얼마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한 연구 붐이 국내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위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를 짚어보고 있는 학술동향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온다. 개인적으로 아렌트는 지젝과 함께 지난 2002년인가부터 읽고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간에 리뷰와 페이퍼들을 꽤 쓰기도 했는데, 한동안은 적요했다. '르네상스'라니까 관심을 되살려볼까도 생각중이다(어차피 갖고 있는 자료만 해도 차고 넘치는 탓에. 한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올해 안으로 새롭게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올 번역서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지출을 고려하면 반가운 소식도 아니지만 아무려나 아렌트 연구자들이 가장 바지런하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교수신문(06. 10. 30)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주요 내용들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성찰하는 학술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 가운데 살다가 타계한지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아렌트는 왜 학계의 ‘우상’이 되고 있는가. 과거의 사상을 현재에 재현시키는 요인은 아렌트의 학문세계에 내재돼 있는가, 아니면 외재하는가. 아렌트 연구자든 애호자든 이런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근 아렌트 연구는 정치학과 철학 영역에 머물지 않고 문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신학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렌트의 저작들은 출판 당시에도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듯이, 최근의 아렌트 연구 역시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외형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타락(왜곡)’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전체주의의 타락한 정치를 극복하고 순수한(또는 진정한) 정치를 모색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의도가 연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에 따라 최근 연구의 특징적 양상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아렌트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분야는 단연 (정치)철학이다. 전체주의의 악을 규명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집착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9·11테러 이후 이데올로기 정치와 테러를 연결시키려는 논문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는 것. 아렌트 전기작가인 영 브륄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현재의 세계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요소로서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으며, 나치의 ‘자연’이데올로기와 스탈린주의의 ‘역사’이데올로기에 이어 오늘날 도덕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덕’이데올로기의 충돌을 강조하고 있다(*영-브뢸의 책은 아렌트에 관한 가장 자세한 전기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정치행위와 세계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을 정치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순수한 정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 아렌트의 열망은 신 치바의 논문 ‘사랑과 정치적인 것: 사랑, 우정, 시민권’에 의해 명료하게 해석되고 있다. 아울러, 시작능력을 말살한 전체주의 악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주목해 아렌트의 인권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국제정치적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코소보 사태 등을 계기로 아렌트의 인권사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도 다수 있다(*일반적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캠브리지 컴패니언>(2000)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편자인 다나 빌라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의 저자이다).

문학예술 분야에서 아렌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분야에선 특히 이분법적 구도가 뚜렷하다. 아렌트와 오든의 사상을 조명한 수잔나 영 고트리브의 ‘고통의 영역’은 두 사람의 사상에 나타난 메시아니즘을 부각시켰다. 두 사람은 대재앙을 공동으로 경험했으며 새로운 현상, 즉 전례없는 뿌리상실감을 경험했다. 고트리브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과 고든의 ‘고뇌의 시대’가 메시아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으로서 행위를 역설한 ‘인간의 조건’에서, 오든은 그의 시 ‘깐조네’에서 의지에 내재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메시아니즘은 정치적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적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렌트 연구에 있어서 정치(철학)과 문학을 연계시킨 탁월한 연구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의 우연성과 특이성을 강조하기에 구조적 인과론에 집착하는 학문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특정 연구경향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전체주의를 연구한 피터 베어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즉 전례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전체주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아렌트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빌스키의 연구는 괄목할만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행태를 심리학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빌스키는 ‘아이히만 재판의 다른 목소리’라는 논문에서 정치적 악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논쟁을 심리학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교육학에서도 아렌트를 응용해 적절히 수용하고 있는데, 특히 아렌트 사상에서 ‘탄생’의 근본성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적절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탄생'은 'natality'의 역어인 듯하다). 전체주의의 악이 시작능력의 말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작, 탄생은 죽음에 대한 안티테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기초로서 교육은 정치적 악과 투쟁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다. 레빈슨은 ‘아렌트 교육사상에서 탄생의 역설’을 제시한다. 교육의 보존기능과 재생기능은 상반되면서도 상호 연계돼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신학분야 역서 선악문제와 관련해 아렌트를 통해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버밍햄은 ‘망각의 소용돌이: 근본적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아래 전체주의의 ‘근본적 악’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고 있다. 매튜 역시 ‘두 가지 판단에 관한 이야기’라는 논문에서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신화를 벗겨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아렌트의 선악이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역사학 분야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렌트는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렌트의 저작들은 역사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야기하기’로서 역사와 ‘시대의 비판적 중재자’로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케르의 논문 ‘아렌트 우상: 정치평론가로서 한나 아렌트’에서는 정치평론가나 정치철학자보다 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로서 아렌트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각 학문분야의 특징적 양상을 고려하면, 선과 악, 타락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 그 어느 측면만을 분석할 때 장점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내적 긴장구조를 상정하고 있는 아렌트의 의도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아렌트의 경우, 타락과 순수,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은 시작 능력의 유지와 상실이다. 최근 아렌트 연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학문 영역에 관계없이 ‘새로운 시작’ 또는 ‘탄생’이란 범주를 소개함으로써 아렌트의 ‘출생의 철학’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렌트 연구가 현대인의 삶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지만, 아렌트 르네상스의 한 요인으로 정서적 또는 낭만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정치철학자’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 정치철학을 서예의 필치로 특징화하자면, 섬세한 선과 굵은 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측면만을 집중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해와 곡해의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최근 경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의무로 남게 된다.(홍원표 / 한국외대·정치철학)

