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력이 좀 나는가 싶었는데 엊그제부턴 목에 가래가 끓는다. 감기인지 아니면 천식인지 모르겠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글을 쓰는 것처럼 뭔가 민감한 일을 해야 할 때는 방해가 된다. 이렇게 몇자 적는 핑계다. 요즘은 보통 하루에 두 가지씩의 일정이 잡혀 있어서 그에 맞게 가방을 챙기다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손이 갔다. <보봐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두레, 1982)이 제목이다(요즘은 보기 드문 유형의 제목이다).   

잘 구할 수 없는 책이고, 서지 사항도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를 통해서야 알았다. <보부아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이라고 제목이 인용한 책 일러두기에 나와 있는데, 실제 책에는 '보부아르'가 아니라 '보봐르'라고 표기돼 있다(도서검색을 할 때는 이게 또 두 사람으로 간주된다! 여기서는 '보부아르'라고 표기한다). 거의 30년 전 책이고 말 그대로 누렇게 빛바란 '헌책'이다. 403쪽 분량에 정가는 3,500원. 사르트르 서거 2주기에 맞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사르트르와의 대화(Entretiens avec Jean-Paul Sartre)>이다. 물론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나눈 대화다. 번역본은 '대담'이란 표현을 썼는데, 둘 사이의 관계와 '대담'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981년에 쓴 서문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이 대담은 1974년 여름 로마에서, 그리고 초가을에 다시 빠리에서 진행되고 끝났다. 때때로 사르트르는 피곤하였고 내게 잘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면 바로 내가 영감이 부족해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기도 했다. 흥미없다고 생각되는 대화들은 내가 삭제해버렸다. 나머지 대화들은 거의 연대순을 따라가며 주제별로 재구성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은 두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아주 요긴한 자료와 입문서가 돼줄 듯싶다. 특이한 것은 이 책의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도 영역본이 나와 있는 걸 고려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건 이미 주문해놓은 영역본 <작별의 예식(Adieux)>을 받아봐야 알겠다. 우리말로는 <작별의 예식>(두레, 1982)이라고 번역됐으며 <최후의 말>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으로 보인다(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받아봐야 알겠다고 한 것은 영역본의 쪽수가 국역본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어본보다는 훨씬 많고 불어본보다는 좀 적은 분량이다. 참고로, 불어본에는 이 두 권이 합본돼 있다.    

  

대학 1, 2학년 때, 그리고 안니 코엔 솔랄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을 읽던 대학원 시절 이후 오랜만에 다시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관해 읽으면서 이 두 권은 챙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좋은 건 새로 책이 나오는 것이지만 현재의 폼새로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또 한 가지 희망사항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나남, 2009)을 장서로 소장하는 것인데, 두께나 가격이 모두 만만찮다. 더 넓은 서재를 갖게 된 이후에야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번에 찾아보니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서는 제법 활발하게 연구서와 관련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사르트르 사전>도 집필한 게리 콕스다. 입문서 외에도 <사르트르와 소설>(2009)이란 연구서를 펴냈다. <구토>에 대해 쓸 일이 생기면 참고해보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면 <구토>는 현재 마땅한 정본 번역서가 없다. 방곤 교수가 옮긴 <구토>(문예출판사, 초판1983)를 강의용으로 쓰고 있기는 한데, 주인공 로캉탱의 연구대상인 '롤르봉'이 '로르봉'으로 표기돼 있다. 그런 경우 보통은 일어 중역본이 경우가 많아서 의심을 했는데, 박홍규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노오벨상문학전집 제7권 사르트르 편>(신구문화사, 1966)에 실린 이휘영 교수 번역의 <구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중역본은 아닌 듯싶다. 대신에 이휘영본을 거의 베낀 번역이다. 그 전집본에는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도 들어 있어서 원래 방곤 교수가 옮긴 것을 이휘영 교수의 이름으로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로선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려나 요즘 세계문학전집이 붐인 만큼 새로운 세대의 새 번역이 출간되면 좋겠다... 

10. 05. 18.  



