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정치학'이나 '제국주의'나 모두 올드해보이는 타이틀이지만,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지금도 시리아에서는 정부군이 시민을 학살하고 있다잖은가). 영어권 좌파의 대명사격인 촘스키와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신작이 이 두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학살의 정치학>(인간사랑, 2011)은 원저가 먼슬리리뷰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에드워드 허먼과 데이비드 페터슨이 지은 책에 촘스키가 서문을 붙였다. 물론 '촘스키 정신'에 충실해 보이는 책이기에 그의 이름을 간판으로 걸어도 어색하지 않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책갈피, 2011)는 '제국주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이론'과 '역사' 두 파트로 돼 있다. 2009년에 나온 책이니까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의 결정판으로 읽어볼 만하다. 두 책에 대한 소개기사를 찾아서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08. 06) 미국이 저지른 학살과 그 하수인 언론

국제법 전문가인 리처드 포크는 ‘개입’이란 미시시피 강과 같다고 했다. 둘 다 북에서 시작해 남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강대국, 특히 미국이 각국에서 벌인 자신의 침략과 학살행위를 어떻게 은폐·축소하고, 적이 저지른 동일한 행위는 어떻게 왜곡·과장했는지를 까발린다. 나아가 이런 불순한 의도를 전파하는 데 “하수인” 노릇을 한 언론을 정조준한다.

이라크, 다르푸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이스라엘, 르완다…. 세계 곳곳의 학살 현장들을 “건설적인 학살(미국이 자행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즉각적 도움이 되는 것)” “자비로운 학살(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것)” “사악하고 가공할 만한 학살(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로 구분한다. 미국이 대학살극들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촉발자이자 집행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미국은 1945년부터 2009년 사이 적어도 29개국에서 “극도로 심각한” 군사적 개입을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들이 보기에 미국은 공격 대상을 악의 화신으로 만들고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제법상 “예외주의”를 설파하며 개입권 남용의 결정체인 “보호책임”을 대중에게 주입했다. 이 같은 정책을 만드는 소위 엘리트들은 뇌물과 위협, 경제제재, 테러, 침공, 점령을 일삼아왔다. 책은 이들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대상으로 뉴스 미디어를 꼬집는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2003년 3월21일까지 이라크를 다룬 70편의 사설에서 ‘유엔헌장’이나 ‘국제법’이란 단어를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분석이 있다. 이 신문은 또 계획된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평론가들만 환영했다고 한다. 저자들은 언론이 여전히 소유주와 광고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제 및 사실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노암 촘스키는 서문에서 이 책으로 “참담”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법정을 꾸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을 처벌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는 침묵하는 게 저자들이 말하는 “학살의 정치학”이다. 간결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다.(고영득 기자)   

레디앙(11. 07. 31) "쓰러뜨리려면 먼저 알아야"

지난 10년 동안 미국이 추진한 세계 정책들을 보면, 우리가 새로운 제국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실인가? 또, ‘제국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고대 로마제국이나 오스만제국, 신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제국 등과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현재의 세계를 제국으로 봐야 하는가 제국주의로 봐야 하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냉전의 해체와 중국의 부상은 국제 정치경제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제 미국의 슈퍼파워는 끝나고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

이런 많은 물음에 대해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천경록 옮김, 책갈피, 20000원)의 저자는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제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들을 두루 평가하고 자신의 제국주의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중요한 정치적ㆍ지적 논쟁에 개입한다.

1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즈음에 레닌ㆍ룩셈부르크ㆍ부하린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경제학자 J. A. 홉슨이 발전시킨 고전적 제국주의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또,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와 국제적인 국가 체제 사이의 관계를 분석한 이론을 개괄하고, 오늘날 제국과 제국주의 문제를 다룬 다른 이론가들(안토니오 네그리, 데이비드 하비, 조반니 아리기, 엘런 메익신스 우드 등)을 비교ㆍ분석하면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한다. 