국내 아렌트 연구 붐 - 번역서 속속 출간 … 불교학으로까지 확대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기 전부터 아렌트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상당했다. 연구자들의 숫자는 몇 안되지만 아렌트 주요 저작들은 속속 번역돼 나왔다. 김선욱 숭실대, 홍원표 한국외대, 서유경 경희사이버대 교수 등 정치철학자들을 주요 멤버로 해서 얼마 전에는 ‘한나아렌트연구회’가 본격 출범되기도 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고 정치사상학회와 사회와철학연구회가 뜻을 모아 지난 14일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이라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탄생일인 10월 14일에 맞춰 김선욱 교수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을 번역·출간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이진우 옮김), ‘정신의 삶 2’(김석수 옮김), ‘정신의 삶 3: 칸트정치철학강의’ 등도 곧 번역돼 나온다. 또 ‘공화국의 의지’(김선욱 옮김)는 재번역판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은 개정판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아렌트 사상은 이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며 이미 여러 곳으로 뻗쳐나가고 있다. 정치학에선 아렌트의 정치적 입헌주의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 및 막스 베버와 비교해 고찰하는 등 연구가 활발하다. 페미니즘, 교육학, 나아가 불교연구자의 응용연구도 주목할만하다. 이은선 세종대 교수(세종대)는 아렌트의 ‘탄생성’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관을 비교해 연구물을 내놓았으며, 김인순 동국대 강사(정치철학)는 논쟁이 많은 아렌트 사상의 페미니즘적 측면을 고찰했다. 특기할만한 건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고옥 스님이 발표한 ‘탈속과 귀환의 중도에서 만난 아렌트’로서 아렌트 사상의 확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이은혜 기자)

06. 10. 31.

 

 

 

 

P.S.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폭력의 세기>까지 포함하여 현재까지 번역/소개된 아렌트의 저작은 8권 가량이며 이 중 5권이 2002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거기에 조만간 네댓 권이 보태진다고 하니까 '아렌트 르네상스'란 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P.S.2. 국내 아렌트 학자 중 한 사람인 서유경 교수의 '아렌트 이야기'를 보충자료로 옮겨놓는다. 아렌트 입문에 값할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며 우리 현실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짚어주고 있는 글이다. 서교수는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와 함께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06. 10. 23) 2006년 가을,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현대정치철학'이라는 강의을 듣고 있었다. 푸코, 하버마스, 가다머, 롤즈, 료타르, 데리다, 아렌트의 저서들을 두루 읽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맨 처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직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다수성(plurality)', 즉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조건'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굴레)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한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턱 버티고 있는 홉스의 웅장한 리바이어던의 흉상, 바로 그것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 맑스,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구 철학 2500년 역사의 광활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내게 놀라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지적 충격 속에서 나는 아렌트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후, 민선 2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접어들었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시민단체 인사들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상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학자들은 그때까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아렌트는 소수의 대표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고대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방식의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자고 제안하는 정치이론가였다. 아렌트가 주창하는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 당시까지만 해도 하버마스는 잘 알아도 아렌트는 모른다는 것이 학계와 일반의 반응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원출처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 사회 내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지형의 이론적 타당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고, 3년 뒤 그것을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맥락에서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거치며 우리 학계에 나처럼 전문적으로 아렌트를 연구하는 '아렌티안(Arendtian)'들의 수가 제법 늘어났다. 그 덕분에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 출간되었고 관련 논문들도 꾸준히 발표돼 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축적에 힘입어서인지, 요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근래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부쩍 잦아진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지난 14일 경희대에서 "한나 아렌트와 Amor Mundi(세계사랑)"라는 제하에 열린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던 '인문학의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왜 우리 한국인들이 아렌트 사상에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의 본명은 Johannah Arendt로 1906년 10월 14일 프러시아 영토인 하노버의 유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는데 그곳은 칸트가 태어나서 평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렌트는 16세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난 매우 명석하고 지적인 소녀였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철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이데거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아렌트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듬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동의 하에 프라이부르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후설에게 반년에 걸쳐 현상학을 배운 다음, 다시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의 지도 하에 1929년 <사랑 개념과 성 어거스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동급생이자 유태인 저널리스트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서평 담당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한 유태계 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발터 벤야민, 레이몽 아롱 등과 친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슈테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역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독일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한다. 그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서로에게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어 비시정부가 더 이상 자국 내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미국행을 결심한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렌트는 뉴욕에 정착한 뒤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그는 유태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뉴스쿨 등의 대학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특히 기성의 틀을 깨는 급진적인 주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지적 공헌을 인정받아 1959년 레싱상, 1967년 프로이트상, 1975년 소니그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서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앙리 베르그송, 가브리엘 마르셀, 레이몽 아롱과 같은 세기의 지성들이 초빙되었던 철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아버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연의 최초의 여성 연사로,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초빙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이처럼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렌트는 늘 '국외자'였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학계에 불어 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과 더불어 화려한 부활을 하기까지는 그랬다.
  