P.S.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는 내게 요긴한 몇가지 정보를 제공해주어 고마운 책인데, 약간 부주의한 대목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에게 흔히 '알랭'이린 필명으로 소개된 '에밀 샤르티에'가 '알랑'이라고 표기된 건 좀 생경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표된 1934년의 제1차 소련작가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앙드레 지드가 '러시아문학의 낭만주의적 리얼리즘'(114쪽)을 찬양했다는 내용도 좀 이상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겸사겸사 지드의 경우에도 예전 <앙드레 지드 전집>에 포함돼 있던 '소련기행' <소련에서 돌아오다>와 <속 소련에서 돌아오다>가 다시금 출간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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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5-18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토>가 아직 정본이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군요. 전 방곤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언젠가 지적하셨듯이 표트르와 파벨이 혼동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신뢰를 접었습니다. 이 오류가 다른 역자의 번역에도 있다고 하신 걸로 보아 <구토>의 번역에도 표절이 횡행한 모양입니다. 김희영 번역본이 낫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책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더군요. 여러가지로 구토감을 느끼게 하는 세상에 제대로 된 <구토> 번역이라도 있으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텐데요.^^

그나저나 한국어로 번역되면 책이 왜이리 두꺼워지고 분량이 많아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한글이 알파벹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져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의도적인 부풀리기도 한몫하는 듯 싶습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저도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건만 아직 구매버튼을 흔쾌히 누르고 있지 못합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서문을 단 영역본은 한권인데 그러한 편집에 호감이 갑니다.^^

로쟈 2010-05-18 23:51   좋아요 0 | URL
영역본이 한 권이었나요? 기억엔 두 권짜리가 있었는데요. 표트르와 파벨은 사실 사소한 디테일이긴 한데, 문예출판사본에는 제대로 돼 있습니다. 이휘영본에 혼동이 있구요. 한데 그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예요...

푸른바다 2010-05-20 00:56   좋아요 0 | URL
835페이지이긴 하지만 한권짜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7권짜리 초호화 장정으로 나온 <쌍윳따 니까야>같은 책도 영역본으로는 한 권입니다. 플라톤 전집도 영역본으로는 한권이고 그 두께는 <법률> 한국어 번역본 정도.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2권.

아마존에서 찾아 보니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2권이군요. 알라딘에 1권만 올라있어서 착각했던 것 같네요.^^

2010-05-1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5-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1983년에 초판발행된 학원사 세계문학의 김희영 번역 '구토'가 있는데요 어렸을때 무척 좋아했기때문에 그 뒤론 한번도 다른 번역본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는데 이 책은 정본 번역서가 아닌가요? 프랑스어과 교수로 나와있던데요.

로쟈 2010-05-18 23:48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라 잊고 있었네요. 가장 나을 거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어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한겨레를 들고 왔다. 뜨겁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날은 벌써 여름날씨다. 한겨레의 5.18 특집기사들을 조금 보다가 온라인 경향신문의 기사도 몇 개 읽는다('북풍 시나리오'를 꾸미는 자들에게 저주를!). 이런 날엔 훌쩍 칸에라도 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그 '깐느' 말이다. 우디 앨런의 신작에 관한 리포트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며칠전 임상수의 <하녀>를 봤는데, 조만간 이창동의 <시>와 홍상수의 <하하하>를 챙겨보게 되면 대충 '칸'에 가 있는 기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 10년 안으로 한번 가보기로 하자... 



경향신문(10. 05. 17) 우디 앨런 “인생이란 악몽 같고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  

지적이고 신랄한 코미디로 사랑받아온 우디 앨런 감독(74)이 또 한 편의 신작을 들고 제63회 칸국제영화제를 찾았다. 15일(현지시간) 상영된 신작의 제목은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당신은 키 크고 어두운 피부의 낯선 이를 만날 것이다’란 뜻인데, 미국에선 점쟁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난다’식이니 별 뜻은 없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런던이다. 위기에 빠진 몇 쌍의 부부가 중심이다. 알피(앤서니 홉킨스)가 젊음을 되찾겠다며 40년간 산 부인 헬레나를 떠나자 헬레나(젬마 존스)는 충격에 빠져 점쟁이가 건네는 헛된 위안에 의지한다. 헬레나의 딸 샐리(나오미 워츠)와 그의 남편 로이(조시 브롤린) 역시 원만한 부부는 아니다. 로이는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고, 샐리는 돈 한 푼 못버는 남편이 지긋지긋하다. 샐리와 로이에겐 새 인연이 찾아온다. 공식 기자회견에서는 죽음, 나이듦과 같은 앨런 영화의 주제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앨런은 웃지 않았지만, 배우와 기자들은 줄곧 웃음보를 터뜨렸다.

