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의 시 비평집이 출간됐다.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2009). 중간에 <시 읽기의 방법>(삶과꿈, 2005)도 있었지만, 짐작엔 <다시 읽는 한국시인>(문학동네, 2002)에 이어지는 것인 듯싶다. 더 거슬로 올라가면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도 있는데, 이런 책들이 유종호 교수의 책으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쪽이다. 일찍부터 문학, 특히 시에서 언어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해온 저자의 시어에 대한 오랜 관심과 애착이 이번 책에도 묻어나는 듯싶다. 아마도 올해 구입할 마지막 비평집.  

한국일보(09. 12. 14) "당대 사회상을 알면 詩 읽기의 묘미 더해"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청록파 박목월(1916~1978) 시인의 대표작인 '윤사월'은 적막한 산골마을에서 꾀꼬리 울음을 듣고 있는 외딴집 눈먼 처녀의 외로움을 정제된 언어로 보여준 작품으로 지금도 애송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왜 일제시대에 흔했던 폐결핵이나 말라리아 환자가 아니라 시각장애인 여성을 시에 등장시켰을까 관심을 기울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유종호(74) 전 연세대 교수는 이 시를 통해 당시 시대상황을 들여다본다. 하사마 분이치(狹間文一)라는 일본인이 1944년 펴낸 <조선의 자연과 생활>에 따르면 해방 직전 전국의 시각장애인은 2만명이고 안과전문개업의는 20명이며 그 중 8명이 서울에 있었다. 그때 안과질환은 유아들에게 가장 흔한 질환이었다. 일상적으로 식량이 부족했던 당시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젖먹이 때 영양부족으로 안질을 앓았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실명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론하는 유씨는 "박목월 시에 나오는 눈 먼 처녀는 틀림없이 유아기 안질의 희생자였을 것"이라며 "그렇게 생각하고 시를 읽으면 공연히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유씨는 새 시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발생)에서 시어에 묻어있는 당대의 사회적ㆍ정치적 함의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시 읽기의 묘미를 맛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시 연구라면 의당 작가론을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시어의 함의를 세밀하게 음미하고 당시의 사회상을 그려보는 이런 독해법은 신선하다. 가령 저자는 1950년대 서정주가 발표했던 '시월유제'의 한 구절 '한동안씩 잊었던 이 엽전(葉錢)선비의 길'에 나온 '엽전선비'라는 시어에 주목한다. 모더니즘 구호가 판치던 당시'엽전'은 구습에 젖어있는 한국인들이 자기비하적인 뜻으로 흔히 쓴 표현인데 신라정신을 내세웠던 시인이 '엽전선비'라는 시어로 자기 신세를 반어적으로 표현했다는 것. 유씨는 이는 비속어이되 비속하지 않고 자조적이되 비굴하지 않은 반속(反俗)적 함의가 짙은, 대체불가능한 시어라며 시의 재미란 이런 묘미 찾기라고 설명한다.

시각을 나타내는 표현도 세월에 따라 크게 변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시작하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은 언어의 변천사를 알아야 그 시간적 배경을 추론할 수 있다.'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라는 구절은 젊은 세대에게 요령부득일 수 있지만, 시 해석의 단서가 된다. 1940~50년대에는'오전 두시'가 흔히 '새로 두시'로 쓰였다. 이런 세세한 것에 대한 음미야말로 시 읽기가 주는 재미라고 유씨는 강조한다.

언어의 시대사적 맥락 파악이나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한 이런 시 읽기는 필수적이지만, 유씨에 따르면 단어 하나하나를 허술히 다루는 병폐는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하다. 가령 정지용의 시 '촉불과 손'에 나오는 '초밤불'이라는 단어의 해석이 그런 예다. 서울대 국문과의 한 교수는 '초밤불'을 '결혼 첫날 밤에 밝히는 불'이라고 해석했는데 유씨는 이를 '저녁에 켜는 불'로 정정한다. 정지용은 이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To the evening star'를 '초밤별에게'로 번역한 바 있으며 정지용 이후에도 조지훈의 '편지'나 임학수의 '코스모스'같은 시에서 '초밤별'이라는 시어가 '저녁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다. 



