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가장 고대하는 책 중의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생각의나무, 2007)이다. 역자는 역시나 김종건 교수인데, 상품 소개가 뜨지 않아서 책이 범우사판을 한 권짜리로 다시 내는 것인지 개정된 내용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달라진 내용이 없다면 일종의 '트릭'이다). 제목이 <율리시즈>에서 <율리시스>로 바뀐 이유도 잘 모르겠고(그냥 '차별화 전략'인가?).

 

 

 

 

나로선 범우사판의 <율리시즈>를 모두 갖고 있고, 역자의 <알기 쉽게 풀이한 율리시즈>(범우사, 1997)도 챙겨놓은 지 오래이다. 다만 이 세기의 문제작을 완독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간혹 여름방학때면 조이스학회에 주관하는 '율리시즈 강독' 강좌가 개최되곤 하는데, 언젠가부터 한번 들어본다고 마음만 먹다가 두어 차례 흘려보내고 말았다.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던 것인데, 덕분에 2종류 갖고 있는 <율리시즈>의 원서도 책장에서 자고 있다. 게다가 범우사판 <율리시즈>와 관련서들이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라 이번에 나온 책이 개정번역판이라면 새로 구입해볼 생각을 품어본다. 그런 생각의 와중에 문득 '준비'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이 페이퍼를 쓴다.

 

 

 

 

먼저 조이스에 관한 책들을 챙겨둘 필요가 있겠다. 리처드 앨먼의 평전 <조이스1,2>(책세상, 2002)가 일단 챙겨두어야 하는 소장도서(조이스 컬렉션을 마저 채우려면 돈푼깨나 깨지겠다). 나는 이 두툼한 평전 대신에 얄팍한 조이스 두 권, 곧 데이비드 노리스의 만화 <조이스>(김영사, 2006)와 프랭크 스타터의 <30분에 읽는 제임스 조이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을 챙겨두고 있는데, 상황을 봐서 용적을 늘려야겠다(사실 문제는 책값이 아니라 꽂아놓을 공간이다). 거기에 국내서를 보태자면 나영균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정우사, 1999), 김학동 교수의 <제임스 조이스>(건국대출판부, 2001)를 꼽아볼 수 있겠다. 두 권 모두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더블린 사람들>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거쳐서 <율리시즈>에 이르는 조이스의 여정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여러 종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횡적으로 읽어야 할 책들도 있다. 러시아작가 나보코프가 세계 4대소설로 <율리시즈>와 함께 꼽은 책들인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경우 국내 유일의 완역본(국일미디어, 1998)이 현재는 절판중이지만 같이 읽어두어야 할 고전이다. 거기에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문학과지성사, 2006)까지가 그 네 권의 소설들이다(카프카의 경우엔 <변신>을 꼽았는지 아니면 다른 작품을 꼽았는지 헷갈리긴 하다). 모두 20세기 전반기에 각 언어권별로 세게문학이 산출해낸 걸작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종적으로 읽어야 할 책은 물론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06)부터이다. 이 방대한 고전도 읽어내려면 상당한 견적을 요한다. 영역본도 한두 종 정도는 갖춰놓는 게 좋겠고(인터넷에 떠 있긴 하지만 편의상) 해설서도 챙겨두도록 하자.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솔출판사, 2004)나 강대진의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 2007)가 적절한 길잡이가 돼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아우구스테 레히너란 오스트리아 작가가 다시 쓴 <오디세이아>(문학과지성사, 2006)도 번역/소개돼 있다. "그리스 서사 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현대의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 원전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가치와 의의를 그대로 전하는 동시에 읽는 재미를 준다. 지도와 등장인물 소개 글을 수록해 장대한 텍스트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준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명화도 함께 실었다"고 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책이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 문학사의 모더니즘에 대한 도발적인 재평가/재서술을 시도하고 있는 이 야심만만한 책의 한 장이 '<율리시즈>와 20세기'에 바쳐져 있다.

Улисс

개인적으론 지난 2004년 모스크바 체류시 러시아어본을 구하고자 했었던, 하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 책이 세 권 있는데, <율리시즈>는 그 중 하나이다(<모비딕>과 <특성없는 남자>가 다른 두 권이다). <율리시즈>의 경우는 러시아어본을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너무 고가였다(기억에는 3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Улисс

그러는 사이에 작년에 보다 대중적인 판본의 새 번역서가 나왔다(역자가 같은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감스러운 건 인터넷서점에서 품절중이라는 것. 내가 <율리시즈>를 읽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손대볼 수 있는 건 이 러시아어본을 손에 넣는 일이다...

07.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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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04 03:08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퍼갑니다.

류스케 2007-03-04 10:28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신 분이군요 ^^ 추천하고 갑니다~

biosculp 2007-03-04 13:31   좋아요 0 | URL
지금 강대진의 고전은 서시시다 를 읽고 있는데 글이 간결하면서 번역투가 아니라 머리복잡하게 하지 않고 뚜렷이 읽히게 만듭니다. 더불어 고전읽기의 해법이라는 책머리의 제목처럼 고전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니(들어갈지는 들어가야 하니 아직은?) 최근 읽은 책중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데 혹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위하여라는 페이퍼를 쓰신적은 있나요.
열린책들에서 새로운 판본을 210질 낸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오면
달려들어볼 계획인데요.