“인생에 대한 내 유일한 관점은 이겁니다. 인생이란 고통스럽고 악몽 같고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이라는 것이죠.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속이고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에요. 니체, 프로이트, 유진 오닐도 다 그렇게 말했어요. 이번 영화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한 커플은 스스로를 속이고 멍청한 사람들과 어울려요. 그래도 아무튼 저보다는 행복하죠.”

이번 영화제에는 102세의 포르투갈 감독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도 신작을 출품했다. 앨런은 “그처럼 건강하게 100살이 될 수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아무튼 난 죽음에 강하게 반대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앨런은 감독이기 이전에 훌륭한 코미디 배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영화에선 좀처럼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늙어서 로맨틱한 역을 할 순 없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스칼렛 요한슨이나 나오미 워츠 같은 배우를 캐스팅해 놓고 다른 남자 배우와 짝을 지어준다는 게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지…. 여배우의 맞은편에 앉아 눈동자를 보면서 거짓말하는 역을 하고 싶다고요. 그걸 못하니까 연기하는 재미가 없네요.”

그는 자신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내레이션에 대해 “내 영화에는 소설 같은 요소가 있다.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글을 읽으면 이야기를 해주는 화자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백승찬기자) 

10. 05. 17.  

P.S. 국내에 나와 있는 우디 앨런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웅진지식하우스, 2009)를 포함하여 거의 다 갖고 있는데,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황금가지, 2000)은 안 챙겨두었다는 걸 확인한다. 이미 절판된 책이니 도서관이나 이용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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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e 2010-05-1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 읽고 역시 우디 앨런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거의 석달 반 만에) 떠날 때 부친 짐들이 도착해서
지젝의 <폭력>과 우디 앨런의"Mere Anarchy" 받아보네요.
하녀는 어떠셨나요? 저는 시의 수상확률을 60%로 잡았어요. ^^

로쟈 2010-05-17 19:08   좋아요 0 | URL
<하녀>의 몇 장면은 재미있었습니다. 임상수 감독은 캐리커쳐들을 다뤄서 자극적이어도 힘은 떨어진다는 생각입니다. <시>는 평들이 좋네요...

2010-05-17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7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란 부제가 눈길을 끄는 책은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서해문집, 2010). 아직 알라딘에는 책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는데,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테렌스 데 프레는 간단한 약력과 함께 '홀로코스트 학자'라고 소개돼 있다. 대표작이 1976년에 출간한 <생존자(The Survivor: An Anatomy of Life in the Death Camps)>. 저자 자신이 '생존자'의 모습이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나 살펴봤더니 이미 두 차례 번역된 바 있다(그래서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한다). 어지간한 도서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일단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월간 중앙>(1976년 10월호)의 별책으로 소개됐었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 <생존자>(인간, 1981)이다. 역자는 차미례 씨. 이번에 나온 서해문집판은 이 번역판을 손질해서 펴낸 듯하다. 1981년판의 목차는 이렇다.    

머리말 / 테렌스 데 프레 = 3  

제1장 소설 속에 나타난 생존자 
살아남기 위한 투쟁 = 11 
페스트 = 14 
누명쓴 사람 = 17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21 
연옥(煉獄) = 24 
암병동(癌病棟) = 30 

제2장 증인이 되기 위하여 
기록하라! = 36 
죽은 자와의 약속 = 42 
힘의 논리를 고발한다 = 53  

제3장 배설물의 공격 
배설에서 야기되는 참상 = 59 
배설물에 의한 고문 = 62 
정신력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 = 66 
몸을 씻지 않는 사람부터 죽였다 = 69 
배설물과의 접촉에서 받는 충격 = 72 
악의 상징으로서의 오물 = 75  

