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에서 조금 의외의 일이 벌어져 유감스럽다. 지난달에 출간된 책 한권이 외국서적을(그것도 번역된 적 있는 책을) 그대로 도용했다는 것. 따지고 보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하여 '원로' 과학자들이 구태여 그런 불미스런 일에 관여했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보편화된 '불감증' 탓이 아닐까 싶다.
경향신문(07. 03. 03) 진실 배반한 과학원로들…외국책 베껴 파문
‘황우석 논문조작’ 사태를 계기로 연구자의 표절 등 부정행위를 방지하자는 취지로 출간된 책이 외국책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2일 출판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출간된 ‘탐욕의 과학자들’(일진사 펴냄)은 전체 25%에 해당하는 84쪽을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Betrayers of the Truth)’에서 무단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은 갈릴레오·뉴턴·다윈 등 고대 과학자에서부터 최근 과학자들까지 표절 등 부정행위 사례를 엮어 출간됐다. 머리말에는 ‘연구 진실성과 투명성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고자 출판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 책은 1982년 뉴욕 타임스 과학담당 기자인 윌리엄 브로드 등이 저술한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의 일부를 그대로 도용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국내에서 한차례 번역소개됐지만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가 지난달말 미래M&B에서 재출간됐다.

‘프롤레마이우스의 관측 오류’를 담은 부분의 경우 ‘탐욕의 과학자들’과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 내용이나 표현, 글의 진행이 거의 유사하다. 갈릴레오, 뉴턴, 돌턴, 다윈, 멘델 등의 부정행위를 설명하는 총 19쪽에 달하는 내용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그대로 베낀 수준이다. 로버트 훅의 부정행위 사례를 담은 부분 역시 29~30쪽에 걸쳐 그대로 베꼈다. 심지어 민영기 교수가 필자로 돼 있는 ‘펄서 발견에 얽힌 사제 간의 공적 논란’은 15쪽에 걸쳐 주어·서술어·수식어의 흐름이 모두 유사하다.
당사자도 ‘무단도용’에 대해서 시인했다. 민영기 교수는 “다른 공동저자가 원서를 주면서 저작권이 이미 소멸돼 편저로 내자고 했다”며 “책이 출간된 이후 표지에 저자로 돼 있어서 출판사측에 잘못됐다고 항의했다”고 해명했다. 박택규 교수는 “편저라 하더라도 출처 표시를 하지 않은 점은 잘못”이라며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인 일진사의 대응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일진사는 출간된 이후 ‘편저’라는 사실을 필자들로부터 들었으나 곧장 책을 회수하지 않았다. ‘편저’라고만 쓰인 띠지를 만들어 판매를 강행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출판한 미래M&B측은 “책의 일부를 발췌한 것도 아니고 무더기로 베꼈으며 역사연표까지 모두 표절했다”면서 “출처를 표시하든가 번역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07. 03. 03.
P.S. 찾아보니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은 <배신의 과학자들>(겸지사, 2002)이라고 번역된 적이 있다. 저자들이 뒤늦게 '편저'라고 밝혔다지만 그 경우에도 정식으로 발췌에 대한 저작권 위임을 받지 않았다면 위법 아닌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을 판권 없이 편집출판하는 관행에 대해서 잘못을 느끼고 있다”고 한 발언은 특히나 문제적이다. 그러한 표절/도용이 과학계의 흔한 '관행'이라는 증언도 되기 때문이다(어디 과학계뿐이겠는가). 여러모로 뒷맛이 씁쓸하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의 기사들 참조).

표절이나 도용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만 며칠 전에 읽은 한 서평도 뒷맛이 씁쓸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1994)과 프랭크 렌트리키아의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문예출판사, 1994)을 다룬 송승철 교수의 서평 '모더니즘 미학과 근대성의 역학'(<창작과 비평>, 1996년 봄호)이 문제의 서평인데, 나도 렌트리키아의 책은 출간 직후에 지방에서 사서 읽어보고(물론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나는 이후에 원서를 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번역을 개탄하는 편지를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써보낸 기억이 있다. 서평은 말미에서 두 번역서의 실태를 꼬집고 있는데, 특히나 문제가 되는 건 원로 영문학자가 공역자로 참여한 <신비평 이후>. 원서는 워낙에 평판이 좋은 책이지만 한국어로는 읽을 수 없게 돼 있다.
영문학계에서 그냥 쉬쉬하고 넘어간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과문했다. 서평은 직설적으로 오역의 실태에 대해서 질타하고 있다. "<신비평 이후의 비평이론>은 지금까지 내가 검토해본 숱한 번역이론서 가운데 최악의 것이며, 정말 본인들 자신의 번역이라면 비평이론의 수준을 따지기 앞서 역자들의 영어교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게 일단 총론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가관이 된다.

"도대체 번역을 한 후 제대로 교정을 보았는지 의심가는 대목이 한 페이지에 평균 대여섯 군데씩 있다. 예를 들면 책의 첫 페이지에 있는 에피그라프 두 개의 번역(9면)에서부터 오류가 발견되거니와, '감사의 말' 앞부분에 있어야 할 것이 '들어가는 말' 다음으로 옮겨져 있다. 게다가 사전만 제대로 들쳐도 피할 수 있는 오역, 즉 문장의 'whether... not' 'not just' 따위를 거꾸로 해석한 부분(152면)도 부지기수여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기가 오히려 민망하다."
민망한 내용을 조금 옮겨오자면, "데리다를 논하면서 presence와 being을 똑같이 '존재'로 옮겼다든지 generic이 genre의 형용사임을 몰라 '일반적'으로 옮기거나 바흐찐적 술어인 sociolect(집단방언)를 '사회학강의'로 번역한 것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discourse를 줄곧 '논술'로, discoursive를 '산만한'으로, 독일 관념론을 지칭하는 idealistic을 '이상주의적'으로, 더구나 dialect를 '변증법', pragmatist를 '실증주의자'로, fault-line을 '잘못된 선'으로, 심지어 latest를 '마지막'으로 번역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평자로서는 이 번역이 역자들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의 번역을 적당히 추려서 내놓은 것으로 믿고 싶은데, 그렇더라도 역자들의 책임이 면피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역자의 한 사람이 최근 관민합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번역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번역서와 원서는 다행히 박스보관도서가 아닌데 언젠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서가에 악착같이 모셔둔 탓이다('discoursive practice'를 '논술 연습'이라고 번역한 사례도 이 책에 나온다). 다행히 애써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번역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다(기대할 걸 기대해야 하나?). 개인적으론 서평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애꿎은 영문과 대학원생들)의 (한심한) 번역이라고 믿고 싶지만 원로 영문학자께서는 이런 '옮긴이의 말'을 남기셨다.
"이 번역 작업은 학교에서의 강의와 다른 글쓰기 등으로 간간이 오랜 시간 동안 중단되기는 했지만, 약 3년에 걸친 노역(勞役)에 가까운 나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동안 많은 좌절감과 함께 오역에 대한 두려움을 적지 않게 느꼈으나, 우리는 한권의 뜻 깊은 책을 내겠다는 보다 큰 희망과 목적을 위해서 작은 고통이나 두려움은 잊어버리기로 했다."(489쪽)

그리하여 우리가 갖게 된 것이 이 '뜻 깊은' 오역서이다. 무슨 '뜻'인가? 한국 학계에 믿을 만한 원로들은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오역과 표절에 관한 이 오랜 '관행'은 쉽게 근절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부도덕'이 정치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의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근간일지도 모른다는 매트릭스적 깨달음. 이게 과연 우리의 '현실'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