유씨는 "리얼리즘, 민족문학론 등 거시적 담론이 지배하는 가운데 메시지 중심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는 문학연구 풍토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꼬집으며 "'문명이란 조그마한 차이의 감각'이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말처럼 적어도 시를 이야기할 때는 시어의 뉘앙스 같은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용적인 중국인들이 관료를 뽑는데 시를 시험과목에 넣었던 이유는 시 읽기를 단순히 감상이 아니라 지적 훈련의 과정으로 봤기 때문"이라며 "언어에 대한 세세한 분석과 검토를 통해 독해적 상상력의 세련을 도모하자는 것이 이 책을 낸 이유"라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9.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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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1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속에는 당 시대의 문화가 녹아있죠. 지금에 우리가 그때의 작품을 읽음으로서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 등에 대한 인식들을 넓혀 갈 수 있어 좋습니다. 번역에 있어서도 중역보다는 원본 번역을 더 선호한것 같아요. 원뜻을 최대한 자기방식으로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일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말(문자)에 대한 미시적인 관심은 의미있습니다.

로쟈 2009-12-14 23:3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말을 음미하는 법을 배우는 게 시 교육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ati 2009-12-1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참 어려웠는데, 로쟈님 덕분에(특히 자작시^^) 시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로쟈 2009-12-14 23: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한편 더 옮겨놓았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역사비평사, 2009)을 다루고 있는데, <국민이라는 괴물>(소명출판사, 2002)의 내용도 일부 포함됐다. 니시카와의 책은 <신식민지주의론>(일조작, 2009)도 출간됐는데(언제부턴가 '식민주의'란 말 대신에 '식민지주의'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짐작엔 일본어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주저의 대부분이 소개된 게 아닌가 한다. 일본 학자의 책이 이렇듯 한꺼번에 소개되는 건 드문 일이어서 눈길을 끈다.  

한겨레21(09. 12. 21)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 없다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 이런 제목에 눈이 번쩍 뜨이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게다가 “당신은 계속 ‘국민’이고 싶은가, 아니면 ‘국민’을 그만두고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가?”라는 둔중한 물음까지 표지에는 붙어 있다. 어떤 ‘노하우’일까 궁금해서 책을 손에 들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잘못 골랐다! 저자의 물음은 책의 첫 문장이 아니라 맨 마지막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지는 않다. ‘국민’을 그만두려면 ‘국민문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요지 정도는 감지할 수 있으니까. 사실 책의 초점은 국민이 아니라 바로 그 국민문화에 두어진다.  

‘국민국가론’의 권위자로 알려진 니시카와 나가오의 저작은 이미 여러 권 소개돼 있는데, 쓰인 순서에 따르면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역사비평사)은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과 <국민이라는 괴물>(소명출판사, 2002) 사이에 위치한다. 연작으로 읽어도 좋을 만한 이 저작들의 토대가 되는 건 ‘문명(civilisation)’과 ‘문화(culture)’에 대한 개념사적 통찰이다.  