제4장 악몽과 현실 
유일한 도피처 = 79 
더 이상 살아 있고 싶지 않다 = 81 
휴매니티의 신뢰에 대한 배신 = 86 
비인간적 솔직성에 대한 자각 =90 
걸어다니는 시체들 = 93 
수렁 속에서 의지를 되찾는 섬광같은 힘 = 98

제5장 죽음 속의 삶 
살아남기 위한 두 가지 처방 = 103 
협력과 저항 속의 생존 = 106 
두 가지 용어 - '조직한다'와 '캐나다' = 111 
암시장(暗市場) = 116 
훌륭한 보직 = 121 
삶의 연대의식 위에서 = 127 
정보수집과 저항운동 = 131 
죽음의 전략적 이용 = 135 
약속도 보상도 필요없는 도움 = 138 
선물 -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 = 144 
빵의 법률 - 생존을 위한 응징과 질서 = 149  

제6장 우리와 그들 
수용소에서 행위에 대한 정신분석 = 157 
영웅주의에 대한 오해 = 162 
고통을 통한 인간의 재생 = 168 
지옥에 대한 잠재의식 = 176 
종말적 이미지의 극복 = 179  

제7장 우리 시대의 예언자 
철저한 빼앗김 = 185 
추억과 희망을 버려라 = 188 
성욕의 상실 = 193 
생명의 선천적 잠재능력 = 197 
바이오그램 - 생물학적 내면 구조 = 201 
집단에의 경보 = 204 
생명의 상향운동 = 206 
문화와 죽음의 상관관계 = 209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다 = 213  

참고 문헌 = 217 
역자 후기 = 224   

오래 전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관심분야의 책이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나 <암병동>에 대한 언급도 포함하고 있어서 구입해볼 작정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엘리 위젤의 <나이트>(예담, 2007),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청아출판사, 2005) 등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10.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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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스 2010-06-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완역본도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현재 열린책들에서 나온 책은 영어판과 다르게(러시아 원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용이 절반 이상 압축되어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로쟈 2010-06-29 17:09   좋아요 0 | URL
6권짜리로 나왔었는데, 절판됐습니다. 1/6인 거지요...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두 개의 강연/강의 준비를 하려면 언제 자야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게다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또 있다) 간단한 페이퍼를 적어둔다. 그건 오랫동안 벼르던 책을 드디어 짝을 채워 구입했기 때문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기획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이 그 책이다.  

  

알라딘에서는1권이 품절이어서 그제 홍익문고에서 구하고, 2권은 당일배송이 되기에 알라딘에 주문해서 받고 다시 3권은 어제 홍익문고에서 수중에 넣었다. 권당 26,000원이라는 만만찮은 가격이어서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엊그제에서야 '결단'을 내렸다. 내친 김에 영역본까지 주문하고. 

  

대학도서관에 있는 영역본을 복사할 수도 있지만 워낙 두께가 있는 책이라 그냥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덩달아 <코카서스의 부르디외 숭배자>도 주문했다(이 책은 아직 국내 도서관에 들어와 있지 않다). 지젝이 <레닌 재장전>(마티, 2010) 등에서 언급한 책이다. <세계의 비참>은 언젠가 부르디외가 귄터 그라스와 나눈 대담에서 <나의 세기>(민음사, 1999)와 함께 거론될 때 처음 본격적으로 '욕심'을 냈었다(그라스의 <나의 세기>는 왜 다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전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의 말미에서 바우만이 다시금 "부르디외의 마지막 '대작'인 <세계의 비참>"을 한번 더 언급해주시는 바람에 '때'가 됐구나 싶었다.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학 팀이 3년간 작업한 결과인데, "그들은 대규모 공영주택 단지, 학교, 사회복지회 직원, 노동자, 하층 무산계급, 사무직원, 농부, 그리고 가정이라는 세계 속에 비참한 사회적 산물이 어떠한 현대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이 세 권의 책을 대부분 채우고 있는 인터뷰들이다. 부르디외는 서문에서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통탄해서는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어떻게? 부르디외로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들을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이유를 그들에게 결부시켜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와 삶의 어려움에 관해 우리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평소 동문선에서 나온 많은 책들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세계의 비참>만큼은 역자와 출판사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이 정도 두께의 '보고서'는 나올 만하며, 또 나와야 하지 않을까란 바람을 적는다.   

