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에도 쪼들리고 있는 걸 보면 이래저래 바쁜 계절이다(4월이 어디 가겠는가?). 벚꽃놀이가 '시즌'에 들어갔지만, 꽃구경은 언감생심이다. 어린이대공원의 벚꽃놀이가 이렇다 한다. 나는 책구경으로 허전함을 때우려 한다. 최근에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온 책들이다.

 

 

 

 

첫번째 책은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들뢰즈의 <시네마>인가에서 'autopoietic'을 '자율시적'이라고 옮겼는데, 오역이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저자는 인지생물학을 인식론에 한정하여 이해하지만, 보다 확장된 시야에서 바라볼 수도 있는 것. 

가령, 오래된 책이지만 에리히 얀치의 <자기조직하는 우주>(범양사, 1989) 같은 천체물리학 책이나(물리학 책으론 로저 하이필드 등의 <시간의 화살>(범양사, 1994)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참고문헌이다), 폴 크루그먼의 <자기조직의 경제>(부키, 2002) 같은 경제학서, 그리고 슈미트의 <구성주의 문학체계이론>(책세상, 2004) 등은 모두 우주와 경제와 문학작품을 자기조직적 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책들이다. 김성재의 <체계이론과 커뮤니케이션>(커뮤니케이션북스, 2005)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한 체계이론적 접근 입문서이고, 사회학이론의 대가 니콜라스 루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체계를 이해한다(그의 대저 <사회체계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또, 체계이론은 보통 기호학과 많은 부분 문제의식을 공유하는데('자기생산'의 기호학을 주제로 한 책들이 다른 언어권에는 나와 있다), 문화를 하나의 체계로 보는 러시아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하에 놓인다.

'자기조직적' 관점의 세계 이해라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혼자서도 잘해요!"가 되겠다. 어떤 외부의 힘의 유입/개입 없이도 자체적으로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질서)를 형성해나간다는 것. 이러한 관점의 함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가 외부(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체계들의 집합체라는 것(바깥은 없다, 내지는 없어도 된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아닌가? 외부/바깥이 없는 무한으로서의 우주. 동양사상에서는 무위(無爲)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해서, 제목에서는 '있음에서 함으로'로 돼 있지만(물론 프리고진의 '있음에서 됨으로'를 바로 연상시킨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 아닌가? 비록 마투라나는 프리고진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함(doing)'은 '무위'의 함이라고 나는 지레짐작한다. 그것은 무얼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최적성의 경로를 따라서 무엇이 저절로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정치적 함의가 (루만의 경우도 그렇지만) 한편으론 보수주의적이라는 걸 따로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왓에버 윌비 윌비(Whatever will be, will be)의 교육 버전. "애들은 (지들이) 알아서 큰다!"(이런 경우는 '진보적'이라고 해야 하나?)     

 

 

 

 

두번째 책은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1904-1980)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책세상, 2006)이다. 원제는 'Steps to an Ecology of Mind'인데, 이미 <마음의 생태학>(민음사, 1990)으로 국역본이 나와있는 책이지만, 이번에 나온 책은 2000년판을 옮긴 것이며,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1936- )의 서문(1999)이 붙어 있다. 메리는 베이트슨과 저명한 여성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아래는 베이트슨 부녀의 사진.

<마음의 생태학> 외에 베이트슨의 책으론 루스 베네딕트의 <문화의 패턴>(까치, 1997), 마가렛 미드의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이대출판부, 1998)과 함께 초기 인류학의 '명저'로 꼽힌다는 <네이븐>(아카넷, 2002), 그리고 <정신과 자연>(까치, 1998), <마음과 물질의 대화>(고려원, 1993) 등이 더 소개돼 있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것은 정신분열증에 관한 베이트슨의 이론이다. 흔히 이중구속(double bind)론이라고 불리는 것 말이다.  백과사전에서 관련내용을 옮겨오면 이렇다: "예컨대 어머니가 아이에 대해서 무언가를 하도록 말하고,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중으로 구속된 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중구속의 상태라고 한다. 베이트슨은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없을 때에 이 상태가 생기기 쉽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이론의 모델은 발리섬 주민의 개인 간 상호작용에 관한 고찰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개인 중에서도 주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약해지거나 아버지가 없는 현대의 가족상황을 예견한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국의 반정신의학이나 가족요법의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두 가지 명령에 구속된 상태를 말하는바, 강의시간에 우스개 소리로 자주 하는 얘기는 이런 거다. 다이어트중인 딸한테 아빠가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엄마는 먹으면 혼날 줄 알아라는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만약에 엄마와 아빠를 모두 사랑하는 딸이 두 사람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자 한다면, 이중구속 상태에 빠지게 된다(보통은 이런 난처한 상황한 처한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린다). 정신분열증이란 이때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이거 먹는 건 내가 아니야 라고 부인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와 그걸 금지하는 나의 자기분열. 믿거나 말거나.   

 

언젠가 체계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어 베이트슨의 책들을 사들이긴 했었는데(근작에 속하는 <네이븐>을 제외하고), <마음의 생태학>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이 거기에 포함된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독서계획을 세워볼까 하지만, 책장에서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니 모두 박스보관 도서인 듯하다.      

 

 

 

 

세번째 책은 역사학자 피터 버크의 <지식>(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문화사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버크 교수의 처음 출간된 책은 <역사학과 사회이론>(문학과지성사, 1997)이며 이후로 잠잠하다가 작년부터 부쩍 출간도서가 많아지고 있다. <이미지의 문화사>(심산, 2005), <문화사란 무엇인가>(길, 2005) 등이 그의 책들이다. 모두가 한번쯤 읽어볼 만한 주제와 분량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식>의 원제는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from Gutenberg to Diderot'(2000)이니까 '지식의 사회사'쯤 될 텐데, <지식의 역사> 같은 식의 제목을 붙이지 않은 것은 좀 이외이다. 슈바니츠의 베스트셀러 <교양>(들녘, 2004) 같은 책과 '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된 것인지? 여하튼 내용은 지식의 탄생과 유통, 소비에 관한 모든 역사이다. 

