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력이 좀 나는가 싶었는데 엊그제부턴 목에 가래가 끓는다. 감기인지 아니면 천식인지 모르겠다.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글을 쓰는 것처럼 뭔가 민감한 일을 해야 할 때는 방해가 된다. 이렇게 몇자 적는 핑계다. 요즘은 보통 하루에 두 가지씩의 일정이 잡혀 있어서 그에 맞게 가방을 챙기다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손이 갔다. <보봐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두레, 1982)이 제목이다(요즘은 보기 드문 유형의 제목이다).
잘 구할 수 없는 책이고, 서지 사항도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를 통해서야 알았다. <보부아르에게 남긴 사르트르 최후의 말>이라고 제목이 인용한 책 일러두기에 나와 있는데, 실제 책에는 '보부아르'가 아니라 '보봐르'라고 표기돼 있다(도서검색을 할 때는 이게 또 두 사람으로 간주된다! 여기서는 '보부아르'라고 표기한다). 거의 30년 전 책이고 말 그대로 누렇게 빛바란 '헌책'이다. 403쪽 분량에 정가는 3,500원. 사르트르 서거 2주기에 맞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원제는 <사르트르와의 대화(Entretiens avec Jean-Paul Sartre)>이다. 물론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나눈 대화다. 번역본은 '대담'이란 표현을 썼는데, 둘 사이의 관계와 '대담'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981년에 쓴 서문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이 대담은 1974년 여름 로마에서, 그리고 초가을에 다시 빠리에서 진행되고 끝났다. 때때로 사르트르는 피곤하였고 내게 잘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면 바로 내가 영감이 부족해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기도 했다. 흥미없다고 생각되는 대화들은 내가 삭제해버렸다. 나머지 대화들은 거의 연대순을 따라가며 주제별로 재구성하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은 두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아주 요긴한 자료와 입문서가 돼줄 듯싶다. 특이한 것은 이 책의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도 영역본이 나와 있는 걸 고려하면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확한 건 이미 주문해놓은 영역본 <작별의 예식(Adieux)>을 받아봐야 알겠다. 우리말로는 <작별의 예식>(두레, 1982)이라고 번역됐으며 <최후의 말>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으로 보인다(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받아봐야 알겠다고 한 것은 영역본의 쪽수가 국역본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위 한국어본보다는 훨씬 많고 불어본보다는 좀 적은 분량이다. 참고로, 불어본에는 이 두 권이 합본돼 있다.
대학 1, 2학년 때, 그리고 안니 코엔 솔랄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을 읽던 대학원 시절 이후 오랜만에 다시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에 관해 읽으면서 이 두 권은 챙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좋은 건 새로 책이 나오는 것이지만 현재의 폼새로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또 한 가지 희망사항은 <변증법적 이성 비판>(나남, 2009)을 장서로 소장하는 것인데, 두께나 가격이 모두 만만찮다. 더 넓은 서재를 갖게 된 이후에야 시도해보려고 한다.
이번에 찾아보니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서는 제법 활발하게 연구서와 관련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 이번에 관심을 갖게 된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사르트르 사전>도 집필한 게리 콕스다. 입문서 외에도 <사르트르와 소설>(2009)이란 연구서를 펴냈다. <구토>에 대해 쓸 일이 생기면 참고해보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면 <구토>는 현재 마땅한 정본 번역서가 없다. 방곤 교수가 옮긴 <구토>(문예출판사, 초판1983)를 강의용으로 쓰고 있기는 한데, 주인공 로캉탱의 연구대상인 '롤르봉'이 '로르봉'으로 표기돼 있다. 그런 경우 보통은 일어 중역본이 경우가 많아서 의심을 했는데, 박홍규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노오벨상문학전집 제7권 사르트르 편>(신구문화사, 1966)에 실린 이휘영 교수 번역의 <구역>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중역본은 아닌 듯싶다. 대신에 이휘영본을 거의 베낀 번역이다. 그 전집본에는 방곤 역,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도 들어 있어서 원래 방곤 교수가 옮긴 것을 이휘영 교수의 이름으로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로선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려나 요즘 세계문학전집이 붐인 만큼 새로운 세대의 새 번역이 출간되면 좋겠다...
10. 05. 18.
P.S.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는 내게 요긴한 몇가지 정보를 제공해주어 고마운 책인데, 약간 부주의한 대목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에게 흔히 '알랭'이린 필명으로 소개된 '에밀 샤르티에'가 '알랑'이라고 표기된 건 좀 생경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표된 1934년의 제1차 소련작가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앙드레 지드가 '러시아문학의 낭만주의적 리얼리즘'(114쪽)을 찬양했다는 내용도 좀 이상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겸사겸사 지드의 경우에도 예전 <앙드레 지드 전집>에 포함돼 있던 '소련기행' <소련에서 돌아오다>와 <속 소련에서 돌아오다>가 다시금 출간되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