2부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부터 오늘날의 경제적ㆍ지정학적 경쟁의 구체적 패턴, 즉 미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성장하는 현재의 상황까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역사를 추적한다. 캘리니코스는 또 다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석학 데이비드 하비와 비슷하게 오늘날의 제국주의, 즉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핵심 특징을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결합으로 파악하면서, 이런 관점은 다음과 같은 장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역사적 개방성, 즉 서로 다른 제국주의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유연한 분석틀을 제시한다. 둘째, 경제환원론을 피할 수 있다. 즉, 구체적 상황에서 경제적 결정 요인과 지정학적 결정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가정하면 국가 정책의 형성은 다소간 불확정적인 것이 되고 그러면 이데올로기 같은 다른 요인들의 개입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셋째, 서로 다른 경쟁 형태들 간의 상호 관계를 초점 삼아 제국주의를 분석함으로써, 20세기 초에 제국주의론이 등장한 원래의 문제의식에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점이다. 즉, 20세기 중후반 이후 주로 강대국 대 약소국 관계론으로 전락해 버린 협소한 제3세계주의식 관점을 벗어나서 자본주의 구조 변화로 말미암은 강대국 간 경쟁 형태 변화라는 원래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의 이론과 역사, 현실을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끝 부분에서 캘리니코스는 제국주의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제국을 쓰러뜨리려면 제국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행동의 지침, 사회 변혁의 무기로 이해하는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이 어렵고 복잡한 듯한 이론서를 쓰게 된 이유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말이다. 

11. 08. 07. 

 

P.S. 아직 안 읽어봤지만 같은 주제의 책을 보태어 읽는다면 '촘스키 정치학의 교과서'라는 <정복은 계속된다>(이후, 2007)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동력학'을 부제로 갖고 있는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갈무리, 2010)도 손에 듬직하다. 모두 미국의 침략사와 제국주의적 행태를 맹렬히 비판하며, 특히 <제국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어떤 조건 하에서 그리고 어떤 지정학적 위치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출현하고 확대되는지, 반제국주의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오늘날 새로운 세계를 위한 가능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덧붙여 존 벨라미 포스터의 <벌거벗은 제국주의>(인간사랑, 2008)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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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을 기다리며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민교육'이란 주제도 괜찮아 보인다. 우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아서이다. 다른 저작들도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경향신문(11. 08. 06) 교육, 이익이 아닌 시민을 만들라

책의 원제는 ‘Not For Profit’이다. 그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 누스바움(64)이 강조하는 핵심은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세계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주목하는 교육의 목적이다. 그는 오늘날의 교육이 “다른 문화권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감소시키며, 전 지구적인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능력을 오히려 손상시킨다”고 진단하면서 “교육을 국민총생산의 도구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저항할 것”을 주문한다. 교육의 목적을 ‘이익’이 아닌 ‘민주주의’로 환원하자는 얘기다.

이러한 주장에는 ‘위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저자가 보기에 “교육의 목적이 마치 경제성장인 양 행동하고 있는 사태”는 이제 세계적인 흐름이다. 저자는 주로 미국과 인도의 사례를 들고 있지만,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이로 인해 세계의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질 수 있으며, 시민정신의 기초가 흔들리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책의 곳곳에 깔려 있다.

저자가 열정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의 부활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발상지였던 유럽에서조차 상황은 비관적이다. “유럽의 인문학 학과들은 미국의 인문학 학과들이 그러하듯이… 이윤창출에의 기여도가 보다 뚜렷한 다른 학과들에 합병되기 십상이다. 합병되고 만 학과는 이윤창출에 가깝거나 그렇게 보이도록 자체 요소들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를테면 철학과가 정치과학과에 합병되는 경우, 플라톤 연구나 비판적 사색의 기술,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 따위가 아니라 기업윤리 같은 것들을 강요받는다. 오늘날의 유행어는 바로 ‘효과’이며, 그것이 명확하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 경제적 효과다.”

그것은 “유능한 기술·비즈니스 엘리트들을 양산해 GNP를 상승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불평등을 무시하는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도덕적 둔감성”을 키운다. 아울러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적 적대 프로젝트”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예컨대 “기괴하고 거대한 ‘문명의 충돌’에 자신이 참여하는 사태를 기분좋게 여기게” 하며, “세계의 ‘다른 곳’에서 온 ‘나쁜 놈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게 한다.

