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주에나 리뷰가 올라올 거 같은데, 이번주 철학분야의 관심도서는 김진석 교수의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과 여덞 명의 사상가의 정치철학을 다룬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난장, 2010)이다. 이 중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의 목차와 함께 '기획의 말'을 도서출판 난장의 블로그에서 발췌해 옮겨놓는다.  

   

1. 클로드 르포르: 정치적인 것의 발견과 현대 민주주의의 모색(홍태영)
2. 알랭 바디우: 진리와 평등으로서의 정의(장태순)
3. 자크 랑시에르: 감성적/미학적 전복으로서의 정치와 해방(최정우)
4. 가라타니 고진: 교환 X로서의 세계공화국(조영일)
5. 에티엔 발리바르: 도래할 시민(권)을 위한 철학적 투쟁(장진범)
6. 조르조 아감벤: K(양창렬)
7. 샹탈 무페: 경합적 다원주의로서의 급진민주주의(홍철기)
8.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구조와 논리(강병호)
  



기획의 말 
현대, 정치철학, 모험

2008년 봄과 여름의 길거리를 수놓았던 촛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촛불은 현재 ‘공화국’에 대한 논의, 87년-97년-08년 ‘체제논쟁,’ 그리고 ‘급진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낳았다. 이런 촛불의 흔적 또는 촛불효과는 신자유주의라는 반(反)정치를 넘어서는 ‘정치(철학)의 귀환’으로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서구 유럽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 나아가 맑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귀환은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경향을 레오 스트라우스나 한나 아렌트 식의 ‘정치’의 자율성론으로 비판하고 존 롤즈, 마이클 샌들, 찰스 테일러, 로버트 노직,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같은 영미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수용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처럼 서구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결국 철학이 곧 정치라고 봤던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68사상가들’을 결산하며 정치철학의 고유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금 이 땅에서 정치(철학)의 귀환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지성계에게 사유할 것을 요청, 심지어 명령하는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건설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환은 하나의 철학적 조류에 또 다른 조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건강하다. 하지만 반신자유주의 연합이든, 반MB 연합이든, 또 그밖에 어떤 구체적인 전략을 사유하든 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촛불의 교훈은 이것이다. 즉, 정치란 (국가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국가’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요구를 초과한다는 것, 민주주의는 일종의 합의나 체제가 아니라 갈등·경합·투쟁·계쟁·봉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 우리가 지금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공통의 지평 위에 서 있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국가형태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권력이 정당하며, 누구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하는가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도 정치철학의 주된 물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정치학』에서 평등/불평등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난제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체제에 대한 고민의 가장자리야말로 정치철학의 아포리아가 자리하는 곳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당성과 배분이라는 문제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정치 또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기. 기존의 정치 개념(권리, 정의, 자유, 평등, 인민주권 등)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바로 이것이 여덟 명의 철학자를 통해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하나의 전략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주)텍스트를 읽기 위한 (곁)텍스트, 그러나 늘 곁에 두고 사유하며 곱씹을 것을 요구하는 (곁)텍스트이다. 

지금 선보이는 여덟 명의 철학자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주장은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지난 게 대부분이다. 이제와 이들의 사유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것도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입문서의 형태로 소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성사적으로 늘 뒤쳐져서 남들 뒤꽁무니 따르기에 바쁜 우리 모습에 대한 자조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아니면 유행하고 있거나 유행할, 하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일군의 신상품을 풀어놓는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허나 무엇보다도 푸코가「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근대’를 하나의 태도, 그것도 ‘비판적 태도’로 규정했듯이 우리 역시 ‘현대’ 또는 ‘동시대’를 하나의 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오늘을 사유하기 위해 과거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것은 오늘과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시차적(時差的)이며, 과거의 텍스트를 다른 시각으로 읽는다는 점에서 시차적(視差的)이다. 요컨대 현대/동시대는 이 이중의 시차를 경유함으로써만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이 이 모음집의 텍스트를 그 맥락에서 떼어내 자유롭게 인용할 때, 다시 말해서 이 텍스트들이 경전들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곁)텍스트가 될 때 이 모음집에 수록된 정치철학은 비로소 현대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음집에 참여해주신 글쓴이들의 약력에는 대부분 ‘과정’이라는 꼬리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학계와 사회의 끝자락 또는 가장자리에 있는, 이 ‘과정 중의’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 아닌가. 이제는 당신의 차례이다. 

