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읽을 만한 책'을 후딱 적어놓으려 한다. 새 학기를 맞아 아이와 찜찔방에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고(가장 저렴한 '가족행사'다), 해야 할 일들의 진도는 빠질 기미가 없어서 제 풀에 지치기도 해서다(언제나 저질체력이 문제다).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추천 리스트를 보니 문학 분야만 아직 업뎃이 안 됐는데, 문학부터 내 맘대로 고른다.
1, 문학
국내 작가들의 신작 소설을 고른다. 무엇보다도 <고래>(문학동네, 2004) 이후에 6년만에 나온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이 눈에 띈다. 여담이지만 2004년에 러시아에서 체류하다가 이듬해 돌아왔을 때 나만 모르던 작가가 천명관이었다. 다들 <고래>를 추천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지만, 게으른 탓에 책만 사놓고 아직 들춰보진 못했다. 영화쪽에 더 주력하던 작가가 문학을 부업 정도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도 독서를 미루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인터뷰기사들을 읽어보니 이젠 문학에 '올인'할 예정이라고. 독자들도 이젠 그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도 좋을 듯싶다. 한 일간지의 리뷰는 이렇게 시작한다.
천명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은 애틋하고 유쾌하다. 애틋하면서 유쾌한 이질적 결합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에 대해 궁극적으로 신뢰하는 작가의 따뜻한 밑바탕과 가면을 벗어던진 진솔한 서술 태도에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어떻게 더 망가질 수도 없을 정도로 마이너의 최극단에 놓인 한심한 형제 자매가 있다. 강간죄를 비롯한 폭력 전과 5범인 큰아들과 영화감독을 한다고 설치다가 완전히 망해 먹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둘째 아들, 바람을 피우다 이혼을 당해 친정으로 쫓겨온 막내딸. 이 3남매가 칠순의 어머니 집으로 기어들어와 모친의 등골을 빼먹는다. 하지만 노모는 단호했다. 서술자인 둘째 아들 오 감독의 진술에 따르면 이 정도는 노모에게 약과인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키우고, 남편을 수발하고, 홀몸이 되어 큰아들 옥바라지로 한 세월을 보내는 과정이 전쟁보다 하등 나을 것도 없었을 터, 전쟁통에 학도병으로 끌려가서도 멀쩡하게 살아돌아왔던 아버지가 승용차에 치여 죽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41쪽) 오 감독의 진술을 계속 따라가자면 그들은 “마이너리그 중의 마이너리그, 인생의 패배자들만 모아놓은” 가족이었다.(세계일보)
편혜영의 <재와 빨강>(창비, 2010)은 엊그제 포스팅을 했으니 넘어가고 오현종의 <거룩한 속물>(뿔, 2010)은 요즘 젊은 세대를 중인공으로 한 세태소설. 사회학쪽에서도 '속물'론이 본격적으로 나오더니 이젠 대놓고 '속물'이다(거룩한!). '21세기 대한민국 속물지형도'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알다시피 알라딘의 문학웹진뿔에 연재됐던 소설이다.
소설가 오현종(37)의 장편 ‘거룩한 속물들’(웅진 뿔)은 속물이 되지 않으면 낙오자가 돼 버리는 우리 사회의 속성을 담은 작품이다. 한마디로 21세기 대한민국 속물지형도다. 초점을 맞춘 대상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발을 내딛는 20대다. ‘속물을 권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여유도 없이 세상으로 내몰리는 안쓰러운 20대. 서울 중상위권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기린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면서도 돈을 펑펑 쓰는 친구들과 어울린다. 가방에 들어있는 화장품의 가격에 따라 인간 등급을 매기는 지은과 부잣집 딸로 명품 옷은 척척 사도 친구들에게 커피 한 잔 사는 법 없는 명이 그들이다. 기린은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A급 짝퉁 가방과 지갑을 샀고, 수입 생수병에 학교 정수기 물을 몰래 받아 들고 다닌다.(국민일보)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필립 판의 <마오의 제국>(말글빛냄, 2010). 지난번에 <윤치호의 협력일기> 대신 한겨레21 서평에서 다룰 뻔했던 책이다(사정상 더 얇은 책을 골랐다). 추천자의 책소개는 이렇다.