저자가 잘 정리해놓은 걸 다시 정리하자면, 일단 문명과 문화 모두 유럽에 기원을 둔 개념이다. ‘고대문명’나 ‘고대문화’란 말도 쓰지만, 두 용어는 모두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다. 문명은 아예 신조어이고 원래 ‘경작’을 뜻하던 문화는 현재와 같은 의미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라틴어 어원(civitas)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은 고대 도시국가와 연결된 말로서 도시생활을 모델로 하고, 문화는 농촌생활을 모델로 한다. 농작물과 가축을 기른다는 어원적 의미 덕분에 문화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기른다는 의미의 교양도 뜻하게 됐다. 더불어 문명은 인류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진보를 예찬하는 반면에, 문화는 생활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한다. 물질적 진보를 중요시하는 문명이 미래 지향적이라면, 정신의 우월성을 앞세우는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개념의 전파 양상이 다르다는 점. 문명은 프랑스 및 영국과 미국 등 주로 선진국으로 전파됐고, 문화는 독일을 중심으로 폴란드, 러시아 등 후진국으로 퍼져나갔다. 곧 ‘문명=선진국 모델’, ‘문화=후발국가 모델’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프랑스에서는 문명이 국민적 이데올로기로 정착된다. 프랑스 혁명이 곧 인류의 해방이고 프랑스인은 그러한 진보의 선두에 있다는 자각이 거기엔 반영돼 있다. 반면에 프랑스에 대항하여 성장한 독일의 국민사는 기본적으로 문화사다. 독일의 지식인과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독자적 가치관을 문화라는 말을 통해서 표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근대 이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반복된 전쟁은 한편으론 문명과 문화 사이의 투쟁이란 양상도 갖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문명과 문화 사이에 차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개념은 각각 유럽의 선진국과 후발국의 국익과 가치관에 부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근대 국민국가 형성과정이라는 동일한 모태에서 샴쌍둥이처럼 태어난 둘의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한 문화가 자기의 우월성을 확신하게 되면 문명적 보편주의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보이고, 반대로 패권을 잃어버릴 경우에는 문화주의로 전환하는 양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일본이 패전 이후에 ‘문화국가’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고 니시카와는 지적한다. 야마토 다마시(大禾魂)라는 일본의 정신문화가 미·영의 물질문명에 패했음에도 국가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문화’가 문책받기는커녕 오히려 평화의 동의어로 유행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가이데올로기로서 ‘문화’ 개념은 ‘민족’이나 ‘국체’ 개념과 일체였기 때문에 문화로는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비록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사고가 특정한 방향성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한국문화’는 사정이 다를 수 있을까?  

09. 12. 14.  

P.S. 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니시카와 교수의 인터뷰기사는 http://news.khan.co.kr/kh_thema/khan_art_view.html?artid=200903311748355&code=9601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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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문명은 다를 수 있을까?"로 대입 해봅니다.

로쟈 2009-12-14 23:36   좋아요 0 | URL
'한국문명'까지는 갈길이 멀어보이는데요.^^;
 

두어 번 연재를 옮겨놓은 듯도 싶은데,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연재 '여자들'이 책으로 출간됐다. <여자들>(개마고원, 2009). 기다렸던 책이어서 조만간 손에 들 듯싶다(오늘은 <안나 카레니나>를 챙기느라 여유가 없었다). 찾아보니 리스트를 만들어놓은 적이 없어서(놀랍게도!) 이 참에 고종석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그가 단독으로 낸 책들만 모았다. 


2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여자들-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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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긋기의 어려움-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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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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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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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2월 13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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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13 23:23   좋아요 0 | URL
'고종석의 여자들'중 '마더 테레사 콜카타의 성녀'장과 '히친스'의 '자비를 팔다'에서 '테레사'의 이중성에 대해 비교하여 읽고 싶습니다.

로쟈 2009-12-14 23: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연재를 다 챙겨읽지 않아서 책이 기대가 됩니다. 동네서점엔 오늘도 안 들어왔더군요...

알케 2009-12-16 13:57   좋아요 0 | URL
한때 고종석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 시절부터 동어반복의 느낌도 들고
속살거림이 귀에 서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의 책이 출간되면 책은 삽니다만 목차만 읽고 서가로 갑니다. 전작주의자가 될 수 없는 운명입니다. ^^

로쟈 2009-12-17 08:2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시의 기억>부터는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없어서이긴 하지만...