로쟈 2007-03-04 14:42   좋아요 0 | URL
두분의 추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전은 서사시다>는 서점에서 보고 바로 손에 들 뻔한 책인데, 책값을 보고서 다시 내려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책들임에도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들을 안 하는 것인지(실제로 많이 안 팔리는 것인지) 저자의 책들이 주로 고가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선 다른 페이퍼들을 좀 쓴 게 있습니다. '새로운 판본'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는데, 210질 한정본인가요?..

biosculp 2007-03-04 16:10   좋아요 0 | URL
새로운 판본이 아니라 겉표지가 새로운것입니다. 한정본이더군요.아직 나오지는 않고 출판사에서 가격고민중인것같더군요.

로쟈 2007-03-04 19:0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이미 전집 초판을 갖고 있는 데다가 여러 권의 '빨간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고민'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2007-03-05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05 13:38   좋아요 0 | URL
**님/ 햇빛비둘기님의 정보를 참고하시길...
햇빛비둘기님/ 목돈 들어가게 생겼네요.^^;

로쟈 2007-03-05 15:35   좋아요 0 | URL
주석 말씀하시는 거지요? 저도 갖고 있습니다. 다만 박스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2007-03-07 06:5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조만간 '율리시즈'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마침 이 책 발간 소식을 듣고 살까,말까 고민하던 차에 로쟈님 페이퍼 보니 구매의욕이 불끈 솟아 오릅니다. 아주 알찬 페이퍼네요.^^ 추천 꾸욱!!

로쟈 2007-03-07 23:04   좋아요 0 | URL
다소님/ 이 카테고리가 '로쟈의 낚시'랍니다.^^
**님/ 메일 드렸습니다. 감사.^^

2007-03-13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3-14 23:04   좋아요 0 | URL
**님/ 그러셨군요. 강선생과는 직접 면식은 없지만 한다리 건너서 예전에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잔혹한 책읽기>가 나오기 전에). 저에 대한 '온갖 소문'은 뜻밖인데 아직 숨어계신 분들이 다 드러나지 않은 탓이란 생각이 드네요...
 

지난주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널드 시먼스의 <섹슈얼리티의 진화>(한길사, 2007)이다. 학술명저번역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는데, 지난 1979년에 출간된 원저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는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비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이나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비롯해서 이후에도 이 분야의 '명저들'은 많이 출간/소개됐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저자의 이름도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책소개도 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아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출판된 지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에 따라 진화심리학에서 그 당시 이뤄졌던 논의와 현재 진행되는 논의가 다소 다를 수도 있으나, <섹슈얼리티의 진화>는 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논의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책이다. 관련 분야의 다양한 논의를 심화시키는 데 이바지한 바가 크며, 특히 국내의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 성 심리학, 그리고 여성학적 논의의 성숙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성매매 특별법' 등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요컨대, 이정표가 된 책이라는 것. 분량도 560쪽(원저는 368쪽)에 이르기에 부피에 대한 바람도 채워준다. 장서용으로 좋다는 얘기이다. 다윈의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도 아직 꽂아놓고 있지 못한 형편인지라 소장도서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하지만, 리뷰 정도는 미리 읽어두도록 한다.  

 

문화일보(07. 03. 02) 남성의 바람기는 ‘유전자의 명령’

여성을 위한 ‘플레이 보이’지를 창간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충 고. 첫째, 음경이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음경이 축 늘어진 남성 의 사진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둘째, 남성의 단독 사진보다는 벌거벗은 남성과 함께 있는 여성의 사진이 좀더 효과적이다. 셋째, 남녀가 서로 어루만지는 사진이 특히 효과적이다.

이 같은 충고는 여성의 성(性)적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성의 벗은 모습에 시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성과 달리 상당수 의 여성들은 남성의 누드사진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기한 남성의 사진이 그렇지 않은 남성 사 진에 비해 효과적인 것은 보다 실질적인 성 관계를 시사하기 때 문이다. (이는 여성을 위한 포르노 잡지의 입지가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포르노토피아(pornotopia)에선 합당한 맥락에서의 성적 현실 보다는 환상적인 상황을 설정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은 남성을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서 오는 자극보다 는 사진에 같이 나오는 여성에 대해 주관적인 동일화를 함으로써 더욱 자극받는다. 이는 세번째 충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단순한 시각적 자극보다는 사진에 자신을 투사해보기를 여성은 더 선호한다. 사진에 자신과 같은 성인 여성이 나오는 것은 경쟁과 질투심 같은 정서 또한 촉발할 수 있다.