소개를 옮겨오자면, 책은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지식의 탄생, 흐름, 분류, 판매, 소비, 상품화 등을 망라하는 '학문의 역사'를 담았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형성된, 이른바 '지식의 공화국(Republic of Knowledge)'에 대한 40여년에 걸친 지은이의 연구 결과물이다. '지식의 공화국'이란 표현은 주로 학자들 간의 상상된 지식공동체를 뜻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를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장인이나 농부, 산파의 현장경험도 '지식'의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거기에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지는바, 실상 '지식인'의 탄생과 종말을 다룬 책들은 적지않게 나와 있으므로 관심있는 독자들은 일독해보시길. 아쉬운 건, 러시아식의 독특한 지식인 유형인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책들이 요즘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인텔리겐치아의 시대는 끝났다 하더라도 '인텔리겐치아의 역사' 정도는 소개되어도 좋지 않을까?  

 

 

 

 

네번째로는 자유주의에 관한 책들을 몇 권 고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스티븐 룩스의 <자유주의자와 식인종>(개마고원, 2006). 다른 정보가 없으니 소개를 인용하면, ""자유주의자에게는 자유주의를, 식인종에게는 식인주의를" 이 책 제목의 모티브가 된 이 말은 영국의 철학자 마틴 홀리스가 만든 경구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사상의 '자유'를 용인한다는 자유주의를 따른다면 식인주의도 용인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책은 저명한 사회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스티븐 룩스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기고하거나 강연한 원고를 모은 것이다. 13편에 달하는 글에서 지은이는 자유주의가 내포하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갖는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

 

"즉, 다양한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생성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빚을 수밖에 없는 현대 지구촌 사회에서 절대적 가치를 거부하며 모든 가치를 원칙적으로 인정해 버리고 마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갈등을 해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자기 한계까지도 인정할 줄 아는 자유주의적 이성'을 제시한다. 이성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이성을 계몽하고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최적점을 찾아가는 자세를 갖는 것이 '자유주의자'와 '식인종'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자기 한계까지도 인정할 줄 아는 자유주의적 이성'은 얼핏 리처드 로티를 연상시킨다.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가 되라!'가 저자의 금언인가?

그리고, 자유주의 이론에 관한 천착을 계속 하고 있는 이근식 교수의 신작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기파랑, 2006)도 출간됐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저술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데, "1999년 출간된 지은이의 전작 <자유주의 사회경제사상>(한길사, 1999)에서 애덤 스미스를 다루었던 부분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저자의 변은 이렇다: "지금부터 꼭 40년 전 대학 진학시 경제학과를 지망한 것은,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워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없었다.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된 것은 40대 중반에, 경제학을 전공한 지 20년도 넘어서, 애덤 스미스의 책들, 특히 <도덕감정론>을 읽고 나서였다. <도덕감정론>은 내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스미스는 인간은 양심과 타인에 대한 동정심도 있으나 자기 사랑이 더 강하며, 누구나 더 잘 살려고 노력하는 강렬한 본능이 있으며, 시장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므로 저절로 발생하여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제도임을 가르쳐 주었다."

한데, 이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1996)은 이미 품절된 지 오래된 책이다. 자유주의 애호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주저를 서점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한편, 저자의 다른 책으론 <자유와 상생>(기파랑, 2005)이 얼마전에 나온 책이고, 편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원류>(철학과현실사, 2003), <자유주의란 무엇인가>(삼성경제연구소, 2001) 등도 자유주의 '원론'을 챙겨볼 수 있는 책들이다.

한편,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정치철학을 살핀 입문서도 출간됐다. 조나산 울프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철학과현실사, 2006)이 그것이다. 노직의 대표작인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1974; 국역본은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문학과지성사, 1997)에 대한 해설서로 유용한 책이겠다. 노직의 책은 내가 학부를 다닐 때만 해도 롤즈의 <정의론>과 함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필독서였다. '자유주의'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나 반감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노직과 한번 대결해 봄직하다(이런, 노직의 책들도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다!). 한편, 알라딘에는 저자가 '노지크'로 돼 있지만, <인생의 끈>(소학사, 1993)의 저자도 로버트 노직이다. 저자의 명성에 비해 좀 한가해보이는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흥미로운 건 그의 인생론이 아니라 정치철학이다. 

 

 

 

 

끝으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책, 롤랑 바르트의 'S/Z'(동문선, 2006)이다. 작년에는 <목소리의 결정>이 나오고 해서, 이로써 롤랑 바르트 전집이 거의 완결돼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발자크의 단편 <사라진느>에 대한 정밀하면서도 유희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문학이론서'는 바르트의 이론적 여정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전범적인 책이다. 한데, 그런 만큼 번역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국역본의 출간은 반가우면서도 미심쩍기까지 하다(러시아어로 번역돼 있긴 하지만). 한편으론 <모드의 체계> 같은 '구조주의' 저작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법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바르트의 책으론 단연 <텍스트의 즐거움>과 <사랑의 단상>을 꼽을 수 있다. 거기에 그의 사진론 <카메라 루시다>(열화당)를 보탤 수 있고(이 책이 절판된 건 유감스럽다).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는 바르트 애호가나 전문 독자의 리뷰를 읽었으면 싶다. 이럴 때면 좀 아쉬운 사람들이 있다...

06. 04. 14-15.