꼼미 2009-12-18 00:34   좋아요 0 | URL
얼마전 언니에게 한국책들을 좀 부탁해 받았습니다. 그 안에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도 있어서 읽고 있습니다. 개정판이군요. 나온지 한참 됐는데 저자는 자기 생각에 그리 변한게 없다며 그냥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건 짜증과 화입니다. 복거일과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한 견해며, 한자 문제며. 그 예전 한겨레 문학기자로 정말 책을 열심히 읽고 쓰는 듯한 그의 글이 좋아서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서 그에게 기대한 많은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언어학자 (언어에 오랜동안 전문적 관심을 가져온 자)로서 건네주는 응당한 철학도 정당한 판단도 없을뿐 아니라 소양있는 지식인에서 풍기는 감동도 느끼기가 힘드네요. 마지막 <서경별곡>은 참으로 더 황당합니다. 그 잡다한 이야기의 나열이라니. 나이많은 할아버지가 손가는 대로 써내려간 낡은 수필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저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위의 목록처럼 많은 책을 집필해온 또 하나의 '권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이런 글을 쓰고 이런 책을 다시 아무런 수정없이 개정판으로 내었다니 (그 말은 앞으로도 이 책을 사서 읽을 사람들이 꽤 될꺼라는 뜻....), 그저 혼자 씁쓸해할 일만은 아니란 생각도 들고. 뭐, 좀 그렇습니다. 적어도 제가 읽은 "새롭게 단장되어" 개정판으로 재출판된 <감염된 언어>는 그렇다는 말이지요. 갑자기 로쟈님께서는 이 책을 제대로 완독하셨는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로쟈 2009-12-18 08:41   좋아요 0 | URL
완전 실망하셨네요.^^; 저자 자신이 이 책에서 개진된 생각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적었지만 저는 읽을 때(초판으로 읽었습니다) 공감했던 1人이었습니다. 고종석의 자유주의와는 입장을 좀 달리하더라도 재미있었구요. 책에 대한 판단도 취미 판단의 일종이란 걸 요즘 자주 느끼게 됩니다...
 

이번 학기 들어 처음으로 약간 여유로운 휴일을 보냈다. 이런저런 일들과 함께 원고 하나가 밀려 있긴 하지만 네 편을 써야 했던 지난주에 비할 바가 아니고, 무엇보다는 내주가 시험기간이어서 두 과목에 대한 강의준비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이유다. 그래서 모처럼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8)의 한 장을 읽고 있기도 하다(아, 이건 외부 강의준비이기도 하다). 낮잠까지 조금 자고서 동네 도서관에 가 조너선 스펜스의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푸른숲, 2002)과 남경태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역사>(들녘, 2008)를 대출했다. 그러고 보니 <마오쩌둥>의 번역자가 남경태 씨다.  

그리고 동네 대형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잠깐 둘러보고 오는 길에(고종석의 <여자들>이 출간됐다) 손에 든 경향신문에서 <삼국유사>에 얽인 이야기를 닮은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현암사, 2009)에 관한 기사를 흥미롭게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대학생 자유기고가' 한윤형의 대학 총학생회 문제를 다룬 칼럼을 읽고서 엊그제 읽은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칼럼과 나란히 스크랩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진보정치의 딜레마를 고민하게 하는 칼럼들이 아닌가 한다(사적 영역과 정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란 문제).   