책은, 이 같은 인간의 성 특성에 관한 진화심리학적 고찰을 집대성한 고전이다. 진화심리학에선 인간의 진화사를 통해 보통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심리적 특성과 행동을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성적 행동과 태도, 감정에서 남녀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차이가 생래적이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똑같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남녀 사이에는 전형적인 성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성 특성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이성을 두고 벌어지는 동성간의 경쟁은 일반적으로 여성들 보다 남성들 사이에서 훨씬 치열하다. 둘째, 남성은 일부다처적인 성향이 농후하지만 여성은 이런 측면에서 비교적 유연성이 있다. 셋째, 배우자에 대한 성적 질투심은 남성이 더욱 강렬하다. 넷째, 육체적 특징 특히 젊음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에 비해 남성의 육체적 특징(젊음 등)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작다. 다섯째, 여성에 비해 남성은 훨씬 많은 수의 성 파트너를 갖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여섯째, 성은 여성이 남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또는 호의로 간주되며 그 반대는 아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남녀의 성적 특성이 유전자의 보존과 후대 전달을 위해 모든 생물이 프로그램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유전자의 후대 전달을 위해 남녀간 성적 특성과 행동에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남성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평생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에 제한이 있는 여성은 다수의 남성과 무작위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 따라서 남녀는 각기 다른 성행동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족 한마디. 남성에게 다수의 성 파트너를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특성 이 있다는 ‘사실(fact)’에서 ‘가치(value)를 도출해내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자연’과 ‘선(善)’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은 진화론적 원인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김영번기자)

07. 03. 03 - 04.

P.S. 저자인 도널드 시먼스는 "캘리포니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로서 "인간의 성 특성의 진화론적 해명에 관심을 가지고 줄곧 연구해왔으며, 성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탐구를 대표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소개돼 있다.

"지은 책으로는 <놀이와 공격성: 붉은털원숭이에 대한 연구>, <섹슈얼리티의 진화>, <전사 연인들: 성애적 허구, 진화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언급된 <전사 연인들>이 최근에 나온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한권이다.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하다...

P.S.2. 섹슈얼리티의 진화심리학의 연장선상에서 '강간의 진화심리학'에 대한 소개/논의를 옮겨놓는다.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의 리뷰팀이 <섹슈얼리티의 진화>의 역자이기도 한 김성한 교수의 연구논문을 요약정리해놓고 있다.

담비(07. 03. 03) 진화심리학을 오해하는 페미니즘에 맞서

강간 같은 흉폭한 강력범죄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는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명의 유파가 존재한다. 피해 여성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강간은 그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그 주도권을 잡아왔다. 강간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 기준을 제시해온 그들의 공력은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양 측이 해석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철학' 제89집에 발표된 김성한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 비판은 타당한가?'는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분류하고 그 각각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김 연구원은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불필요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왜 남성이 강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까부터 보자. 이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 특성의 차이 때문으로 "여성이 상대를 가림에 비해 남성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단순히 교접만으로도 자손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없이, 상대와 비교적 무관하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극 등 비교적 단순한 기작을 통해 성적 욕구가 일어난다. 반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 등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상대를 잘못 고를 경우 자칫 자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 선택에 신중하다. 이 때문에 성관계와 관련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성적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가 성매매의 사회적 승인여부와 관계없이, 나이와 사회경제적 지위 또는 정신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들마저도 강간범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다.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설문조사에선 잡히지 않으면 강간을 범하겠는가의 질문에 35%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건 이런 주장을 보강해주는 자료다.

강간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왜 강간의 고통이 여타의 폭력 등에 비해 더 심각한 상처를 안겨주나. 강간 희생자인 여성은 육체적 상처를 넘어서, 아이출산 시기와 상황, 그리고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성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기 때문이라는 게 그 설명이다. 심지어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도 해봤다고 한다. 만약 여성들에게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터무니 없는 추론이다. "여성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강간당하는 경험을 원하게 될만큼 유연한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결론.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이 강간을 옹호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레이(R. Gray) 같은 학자는 "진화론적 설명은 우리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돼 있으며, 그래서 그 행위가 자연스럽고 고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이지만, 진화심리학은 남성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야기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여러 여성과의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곧 강간에의 욕구는 아니라는 것. 이런 맥락에서 유전자 결정론자로 비난을 받고 있는 도킨스조차 "우리는 유전자에 대항할 힘이 있으며,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기적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에드워드 윌슨도 인간의 공격성은 유전적 성향과 사회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라는 세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했다'라는 의미의 결정이 아니라, '직각적으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라고 김 교수는 되풀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학습이나 환경적 요인들이 통제력을 발휘해 행동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일부 성향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호랑이의 맹수적 본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이들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자연적인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만, '자연적인 것=옳은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경향을 인정하는 게 곧 옳음을 주장하는 게 아니며,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에 대한 기타 사회과학자들의 구체적인 반박을 살펴보자. 먼저 진화심리학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라는 관점이다. 니네들이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된다는 것으로 탕-말티네즈(Z. Tang-Martinez) 같은 이는 "강간이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 분석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이란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를 통해 여성을 통제, 지배하려는 욕구를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고착 강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으로, 강간이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는 주장을 표방하는 입장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 교수의 주장처럼 동일한 현상에 대해 근인(proximate cause)적 설명과 궁극인(ultimate cause)적 설명을 모두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동물의 행동을 신경, 호르몬, 인지과정, 유전자, 조건화, 감정 등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 중 어떤 한가지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에서 생물학적인 성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강간범들의 증언을 활용하기도 한다. 강간범들은 붙잡히고 나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불만, 분노, 소외감" 등을 대기도 하는데, 이를 근거로 강간을 힘, 지배, 굴욕, 착취, 가학성에 관한 폭력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강간범들이 "더 이상 내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성적 충동을 최소화해서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사실상 크고, 일부 조사에서 강간범들은 자신의 실제 동기를 말하기보다 연구자들이 원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할 때의 폭력사용을 이유로 강간을 폭력으로 이해하려는 경우도 비판하고 있다. 강도가 피해자의 물건을 강탈할 때 강도의 목적이 물건이지 폭력이 아닌 것처럼, 강간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힐(R. Thornhill) 등의 경험적 연구가 있는데, 강간범의 폭력을 도구적 완력과 과도한 완력으로 나눌 때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는 연구가 그것이다. 또한 강간희생자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전체 살인사건에 비해 극히 일부분이고, 면식범의 소행일 경우 사건은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다.

