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전문지 공간(52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매클래치의 <걸작의 공간>(마음산책, 2011)을 거리로 삼았다. 작가들의 집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래서 조심스레 책장을 넘겨야 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책이었다. 

    

공간(11년 9월호) 걸작의 공간

문학의 거장들은 어떤 집에서 살면서 글을 썼을까. ‘작가의 집’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집’보다는 ‘작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들의 사색과 일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작이 이루어진 공간에 대한 관심이다. 시인이자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인 J. A. 매클래치의 <걸작의 공간>은 미국 문학사를 수놓은 대표적인 작가들의 집에 대한 ‘방문기’다. 원제는 ‘미국 작가들의 집(American Writers at Home)’이고, 번역본에는 ‘작가의 집에 대한 인간적인 기록’이란 부제가 붙었다. 화보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풍부한 사진자료들이 이 기록에 실감을 부여한다.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 ‘오차드 하우스’에서 시작해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의 ‘월트 휘트먼 하우스’까지 둘러보는 ‘미국 작가들의 집’ 방문기에서 저자가 특별히 방점을 찍는 건 ‘미국’이다. “미국은 항상 은둔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고립된 사람들의 나라”였다는 생각에서다. 미국 작가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기에 그런 운명에서 비껴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 스스로는 “끊임없이 들썩이는 기복이 심한 나라,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삶을 영위하고 무엇보다 일을 하는 장소로서 자기들의 집을 어디에, 무슨 이유로, 또 어떤 방식으로 지었는지 알려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집은 미국적 삶과 창작이 서로를 비춰주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안내하는 작가의 집은 21곳인데, 어떤 차례가 있는 건 아니다. 그의 걸음을 따라가는 독자도 마찬가지여서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좋아하는 작가의 집부터 먼저 둘러볼 수도 있고, 새러 오언 주잇(Sarah Orne Jewett)이나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처럼 국내 독자들에겐 생소한 이들의 집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무작정 찾아가볼 수도 있다. 일단 발견하게 되는 것은 공통점이다. 책상이 놓여 있는 서재와 거실, 그리고 침실 등 예상할 수 있는 공간들이 방문객 독자를 맞이한다. 허먼 멜빌의 책상에 붙은 설명처럼 “어떤 작가의 집이든 중심에는 책상이 있다. 장식적이든 평범하든, 책상과 그것을 둘러싼 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아려한 아이디어나 마무리되지 못한 문단, 어른거리는 시의 연이 되고, 어쩌면 이미 출간된 책들을 가까이 둔 고요한 책장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책상들에서 <모비딕>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8월의 빛> 등이 쓰였다고 하면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두가 명작의 산실이란 점에선 공통적이긴 하지만 작가의 집은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 개성은 그 주인의 개성을 닮은 것이다.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의 헤밍웨이는 종군기자로도 맹활약을 했던 만큼 전선의 참호도 창작의 공간으로 떠올리기 쉽지만 그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같은 대표작은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서 쓰였다.  이 저택은 넓은 터에 스페인 식민지 양식으로 지어졌다. 헤밍웨이는 간결하고 건조한 스타일의 문장을 구사했지만 그의 집은 녹음이 무성하고 야자수가 우거졌다.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사고도 치고 폭음을 했지만 헤밍웨이는 ‘훈련된 작가’였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매일 아침 8시에 책상에 앉아서 오전 내내 글을 썼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은 불안정해서 네 차례나 결혼하고 1954년 노벨상 수락연설에서 “글쓰기는, 기껏 잘해야 고독한 삶이다”라고 말한 작가가 헤밍웨이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집으로는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의 저택이 손꼽힌다. “나는 평범한 미국인이 아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미국인이다.”라고 말한 트웨인은 ‘증기선과 뻐꾸기시계 중간쯤의 모습’을 한 이 집을 가장 아꼈다. 3층에 있는 서재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어서 트웨인은 즐겨 게임을 하면서 아이디어와 플롯을 가다듬었다. 그는 아침을 거나하게 먹고 오전 11시경에 서재로 올라가서 저녁때까지 온종일 일하고 그렇게 쓴 작품을 가족들에게 읽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만년은 불행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재정적으로 파산한 상태에서 가장 아끼던 딸을 척수막염으로 잃은 그는 충격과 비탄에 빠졌고 하트포드의 집도 마침내는 처분했다. 트웨인은 “유머의 은밀한 근원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고 말했다.      