경향신문(09. 12. 12) [2030콘서트]‘허수아비’ 대학 총학생회 

대학가에서 가을은 총학생회 선거의 계절이다. 올해는 유난히 총학 선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지인이 많았다. 개표 전 ‘투표함 개봉’과 ‘도청’을 통한 비리 폭로로 파행으로 치달은 서울대 총학 선거를 비롯해 우려스러운 모습이 많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기성 정치권 못잖은 ‘꼬마 정치인’들의 진흙탕 싸움? 어떻게 해도 투표를 하지 않는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 어느 쪽을 택하든 씁쓸함은 남는다. 우스갯소리로 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자기네 정치조직으로 돈이 흘러가고, 비(운동)권이 총학을 잡으면 학생회장과 그 측근들의 주머니로 돈이 흘러간다고 한다. 이 말에 약간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학생의 대표자로서 제 역할을 하는 총학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실정이므로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무심해지고, 그 무심함의 장막 뒤편에서 총학이란 조직에 배정된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한 난장판이 벌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오늘날의 대학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해방구’도 아니고, 진학률 86% 시대의 대학생을 특권층이라 칭하는 것도 부질없다. 대학생의 위상이 낮아지면서 이들을 예비노동자라 부르는 이도 나타났지만, 지금은 이조차 사치스럽다. ‘예비’라는 글자를 떼어내기 위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이제 대학생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고, 다만 자신의 삶이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던져진 2000년대 초반의 운동권 정파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주장해서 학우들의 신망을 얻어 총학을 잡고, 총학을 잡은 이후엔 자기네 정치조직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학생들을 위하는 ‘복지공약’과 제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투쟁’의 이분법 속에서 등록금 문제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설령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총학은 대학 당국에 대해 얼마나 무력한 조직인가? 가장 강경한 정파가 가장 강경하게 투쟁했을 때도 등록금 투쟁은 실패로 끝나곤 했다.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몇몇만 희생양이 되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학 선거가 복마전이 되는 이유는 총학이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할 만큼의 권력은 지니지 못했으되, 선거에서 승리한 몇몇 학생들에겐 충분히 보상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의 조직이 되어버렸기 때문 아닐까?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듯이, ‘학생 없는 학생회’에 대해 얘기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는 ‘꼬마 정치꾼들’과 ‘선거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 대한 규탄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다.

총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학생들이 총학 선거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학생들의 열렬한 참여 없이는 대학 당국이 총학에 더 큰 권력을 배분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다. 이 딜레마 속에서 총학은 대학 당국과 학생들 사이에 어떠한 소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허울 좋은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총학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그것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한윤형 | 대학생·자유기고가)   

경향신문(09. 12. 11) [사유와 성찰]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

우리 사회 진보파 가운데는 개인 삶을 돌보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진보를 위해서는 개인 삶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사적 영역 자체를 부정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돈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한 민주노동당은 소속 국회의원과 보좌관, 중앙당 및 지역조직 상근자 등, 이른바 진보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된 사람들에게 평균 127만3000여원의 월급을 줬다. 국가 예산으로 지급된 국회의원과 보좌관 급여는 당이 환수했다. 이 모든 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받는다”는 논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후 약간의 증액은 있었지만 그 원칙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서 지켜지고 있다.

결과는 어땠을까? 가족을 건사하고 자녀를 교육하는 등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요구나 불만조차 잘 표출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자칫 돈을 밝히는 사람이거나 진보의 대의에 헌신하려는 자세가 안돼 있는 사람으로 비난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균임금 받는 국회의원
그렇다고 진보에 대한 도덕적 헌신은 강해졌을까? 그것도 아니다. 개인 삶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열정은 식고 현실의 압박은 커졌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진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되니, 조직의 인적 역량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저임금 구조에서 고용 안정마저 위협되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유능한 인력이 충원되고 순환되기보다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저임금 구조로 통합·유지하는 조직, 공식적으로는 급여를 올리기 어렵다보니 편법을 통한 소득 보전을 강구해야 하는 진보 아닌 진보정당이 되고 말았다.

공직에 대한 보상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으로 한다는 생각은 파리코뮌의 원칙이었다. 달리 말해 혁명 내지 혁명정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혁명의 원칙으로 실천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이고, 진보정당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평범한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고 실천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개인 삶을 희생하는 진보는 혁명의 원칙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원리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차티스트 운동을 단순히 노동자 참정권 주장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 제기된 요구 가운데 하나는 대표들에게 세비를 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개인 삶을 희생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공직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천박하다며 반대한 사람들은 돈 걱정이 없는 귀족들이었다.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주기 시작했는데, 그래야 정치 참여와 개인 삶이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지켜지는 개인 삶이 튼튼할 때 민주주의가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듯이, 진보의 이름으로도 개인 삶이 안정될 수 있어야 자기 삶을 걸고 진보를 지키려는 의지가 커질 수 있고 또 오래갈 수 있다. 돈이 진보정치를 타락시킬까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저임금을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다.