또한 일부는 전쟁중에 강간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강간이 성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브라운밀러 같은 이는 전쟁 중에 남자들이 떼거지로 다니면서 여자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집단윤간을 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나 지배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성적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일어난 강간으로서, 다만 전쟁중에는 처벌받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때문에 강간빈도가 높아지고 행위의 수준도 강화된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무튼 강간의 원인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은 기존의 사회심리학적 설명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김 교수의 논문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적 설명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논쟁을 통해 가다듬어 나가야 할 주제인 듯하다.(리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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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옮겨오는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에는 시인 김선우씨가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평론가 신형철씨가 거들고 있다. 한겨레('모 일간지')의 '18도' 지면에서도 그녀의 칼럼을 종종 읽을 수 있으므로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시집으론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이 있다.

 

경향신문(07. 03. 03)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03.

P.S. 시인은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피어라, 석유!' 등의 시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그 아래는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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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7-03-0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야구 선수 김선우를 생각했었습니다.^^ 요즘은 작가들도 인물이 좀 되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ㅎㅎ

jouissance 2007-03-0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 시인의 책이나 칼럼에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 왠지 불편하더라구요. 만일 제가 바르트라면 '모델처럼 찍힌 시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는 설을 풀어 볼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냥 그런저런 시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에코 페미니즘과 진보'를 얘기하는 시인이라, 그 사진이 무심하게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너무 강팍하고 삐뚤린 시선으로 본 건가요?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시와 산문이 좋다는 겁니다...ㅎㅎ

로쟈 2007-03-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아무래도 매체환경이 유인하는 면이 있겠죠. 게다가 여성성을 강조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jouissance님/ 한마디로 색을 쓸 줄 아는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개인적으로 특별히 와닿는 시인은 아닙니다...

jouissance 2007-03-0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성을 노래하는 시인은 '색'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페미니스트들에게 '색'을 얘기하면 당연히 으르렁 대겠지요. 그렇다면 여성성과 페미니즘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은 '색'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신형철 선생이 조금 오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벌써 '색'에 포섭된 걸까요..ㅎㅎ

로쟈 2007-03-0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시집에 대한 김승희 시인이 추천사를 다소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김선우의 두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해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범이다. 그녀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맛있는 모국어와 무의식이 질주하는 치렁치렁한 환유의 시 문법은 남성 시인의 직선적 상상력과 발성과는 차이가 있으며,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흘러넘치는 환상(環狀)선의 욕망을 보여주는 기표들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육체와 대자연의 쾌락, 성욕 등이 무한한 욕망으로 겹쳐지면서, 이 대자연-상상계적 여성 육체는 그리하여 아버지-근대-로고스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담론의 공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민둥산'이나 '69-삼신할미가 노는 방'이 보여주는 우주적 에로티시즘, '완경(完經)'이나 '물로 빚어진 사람'이 보여주는 엄마-딸의 생리적 연대와 사랑, 여성의 '여성다운' 육체와 생리를 대자연의 성욕에 천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열락(jouissance)의 상상력. 이러한 특징은 김선우적 여성 텍스트가 모유와 음문(陰門), 유방과 아주 능동적인 클리토리스로서의 풍요로운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jouissance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jouissance님이 가장 잘 아실 거 같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인용해주신 로쟈님께는 죄송하지만, 일순 짜증나게 만드는 추천사입니다. 평론도 아니고 추천사인데, 이런 고답적인 어투 조금 거북스럽네요. 꼭 이렇게 교수티를 내고 싶은 걸까요. 아무래도 김선생이 교수들의 나쁜 습성을 너무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 최근 몇년 사이에 읽은 김승희 선생 대부분의 글에서 이런 불쾌감을 경헙했답니다. 하루빨리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기를 바랄뿐입니다...ㅠㅠ

로쟈 2007-03-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교수'로서의 정체성은 다른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글'을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수가 발표한 '대부분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제가 읽은 김교수의 글에 한에서 '대부분'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근데 로쟈님, '시인 김승희'가 역량에 비해 평단에서 너무 홀대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가^^