 

 

 

 

P.S. 덧붙이고 싶은 책은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된 노르웨이의 노벨상 수상 작가 크누트 함순(1859-1952)의 <굶주림>(범우사, 2006)이다. 나는 이전에 우종길의 번역으로 된 <굶주림>(창, 1994)으로 읽었었다. 나치 부역 혐의로 말년의 삶은 좀 치욕적이었지만, '20세기 최고의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크누트 함순의 처녀작. "1890년에 출간되었으며, 고통스럽게 불안해하는, 소외된 현대의 인간을 문학작품 속에 등장시킨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이중적이고 복잡한, 그래서 때때로 관련성이 없는 반응양식을 보이는 인간의 심리를 통찰한 작품이다."



소개를 더 옮기면, "이 작품에는 1886년 겨울 작가가 오슬로에서 직접 겪은 극심한 가난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묘사하는 굶주림의 상황과 심리현상은 매우 충격적이다. 소설 속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굶주림의 사회적 원인도 서술대상이 아니다. 오직 '불가사의한 굶주림'만이 눈앞에 나타나 있을 뿐. 이 굶주림은 주인공을 '극도로 날카로운 지각능력과 죽음에 가까운 혼미상태가 교차하는' 고도의 정신분열증적 상태로 몰아간다."

"작가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은 20세기의 주요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란츠 카프카, 베르톨트 브레히트, 헨리 밀러 등 전 세계의 유명 작가들이 그를 숭배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이작 싱어는 영어로 번역된 <굶주림>의 미국판 서문에서 크누트 함순을 '현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평한 바 있다."

거기에 동시대 작가 폴 오스터(왼쪽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문학론 <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는 무엇보다도 함순의 <굶주림>과 카프카의 단편 <단식광대>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더불어,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1905-1942, 오른쪽 사진)의 부조리한 작품들에도 함순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함순은 하름스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의 한 사람이다).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청어람미디어, 2004)에 실린 단편 <노파>를 <굶주림>과 같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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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3 17:20   좋아요 0 | URL
새로나온 책은 아니지만 민음사에서 김우창전집을 재간행했더군요. 예전의 활판인쇄(?)가 아닌 새로운 판본으로...[시인의 보석]이 없던차라 서점에서 낼름 사왔습니다.

로쟈 2006-04-13 18: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반가운 소식인데요(다음번에 올려야겠습니다). 저는 <시인의 보석>만 갖고 있는 거 같은데.^^
 

 

 

 

 

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은 이진경(박태호 교수)의 <미-래의 맑수주의>(그린비, 2006)이다. 아직 구해서 읽어보진 않았지만, 맑스(주의)에 관한 책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2부와 함께 듀엣으로 읽어볼 계획은 갖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 2005)를 꼽을 수 있겠다(네그리/하트의 <제국>까지 포함시키고자 하면 줄줄이 딸린 책들 때문에 또다른 한판의 방대한 책읽기가 되므로, 가급적 자제해야겠다). 해서, 예비적으로 <미-래의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이 페이퍼는 그걸 정리한 것이다. 세 개의 서평인데, 각각 한겨레,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것이다.

(1)먼저, 한겨레의 리뷰(06. 04. 07)는 "마르크스 근대성 넘어 '이진경주의'로"로 제목을 달고 있다(*해서, 이 글 제목 '이진경주의'의 출처가 됐다). 내가 읽기에, 그 속사정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이진경의 (과격한) 맑스주의를 분리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해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진경 맑스주의', 혹은 더 줄여서 '이진경주의'라고 불러주는 것. 서로 인상 구기지 않게 말이다. 그건 그냥 나의 '추측'이고, 다른 속사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리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진경씨의 새 책이 나왔다. <미래의 맑스주의>(2006)다. 그의 이력은 그가 쓴 책으로 대표된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6년), <철학과 굴뚝청소부>(1994),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년),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2000), (노마디즘>(2002),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년). 그는 쉼없이 생각하고 썼다.(*물론 저자는 거명된 책들보다 더 많은 책을 썼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대학가 베스트셀러였고,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박사학위논문이며, <노마디즘>은 한국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부터도 호평을 얻으면서 '이진경'이란 운동권 브랜드가 '인문학 브랜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책이다. 동시에 국내에 들뢰즈와 노마드/노마디즘 붐을 가져온.)

-<사회구성체론> 이후 꼭 20년만에 나온 <미래의 맑스주의>는 그 이력에 책 하나를 더하는 의미 이상이다. 책 제목에 마르크스주의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실은 ‘이진경주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그를 말할 때는 <사회구성체론>과 <미래의 맑스주의>를 언급하게 될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에서 그러했듯이, <미래의 맑스주의>에서 그는 사상가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즉, '사상가' 맑스나 맑스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이진경 자신의 이야기라는 함축이다). 이를 따라가며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두 책의 또다른 공통점이다(*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90년대 이후 그의 화두는 근대의 패러다임에 오염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재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 10여년이 넘도록 사상의 초원 위를 유목하며 고독한(실은 난해한) 전투를 벌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서구 탈근대론자들의 문제설정과 씨름했다. 동양사상과 생명과학 등도 섭렵했다(*'10여년이 넘도록'이 아니라 '10여년도 안되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사회구성체론>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은 그런 편력의 특정한 대목을 반영하는 것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진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박수를 치건 돌을 던지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동안 몇몇 책에서 등장했던 독특한 사유와 개념들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비로소 전체적인 얼개 속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유물론을 물질개념에서 탈피시켰다. “물질이란 말로부터 유물론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유물론에 대한 적절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그는 물질과 관념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유물론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대신 “유물론이란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관념론은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다. 유물론은 “모든 것의 본질은 그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철학이다.(*단순한 의문. '외부'에 관한 사유는 규정하기에 따라서 초월적 관념론을 모두 포괄하는 거 아닌가? 혹은, '철학의 외부'란 철학이 자신의 무능력한 대면하는 지점 아닌가? 철학의 외부에 대해서 (유물론)철학은 무엇을 사융할 수 있는가? 사유되는 외부도 여전히 '외부'인가?) 