이른바 '아렌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런 아렌트 사상의 부활 현상에 기폭제가 된 것은 동유럽 시민사회의 태동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구소련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 후 각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공동체 운영 실험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고, 그런 그들에게 정치이론가로서 한나 아렌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아렌트 사상이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유행한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예컨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을 넘어서는 게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無精卵)에 불과한 이론이 될 것이다.
  
반면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과 판단행위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탈근대 사회이론과 차별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1972년 한 학회에서 "당신의 정체가 뭐요?"라고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아렌트는 "좌익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때로 나를 좌익이라고 하거나 이단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아렌트를 '반정초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서구 철학전통 속에 나타난 어느 학파로도 분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해야 한다면 그는 첫번째 '아렌트주의자'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렌트 사상의 대가 다나 빌라는 "아렌트의 사유 방주(方舟)는 정치악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로 시작하여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룰 때 의존하는 정신기능들의 탐색으로 끝나고 있다"고 논평한다. 사실 철학도였던 아렌트는 1930년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창하였고, 70년 중반 사유(思惟)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정치철학자로서 삶을 마치게 된다.
  
무명의 독일-유태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그의 첫 번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체주의 분석을 단순한 전체주의 체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의 무고한 생명 대학살을 서구 역사 속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유태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로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러한 체제들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전체주의 체제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들은 개별 시민들 사이의 모든 대화 장치들을 분쇄함으로써 정권의 공식 대화채널만이 작동하도록 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테러로 응징하는 이중의 통치방식으로 체제를 운영한다. 결국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대중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상품의 소비와 향락산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국가의 근대화된 행정체계는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율하는, 미셸 푸코의 표현인 '파놉티콘'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전체주의 사회 내에서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행위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렌트는 여기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 즉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아낸다. 폴리스에서 자유인, 즉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대소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이러한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삶과 별개로 시민으로서의 공적인 행복을 향유했던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무대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독특한 정치행위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정치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방점은 '언어'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에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해서 아렌트의 정치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나중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상적 담론상황"과 의사소통적 행위론,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 이후 정치이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에게 또 한 번의 학문적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1961년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며, 1963년 자신이 재판정에서 본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자신이 만난 아이히만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유태인 사회 내에서 하나의 필화사건으로 전화한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서 파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통해 사유의 결여가 곧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된다.
  
아렌트의 유작 <정신의 삶>은 바로 이 때 얻은 확신을 논증하는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사유행위와 정치행위의 연계성을 밝힐 목적에서 우리의 정신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작용(thinking), 의지작용(willing), 판단작용(judging)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유작용은 의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사양을 제공해주고, 판단작용은 의지작용의 과정에서 선택된 것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개별 행위자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논점은 개인의 사유행위는 보편타당한 정치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이런 설명 방식을 통해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시하는 한편, 서구 지성사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정치와 철학이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의 사상은 시기별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는 아렌트의 학문여정이 철학, 정치학, 정치철학으로 세 번의 전환을 하면서, 주장의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점에 기인한다. 1996년 당시 내가 처음 아렌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정치학적 주장들에 주목했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그의 정치행위 개념에 담긴 시민정치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혁명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시민사회는 매우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우리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력한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민 정치는 때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번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 사이에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만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행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 아렌트의 '정치학' 이론보다는 '정치철학'적 지혜에 주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무책임한 범죄행위는 그의 사유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평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아렌트는 우리에게 행동하기에 앞서 사유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서유경/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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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6-10-31 10:1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열린 생각과 마음을 그냥 늘 지나기가 미안해서 메모 남깁니다. 그런데 이 많은 책을 언제 어떻게 다 읽는지 비결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실랍니까. 책을 이렇게 읽다보면 머릿속엔 활자들만 살진 않나요.^^

로쟈 2006-10-31 10:18   좋아요 0 | URL
다 읽지 않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소설책들도 아니구요).^^ 다만, 저는 마치 '지도제작자'처럼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를 가늠해놓을 따름입니다. 급하게 읽는 편도 아니어서 주로 우선적으로 손에 잡히는 책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편입니다...

로쟈 2006-10-31 15:30   좋아요 0 | URL
빗발은 아니고, 바람만 좀 부는 거 같습니다.^^ 소설들 만큼은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수습이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