가장 슬픈 인생을 산 작가로는 허먼 멜빌도 뒤지지 않는다. 그가 산 집은 매사추세츠의 피츠필드에 있다. 자신이 ‘애로헤드(화살촉)’이라고 이름붙인 이 집에서 멜빌은 아침 8시에 일어나 헛간으로 가서 암소에게 호박 한두 개를 썰어주고 소가 고결하게 턱을 움직이며 먹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 작업실로 가서 일을 했다. 그는 거대한 그레이록산의 고래 같은 형태를 창문을 통해 바라보며 <모비딕>을 완성한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둘의 일이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고작 556.37달러였고, 이후에 결국 작가로서의 삶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해 일당 4달러의 세관원으로 근무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의 부고란에는 “전에 작가였던 인물” ‘헨리 멜빌’이 죽었다고 짤막하게 언급됐다.

작가들의 집이 대개 시골에 있다는 점이 혹 눈에 띌지 모르겠다. 창작의 공간으로서 번잡한 도시보다는 조용한 시골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도시에 살았던 작가들의 집이 도시 재개발이나 새로운 집주인의 냉대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일례로 <분노의 포도>의 작가 스타인벡의 집이라는 얘기를 듣고 새 주인은 ‘그래서요?’라고 말했다 한다. 책을 덮으며 한국 작가들의 경우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마구잡이 개발로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 목록에 ‘걸작의 공간’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1.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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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문학동네, 2011)이 출간됐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이주의 문학서'로 충분히 꼽을 만하다.   

  

한국일보(11. 09. 03) 환상·현실 넘나들며 풀어낸 인도 현대사

인도 현대사를 역동적으로 펼쳐내는 <한밤의 아이들>은 20세기 영연방권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소설이다. 인도 출신의 살만 루슈디(64)가 1981년에 출간한 이 소설은 그 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았고, 1993년에는 부커상 제정 25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2008년에는 부커상 제정 40년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됐다.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에서 계속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얘기다. 198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됐으나 절판된 것을 이번에 다시 번역해 냈다. 



소설은 1947년 인도가 독립하는 하던 날인 8월 15일 0시 정각에 태어나서 신생 독립국 인도의 운명과 함께 하게 된 살림 시나이의 서른 해를 그린 작품. 신화와 역사,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 며 지극적 개인적 시각에서 인도 현대사를 풀어내는데, 이 작품만큼 현대 인도에 대해 폭 넓고 역동적인 서사를 들려주는 소설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설은 서른 살인 살림이 매일 밤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연인인 파드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인도가 독립하던 날 0시에서 1시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살림을 포함해 1,001명으로 '한밤의 아이들'로 불린다. 이들은 텔레파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미모, 시간 여행을 하거나 성별을 마음대로 바꾸는 능력 등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는데 그들만의 의회를 조직해서 인도의 미래를 열기로 기획하지만 서로간의 갈등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이후 살림은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동-서 파키스탄 전쟁에 참전하며 인디라 간디가 선포한 비상사태 중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는 등 현대사의 굴곡을 겪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 파드마는 독자를 대신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의심을 나타내거나 역사적 사실을 점검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한다. 



루슈디는 다양한 인도 신화를 활용하고 기발한 언어 유희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무거운 역사적 사건을 때로 코믹하고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숨은 의도는 살림과 '한밤의 아이들'의 능력을 지구표면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이후 인도에서 '루슈디의 아이들'이란 신진 작가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송용창기자) 

11. 09. 03. 

 

P.S. 루슈디의 또다른 대표작 <악마의 시>(문학세계사)도 오랫동안 품절상태였다가 작년에 다시 나왔다. 이번 가을엔 루슈디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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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보선과 맞물려 일찌감치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다. 어제는 안철수 교수가 시장 선거 출마를 고려중이란 기사가 정치면 톱뉴스였다. 그런 즈음이라 이주에 나온 책 가운데, 손호철 교수의 <현대 한국정치>(이매진, 2011),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 2000년대 편>(인물과사상사, 2011)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앞으로 어떤 시대를 살 것인지 생각해볼 '의무'가 있다.   