민주주의 원리와 양립 어려워
돈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이다. 돈을 잘못 다뤄서 인간이 타락하는 것이지 돈 그 자체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돈에 무심하다거나 돈 욕심이 없다는 것을 진보인 양 자랑하거나 돈이 가치를 잃어야 인간성이 되살아난다는 진보의 통념은, 자칫 온정적 엘리트주의나 변형된 귀족주의이거나 현실의 고용·피고용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나타날 때가 많다. 진보를 이유로 개인 삶이 희생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박상훈 |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0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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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1:54   좋아요 0 | URL
학생회든 회사의 노조든 그들이 가야 할 길, 아니 쉽게 말해 자신이 무슨일을 하는지, 무슨일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등록금 동결, (똑같은 맥락인) 임금인상 등이 그들의 하는 일인지...차라리 대학이라는 곳이 취업준비하는 곳이 아닌 학문의 연구,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런 그들이 사회에 나가 어느 곳에 들어가도 일도 잘하고 사람관계도 잘하는 진짜 엘리트임을 증명해보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조에서 임금 4.9%인상을 이끌어내었다고 하면 몇십만원 오른 월급 기뻐하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말입니다. 그 금액이 더 좋은 곳에 쓰일 데는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잠깐 씁쓸해지는 나약한 인간성을 그들이 도리어 느끼게 해주더군요

로쟈 2009-12-13 22:16   좋아요 0 | URL
흔히 '생활정치'라고 하는, 등록금 동결이나 인하 요구도 저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럼에서도 지적됐지만, 문제는 현재의 총학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역량을 안 갖고 있다는 것이고요. 이번의 불미스런 사건들을 보노라면 차라리 총학 자체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저항이지 않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허울 좋은 들러리'를 '정치적 참여'라고 포장하는 건 기만적이죠...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2:27   좋아요 0 | URL
'생활정치'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제가 아쉬운 건 왜 등록금을 낮추어야 하는가 의 원인의 밑바닥에 있는 '인간', '인간다운 삶' 이라는 주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죠. 우리네의 정치처럼 말입니다.

로쟈 2009-12-13 22:30   좋아요 0 | URL
사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대학에서 좋아하는 '수혜자 부담'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이죠.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졸업장을 받아도 취업이 안되는 현실이라면 말이죠.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절반은 후불제로 해야된다고도 생각합니다...

2009-12-1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3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2:54   좋아요 0 | URL
등록금을 내고, 공부를 하고, 과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의학에서든 문학에서든 예술에서든 삶의 원리와 진지한 태도를 배우게 되고, 그래서 더 공부할 수 밖에 없고, 그 후에 졸업장을 받았을때 취업 역시 우등상장처럼 따라오는... 학문의 전당, 성공하는 인재를 만드는 대 학 이 되길...
(굶어가고 있는 아내를 버리고 공부,학습하고도 자신은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아내에겐 악처란 이름을 준) 소크라테스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도록 말입니다.^^

로쟈 2009-12-13 22:58   좋아요 0 | URL
'학문의 전당'이나 '성공하는 인재'는 대학의 평균치와 무관한 게 아닌가 싶어요. 진학률 86%라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대학진학이 '선택'의 의미를 잃었으니까요...

펠릭스 2009-12-13 23:25   좋아요 0 | URL
진보주의자라고 해서 아니면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당사자의 가족이 진보거나 보수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요. 만약 진보주의자의 가족이 돈을 펑펑 쓴다며 세간에 알려지면 그것은 '시칠리아의 암소'격이라 비난 받을 가능성 있습니다.진보든 보수주의자든 그에게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생활 경제권이 있습니다.하지만 부자중에 진보주의자가 있던가요, 아니면 학생(노동)운동권에,,,부유계층은 복지부동하며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로쟈 2009-12-14 23:37   좋아요 0 | URL
그리스 민주정이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homania 2009-12-24 17:42   좋아요 0 | URL
하지만 강남좌파라는 말은 일정부분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12-15 21:42   좋아요 0 | URL
어머 저와 이름이 같은 분이 댓글을 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

로쟈 2009-12-15 23:1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아까 기획회의를 읽던 참이었는데요.^^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용산 묵시록이다.   