저자 필립 판은 대약진운동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건들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을 심층 취재해 이 책을 저술했다. 한때 모택동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베이징대 여학생 린자오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 홀로 맞서다 1968년 감옥에서 사형 당하는데 그녀가 옥중에서 자신의 피로 18만 단어에 이르는 수기를 썼다는 실화는 인간의 양심과 존엄성에 대한 큰 감동을 주었다. 겉으로 중국은 평온해 보이지만 중국 내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이 현재의 경제 규모에 걸맞은 정치체제로 나아갈 것인가의 여부가 중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마오의 그늘'이라고 할 때 아무래도 가장 큰 그늘은 문화대혁명일 텐데, 그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만한 두툼한 책들이 있다는 것 정도만 덧붙인다.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그린비, 2008)과 <80년대 중국과의 대화>(그린비, 2009) 등 '현대 중국의 목소리'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책들은 모두 <마오의 제국>을 부피에서 압도한다. 대국에 대한 나름의 대우인 듯하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김용석의 <메두사의 시선>(푸른숲, 2010)이다.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푸른숲, 2000)이란 대중적인 철학서의 물꼬를 튼 저자가 10년만에 개정판을 내면서 같이 출간한 책이다. 부제는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저자의 문제의식이 '신화, 과학, 철학'에 모아진다는 걸 알게 해준다(물론 분량으로 보아 문제의 윤곽만을 그릴 듯싶다). 추천자의 간단한 소감.
메두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그렇다면,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자의 작업은 무엇인가? 필로소피아, 애지愛知, 철학은 지식을 아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지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식과 지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과학도 신화도 철학적 탐구 대상이 된다. 철학은 과학과 신화가 전제로 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이성의 비판 없이 당연시하지 않는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 2010)과 나란히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그린비, 2010).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 부제이고, 56개 주제에 대해 두 사람씩 대질시키고 있다. 하면 무려 112명의 '철학자'가 (주연 없는) 카메오 출연을 하는 셈인데, 일종의 '철학자 사전'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928쪽이란 두께 자체가 사전류의 두께이기도 하고. 아무려나 저자의 공력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대중적 철학서 쓰기'의 현단계를 보여준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핀란드가 말하는 핀란드 경쟁력 100>(바이북, 2010). 제목 그대로 핀란드인들이 말하는 자국의 다양한 모습과 강점의 소개다.
이 책은 ‘핀란드, 국가경쟁력 세계 1위의 비밀을 말한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국가경쟁력이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국가적 역량의 총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핀란드의 사회적 창안을 구상하고 개발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이 책의 집필에 참여했다. 여성의원 40퍼센트 할당제, 부정부패 척결, 노사정 3자주의 등 ‘국가행정’, 빈곤층의 최저소득 보장을 국민의 사회적 기본권으로 인식하는 ‘사회정책’으로부터 시작하여, 전통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성탄절 길’ 등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핀란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연이어 관련서들이 나오고 있지만 '핀란드''는 이미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남의 떡'이 될지 '남의 돌'이 될지는 두고봐야겠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매튜 메이의 <우아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살림Biz, 2010). '우아함'이 경제학 사전에도 등재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책은 우아함이 상품의 핵심적 특성이라고 말한다고.
사람들은 왜 아이폰에 열광하는가? 이 책의 저자인 메이는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열쇠가 아이폰이 갖는 우아함에 있다고 본다. 우아함이야말로 히트상품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우아한 아이디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책 제목이 바로 그 생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저자는 우아함이 반드시 마케팅의 측면뿐 아니라 우리 삶 전반에 걸쳐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저자가 MBA 출신이고 마케팅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면 경영서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영서라고 말하기에는 우리 삶의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크다. 이런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책 읽는 즐거움을 더 크게 만들어 주고 있다.
표지만 보면 아무래도 나비 모양이 더 큰 원서의 표지가 더 우아해 보인다. <우아함의 탄생>(민음사, 2009)도 이왕이면 나란히 꽂아둠 직한데, 남송 시대 이후 중국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남의 문화사를 다룬 책이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지호, 2010). 이미 '여자'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책을 펴낸 바 있는, '예찬'에 남다른 소질이 있는 저자의 과학 예찬이다. 저자의 사진을 한번 찾아봤다.