  

한국일보(11. 09. 03) 진보의 두 시각으로 바라 본 갈등의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는 '압축 성장'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하는 경제적 찬사의 한편에서 끊임없이 다투고 대립하는, 뺏고 빼앗기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역사였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중심에 두는 진보의 시각으로 일관되게 분석해온 손호철 서강대 교수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이름난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한국 현대사 책이 나란히 출간됐다.

손 교수가 자신의 '한국정치 연구 종합판'이라고 소개하는 <현대 한국정치>(이매진 발행)는 이미 냈던 <현대 한국정치-이론과 역사> <해방 60년의 한국정치>를 합치고, 2006년 이후 쓴 노무현 이명박 정부 관련 논문을 더해 무려 900쪽에 가까운 단행본 한 권으로 만든 책이다. 해방 이후 정치체제 분석에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진보연합정치론까지 20여 년에 걸쳐 '민중사관이라고 부르는 진보적 시각에 기초해' 쓴 글들을 모았다.

옛 논문들이지만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해방 공간의 쟁점을 살핀 글들이나, 1950, 60년대 조봉암과 박정희의 대결 속에서 극우반공ㆍ개발독재체제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존재했던 진보적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내려는 노력들은 여전히 눈길을 끈다. '자학사관'이라는 보수세력의 비난의 표적이 되면서도 그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 드물게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논지를 일관되게 펴고 있다.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평가하고 향후 진보진영의 미래를 짚는 논문들은 지금 현실 정치 속에 살아 있는 글들이다. 손 교수는 두 정권의 민주화 업적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정권에 대한 보수의 '좌파' 딱지 붙이기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서 사회양극화를 불러온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다. 같은 맥락에서 내년 총선ㆍ대선을 앞두고 진보세력의 '선 진보대연합, 후 조건부 민주대연합'을 주문하고 있다. 

 



강 교수는 시리즈로 내고 있는 <한국 현대사 산책>의 '2000년대 편'(인물과사상사 발행)을 노무현 시대에 초점을 맞춰 5권으로 묶었다. 194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내온 기존 시리즈 중 권수가 가장 많다. 동시대 이야기라서 그가 늘 저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언론 자료가 풍부하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만큼 이 시기가 파란만장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등 모든 이념적, 정치적 경계를 가로 질러 모든 시각을 다 소개하는 기록에 무게를' 둔다는 원칙에 따라 강 교수가 훑어 내려간 지난 10년의 한국 현대사는, 우리 모두가 불과 얼마 전 겪어 낸 사건들인데도 마치 드라마를 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흥미롭다. 9ㆍ11 테러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는 코드를 찾아낸다. '역사는 룸살롱에서 이뤄지는가'(룸살롱 접대 비리) '영어가 권력이다'(영어 교육 문제)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명박 논쟁)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종횡무진하며 노무현 이명박 시대의 총체적인 한국 사회상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강 교수는 '우리 안에는 노무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명박도 있'고 그 '둘은 늘 충돌한다'고 했다. 그 충돌이 어느 때보나 잦았던 2000년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열정에서 냉정으로'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길게 가는 건 냉정이라고 했다. 냉정의 실체가 뭐냐고? '꿈 없는 생존경쟁의 시대'라고 그는 답한다.(김범수기자) 

11.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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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4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법가와 전체주의의 기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부터인가 화요일 연재에서 금요일 연재로 바뀌었다. 점심때까지 아이템을 놓고 고심하다가 '난세의 후흑학'에 대해 쓰기로 하고 서두로 '법가' 얘기를 꺼냈는데, 그걸로 그냥 분량이 차버렸다. 후흑학 얘기는 꼼수로 아껴두기로 했다.  

   

경향신문(11. 09. 02) [문화와 세상]승승장구하는 ‘법가들’

중국 전국시대에 나온 법가사상은 알다시피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법가에 근거한 가혹한 통치가 시황제 사후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고 뒤이은 한나라 무제는 유가사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다. ‘냉혹한 법가’ 대신에 ‘부드러운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법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저자 정위안 푸는 중국에서 관이 주도한 정통 유교가 실상은 정통 유가의 수사법을 법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혼합물이었다고 말한다. 겉은 유가이지만 속은 법가라는 의미의 ‘외유내법’이 그 결과물이다.