-이어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한계도 넘나든다. 인간과 자연의 결합을 넘어 인간과 기계와 자연의 합일을 말한다. 그의 생태학 안에서는 “기계와 자연은 더이상 대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으로 돌아가는 보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라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게 그의 세계 인식의 틀이다.(*이미 '포스트-휴먼'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지라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생소하거나 과격하지 않다. 물론 '생태주의자'들이라면 불편해 할 주장일 것도 같지만). 

-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인 노동가치론도 전복시켰다. 기존의 노동가치론은 “노동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의 특권적 중심성을 제거해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명제는 과거의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과정의 기계화를 언급하면서 “이젠 ‘인간화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한다.(*인간과 기계의 결합에서 유추될 수 있는 자연스런 결론이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의 계급론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을 구분했다. 그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기존 지배질서를 거부하는 다양한 소수자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전략은 그가 주창해온 ‘코뮨주의’의 핵심이다.(*하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자문하도록 해야겠다. "내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란 말인가?" 여성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여성'이 되는 게 아니며, '여성-되기'가 요청되듯이,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편입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프롤레타리아트-되기가 필요한 것. 한편으로 생각하면, 노동계급은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다! )

-거칠게 보자면 그는 국가·노동계급·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주의’는 확실히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상당히 다르다. <미래의 맑스주의>는 이진경이 몸담고 있는 연구집단 ‘수유+너머’가 주창한 코뮨주의적 실천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거나 알리바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불온함이 책을 읽는 분들의 또다른 불온함을 촉발하고 증식시키길 바란다”고 적었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함의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그의 깊은 모색의 끝에서, 그러나 여전히 남는 의문은 있다. 지금 이진경의 사유와 ‘수유+너머’의 실험을 불온하게 여기며 두려워 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뭐가 불온하냐는 반문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불온함'에 대한 과신도 불온함의 일종인 것일까? 문득 자신의 '야함'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하는 마광수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건 기사의 보충설명인데, '이진경의 지적 이력'이라고 해서 군대 차트식으로 '화염병→감옥→사회주의 붕괴→‘수유+너머’'라고 정리하고 있다. 

-400여쪽의 책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제목의 장이다. 20여쪽의 짧은 글에서 이진경은 자신의 지적 이력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있다. “돌맹이와 화염병,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찬 전투의 바람, 혹은 아련한 꿈같은 혁명의 바람”이 스물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했다.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나은 삶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맑스스주의는 쉽게 버릴 수 있는 하나의 이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집스런 지조로 그저 안고 가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이념도 아니었다.”

-그는 기존의 사회주의 사회 역시 또다른 ‘근대 사회’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부터 ‘근대성’에 대한 긴 모색이 시작됐다. 근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넘으려는 모색은 “맑스주의 외부에서 던져져야 했고, 맑스주의 안에 없는 것, 그 공백을 통해서 사유돼야 했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심지어 동양의 화엄학까지 끌어들였다. ‘수유+너머’ 연구실을 출범시킨 것도 이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연구와 삶이 하나로 결합된, 근대적인 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하고 실험하며 새로운 종류의 습속과 무의식을 생산하는 ‘연구자들의 코뮨’”을 시도했다.(*그러니까 노동자 계급보다 혁명적인 것이 이 '연구자들'이겠다. 프롤레타리아트 후보 1순위. 한데, 노동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닌 이들, 즉 삶과 결합될 '연구'를 안 갖고 있는 이들은 어디에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진경은 이제 “기존의 맑스주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구도에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침투해 뒤섞이는 것,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또다른 주류 계급이 된 노동운동을 소수화의 전략을 통해 새롭게 혁명화하는 것”을 통해 이뤄진다고 믿는다.(*그러니까 이진경에게서 맑스주의는 '맑스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겠다. 맑스의 정신을 근대 맑스주의주로부터 분리/구출하고자 하는 것.) 

-그런 그가 ‘급진 혁명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 작가로 인식되는 경향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자본의 외부에 대한 사유도 자본주의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니까.) 20년전 봄에 나온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서문에서 이진경은 “사상적 논쟁 과정이 주체의 형성과정”이라고 썼다. 코뮨주의의 주체를 형성하려는 그에겐 지금 논쟁할 상대가 없다. 어쩌면 논쟁하려는 사람들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아무도 대꾸를 안 해준다는 얘기인가?)

(2)이어서 동아일보의 리뷰(06. 04. 08)는 '마르크스 넘어서 코뮌주의'란 제목을 달고 있고, 따라서 방점은 맑스주의가 아닌 '코뮌주의'에 찍힌다.  

 

 

 



-<굿바이 프로이트>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때 그를 믿었다가 버린 사람의 수로 쳤을 때 이 빈 출신의 의사(프로이트)를 능가하는 것은 마르크스밖에 없다.” 그렇다. 프로이트도 울고 갈 만큼 수많은 개종자를 양산했던 그 마르크스에 대한 개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1980년대 운동권의 대표적인 논객이었고 1990년대 탈(脫)근대사상 연구에 주력해 왔던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다. 필명 이진경으로 더 유명한 그는 한때 사회주의혁명을 꿈꾸다 감옥까지 다녀온 뒤 한동안 푸코와 들뢰즈의 사상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2004년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집단주의적이고 경제결정론적인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로서 코뮌주의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컨대, '코뮌주의자로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주류'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그가 주장하는 코뮌주의는 익숙한 마르크스 사상과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DNA로 꼽히는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 계급투쟁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모든 것이 물질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경제주의’와는 다른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이 모든 문제를 체계 내부의 인과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유물론은 이를 초월해 우리 삶을 규정하는 체계 외부 조건에 대한 통찰을 말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를 '자본의 외부'와 관련지어 사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체계의 예외성으로서의 '외부'란 체계의 구성적 조건이기도 하다는 상식 정도만 상기하기로 하자. 그의 '외부'는 어떤 외부인 것일까? '수유+너머'?)