로쟈 2007-03-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 양반은 크리스테바의 기호분석론 같은 걸 시텍스트 분석에 적극 도입하려고 해서 좀 '현학적'인 게 나오지요. 그리고 '시인 김승희'는 소월문학상을 이미 수상했고 아마도 '서정주 문학상' 정도만 남은 듯한데, '홀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소설가로서도 좋은 평을 받았었고.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jouissance 2007-03-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동년배의 여성 시인들 중에서 '김승희'를 특별히 좋아합니다(그냥 취향이 맞아서요^^) 애독자로서 비슷한 연배의 최승자, 김혜순, 고정희에 비해 비평가들로부터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문학상 수상 경력(소월, 고정희 문학상)과 평단의 주목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발표된 시인론을 예로들면 되겠네요. 비교해보면 아시겠지만 저 세 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편수가 적답니다. 가벼운 연구 책자 정도는 나올 법도 한데 아직 없구요(예컨대 '작가세계', '깊이읽기', '문학앨범'...뭐 이런 시리즈 말입니다) 그래요,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작가들이 훨씬 많지요. 아마 이런 저의 불만은 애독자의 편향된 시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겁니다...^^ -
 

출판계에서 조금 의외의 일이 벌어져 유감스럽다. 지난달에 출간된 책 한권이 외국서적을(그것도 번역된 적 있는 책을) 그대로 도용했다는 것. 따지고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하여 '원로' 과학자들이 구태여 그런 불미스런 일에 관여했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보편화된 '불감증' 탓이 아닐까 싶다.

경향신문(07. 03. 03) 진실 배반한 과학원로들…외국책 베껴 파문

‘황우석 논문조작’ 사태를 계기로 연구자의 표절 등 부정행위를 방지하자는 취지로 출간된 책이 외국책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2일 출판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출간된 ‘탐욕의 과학자들’(일진사 펴냄)은 전체 25%에 해당하는 84쪽을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Betrayers of the Truth)’에서 무단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은 갈릴레오·뉴턴·다윈 등 고대 과학자에서부터 최근 과학자들까지 표절 등 부정행위 사례를 엮어 출간됐다. 머리말에는 ‘연구 진실성과 투명성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고자 출판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 책은 1982년 뉴욕 타임스 과학담당 기자인 윌리엄 브로드 등이 저술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일부를 그대로 도용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국내에서 한차례 번역소개됐지만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가 지난달말 미래M&B에서 재출간됐다.

Betrayers of the truth

‘프롤레마이우스의 관측 오류’를 담은 부분의 경우 ‘탐욕의 과학자들’과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 내용이나 표현, 글의 진행이 거의 유사하다. 갈릴레오, 뉴턴, 돌턴, 다윈, 멘델 등의 부정행위를 설명하는 총 19쪽에 달하는 내용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그대로 베낀 수준이다. 로버트 훅의 부정행위 사례를 담은 부분 역시 29~30쪽에 걸쳐 그대로 베꼈다. 심지어 민영기 교수가 필자로 돼 있는 ‘펄서 발견에 얽힌 사제 간의 공적 논란’은 15쪽에 걸쳐 주어·서술어·수식어의 흐름이 모두 유사하다.

당사자도 ‘무단도용’에 대해서 시인했다. 민영기 교수는 “다른 공동저자가 원서를 주면서 저작권이 이미 소멸돼 편저로 내자고 했다”며 “책이 출간된 이후 표지에 저자로 돼 있어서 출판사측에 잘못됐다고 항의했다”고 해명했다. 박택규 교수는 “편저라 하더라도 출처 표시를 하지 않은 점은 잘못”이라며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인 일진사의 대응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일진사는 출간된 이후 ‘편저’라는 사실을 필자들로부터 들었으나 곧장 책을 회수하지 않았다. ‘편저’라고만 쓰인 띠지를 만들어 판매를 강행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출판한 미래M&B측은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도 아니고 무더기로 베꼈으며 역사연표까지 모두 표절했다”면서 “출처를 표시하든가 번역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07. 03. 03. 

P.S. 찾아보니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배신의 과학자들>(겸지사, 2002)이라고 번역된 적이 있다. 저자들이 뒤늦게 '편저'라고 밝혔다지만 그 경우에도 정식으로 발췌에 대한 저작권 위임을 받지 않았다면 위법 아닌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한 발언은 특히나 문제적이다. 그러한 표절/도용이 과학계의 흔한 '관행'이라는 증언도 되기 때문이다(어디 과학계뿐이겠는가). 여러모로 뒷맛이 씁쓸하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들 참조).   

표절이나 도용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만 며칠 전에 읽은 한 서평도 뒷맛이 씁쓸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1994)과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을 다룬 송승철 교수의 서평 '모더니즘 미학과 근대성의 역학'(<창작과 비평>, 1996년 봄호)이 문제의 서평인데, 나도 렌트리키아의 책은 출간 직후에 지방에서 사서 읽어보고(물론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나는 이후에 원서를 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번역을 개탄하는 편지를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써보낸 기억이 있다. 서평은 말미에서 두 번역서의 실태를 꼬집고 있는데, 특히나 문제가 되는 건 원로 영문학자가 공역자로 참여한 <신비평 이후>. 원서는 워낙에 평판이 좋은 책이지만 한국어로는 읽을 수 없게 돼 있다. 