경향신문(09. 12. 10) [이대근칼럼]버려야 할 것 - 국격·곡격·국역·구격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격은 소수만이 쓰던 예외적이고 특수한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사용 빈도가 부쩍 늘더니 요즘은 이 걸 빼고는 말을 못할 정도로 대유행이다. G20 정상회의 주최, 외교 강화, 기부, 관광산업, 공적개발지원(ODA) 확대 모두 국격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국격은 국회 의장대 도입, 아프가니스탄 파병, 법질서 확립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부에게는 바람직한 국정의 표상이 다. 정부는 이미 ‘국격 업그레이드’를 위한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운영 중이고 대통령은 내년 부처별 업무보고 때 국격 향상안을 내라는 지시를 했다. 정부의 용산 참사 방치, 인권침해도 국격을 손상한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국격은 이렇게 방어와 공격은 물론 여야가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도 요긴한 만능의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어느 새 이 단어가 풍기는 낯섦과 어색함은 사라지고 ‘국민’이 지켜야 할 새로운 규범이자, 누구나 존중해야 할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 그 덕에 자기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고, 자기 제안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할 때 쓰는 권위 있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남용으로 상투어처럼 되기도 했다.

세련된 포장의 국가주의, 국격
국격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도 하나의 인격체나 다름없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말이다. 따라서 국격은 국가를 다른 어떤 것의 반영물·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유지하고 강화해야 하는 자기 고유의 목적을 지닌 독자적인 실체로 여긴다. 이 유기체적 국가관은 시민을 전체를 위한 일부로 간주하고 자아실현 역시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국가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국가관이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모태신앙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한국에는 이미 국가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태어나서도 잊을까 가족·학교·군대·언론이 끊임없이 환기시켜 줘야 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국격이 빠르게 한국인의 언어습관을 지배하게 된 배경이다. 나라를 잃었던 역사적 기억의 반영이라고 이해해도, 박정희 군사집단의 국가폭력 경험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특별한 정서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국가에 대한 이 낭만주의적 열정은 아직 뜨겁다.

물론 국격이 획일주의의 낡은 가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위원회가 배려·다문화·기여를 국격 향상의 과제에 포함한 점이 그렇듯 성숙한 사회를 위한 성찰도 담고 있다. 문제는 성숙한 사회를 바라는 시민의 욕망조차 국가의 명예·국가 브랜드·국격 향상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박힌 국가주의적 사고이다. 그런 사고는 점차 업그레이드되어 조국 근대화니 국익이니 했던 단순 투박함을 벗고 국격이란 세련된 옷을 입은 채 국가주의를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 담론을 효과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국가(국격)를 위해 무엇을 했나’라고, ‘국민’을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주의를 공고하게 재생산한다. 사실 국격을 국가의 품격이라고 우아하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는 한국인의 가슴을 적시는 주제가 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년 이명박 정부의 목표대로 G20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국격이 높아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아도 시장 만능으로 힘들어진 시민은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국가 개입으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시장과 국가 모두 한 편만 드는 불공정 게임조차 한국인들은 국가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믿고, 오랫동안 잘도 참아 왔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는 없다. 국가는 시민 의사의 총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국가의 목적을 이행하는 ‘국민’이라는 제복을 벗어야 한다. 이 칼럼을 쓰던 중 ‘한글문서’에서 국격에 대해 맞춤법 검사를 해봤더니 ‘철자가 잘못 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나왔다. 국어사전에 없는 신조어였기 때문이다. 대체해야 할 단어가 제시되었는데 곡격·국역·구격 세 가지였다.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 버리자. 국가도 버리고, 국격도 버리자.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나의 삶과 행복을 고민하는 나만을 남겨 놓고 다 버리자.(이대근 논설위원)  