-그는 노동가치설에 대해 기계나 화폐, 지대도 가치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적 노동가치설의 폐기를 주장한다. 또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계급질서 내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가 포착할 수 없는 ‘비(非)계급’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양한 비주류 소수자 그룹으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뮌주의는 바로 이런 소수자들이 자본주의라는 체계 외부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모든 불온한 노력을 말한다는 것이다.(*'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일까. 근대적 사상가였던 마르크스에게 온갖 탈근대적 사유를 주입한 뒤 이게 본래의 마르크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 유생들이 중국 취푸(曲阜) 공자 생가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공자를 안 닮았다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했던 선불교의 기개가 못내 아쉽다.(*미래의 맑스주의, 아직 도래하지 않는 맑스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 과거에 실재해던 모든 '역사적' 맑스주의의 기각이다. "너네, 맑스주의 아냐, 딱지 다 반납해!" 한데, 그건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역사적 자본주의, 혹은 현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미래의 자본주의', 진정한 자본주의에 의해서 극복될 거라고.) 

(3)경향신문의 리뷰(06. 04. 09)는 "마르크시즘을 뒤집어 새 마르크시즘 만났다"란 제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주의'는 '새 마르크시즘'이란 표현을 얻었다. 가장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인터뷰라서 그런가?).

-사회학자 이진경씨(서울산업대 교수·43)가 ‘미-래의 맑스주의’(그린비)를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서이지만, 책에는 ‘이것이 마르크시즘인가?’ 할 정도로 새로운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이씨는 도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니다라는 주장도 펼친다.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계적 포섭’ 개념을 통해 기계 또한 가치를 생산한다며 맞선다. 공산주의를 대신하는 ‘코뮨주의’라는 사회모델도 내놓았다. 독창적이다 못해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래서 책은 이씨의 독창적인 사회구성체론으로도 읽힌다. 이씨가 20대인 1987년 내놓았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연장선인 셈이다(*나는 이 80년대의 '고전'을 읽지 않았다. 다들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을 때라서, 나는 딴 걸 읽었다). 한때 들뢰즈, 가타리, 푸코 등에 탐닉하며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씨를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만났다.

-마르크시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인가.

“아니다. 대학시절 마르크스를 만난 이후 한번도 마르크스를 떠난 적이 없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마르크스보다는 푸코, 들뢰즈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만났지만, 모두 마르크스를 제대로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잘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흔히 마르크시즘은 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물론은 흔히 물질의 일차성을 인정한다거나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외부에 의한 사유’로 정의한다(*유물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탈목적론으서의 우연성에 대한 사고이다). 역사유물론에서 ‘역사’가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뜻한다고 볼 때 사적유물론은 역사 과학이라기보다는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는 게 옳다. 스탈린주의자들처럼 사적유물론을 사회발전단계론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외부에 의한 사고다. 사물은 정해진 것도 없고 본성도 관계 속에 달라진다. 사물은 조건에 비춰 사유하고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人'이 아닌 '人間'에 대해 사고했던 동아시아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야 말로 '관계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유물론에 근접하는 것이겠다.) 외부에 의한 사고는 유물론을 물질이란 개념과 결별하도록까지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개념 등이 통설과 달라 혼란스럽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노동자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계급’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노총 등에서 보듯 노동자가 귀족화되는 속에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문제 등과 연대를 가져야 한다. 현재의 노동운동만으로는 변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기계적 포섭’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것인가.

“가치나 가치 생산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기계화·자동화도 가치를 생산한다. BT(생명공학) 산업도 잉여가치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정보화시대, 생명복제시대에는 인간과 기계, 생명체와 기계에 관해서도 기존과 다르게 사유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물론 저자는 알튀세리언의 경력을 거쳤으며,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는 반휴머니즘을 표방했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 이씨는 루카치,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마르크시즘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씨가 책 제목을 ‘미-래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붙인 것은 마르크시즘이 다가온 현재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것을 찾는’ 무엇이 아니라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다.(*그에게서 마르크시즘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인 것이다.)

06. 04. 12.

P.S. '이진경'의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눈에 띈 글은 김규항의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B급 좌파'의 견해(04. 07. 10)도 참고삼아 들어보기로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진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받는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진경의 방법은 지적 편력, 혹은 지적 허세다. 편력이든 허세든 그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지만 그런 방법이 지나치게 많은 존중을 얻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 배경엔 그가 80년대 PD 운동권의 주요한 이론가였다는 다소 엉뚱한(그러나 한국이라는 기지촌 지식 사회에선 지극히 당연한) 이유가 있다.

-이진경의 주 메뉴가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차단당한 유럽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지적 허세(특히 프랑스의)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탈근대 철학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탈근대철학은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진경을 비롯한 80년대 우등생 좌파들의 정신적 공황과 포기할 수 없는 지적 허세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엔 자의식이 강하고, 기약 없이 풍찬노숙하며 운동하기에도 너무나 유약한 그들에게 탈주, 횡단, 유목 같은 탈근대 철학의 개념들은 뇌까리는 건 모든 것을 실제로 청산하면서도 뭔가 진지한 탐색을 지속하는 듯한 외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진경은 최근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라는 책을 ‘예약 이벤트’까지 벌이며 냈다. 그 책의 맑스주의적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맑스가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하는 것이다.”(*요컨대, '근대적 맑스주의자'로서 김규항은 '새로운 맑스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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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13 12:24   좋아요 0 | URL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이게 왠지 핵심같아 보인다는...