영문학계에서 그냥 쉬쉬하고 넘어간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과문했다. 서평은 직설적으로 오역의 실태에 대해서 질타하고 있다.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은 지금까지 내가 검토해본 숱한 번역이론서 가운데 최악의 것이며, 정말 본인들 자신의 번역이라면 비평이론의 수준을 따지기 앞서 역자들의 영어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게 일단 총론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가관이 된다.

"도대체 번역을 한 후 제대로 교정을 보았는지 의심가는 대목이 한 페이지에 평균 대여섯 군데씩 있다. 예를 들면 책의 첫 페이지에 있는 에피그라프 두 개의 번역(9면)에서부터 오류가 발견되거니와, '감사의 말' 앞부분에 있어야 할 것이 '들어가는 말' 다음으로 옮겨져 있다. 게다가 사전만 제대로 들쳐도 피할 수 있는 오역, 즉 문장의 'whether... not' 'not just' 따위를 거꾸로 해석한 부분(152면)도 부지기수여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민망한 내용을 조금 옮겨오자면, "데리다를 논하면서 presence와 being을 똑같이 '존재'로 옮겼다든지 generic이 genre의 형용사임을 몰라 '일반적'으로 옮기거나 바흐찐적 술어인 sociolect(집단방언)를 '사회학강의'로 번역한 것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discourse를 줄곧 '논술'로, discoursive를 '산만한'으로, 독일 관념론을 지칭하는 idealistic을 '이상주의적'으로, 더구나 dialect를 '변증법', pragmatist를 '실증주의자'로, fault-line을 '잘못된 선'으로, 심지어 latest를 '마지막'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평자로서는 이 번역이 역자들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의 번역을 적당히 추려서 내놓은 것으로 믿고 싶은데, 그렇더라도 역자들의 책임이 면피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역자의 한 사람이 최근 관민합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번역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번역서와 원서는 다행히 박스보관도서가 아닌데 언젠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서가에 악착같이 모셔둔 탓이다('discoursive practice'를 '논술 연습'이라고 번역한 사례도 이 책에 나온다). 다행히 애써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번역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기대할 걸 기대해야 하나?). 개인적으론 서평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애꿎은 영문과 대학원생들)의 (한심한) 번역이라고 믿고 싶지만 원로 영문학자께서는 이런 '옮긴이의 말'을 남기셨다.

"이 번역 작업은 학교에서의 강의와 다른 글쓰기 등으로 간간이 오랜 시간 동안 중단되기는 했지만, 약 3년에 걸친 노역(勞役)에 가까운 나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 많은 좌절감과 함께 오역에 대한 두려움을 적지 않게 느꼈으나, 우리는 한권의 뜻 깊은 책을 내겠다는 보다 큰 희망과 목적을 위해서 작은 고통이나 두려움은 잊어버리기로 했다."(489쪽)

그리하여 우리가 갖게 된 것이 이 '뜻 깊은' 오역서이다. 무슨 '뜻'인가? 한국 학계에 믿을 만한 원로들은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오역과 표절에 관한 이 오랜 '관행'은 쉽게 근절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부도덕'이 정치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근간일지도 모른다는 매트릭스적 깨달음. 이게 과연 우리의 '현실'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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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3-03 22:57   좋아요 0 | URL
혹은 "(내 번역이)오역과 표절이 위험수위에 있다는 걸 알아. 그러나 번역서가 없는것 보다는 나은거 아냐?"와 같은 과소진술적(understatement) 깨달음일지도..-_-

릴케 현상 2007-03-04 00:28   좋아요 0 | URL
2006년 봄호의 송승철씨 글은 <<크리티카>>1호 소개글이군요

로쟈 2007-03-04 00:36   좋아요 0 | URL
yoonta님/ 그건 제 깨달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산책님/ 오타네요.^^; 1996년 봄호입니다.
 

지난주에 '새로운 비평용어사전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하고 나서 사라 밀즈의 <담론>(인간사랑, 2001)을 원저(1997)와 함께 도서관에서 대출해 절반 정도를 읽었다. '담론'은 물론 'discourse'의 역어인데 푸코가 처음 소개될 즈음만 해도 '언술' '언설' '술화' 등의 경쟁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대략 '담론'으로(언어학에서는 '담화'로) 통일되어 가는 듯하다(알라딘에서 '담론'을 검색하면 현재 286건의 상품이 뜰 정도로 상용화돼 있다).

 

 

 

 

그러한 용어의 정착에 기여한 책으론 밀즈의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는 다이안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한울, 1992/2002)와 푸코의 <담론의 질서>(새길, 1993; 서강대출판부, 1998)를 꼽을 수 있겠다. 토도로프의 <담론의 장르>(예림기획, 2004)도 번역돼 있고, 국내서 가운데서는 학술서로 분류될 이정우의 푸코 연구서 <담론의 공간>(민음사, 1994; 산해, 2000)이나 고명섭 기자의 서평집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은 '담론'이란 용어를 표나게 내세운 경우이다(한국학 관련서들을 제외할 경우 그렇다).