저자는 잘못된 교육이 결국 “악독한 사유”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인문학과 예술교육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명령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세계에서 불현듯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한 인문학과 예술이야말로 “존경과 공감을 받을 만한 자신의 생각을 지닌 채, 타인을 전인적 인격체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이성적이며 공감에 바탕한 논쟁을 위해 공포와 의심을 극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들을 창조”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오늘날의 교육에서 중요한 교수법으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지혜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보여주는 열정적 상호작용,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이 강조하는 주체적으로 삶을 해결하는 의지와 타인과의 동등한 삶의 가치, 페스탈로치가 실천했던 공감과 사랑의 교육, 독일 교육가 프뢰벨이 시도한 놀이를 통한 교육, 미국의 현대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가 제창한 경험으로서의 교육 등에 주목한다. 인도의 타고르가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수용하는 교육을 실천하려고 참여형 학교를 설립했던 사실도 떠올린다. 이 모두가 오늘날 유용하다는 것이다. 법철학, 정치철학, 고전학, 연극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인문주의자인 저자는 현재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08. 07. 

  

P.S. 누스바움에 관해서는 예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마사 너스봄'이란 저자명으로 나온 편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삼인, 2003)이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도 꼽을 수 있겠다. 원제는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그리고 교육 문제를 다룬 책들에 대한 가이드로는 '앎과 삶' 시리즈로 나온 <교육>(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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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익을 위한 교육 VS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20 20:50 
    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4호)에 실은 서평은 옮겨놓는다. 제안을 받고 인문서평을 격주로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추석 연휴 첫날에 독서실에 가서읽은 책이다. 참고로 같이 읽은 건 곽준혁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한길사, 2010)에 수록된 인터뷰이다. 이 책에선 '마사 너스바움'이라고 표기돼 있다. 서평을 쓰고 나서 <인간성 함양(Cultivati

얼마전에 사두고 아직 손에 들지 못한 책은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 2011)이다. '위기의 지구화 시대 청(소)년이 사는 법'이 부제. 자칭 '잉여세대'의 하위문화를 다룬 논문들도 포함돼 있는데, 그중 '병맛 웹툰'을 분석한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는 제목만으로도 눈길을 끈다(하지만 나는 '병맛 웹툰'이란 말도 처음 들어봤다. 요즘 청(소)년 세대에 무관심한가 보다). 요지를 전해주는 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1. 08. 05) '병맛’ 웹툰…‘잉여’ 세대의 발칙한 반전

경제적으로 ‘낀 세대’인 요즘 젊은 세대를 말하는 ‘88만원 세대’를 비롯해 갖가지 세대론이 나온다. 그러나 한 세대의 정체성과 특징을 규정하는 세대론의 고질적인 약점은 ‘대표성’이다. 과연 청년 세대의 정체성을 하나의 표현으로 묶을 수 있는 걸까? 또 그렇게 규정하는 가장 적절한 접근법은 무엇인가? 



문화연구자인 김수환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는 최근 인터넷 만화인 ‘웹툰’으로 요즘 젊은 세대를 읽어내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김 교수는 최근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이란 책에서 ‘너희가 병맛을 아느냐?-웰컴 투 더 <이말년 월드>’란 논문을 싣고 ‘병맛 웹툰’을 우리 청년 세대를 들여다보는 틀로 활용했다. 웹툰을 20대 문화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문화현상을 넘어 20대가 고유하게 장악하고 있는 ‘매체’로 보고 이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간 작업이다.

김 교수는 “21세기 한국의 청년층에게 웹은 단순한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과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성장하며 때론 상실되거나 소멸되기도 하는 공간”이라고 분석했다.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청년층의 정신적, 문화적 멘탈리티에 심원한 영향력을 미치는 실존적 토대라는 것이다. 특히 웹툰은 20대들과 함께 태어나고 성장하고 유통되는 장르라는 점에서, 매체로서의 속성을 지닌다고 봤다. 1990년대 청년 세대가 영화를 자기 세대 고유의 특징을 담은 매체로서 활용했던 것처럼, 오늘날 20대의 지배적인 매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웹툰이란 해석이다.

김 교수는 웹툰 중에서도 젊은층들의 인기가 높은 이말년 작가의 <이말년 월드>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병맛’이란 성격에 주목했다. 인터넷 신조어인 병맛은 ‘병신 같은 맛’의 준말로 흔히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 대충 그린 그림체, 말도 안 되는 전개 등이 병맛 웹툰의 특징이며,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말년 월드>는 병맛 웹툰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승객 한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요금통에 담배를 넣는 바람에 버스에 불이 붙자 갑자기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고 하고, 운전기사는 “그래야 내 손님이지” 맞장구를 치면서 버스를 몰고 ‘명박산성’으로 돌진하는 식이다.