pax 2006-04-13 12:26   좋아요 0 | URL
'불온성'은 저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바인 모양이다. 한데, '체계 외부의 공간'은 어디일까? '율도국'? 아니면, '존 말코비치'의 머리속?<--이 부분 읽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확실히, 외부, 외부, 이야기하지만 저로서도 잘 감이 잡히지 않는 개념이더군요. 제가 상상력이 너무 부족한 건가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질렀습니다. 근데 읽기도 전에 이 글을 읽으니 최초의 열광이 많이 가라앉는 느낌이군요....;;; 뭐,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어쨌거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글입니다^^

yoonta 2006-04-13 13:51   좋아요 0 | URL
왠지 한겨례의 "이진경주의"라는 표현때문에 좌파쪽 사람들한테 더 많이 까이는 것 같다는..-_- 위의 로쟈님 코멘트에서도 느끼는 거지만..저는 솔직히 이진경씨만한 분도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맑스주의적 좌파라는 것이 이론적 천착을 기본으로 깔고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만큼 그것에 충실한 사람이 없죠. 김규항씨처럼 이론을 등한시?하는 좌파가 이진경씨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까대는것이 설득력이 없어보이는 것도 그가 불온한 좌파?라는 꼬리표를 스스로에게 달고 있기 때문이죠. 고민하지않고 공부하지않는 좌파가 공부하는 좌파를 깐다..-_- 물론 그것이 지적허세처럼 보일수도 있지만..구세대적 혁명이 불가능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이 할수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공부하고 이론을 천착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변혁을 구상하고 준비하는것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그런점에서 이진경은 다만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따름입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김규항씨의 별볼일없는 에쎄이집보다..이진경씨의 지적허세처럼보이는 그의 저작들이 백배는 더 불온해보이는군요..

참 아이러니컬한게 뭐냐면..구세대의 좌파에서 "코뮨주의"를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공부하지않는? 바쿠닌같은 아나키스트였고 반대로 권위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개량적 사민주의노선을 걸어온 사람들이 공부하는 맑스주의적 좌파였다면 요즘은 김규항씨같은 공부하지 않는 좌파들이 더욱 개량적?이어지고 공부하는 이진경씨같은 좌파들이 더욱 급진적인 아나키즘적 "코뮨주의"로 간다는 건데요. 요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_-

p.s. 그리고..프롤레타리아트-되기와 여자-되기는 다릅니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성질을 가지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진경식 뭐뭐-되기가 필요하다는것은 너무도 당연한것 아닌가요? 노동자답지않은 노동자가 그런 노동자보다 더 많은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말이죠..

노부후사 2006-04-13 13:44   좋아요 0 | URL
불온한 건 둘째치고 이진경씨는 어쩜 저리 느끼해 보일까요. 흡흡

프라즈나 2006-04-13 13:59   좋아요 0 | URL
저도 yoonta님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맑스주의건 들뢰즈주의건 불교이건 뭐건간에 이론은 재해석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이며 그로인해 철학적/사상적 발전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러한 노력을 두고 맑스의 말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김규항씨가 오히려
'가볍고 교조주의적으로' 보입니다.

로쟈 2006-04-13 14:31   좋아요 0 | URL
다양한 의견들이시군요. yoonta님의 의견 가운데, "프롤레타리아트-되기와 여자-되기는 다릅니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성질을 가지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신 것에만 이견을 답니다. 여자도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게 들뢰즈의 주장 아니었나요? 적어도 제가 읽은 콜브룩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게 맞다고 봅니다. 여자-되기는 일종의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에.

'B급 좌파'에 대한 비판은 그 자신이 'B급'이라고 접어두고 있기 때문에, 별로 효력이 없는 비판 같습니다(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까고 있는 형국이니까). 한편, 저로선 '좌파적 허세'가 불편하긴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마저 없다면, 그분들이 무엇으로 삶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아직은 염려스럽기 때문에...

yoonta 2006-04-13 15:42   좋아요 0 | URL
물론 여자도 여자-되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죠.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들뢰즈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적어도 현실에서의 노동자들은 여자-되기를 해야하는 여자들보다 프롤레타리아-되기를 해야하는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뿐입니다. 그것이 소수자-되기인지 뭔지는 차치해놓고라도 말이죠. 여자들은 그래도 여자들을 상대로 남자-되기를 시킨다고 쉽게 남자가 되지는 않죠..반면 노동자들은 파쇼-되기를 하면 쉽게 파쇼가 되는 그런 사회적 집단입니다. 그래서 이진경식의 프롤레타리아-되기라는 말도 유효할수있단 거죠.


그리고 이진경의 프롤레타리아-되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빈정대기보다는 그것의 문제가 무엇인지..그리고 그것을 대체할만한 계급론 혹은 대안이 무엇인지를 말하면 되는 겁니다.

로쟈 2006-04-13 16:38   좋아요 0 | URL
'빈정대기'의 뉘앙스가 포함돼 있지만, 기본적으론 제 '의문'이자 '질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되기'에서 왜, 노동계급과 프롤레타리아 범주를 분리시키면서까지 '프롤레타리아'(란 기표)를 특권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효성을 여전히 유지하기 위해서일까요?(프롤레타리아에의 충실성? 하지만, 그 역시 '미래의 프롤레레타리아'?) 이 역시 '빈정대기'로 비칠 수 있지만, 제 '의문'입니다. 책을 읽기 위한...

yoonta 2006-04-14 02:42   좋아요 0 | URL
제가 로쟈님 "질문"에 답할수있는 처지가 아니니 무어라 말하순 없네요. 프롤레타리아란 기표를 "특권화"하거나 맑시즘, 노마디즘, 탈주, 접속 등등의 기표를 특권화하고 또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에 좀 문제가 있어보이긴 합니다. 아마도 맑시즘이라기보다는 아나키즘에 가까운 그의 "코뮨주의"를 굳이 "미-래의 맑스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프롤레타리아라는 기표를 특권화 시키는 것은 공통의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어요. 맑시즘이라는 기표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해보인다는 생각이 드는데..80년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써 맑시즘이라는 기표를 그냥 내다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느끼나 봐요.