사라 밀즈의 책은 그러한 단상을 잠시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다지 재미있거나 유익한 책은 아니었다(이미 '담론'을 다루는 다른 책들을 읽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재미있는 내용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나머지 절반(4,5,6장)에 집중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5장의 제목이기도 한 'Colonial and post-colonial discourse theory'를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담론 이론'이라고 생경하게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자의 독특한 취향을 고려하연서 읽어야 할 터인데 그럴 만한 여유가 내겐 없다. 게다가 간간이 눈에 띄는 오역과 고유명사의 독특한 표기 등이 이 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든다.

가령 러시아의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내내 '미하일 박틴'이라고 옮기고 있다(아예 'Mikhail Bakhtin'을 'Mikhail Baktin'이라고 병기하면서!). 번역서가 나온 2001년이면 바흐친의 책들이 그래도 적잖게 소개된 형편이었는데도 말이다(역자가 국내의 이론 담론에 둔감했다는 것밖에 안된다). 그리고 저자가 푸코의 담론이론을 더 정교하게 이론화한 사례로 들고 있는 '미셸 페쇠(Michel Pecheux)'의 경우도 역자는 '미셸 뻬슈'라고 옮겼다. 물론 취향에 따라 그렇게 옮길 수도 있다. 단, 국내의 문헌들에 소개된 '페쇠'를 역자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적어도 맥도넬의 <담론이란 무엇인가> 정도는 참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페쇠의 공로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언어학자 미셸 페쇠의 작업은 보통 미셸 푸코의 작업과 함께 읽는 것이 유리하다. 담론에 관한 그의 작업(페쇠, 1982)은 그가 단어들의 의미와 단어들이 더 큰 규모의 구조와 갖는 관계의 의미를 단어와 문장을 스스로 의미를 갖는다고 상정하지 않고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쇠의 작업은 그가 미셸 푸코 이상으로 담론의 충돌적인 성격, 즉 담론이 항상 다른 입장들과 대화 또는 갈등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담론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한다."(29-30쪽) 

그러니까 페쇠는 단어나 문장 들이 갖는 자체적 의미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 막바로 그보다 큰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자 했으며, 한편으로 그러한 시도의 이론적 원천을 푸코라는 것. 하지만 "담론이란 용어는 푸코의 작업에서는 잘 정비된 이론적 관념 체계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푸코 자신의 표현을 빌면, "나의 모든 책들은... 도구로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한다."(34쪽) 이런 식의 연결이 뭔가 어색한 것은 인용문에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이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All my books ... are little tool boxes...."이다('나의 모든 책은... 작은 도구상자들이다"). 그런 식으로 옮겨놓으면 번역서의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참고로, 저자가 참조하고 있는 페쇠(1982)는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1975)의 영역판이다(두껍지 않은 책이다). 어쨌든 담론과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를 더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 페쇠가 기여한 거로 보면 되겠다. 그러한 구도는 푸코와 알튀세르의 작업을 접합시키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을까?

밀즈의 <담론>를 읽으며 그래도 얻은 소득은 이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긴장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다('담론과 이데올로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이론가와 비평이론가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토대를 둔 작업과 담론에 의거한 작업 중 어느 쪽을 원천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극심한 이론적 어려움을 겪었다."(51쪽) 즉, 담론과 이데올로기 중에서 어느 것이 '베이스'이고 또 '베이스캠프'이어야 하는가, 가 논란의 쟁점이라는 것.

"작업의 토대를 이데올로기에 두는 이론가와 담론 이론에 두는 이론가 사이의 극명한 대조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정치적 올바름/성차별주의에 대한 논쟁일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평가와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이 성차별적인지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서는 성차별주의는 허의의식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즉 스스로를 특정 유형의 성적 주체로 인식하기를 요구받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담론이론의 관점에서는 성차별주의가 주체집단에 부과된 일단의 믿음의 문제인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된다."(71-2쪽)

большой пикчер

인용문에서 '언술'은 'statement'의 역어이다('언표'라고 자주 옮겨지는). 이데올로기 이론가나 담론이론가 모두 어떤 언술/언표가 성차별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는 것. 알튀세르의 용어로 표현해서 '주체가 질의받는' 방식이라고 보는 게 이데올로기 이론가의 입장이라고 했는데, '질의받는'는 알튀세르의 술어 '호명받는(interpellated)'을 잘못 옮긴 것이다(인문이론서의 역자가 소위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도 무지하다는 것은 좀 놀랍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성차별주의적 표현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지표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면에 담론이론의 입장은 성차별주의가 단순히 '부과'되는 것이라 투쟁을 통해서 정당화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억압적 전략이지만 담론이론에서는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자리이다. 성차별주의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기 위한 다수의 남성의 시도가 정당화되는 전장이다. 성차별주의는 또한 여성들이 항변하고 이러란 저항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자리이다."(73-4쪽).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핵심적인 대목이기에 원문을 옮겨적자면: "Thus, whilst within an ideological view sexism is an oppressive strategy employed by men to bolster their own power, within a discourse theory model, sexism is the site of contestation; it is both the arena where some males are sactioned in their attempts to negotiate a powerful position for themselves in relation to women, but it is also the site where the women can contest or collaborate with those moves."(45쪽)