<세계의 비참>을 구하러 갔다가 어떨결에 같이 손에 넣은 책은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문학과지성사, 2003)이다. 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다 읽진 못하고 반납했던 책.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책은 인도의 나르마다 강 유역의 대규모 댐 건설사업과 개발 지상주의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책이 출간됐을 때는 '남의 나라' 얘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이젠 '우리' 얘기다. 그래서 선뜻 손이 갔다. 이 정도 비용은 책값으로 치러도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세계의 비참>이나 <생존의 비용>이나 나온 지 7, 8년이 됐지만 아직 초판이었다. 많이 잡아도 그동안 2-3,000부도 안 나갔다는 얘기다. 생각하면 그 또한 '비참한' 일이다. 뒤늦게 이 두 책을 손에 넣고서 생색도 내고 겸사겸사 '광고'도 하는 이유다. 우리의 '비참'을 조금 더는 일에 각자가 조금만 더 비용을 들이면 좋겠다. 아룬다티 로이의 책도 그래야 더 나올 게 아닌가... 

10.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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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4 01:27   좋아요 0 | URL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존재와 삶의 어려움에 관해 우리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소개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할 때 반드시 필요하고, 또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포괄적인 시선으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독자들 역시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중략)..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이는 스피노자의 말이다. 하지만 이 스피노자식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들 사회학자가 아무리 이 규율을 준수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들,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 즉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도대체 어떻게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 그들을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이유를 그들에게 결부시켜 보는 것, 그것뿐이다." -> 갑자기 로쟈님이 이 책 소개해주시고 제가 좋아하는 구절 옮겨주셔서, 발제 때 인용한 본 책의 제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옮겨봤습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서 나중에 돈 모으면 3권 다 살려고 했는데, 1권이 품절이군요.ㅜ.ㅜ

로쟈 2010-05-16 10:00   좋아요 0 | URL
네, 아쉬울 땐 품절이죠...

kumun 2010-05-15 17:32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에서 개화기 지식인이 복지의 본질은 거지근성이다 뭐 이런 말을 했다는 내용을 본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네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로쟈 2010-05-16 09:59   좋아요 0 | URL
정확하진 않지만, 윤치호에 관한 페이퍼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매달린 원고를 끝마치지 못하고(어쩌면 테마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의차 나가려던 차에 모처럼 '시적인' 칼럼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의 칼럼이다. 실제로 정현종 시인의 시가 인용돼 있기도 하다. 최근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강, 2009)를 강의시간에 읽기도 했는데, 칼럼은 액체근대(가벼운 근대, 유동적 근대)의 한 사례로도 읽힌다(하지만 '한국적인' 유별남을 보태야겠다. 대비하자면, 박정희 시대가 우리에겐 '고체근대'다). 물론 이 사례는 페이소스를 머금게 하는 사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처럼... 

경향신문(10. 05. 13) [이대근칼럼]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얼마 전 상가(喪家)에서 만난 이가 의원인 줄은 소개한 사람의 설명을 듣고서 알았다. 그 전 한 모임에서 인사를 나눈 이가 전직 의원이라는 사실도 명함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러나 의원 얼굴도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불평했다. ‘왜 이렇게 모르는 의원이 많은 거야.’ 18대 총선에서 현역 의원 재선율은 46%였다. 17대 총선에서는 30%, 16대 58%, 15대 44%. 

미국 하원은 2002년까지 10개 선거에서 재선율이 95%였고, 일본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높다. 이에 비하면 4년마다 의원 절반 이상이 바뀌는 한국은 매 선거가 혁명이다. 만일 당신이 ○ 의원은 △ 당 소속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걸 너무 믿지 않는 게 좋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7대 국회에서 당적 변경 의원은 62%에 달했다.