로쟈 2006-04-14 08:32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맑시즘이 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이진경주의 또한 매우 종교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바타이유를 검색하다가 한동안 잊어먹고 있던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작년 가을에 개봉됐던 영화 <루시아>(2001)인데(원제는 'Sex & Lucia'), 스페인 영화이고 감독은 홀리오 메뎀, 주연 여배우가 파즈 베가이다. 비디오 대여점이라기보다는 만화대여점이라고 해야 할 동네 '영화마을'에 이런 류의 영화가 들어올 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DVD는 좀 부담스런 가격이다), 기억을 위해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주간한국(2005. 09. 07)에 실렸던 '탐욕적 에로티시즘에 빠진 그들'이 기사의 제목이고, 필자는 영화평론가 장병원이다.

-영화계에는 ‘한국식 제목'이라는 말이 있다. 외화가 국내에 수입될 때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제목을 바꾸는 경우를 두고 쓰는 용어다. 통상 알기 힘든 영문이나 밋밋한 제목을 선정적으로 개작해 원래의 뜻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는데, <블로우 업>을 <욕망>으로, <브라질>을 <여인의 음모>로, 'Lost in translation'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루시아>는 영화계의 제목 바꾸기 관행을 거꾸로 뒤집은 사례로 기억될만하다. <섹스 앤 루시아(Sex & Lucia)>라는 자극적인 원제가 관객의 호기심을 더 끌만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수입사는 <루시아>라는 밋밋한 제목을 내세웠다.



-오금이 저리는 섹스 장면 하나 없어도 ‘섹스'라는 말을 제목에 버젓이 집어 넣는 세태를 떠올린다면, 실로 시류에 ‘역행’하는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수입사의 의도는 말초적인 쾌락에 호소하려는 싸구려 에로 영화가 아니라 품격 있는 예술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 영화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으로 파국에 이르는 인간을 보여주지만, 탐미적 에로티시즘 위에 가볍지 않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덧씌운다.

-죽음과 에로티시즘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타이유는 저서 <에로티시즘>(*국역본과 영역본 모두 <에로티즘>으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다)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의 친족관계를 설파한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의 순간 인간은 극한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섹슈얼한 욕망은 죽음에의 동경에 다름 아니며, 성적 쾌락은 죽음의 경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루시아>는 이 같은 생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루시아(파즈 베가)는 6년 간 동거했던 소설가 로렌조(트리스탄 우요아)가 세상을 뜬 후 상실감에 시름시름 앓는다.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 지중해의 호젓한 섬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남자 카를로스, 민박집 주인 엘레나 등과 교류하며 평온을 찾는다. 하지만 로렌조를 축으로 맺어진 3사람의 과거 행적이 베일을 벗으면서 예상치 못한 비밀의 실체가 드러난다. 

-<루시아>는 한 인물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지를 치면서 전체 등장 인물로 퍼져가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동상이몽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실체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루시아>는 양파 껍질 벗기듯 이들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내밀한 진실의 속살을 들춰낸다. 뒤엉킨 관계만큼이나 그걸 포장하는 재료들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소설가인 로렌조가 쓰는 소설과 그의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꿈, 환상,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미궁 속을 헤매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관계가 하나 둘 씩 밝혀질 때마다 ‘그들 사이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이 난잡한 관계의 사슬을 맺어주는 끈이 있다면 섹슈얼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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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의 성애 묘사 수준은 그간 한국의 영화 심의 기준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다. 남녀 성기 노출은 예사요, 디테일한 성행위의 묘사도 수분간 이어진다.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극한 이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 때문에 미국에서는 17세 미만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는 'NC-17 등급'을 받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서슬 퍼런 심의의 가위질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무삭제'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 심의를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까지 나서 “과거의 구태의연한 심의기준이 사라졌다는 결정적 증거"로 거론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섹스 장면은 표현의 강도가 세다.

-파격의 영상 미학 물론 파격의 섹스 묘사는 그저 말초적 쾌락을 위한 눈요기 용은 아니다. 대담한 섹스 장면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장치로 동원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회피하지 않는 개방성도 욕망의 덧없음을 주장하는 결론을 위한 것이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가 이 같은 점을 확인시켜준다. <루시아>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 만큼 뇌리에 남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다. 보름달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도입부의 수중 정사, 파도가 만들어낸 포말 위에 어리는 그림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코발트 빛 바다와 하늘 등 화려하고 추상적인 풍경의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농담이 짙은 색감으로 덧칠된 유화나 총천연색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은 영상은 잠시 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데 공헌한 것은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 훌리오 메뎀의 연출력이다. 홀리오 메뎀은 페드로 알모도바르(<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의 뒤를 이을 스페인 영화의 기대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내가 아는 스페인 영화감독이 몇 안되는데, 다행히도 알모도바르-아메나바르는 내가 아는 '라인'이다. 메뎀이 그 뒤를 잇고 있다니까 '알모도바르-아베나바르-메뎀'으로 기억해두면 되겠다.)

 

 

 

 

-<그녀에게> <노보> 등에 출연했고 <스팽글리쉬>에서 억척스러운 스페인 이민자 여성을 연기한 매력적인 스페인 배우 파즈 베가(1976- )의 농염한 관능미도 빛을 발한다. <루시아>는 아름다운 배우, 아름다운 로맨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관객의 눈을 현혹시킨다.(*내가 이름을 아는 스페인 여배우는 모두 알모도바르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빅토리아 아브릴, 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파즈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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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후의 순간, 감독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행위나 가치 뒤에는 추함도 함께 있다고 말한다. 선을 넘어버린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을 ‘도착'이나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하지만 유혹에 약한 인간이 그걸 깨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06. 04. 11.