원문의 'those moves'를 국역본은 '이러한 저항운동'이라고 옮겼는데 내가 보기엔 근거가 없다(일단 'those'는 '이러한'이 아니다). 'those moves'란 복수형이 받을 수 있는 건 앞에 나오는 'their attempts'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 여성들은 논쟁하거나 협력할 수 있다는 게 원문의 내용이다. 해서 다시 옮기면,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성차별주의가 남성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이용하는 억압적 전략이라면, 담론이론의 모델에서 성차별주의는 논쟁의 장소이다. 즉, 성차별주의는 남성들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권력적인 위치를 얻어내려는 시도를 인가받는 격투장이면서, 동시에 여성들이 그러한 시도와 논쟁하거나 반대로 그와 협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담론 이론의 편에 서고 있는 사라 밀즈의 정리는 사실 푸코의 견해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며 인용문 자체가 <성의 역사1>에서의 인용을 부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담론-권력론을 푸코 스스로가 요약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해서 유의미한데 이런 내용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담론이 권력의 수단도 되고 효과도 되는 동시에 권력의 장애물, 권력이 비틀거리며 부딪히는 벽, 저항의 지점, 반대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과정을 고려해야 한다. 담론은 권력을 생산하고 전달하며 강화할 뿐만 아니라 권력을 소멸시키고 폭로하며 허약하게 만들고 권력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73쪽)

대략적인 요지는 맞지만 첫문장은 오역이다. "담론이 침묵보다도 더 권력에 봉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성의 역사> 영역본에서 인용하고 있는 원문은 "Discourse are not once and for all subservient to power or raise up against it, any more than silences are."(44쪽, 영역본 110쪽) 고등학교식 영문법을 되새겨보자면, A whale is not a fish any more than a horse is.(고래가 물고기가 아닌 것은 말이 물고기가 아닌 것과 같다)와 같은 구문이다. 즉, "담론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전적으로 복종하지도 전적으로 저항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복종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의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담론 또한 그렇다는 얘기이다.

이 책에서 내가 챙긴 건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그 정도의 상식이고 그런 상식의 확인이다. 그러니 재미없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비하면 당혹스러운 대목들은 보다 자주 눈에 띈다. 그걸 늘어놓는 것도 소모적이므로 한가지만 지적하자면, 99쪽 이하에서 푸코의 <담론의 질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어인 일인지 역자는 푸코의 논문/강연 제목인 'The order of discourse'를 모두 '사물의 질서'라고 옮겼다. 

우리말로는 단행본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돼 나왔지만(영역본 <지식의 고고학>에 부록으로도 붙어 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문이기도 한 이 글의 영어본은 로버트 영이 편집한 <텍스트 풀기(Untying the text)>(1981)에 실려 있다. 이 텍스트를 황당하게 역자는 내내 '사물의 질서'라고 옮기고, 112쪽에 가서야 원래대로 '담론의 질서'라고 번역해준다(역자가 둘인가?). 이해 못할 노릇이다.

 

이해를 좀 해보고자 한다면, 역자가 <말과 사물>의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와 <담론의 질서>를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 또한 <말과 사물>로 옮겨줘야 한다. 자신의 무지를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절판중인지라 우리가 현재로선 푸코의 <말과 사물>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흥미로운 건 이러한 혼동/착오가 역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 사라 밀즈의 원서 참고문헌에도 푸코의 <말과 사물> 영역본(1970)이 <담론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The Order of Discourse: An Archaeology of Human Sciences)'이라고 오기돼 있다(164쪽). 루틀리지의 편집/교정자들도 눈이 밝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책은 어제 그냥 반납하려다가 읽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리고 또 'discourse'를 '논술'이라고 내내 번역한 또다른 번역서가 생각나기도 해서 간단히 정리도 해둘 겸 몇 자 적어보았다. '논술 읽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7. 0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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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7-03-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가라타니 고진 책을 읽었는데, 한국어 번역자는 미국을 줄곧 '아메리카'로 표기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인들의 용법을 굳이 그대로 살려서 번역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함으로써 해당 글의 원문이 일본어로 씌어 있으며 읽을 때 일본이라는 맥락을 항상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바'인가요? ^^;) [말과 사물]을 영역본 제목인 [사물의 질서]로 옮기는 문제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글이 영미권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히 알려줄 수 있겠지요. 물론 [사물의 질서]가 영역이 아닌 '원문'이라고 받아들여지면 낭패지만..^^;;

로쟈 2007-03-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미국'과 '아메리카'가 선택적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아메리카'라고 했다면 그걸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로선 어색한 번역이라고 생각하고요. <말과 사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사물의 질서>라고 해놓고 병기해주거나 각주를 달아준다면 양해할 수 있지만, <사물의 질서>라고만 옮겨주는 건 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국역본입니다. <말과 사물>이라고 번역돼 있으면 그렇게 통일시켜주는 게 불필요한 혼동을 줄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