이 ‘병맛’ 코드에 대해 많은 이들은 청년층의 ‘잉여’ 의식을 주목했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패배자, 곧 잉여적 존재로 인식하는 자기비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는 ‘병맛=잉여=자기비하’라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 그 속에 담긴 ‘유희적 공통코드’를 짚어낸다. <이말년 월드> 속에는 일정 시간 이상을 웹에서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인터넷 서브컬처 코드’들에 대한 패러디들이 난무하고, 독자들은 이를 발견하고 해독한다. 곧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도 알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잉여짓’을 작가인 너 또한 하고 있다는 모종의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토대로 김 교수는 “잉여들의 ‘문화적 플랫폼’이 가시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공감대가 새로운 주체성을 일궈낼 일종의 ‘연대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는다. 또한 병맛 웹툰이 보여주는 냉소적인 현실인식과 유희적 코드의 결합에서,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세속화’ 전략을 읽어낸다. 아감벤은 세속화라는 말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가 아닌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수동적 저항 태도로 지배권력의 문법을 무화(無化)시키는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말년 월드>가 이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병맛 웹툰 말고도 다양한 장르의 웹툰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단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김 교수는 “아직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은 20대의 ‘최전선’으로서 웹툰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기존 세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20대 스스로의 목소리도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최원형기자) 

11. 08. 05.   

P.S. 논문의 필자인 김수환 교수는 러시아문학자로 유리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전공했다. 로트만적 관점에서 읽은 '병맛 웹툰'쯤 될까? 그의 대중문화 분석은 주로 러시아 상류사회의 문화를 분석한 로트만의 작업과 대비돼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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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8-05 12:32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서울대 행정관 점거 농성 때도 정문에 '엉덩국 만화'의 유행어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가 있어서 웃겼어요.ㅋㅋㅋ 그런데 80년 대 운동권들은 '숭고'에 사로잡힌 반면 요즘은 스스로를 저질, 잉여로 자처하는 세대라서 그러한 의식의 차이가 나중엔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궁금하더군요.

로쟈 2011-08-05 22:59   좋아요 0 | URL
'나중'이라면 한 20년 후가 되나요?^^

미지 2011-08-05 23:24   좋아요 0 | URL
와~ 얼마 전 김수환 교수 논문 하나 읽고 감동해서 이분에 대해 계속 궁금했는데 반가운 포스팅입니다. 보통 학술지 논문은 출판용 도서에서의 문체와 괴리가 있는데 이분 논문은 짜임과 문체가 생생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져서 정말 놀라웠거든요. 충격 받고 반성 좀 하다 보니 논문 쓰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만... 사이버공간은 청년뿐 아니라 일부 장년`노년층에게도 실존적 공간이 된 것 같습니다.^^
많이 더운데 건강하세요~!

로쟈 2011-08-05 23:37   좋아요 0 | URL
논문 독후감은 언제 연락이 닿으면 전하겠습니다.^^

2011-08-08 0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8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8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11-08-08 19:37   좋아요 0 | URL
네, 양해해주셔서 감사. 잘진행되시길 바래요.^^

미지 2011-08-10 00:02   좋아요 0 | URL
완전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대학에 들렀다가 들고온 책의 하나는 격월간 북매거진 '텍스트'(6월호)다(짝수달에 나오는 건가?). '책의 겉과 속'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보다 먼저 들춰보게 된 건 '부자연'이란 테마 서평. 책 속의 한 구절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기후변화라는 유령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시절이므로, 이 자연의 변화는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위적이며 인공적인 작업의 결과이다." 그런 문제의식하에 여섯 권의 책에 대한 리뷰를 실었다. 최근에 나온 책 두어 권을 더 얹어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지구의 노래- 생태주의 세계관이 찾은 새로운 과학 문명 패러다임
스테판 하딩 지음, 박혜숙 옮김 / 현암사 / 201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1년 08월 03일에 저장
절판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7년 8월
18,500원 → 16,650원(10%할인) / 마일리지 920원(5% 적립)
2011년 08월 04일에 저장
구판절판
긴 여름의 끝- 지구에게 문명과 인류의 생존에 대해 묻다
다이앤 듀마노스키 지음, 황성원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11년 08월 03일에 저장
절판

우리는 미래를 훔쳐 쓰고 있다
레스터 브라운 지음, 이종욱 옮김 / 도요새 / 2011년 3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1년 08월 03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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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hema 2011-08-03 23:24   좋아요 0 | URL
텍스트가 격월간으로 나오긴 하나요? 거의 무크지 같아서요. 6월호가 통권 몇호인가요? 저는 작년 9월에 나온 46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 이후에 책이 발행된 적이 있는지 궁금해서요.