법가의 목적은 군주와 정부가 백성의 사회생활 거의 모든 부분을 무제한의 권력으로 통제하는 사회질서의 구축이었다. 법가에 따르면 백성은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가축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법가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 천지는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도덕경)는 도가의 통찰을 더욱 확장한다. 군주에게 백성은 가축이자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법가는 군주의 이익이 곧 ‘공익’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최고 지배자로서 군주는 ‘공공’을 대표하기에 군주 개인의 이익이 곧 ‘공공의 이익’과 같다.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지키고 무지한 백성의 ‘사적 이익’을 막는 것이 법의 중요한 역할이다. 법가가 주장하는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일 따름이다.

정위안 푸는 중국 정치에서 법가의 중요성이 마키아벨리가 서양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법가의 요체는 마오쩌둥에 의해서도 계승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법가라는 것이다. 정치권력의 장악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법가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법가적 전통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남의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 같진 않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혹 민주주의란 허울을 앞세운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교적 국가체제가 민주공화국 체제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권력자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는 법가적 관점이 폐기된 것 같지 않다. 요즘엔 그 권력이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이원화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군주, 곧 권력자를 제외하곤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법가의 평등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법가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상충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상대적 법치도 다 포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은 과거의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가. 제물로 귀하게 쓰이다가 제사가 끝나면 버려지는 지푸라기 개처럼, 선거철에만 귀한 대접을 받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가축’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사실 조작적인 여론몰이에 쉽게 휩쓸리는 ‘대중심리’는 법가의 육질 좋은 먹잇감이다. 공권력의 남용과 편의적 법적용에 앞장서며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법가들’ 말이다. 어쩌면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롯한 고비용의 교육체계 배후에도 백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무지한 채로 놔두어야 한다는 법가의 가르침이 숨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백성이 유순하고 무지해야, 군주는 세속의 모든 쾌락을 즐기면서 천하를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게 법가의 생각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건 말이 그렇다는 얘기인가

11. 09. 01. 

P.S.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가 2009년 용산사태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가를 다시 되묻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란 말인가? 왜 형법만 더 강화되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저자의 주장대로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에는 법가의 잔재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는데도 국내에는 이를 분석한 책이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11쪽)  

'법가적 전제정치'를 '민주주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외피를 쓴 '법가적 법치주의'라면 어떨까. 현재의 공권력이 휘두르는 전횡적 법치주의를 우리의 민주주의는 견제할 수 있을까. '사법개혁' '검찰개혁'이 구호로만 남아있는 현실은 역자가 희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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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우껴 2011-09-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닌가요?

댓글들에서 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이거 본의 아니게 결례했네요..^^;

로쟈 2011-09-03 09:20   좋아요 0 | URL
댓글에서 보셨을 수는 있겠는데, 아무튼 제가 쓴 기억은 없습니다.^^;
 

이달에 '독서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양천도서관에서 3회에 걸쳐 '사랑에 대한 세계명작 읽기' 강좌를 진행한다. 일정은 월요일 오전 10:00-12:00이며 커리로 고른 작품은 러시아 작가 3인의 사랑에 관한 소설들이다. 그래서 애초에 내가 제안한 강좌 타이틀은 '러시아식 사랑이야기'였다. 무료강좌이므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 9월 5일_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2. 9월 19일_ 도스토예프스키의 <영원한 남편>  

 

3. 9월 26일_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11. 0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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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9-0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들을 보면 러시아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들어나는데 몇년간 러시아에 계신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요즘 젊은 러시아인들은 영적으로 너무 타락했다(이분 독실한 신자에요)고 하네요.아무래도 책속의 사랑 이야기는 백년이 넘어서 그렇겠죠.그런면에서 현재 러시아 젊은이들의 사랑을 나눈 작품도 국내에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1-09-03 01:30   좋아요 0 | URL
어느 시대엔 순수한 사랑만 있었다, 이런 건 아닌 듯하고요, 지금도 타락한 사랑만 있다고 말할 순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저도 최근 러시아문학이 소개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건이 또 그렇게 안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