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스포츠 기사부터 읽게 되는 아침 뉴스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번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를 수상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개인으로서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흔한 표현으로 한국영화의 쾌거다(아시아권의 중국이나 일본, 태국 감독들의 수상 전력에 견주면 다소 늦은 수상이더라도 말이다). 더 반가운 것은 이번 영화가 오랜만에 국내에서 찍은 ‘한국 영화‘라는 것. 봉준호 영화의 간단한 필모그라피는 이렇다.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기생충(2019)

이 가운데 나는 ‘설국영화‘를 보고 처음 실망했고 ‘옥자‘는 아예 보지 않았다. 봉준호 영화가 엉뚱한 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었다(봉준호 영화의 암중모색 10년으로 여겨진다. 지난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감독의 불가피한 우회로도 보인다). ‘기생충‘은 시놉시스만으로도 다시 궤도를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결과도 세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쾌작이어서 다행스럽다(모처럼 영화관을 찾을 일이 생겼다).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온 봉준호 감독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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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les 2019-05-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봉감독의 첫단편 <지리멸렬>을 인상적으로 봤어요. 그런 풍자와 상징을 계속 보고 싶네요!

로쟈 2019-05-31 07:24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저는 아직 못본듯. 한번 봐야겠어요.~

phlipismine 2019-05-3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깐느의 경우 그랑프리(Grand Prix)는 심사위원 대상(Grand Prix du Jury)라고 예전에 불렸고, 지금은 그냥 그랑프리인데 2등상입니다. 올드보이가 그랑프리이죠.

봉준호가 받은 황금종려상(Palme d‘Or)이 1등상입니다.
보통은 그랑프리가 1등상이라 많이들 틀리는 부분이죠 ㅎ

로쟈 2019-05-31 07:23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네요. 수정했습니다.~
 

라캉의 <에크리> 완역본이 나온 지 얼마되지 않지만, 사실 <에크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라캉 읽기의 과제이고 난제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에크리>는 <세미나> 읽기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는데, 현재 불어핀으로도 완간돼 있지 않은 <세미나>가 한국어로 다 번역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읽을 수 있는 번역이냐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무망한 일이다(<세미나> 전체는 27권 정도의 규모이고 한국어판은 두 권 나와있다). 그럼에도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라캉의 사랑론을 담고 있는 <세미나 20: 앙코르>가 번역되는 것이다. 라캉의 사랑 개념을 다룬 두 권의 책이 이번에 나와서 든 생각이다.

<라캉, 사랑, 바디우>(에디투스)가 먼저 나왔는데 라캉과 바디우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는 저자의 첫 책이다(바디우의 책들은 번역한 바 있다). 희소성 때문에라도 관심을 가질 만한데, 저자의 번역서가 이번에 나란히 나왔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장 알루슈의 <라캉의 사랑>(세창출판사)이 그것이다. 장 알루슈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이 주제의 책들은 보통 라캉의 <세미나 20>에 대한 해설이나 해석을 포함하기 마련인데 그에 관해서는 지젝이 편집한 <성화>(인간사랑)을 포함하여 몇권의 책이 나와있다. 요는 라캉의 사랑론(내지 여성론)에 관해서 어느 정도 규모의 독서가 가능해졌다는 것.

물론 그 규모가 감당할 만한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경험상 라캉 읽기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읽었는지 어디까지 읽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워서다. 그래도 <라캉, 사랑, 바디우>와 <라캉의 사랑>이 얼마간 길잡이가 되어줄지 모른다. <세미나 20>도 근간 목록에 들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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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하디보다 한 세대 앞서지만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작가로 같이 묶일 수 있는 러시아 작가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다. 이번 봄에도 투르게네프의 <루진>과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강의가 있었는데, 그의 문학사적 의의는 여러 가지로 짚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섯 편의 ‘사회소설‘의 저자로서의 투르게네프다(그에 견줄 만한 것은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의 저자 투르게네프).

하디의 웨섹스 소설 여섯 편을 거명한 김에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해놓는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오지 않아서 갖는 불만도 토로할 겸. 내가 염두에 두는 건 러시아의 첫 사실주의 소설로 간주되는 <루진>부터 마지막 장편 <처녀지>까지의 여정이다.

<루진>(1856)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날밤>(18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처녀지>(1877)

대략 20년간의 여정인데, 장편에 한하여 투르게네프 전작 읽기를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 번역본에 나오길 기대했지만 불발로 그쳤기 때문이다. 현재 공백인 작품은 <전날밤>과 <연기>, 그리고 <처녀지> 세 편이다.