로쟈 2011-08-03 23:43   좋아요 0 | URL
47호네요.^^;

2011-08-05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5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5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5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6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6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6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7 2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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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첨민주주의와 데모크라시 나우!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낮에 쓴 칼럼인데,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 2011)의 문제의식을 풀어놓고 싶었다. 같이 참고한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 

  

경향신문(11. 08. 02) [문화와 세상]엘리트주의 청산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진단하고 비판함으로써 소위 ‘강준만 한국학’이란 걸 세워온 강준만 교수가 최근 <강남좌파>란 책을 한 권 더 얹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하건 ‘정치의 이권화’와 ‘승자 독식주의’를 없애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할 만한 저자의 발언인 만큼 정치판의 진보와 보수를 모두 겨냥하고 있는 그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봄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주장이므로 먼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부터 정의하는 게 좋겠다. 한국 실업의 역사를 다룬 책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에서 강 교수는 “정치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다”라고 답했다. 어느 정치학 개론서에서도 찾기 어려울 법한 ‘독창적인’ 정의이지만 우리가 피부로 접하는 현실을 포착하고 있기에 부인할 수도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과 공공영역의 ‘사유화’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게 한국정치 아니던가. 권력자와의 연고·정실에 따른 ‘낙하산 인사’가 횡행하고, ‘보은인사’ ‘회전문인사’가 남발되는 것 또한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간혹 여론의 비판이 먹힐 때도 있었지만, 몰염치하게 밀어붙이는 정권에서는 별무효과였다. 

문제는 이것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그러니 인물을 바꾼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법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상수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은 엘리트주의다. 정치의 경우라면 좌우파를 막론하고 정치 엘리트들의 전담 영역으로 고착화돼 있다는 것이다. 정권교체가 ‘엘리트 순환’으로 귀결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유권자는 고작해야 ‘밥그릇 싸움’의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좌우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라고 강 교수는 말한다. 그럼 무엇인가.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강남좌파’란 말은 이러한 투쟁 양상을 심각한 이념투쟁으로 포장할 우려가 있다는 게 강 교수의 염려이고, ‘강남’에 비하면 ‘좌파’는 부수적이며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란 것이 그의 견해다.

과연 우리는 엘리트주의를 청산할 수 있을까. 강준만 교수의 제안은 아니지만 추첨민주주의 같은 대안을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임에도 미국 하원의 경우엔 변호사의 비율이 40%가 넘고, 우리도 법조인의 비율이 20% 이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에 의한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제대로 반영한다면 그게 오히려 놀랄 일이다.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즉 모든 국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라고 우리가 ‘정말로’ 믿는다면, 인구 비율에 따른 추첨에 의해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가령 인구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왜 우리는 국회의원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우지 못하는 것인가. 여성은 정치적으로 열등해서인가. 겉으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믿어서인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고 진나라 말기 농민반란군을 이끈 진승은 물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11. 08. 01.  

P.S.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라고 적었지만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라면 단연코 "따로 있다" 쪽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인민이 최대한 참여해서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라는 고전적 민주주의 이념을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이상이라고 비판했다."(<강남좌파>, 33쪽) 강준만 교수는 그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은 일반인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수준의 합리성을 요구하기에 비현실적이며, 일반인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전적으로 현실적이라고 인식하는데, 정치는 이 범위 밖에 있다는 말이다. 그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지나치면 사회 안정과 자유주의적 가치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방법'일 뿐이며, "민주주의는 정치인에 의한 지배"라고 본 슘페터의 민주주의론은 정치에 대한 경박하고 냉소적인 견해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슘페터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걸 알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경박하고 냉소적이라고 반박했다. 

요는 막연한 '민주주의 만세'에서 벗어나 '인민에 의한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정치인에 의한 지배'로서의 민주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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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0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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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0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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