P.S. 참고로, 본문에서 참조하고 있는 <에로티즘의>의 서문을 잠시 인용한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한 말해서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 에로티즘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정의가 문제라면, 생식 차원의 성행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로티즘도 생식의 특수한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생식에 목적을 둔 성행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성동물의 공통된 행위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성행위를 에로티즘으로 승화시켰다... 에로티즘은 아기나 생식 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다."(<에로티즘>,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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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혼들이 무지 역동적이네요! 칼라의 마술사로 알고 있던 샤갈과 전혀 느낌이 다른걸요!

싸이런스 2006-04-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이라는 자의 그림인가...

로쟈 2006-04-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갈의 그림입니다. 소설의 내용을 채워넣어야 하는데 좀 미뤄지고 있습니다...

urblue 2006-04-1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습니다. ^^
 

 

 

 

 

폰카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내가 사진에 대해 특별한 조예를 갖고 있을 리 없다. 몇 사람의 사진가와 사진의 역사에 관한, 누드 사진의 역사에 관한 책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이다. 물론 롤랑 바르트나 수잔 소택의 사진론, 그리고 존 버거의 사진 에세이 등도 갖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외한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진 예술의 거장이라는 에드워드 웨스턴의 이름을 현재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회 소개 기사를 읽고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의 문외한 말이다. 어딘서가 보았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는 티나 모도티와의 커플 공동전에 대한 소개 기사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옮겨놓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또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비록 늦게 알게 되었으나 두고두고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옮겨오는 기사는 오늘자 한국일보(2006. 04. 10)의 것으로 작성자는 조윤정 기자이다.

 -“멕시코를 떠나는 것은 티나를 떠나는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 사진 예술의 거장 에드워드 웨스턴(1886~1958)은 1926년 멕시코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며 작업노트 한 켠에 이렇게 끄적거렸다. 노트 속의 티나는, 그가 4년 동안 멕시코에 머물 때 함께 한 제자이자 연인으로 멕시코 혁명에 참가한 티나 모도티(1896~1942)였다.



-둘은 1919년 처음 만났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티나 모도티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웨스턴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고 사진도 배웠다. 천연두로 남편을 잃은 모도티는 1923년 전쟁과 혁명, 변화의 혼돈으로 뒤엉킨 멕시코로 스승 웨스턴과 함께 건너간다. 당시 웨스턴은 부인을 둔 유부남이었다. 둘은 그곳에서 사진관을 함께 운영하고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에이 시케이로스, 프리다 칼로 등 아방 가르드 예술가와 만나 멕시코 르네상스를 주도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사른다.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그 사이에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정규 사진 교육을 받지 않은 모도티의 사진 기술은 거의 웨스턴으로부터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웨스턴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모도티의 대표작 ‘장미’는 장미가 카메라 렌즈 속에서 하나의 조각처럼 변신하는데 이것은 누드, 사막, 조개 등을 인위적 조작 없이 조리개 작업 만으로 세밀하고 분명하게 포착하는 웨스턴의 작품과 흡사하다.

-웨스턴의 ‘사막 위에 여자’는 사막 사진 위에 누드 사진을 잘라 붙인 것처럼 대상이 극명하다. ‘누드’는 솜털 하나와 털이 난 구멍, 살결까지 보일 정도로 세부 묘사가 날카롭고 정확하다. 웨스턴은 이들 작품을 통해 사진의 기계적 사실성을 극대화했다. 여자의 몸과 바이올린, 물위에 떠 다니는 배의 형상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웨스턴은 카메라가 사람의 눈보다 명확하고 세밀할 수 있다고 믿고 그 스타일로 작업에 몰두했다.



-모도티가 정치, 사회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사회적 이슈로 활동 범위를 넓히자 웨스턴은 심한 거부감을 느끼며 끝내 결별한다. 그러나 티나 모도티는 사랑을 잃고도 차가운 정치적 신념으로 꿋꿋이 살아가면서 멕시코 체류 10년 동안 역동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가난, 고통, 힘겨운 노동 등을 담아낸 모도티의 사진에서는 정밀함과 우아함이 독특하게 묻어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논쟁 때문에 70년 대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으나 91년 ‘장미’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당대 최고의 사진 경매가인 16만5,000달러에 낙찰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모도티와 헤어지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웨스턴은 피사체의 사실성을 더 강조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조개’(1927년)는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정교한 조명으로 사진 속 조개 껍질이 금속성 기계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은(1936년) 최초의 사진 작가였으며,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적 시험을 시도했다.

-둘의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인 스트레이트 사진은 지금 ‘사진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뤼미에르에서 전시되고 있다. ‘사진의 전설’ 전은 5월 7일까지 계속된다.

06.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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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a 2006-07-1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 님 서재를 자주 열람하는 철학도입니다. 나온다던 순수이성비판 재번역 출간 소식에 댓글을 따라 님의 서재까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퍼가고 싶어 망설이다 인사드립니다. 잠시 거닐어보니 저는 인문학도를 명패만 걸고 있었군요. 종종 들르겠습니다.
글구, 딴엔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라 멀리 사는 데도(부산) 그 비싼 돈을 주고 클레 전을 보러갔었지요. 클레는 제가 좋아하는 벤야민이나 들뢰즈가 좋아하는 작가라... 들뢰즈가 여러 차례 얘기하는 클레의 책,<현대 예술 이론>을 누가 번역 좀 하면 좋으련만.. 그 페이퍼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을 짝사랑하는 철학도시라면 예출철학을 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더불어, 클레의 <현대 예술이론>도 번역해주시면 저도 좋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