러시아문학 강의시에는 투르게네프에 할애된 시간이 많지 않기에 통상 <아버지와 아들>이나 중편 <첫사랑>을 읽곤 한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소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소설(<미성년>을 빠뜨리면 4대 장편소설) 읽기도 분량이 만만하지 않아서 쉽게 엄두를 내기 어럽지만 번역본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투르게네프의 경우에는 번역본이 문제가 된다.

이번 겨울에 한 강의에서 투르게네프 읽기를 기획하고 있는데 4주간 네 작품을 읽는 일정이고 그 가운데는 <루진>과 <귀족의 보금자리>(민음사판 <첫사랑>에 들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포함돼 있다. 나머지 세 작품은 언제 다룰 수 있을지 미지수다(<연기>와 <처녀지>는 범우사판으로만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연기>는 과거에 대학강의에서 한 차례 읽었고 <처녀지>는 아직 한번도 강의한 적이 없다. 내게 <처녀지>는 말 그대로 ‘처녀지‘다.

투르게네프의 사회소설에 대해서는 국내 전공자의 책으로 이항재 교수의 <소설의 정치학>이 있다(어빙 하우의 책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투르게네프의 정치학‘을 음미해보기 위해서라도 <전날밤>과 <연기>, <처녀지>, 세 작품의 새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나도 투르게네프 강의를 완성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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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문학 강의는 바야흐로 20세기(조이스)로 넘어갈 참인데 제인 오스틴부터 다룬 19세기문학 강의의 마지막 작가는 토머스 하디(1840~1928)다. 시인으로도 걸출한 업적을 남겼지만 영문학사에서 소설가 하디의 자리는 그의 ‘웨섹스 소설‘ 덕분에 마련된다. 자신의 고향 농촌마을을 그는 작품에서 ‘웨섹스‘라고 부르기에 일련의 소설들을 ‘웨섹스 소설‘이라 부른다. 단편집을 제외하면 여섯 편의 장편소설이 그에 속한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1874)
<귀향>(1878)
<캐스터브리지의 시장>(1886)
<숲사람들>(1887)
<더버빌가의 테스>(1891)
<이름 없는 주드>(1895)

몇년 전 강의에서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와 <이름 없는 주드>를 읽었고 이번 강의에서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더버빌가의 테스>를 다루었다. <귀향>과 <숲사람들>을 제쳐놓은 건 번역본이 절판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나온다면 이번에 읽은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다룰 생각이다.

이전 강의에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캐스터브리지의 시장>과 <테스>를 읽으면서는 하디식 소설의 특징으로 ‘비극적 소설‘에 주의하게 되었다. 강의도 비극과 소설이란 두 장르가 그의 작품들에서 어떻게 혼합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같은 자연주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에밀 졸라와 하디 소설의 차이점도 이번에 식별할 수 있었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은 그런 비극적 소설의 모델인데 아직 읽지 않은 <귀향>과 <숲사람들>에는 어떻게 제시되는지 궁금하다. 아울러 마지막 작품 <이름 없는 주드>(학계에서 통용되는 제목은 <무명의 주드>)도 언젠가 다시 다루게 되면 비극적 소설이란 관점에서 재독해해볼 생각이다. 하디 소설에 대한 나의 관심은 거기까지다(로렌스의 하디 연구서까지 읽는다면 최대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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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강의를 마치고 상경중이다. 한주 더 남아있지만 이번주가 봄학기 강의의 마지막 고비였다. 빡빡한 일정을 겨우 소화해서 ‘생환‘했다는 감회마저 든다. 내일 하루는 휴식을 취하면서 바야흐로 여름 일정에 대비해야겠다. 올여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조이스 읽기인데, 거기에 헤세 강의와 미국 현대작가 읽기 등이 더해진다.

이런 개인적인 일정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맞춤하게도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창비)과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열린책들) 새 번역본이 나왔다. 강의에서는 각각 문학동네판으로 읽을 예정이지만 겸사겸사 참고해보려 한다.

더불어서 <데미안>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내 삶에 스며든 헤세>(라운더바우트)도 이번에 나왔다. 58명의 명사들이 헤세와의 인연을 고백했는데 한국의 헤세 수용사를 엿보게 해주는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나도 필진으로 참여해 헤세의 고향 칼브 방문기를 <수레바퀴 아래서> 독서 경험을 되살리며 적었다. 주말이나 다음주 초에 책을 받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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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5-2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블린사람들,
문학동네 구입해뒀는데
혹시 창비로 수업하실 생각이?!!!

로쟈 2019-05-26 23:06   좋아요 0 | URL
일단은 문학동네판으로. 저는 번역본이 예닐곱 종.~

모맘 2019-05-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표지가 맘에 들어 구입하고 싶은 욕구!ㅎㅎ
수레바퀴아래서도 표지가 저를 넘 유혹하네요 우째요~

로쟈 2019-05-26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