술자리에서 시국을 논하다 장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대화가 끊기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건망증이 생겼다거나, 기억력이 나빠졌다고 비관하면 절대 안된다. 1년 만에 바뀔 수 있는 장관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혹시 장관 이름을 안다 해도 지방선거 이후 개각을 지켜보면,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정보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관료조직만이 아니다. 기업도, 대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1년마다 속으로부터 바뀐다. 이런 사회에 10년이라는 단위가 있을 수 없다. 1년이 열 번 반복되는 일은 있겠지만.

마술처럼 사라져버린 ‘종로 1가’
자주 이사하는 한국인은 살림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챙겨서 떠도는 유목민을 닮았다. 그래서 낯선 동네로 떠날 때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색 바랜 일기장, 젊은 날의 편지, 청춘의 방황과 사색을 부추기던 오래된 책들, 한때 열정을 갖고 몰두했지만 이제는 짐더미가 된 것들을 버려야 한다. 한꺼번에 버리면 가슴이 너무 아플까 봐 일부는 남겨 놓지만, 결국 이사 횟수에 비례해 버리는 것이 많아진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삶의 기억과 흔적을 지워버리는 일이며, 지친 영혼이 잠시 머물 곳을 없애버리는 일이며, 처진 어깨를 떠미는 일이다. 오로지 진군이다. 전쟁 같은 삶을 위해.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셋방 사는 가구의 80%가 최소 5년에 한번 이사하며 5년이 지나면 동네 사람 3분의 2가 바뀐다. 우리에겐 자기가 사는 곳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다. 만일 익숙해지고 있다면, 그건 떠날 때, 바뀔 때가 됐다는 신호일 뿐이다.

서울 외곽 구파발 갈 때였다. 그 익숙했던 거리가 영화 장면 전환하듯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낯선 세계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다녀본 길이지만, 기억을 되살릴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외국 여행자처럼 그 거리를 더듬어 가야 했다. 그곳은 은평뉴타운이라고 했다. 서울살이 37년이지만 아직도 어색하다. 얼마를 더 살아야 이 도시와 친해질까.  



요즘 종로 1가를 걸으면,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라고 노래한 시인 정현종처럼 견디기 힘들다. 종로 1가를 안다는 것은 지도상 위치를 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 거리에 있었던 빈대떡 집, 선술집을 안다는 것이며,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종로 1가다운 분위기와 정서를 안다는 것이다. 그 종로 1가가 사라졌다. 종로 1가를 보자기에 싼 뒤 얏! 하고 벗겨내 바꿔치기 하는 마술이 아니라면 이렇게 바뀔 수가 없다.

추억도 아픈 상흔도 지워져
이제 종로 1가는 언젠가 스쳐 지나 본 적이 있는 뉴욕·도쿄의 거리와 다르지 않다. 종로 1가가 꼭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 곳이 종로 1가만은 아니다. 4대강도 언젠가는 우리가 알던 강은 아닐 것이다. 최근 여러 대학을 다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옛날 그 대학이 아니었다. 몇몇 대학은 공사 중이며 어떤 대학은 정문부터 찾을 수 없었다.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한국. 추억할 것은 물론 아픈 상흔조차 남겨 놓지 않는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자기의 땅에서 낯선 자들이다

10. 05. 13. 

P.S. 우연찮은 일이지만 아침 내내 중얼거렸던 시구는 박정대의 '물질적 황홀' 가운데 일부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輓章처럼 나부낀다

이번주도 햇살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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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5-13 14:37   좋아요 0 | URL
정말 아픕니다. 계속되는 암울한 기분보다 이러 날카로운 고통이 오히려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감정이겠지요.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아마도 한국에서는 이런 계속되는 뿌리뽑힘의 트라우마를 봉합하는 이론적 환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봅니다... 저희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앞산에 재개발 예정된 산동네가 있습니다. 아침마다 햇살이 떨어지는 그 동네를 바라보며 비애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됩니다. 시인들의 노래대로, 이곳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죽음이고 견딜 수 없습니다.

로쟈 2010-05-14 00:05   좋아요 0 | URL
눈뜨고 코베이는 세월이죠. 고단수에라도 당하면 덜 억울할 텐데요...

2010-05-1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4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4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4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6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