이 책은 스스로가 과학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과학 작가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 과학의 중심 분야에서 일하는 수십 명의 과학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과학자들의 위의 질문들에 관한 답을 찾으며 과학자들이 아름답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담아 때론 인터뷰형식으로 때론 이야기 형식으로 다룬 과학 교양서이다. 때때로 동양 사람과 다른 형식의 유머러스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유일하게 생소한 책이다. 밀드레드 프리드먼이 엮은 <게리>(미메시스, 2010). '게리'라고 하면 뭔가 싶은데,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철자는 다르지만 동생의 닉네임도 '게리'이다). 한국어판의 표지가 더 맘에 드는군.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이 책을 잡는 순간 꼭 누구라도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리는 한 마디로 살아있다. 어차피 건축가는 어떤 형태의 건물을 짓는 사람인데,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이 책을 보면 알게 된다. 지난 10여 년간 게리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낸 건축물의 화보와 설계과정 등이 알기 쉽게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의 3분의 2 이상은 편집자인 밀드레드 프리드먼이 게리를 직접 인터뷰해서 정리한 글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책 전체가 게리의 육성으로 이야기를 듣는 듯한 친근함이 있고 쉽다.
흠, 아래 두 작품만 봐도 이 건축가의 개성을 알 수 있겠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서는 로렌스 쇼터의 <옵티미스트>(부키, 2010)이다. 리뷰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낙관하기 여려운 시대에 '옵티미스트'를 자처하는 것도 대단한 '낙관주의'라 할 만하다.
이 기발한 저자는 세상의 낙관주의자들을 찾아 나선다. 그가 한 마디라도 나눈(사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는 ‘당신은 왜 인생을 낙관적으로 보시나요?’라는 질문만 던지기 때문이다.) 명사 목록을 보자.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가수 믹 재거, 존 볼턴 전 유엔미국대사, 노벨문학상 수상자 해럴드 핀터 등 수십 명에 달한다. 물론 찰스 왕세자나 오프라 윈프리처럼 거절당한 경우도 있다. 무명의 저자는 어떻게 클린턴을 만났을까? 영국에서 열린 클린턴 강연회 시작에 앞서 스치듯 만났다. ‘당신은 낙관주의자인가요?’ 클린턴은 강연을 끝내려 할 때 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사람들은 늘 나에게 낙관주의자인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문제가 산적해 있지요. 언제나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쨌든...우리는 결국 이겨내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런저런 자연적, 인공적 재해가 예기찮게, 또 빈번하게 일어나서야 무얼 낙관해야 할지 알기 어렵다. 이번주 한겨레21의 표지 타이틀 '이명박 취임 2주년, 아직 3년이 남았다'는 낙관쪽일까, 비관쪽일까?..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박희권의 <문화적 혼혈인간>(생각의나무, 2010). 이 또한 처음 보는 책이다. 제목만으론 책의 정체를 알 수 없는데, 핵심은 이렇다고 한다.
“고대 로마 1000년 영광은 개방성과 유연함이다. 아테네는 시민권을 극도로 제한한 나머지 아리스토텔레스마저 마케도니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테네 시민이 되지 못했다. 이에 비해 로마는 식민지 사람들도 군복무를 마치면 시민권을 부여했다” “영국인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팔 하나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반면 중동이나 중남미 국가들은 팔의 절반, 즉 팔꿈치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친밀감을 느낀다” 오랜 기간 직업외교관으로 세계무대를 경험한 저자가 젊은이들을 상대로 글로벌 시대의 성공전략을 제시한 책이다. 국제사회의 명품인간은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수혈한 ‘문화적 혼혈인간’이라는 주장이 핵심이다.
일종의 '컬쳐코드' 익히기쯤이 될까? 그런 면에서 읽어볼 만한 책은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학고재, 2010)이지만, 두꺼워서 엄두는 못 내고 있다. <러시아인 발견> 같은 책도 나오면 좋을 텐데...
10. 진보
6월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꾸리에, 2010)이다.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에서 기획한 <리얼 진보>(레디앙, 2010)도 출간됐기에 어제 같이 손에 들었다. <리얼 진보>의 말미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동녘, 2009)에 대한 서평도 수록돼 있는데, 그가 실패한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진보 진영의 화두로 보인다. 카피는 이렇다. "노무현이 실패한 곳에서 진보는 시작된다."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의 진단에 따르면, 향후 20년 안에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바야흐로 긴 장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10. 02. 28.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찜질방에 다녀와서 덧붙인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마음>을 골랐다. 지난 2007년인가 이광수의 <무정>을 다시 읽으면서 언젠가 소세키 읽기를 시도해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떻든 때가 되었다. <마음>이 소세키의 대표작일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문학의 정전이 된 배경에 대해서는 윤상인 교수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문학과지성사, 2009)을 참고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국가'와 '국민'을 환기시키는 언설이 가장 많이 내포된 작품"이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한번쯤 되새겨보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세키에 대해서는 3월에 좀더 자세히 다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