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두 개의 강연/강의 준비를 하려면 언제 자야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게다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또 있다) 간단한 페이퍼를 적어둔다. 그건 오랫동안 벼르던 책을 드디어 짝을 채워 구입했기 때문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기획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이 그 책이다.  

  

알라딘에서는1권이 품절이어서 그제 홍익문고에서 구하고, 2권은 당일배송이 되기에 알라딘에 주문해서 받고 다시 3권은 어제 홍익문고에서 수중에 넣었다. 권당 26,000원이라는 만만찮은 가격이어서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엊그제에서야 '결단'을 내렸다. 내친 김에 영역본까지 주문하고. 

  

대학도서관에 있는 영역본을 복사할 수도 있지만 워낙 두께가 있는 책이라 그냥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덩달아 <코카서스의 부르디외 숭배자>도 주문했다(이 책은 아직 국내 도서관에 들어와 있지 않다). 지젝이 <레닌 재장전>(마티, 2010) 등에서 언급한 책이다. <세계의 비참>은 언젠가 부르디외가 귄터 그라스와 나눈 대담에서 <나의 세기>(민음사, 1999)와 함께 거론될 때 처음 본격적으로 '욕심'을 냈었다(그라스의 <나의 세기>는 왜 다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전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의 말미에서 바우만이 다시금 "부르디외의 마지막 '대작'인 <세계의 비참>"을 한번 더 언급해주시는 바람에 '때'가 됐구나 싶었다.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학 팀이 3년간 작업한 결과인데, "그들은 대규모 공영주택 단지, 학교, 사회복지회 직원, 노동자, 하층 무산계급, 사무직원, 농부, 그리고 가정이라는 세계 속에 비참한 사회적 산물이 어떠한 현대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이 세 권의 책을 대부분 채우고 있는 인터뷰들이다. 부르디외는 서문에서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한다.  

"통탄해서는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어떻게? 부르디외로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들을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이유를 그들에게 결부시켜 보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와 삶의 어려움에 관해 우리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평소 동문선에서 나온 많은 책들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세계의 비참>만큼은 역자와 출판사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이 정도 두께의 '보고서'는 나올 만하며, 또 나와야 하지 않을까란 바람을 적는다.   

<세계의 비참>을 구하러 갔다가 어떨결에 같이 손에 넣은 책은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문학과지성사, 2003)이다. 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다 읽진 못하고 반납했던 책.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책은 인도의 나르마다 강 유역의 대규모 댐 건설사업과 개발 지상주의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책이 출간됐을 때는 '남의 나라' 얘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이젠 '우리' 얘기다. 그래서 선뜻 손이 갔다. 이 정도 비용은 책값으로 치러도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세계의 비참>이나 <생존의 비용>이나 나온 지 7, 8년이 됐지만 아직 초판이었다. 많이 잡아도 그동안 2-3,000부도 안 나갔다는 얘기다. 생각하면 그 또한 '비참한' 일이다. 뒤늦게 이 두 책을 손에 넣고서 생색도 내고 겸사겸사 '광고'도 하는 이유다. 우리의 '비참'을 조금 더는 일에 각자가 조금만 더 비용을 들이면 좋겠다. 아룬다티 로이의 책도 그래야 더 나올 게 아닌가... 

10.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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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14 01:27   좋아요 0 | URL
"여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존재와 삶의 어려움에 관해 우리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소개하는 데 있어서 나름대로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할 때 반드시 필요하고, 또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포괄적인 시선으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독자들 역시 그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중략)..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도 안 되며, 혐오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이는 스피노자의 말이다. 하지만 이 스피노자식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제시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들 사회학자가 아무리 이 규율을 준수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들,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 즉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도대체 어떻게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 그들을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이유를 그들에게 결부시켜 보는 것, 그것뿐이다." -> 갑자기 로쟈님이 이 책 소개해주시고 제가 좋아하는 구절 옮겨주셔서, 발제 때 인용한 본 책의 제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옮겨봤습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에서 나중에 돈 모으면 3권 다 살려고 했는데, 1권이 품절이군요.ㅜ.ㅜ

로쟈 2010-05-16 10:00   좋아요 0 | URL
네, 아쉬울 땐 품절이죠...

kumun 2010-05-15 17:32   좋아요 0 | URL
로쟈님 페이퍼에서 개화기 지식인이 복지의 본질은 거지근성이다 뭐 이런 말을 했다는 내용을 본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네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로쟈 2010-05-16 09:59   좋아요 0 | URL
정확하진 않지만, 윤치호에 관한 페이퍼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