한겨레(09. 12. 12) [삶의창]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2009년 1월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망루에 올라 몸을 떨며 시위를 하던 다섯 사람과 경찰 한 사람이 불에 타서 숨졌다. 사람들은 이를 참사라고 부르지만, 추운 겨울에 그 무리한 철거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나,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을 지닌 사람들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정부는 정부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고, 고위 관료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무마할 계책을 적어 산하기관에 이메일로 보냈으며, 경찰은 거의 동일한 상황을 연출하여 진압훈련을 했다. 그런데 사법부는? 검찰은 시위자들 가운데 불에 타 숨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기소했으며, 판사들은 그들에게 이 참사의 책임을 물어 중형을 선고했다. 물론 행정부가 이들 철거민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는 한 번 빈손으로 참사현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이 참상 앞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인, 소설가, 비평가 192인이 각기 한 줄 선언을 써서 ‘작가선언’을 발표한 것은 지난 6월9일이다. 이 선언은 그달 말에 <이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작가들은 7월부터 용산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시작하고, 각종 매체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하여, 이 릴레이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달 초에 발간된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도 이 진행중인 릴레이 시위와 기고활동의 보고서이다. 시를 쓸 사람은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사람은 산문을 썼다. 그리고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들이 그림을 그렸다. 80년의 광주 이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글과 그림이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이 참사가 잊히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주검이 땅에 묻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아파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09. 12. 12.  

P.S.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칼럼을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에 재수록돼 있다. 같이 수록된 칼럼은 '용산,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60.html)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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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12-12 19:27   좋아요 0 | URL
왠만하면 저기 위에 아저씨 얼굴 좀 가려 주세요. ㅡㅡ' 저 아저씨 얼굴 보면 갑자기 배가 막 아프다는. 예전에 아침밥을 먹다가 신문을 펼쳤는데 저 아저씨 얼굴이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보니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제가 씩씩거리며 포크를 쳐들고 있더라구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 자신의 돌발적인 폭력성에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노 대통령 죽고 얼마 안 있다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저 아저씨 얼굴 되도록 안 보려고 피해 다녀요. ㅡㅡ

로쟈 2009-12-12 20:00   좋아요 0 | URL
블라인드 처리가 안돼 그냥 내렸습니다...

Joule 2009-12-12 22:42   좋아요 0 | URL
친절하신 로쟈 님.

로쟈 2009-12-12 22:47   좋아요 0 | URL
저도 보기 싫은 얼굴이긴 해요.--;

Mephistopheles 2009-12-13 15:28   좋아요 0 | URL
사진을 이미 내리셨는데도 누군지 확실히 아는 1人

로쟈 2009-12-13 20:46   좋아요 0 | URL
뭐 다들 아는 얼굴이긴 해요...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1:42   좋아요 0 | URL
조금은 주제가 다르지만..해결되지 않는 용산참사 문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시위라는 것, 평화 집회라는 것을 할 때 집회자들 내부에도 소위 말해 -튀는- 돌발 행동이나 시위의 본질과 맞지 않는 폭력행위, 혹은 계획하지 않은 사고 등이 일어날 수 있죠 그걸 통제해 주고 질서 있는, 그래서 하려고 했던 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모임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집회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리고 나타나야만 하는 그들의 역할이지요
시위자들이 오히려 그들이 필요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혹시 경찰이 오지 않으면 왜 안오지 하고 두리번거릴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있는 군인, 경찰들 역시 시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무관심한 국민들보다 한발 더,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을 테지요. 이런 생각이 실천되는 사회는 진정 꿈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펠릭스 2009-12-14 10:43   좋아요 0 | URL
'나는 지금 영안실 냉동고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이미 얼어 있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민음사>의 "나는 죽은 몸"을 페러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