10. 01. 24.  

P.S. 개인적으론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의 '슬라보예 지젝' 편 집필을 제안받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아서 사양했었다. 가령 <지젝의 정치학>(2006)을 아직 읽지 않았고, <바디우, 지젝, 그리고 정치의 변형>(2009)이란 책은 배송되는 대로 읽어봐야 한다. 예정대로라면 하반기에는 지젝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혹은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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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5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속에도 철학적인 사유가 존재합니다. 우연과 필연에 대한 계속되는 선택의 문제는 정치에서도 다를게 없습니다. 세계속에 한국의 정치는 어디로들 향하는지, 뱀의 머리가 되어 봄처녀를 따라 오겠지만요.

로쟈 2010-01-25 13:16   좋아요 0 | URL
정치가 인간의 본질적인 차원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대중적 자각 같은 게 필요해보입니다. 신간도 그런 맥락에서 의의가 있을 듯싶고요...
 
'레닌 재장전' 예고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드디어 출간됐다(아직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알라딘에도 입고돼 있다). 책은 어제 배송받았는데, 표지가 깔끔하고 책도 분량에 비해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속표지(표2)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1월 '번역자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췌돼 있다(7명의 역자 중 5명이 참석했었다). 사진은 마티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마르크스와 달리, 여전히 언급하길 꺼리던 레닌이 이렇게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 이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레닌이 귀환했다. 게다가 세계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살아 있는 최고의 석학들이 레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레닌을 읽을 것인가? 그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이현우(알라딘 블로거 '로쟈')  

“80년대 끝무렵부터 90년대 초반을 고비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진보 운동이 사그라들었다. 정의, 저항, 혁명 등의 단어가 증발한 것 같았다.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향해 걸어와 노동자들의 연대와 희망이 사라진 지금 우리 앞에 ‘레닌’이 부활하고 있다.” - 이재원   

“이 책을 옮기며 알게 되었다. 나에게 레닌은 ‘질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구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몸 전체를 던져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 자체가 질문이었고 고민이었으며 민주주의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우리에게 절실한 책이다.” - 한보희  

“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던 단어들을 되새기게 되었다. 정의, 정당, 조직…. 오히려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세계에 속한 사람(사상), 고전이 되었다. 하지만 레닌은 지식인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은 사상가다. 그런 점에서 새로웠고 자극적이다. 왜 레닌을 읽을 필요가 생겼을까? 다시 한번 자문하게 된다.” - 최정우(알라딘 블로거 '람혼') 

“바디우의 레닌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냉혹한 현실 정치인이란 통념과는 완전히 반대로, 레닌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섰을 때 언제나 ‘정의와 이념, 그리고 진리를 선택했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레닌은 말랑한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진리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이은정 

   

레닌의 철학과 정치적 실천에 대한 재해석/재평가를 담은 17편의 글 가운데 내가 맡은 건 지젝이 쓴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적 이성에 맞서' 하나이다. 다른 역자들, 특히 역자들을 대표해 '옮긴이의 글'을 쓴 이재원씨나 가장 어렵고 많은 분량의 텍스트들을 옮긴 한보희씨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고는 아니었다(그럼에도 편집부를 애먹게 했지만). 지젝의 텍스트는 이렇게 시작한다(이 서두는 <시차적 관점>의 내용과 일부 중첩된다). 이후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에서 지젝은 주로 라클라우의 포퓰리즘론(<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과 대결한다.     

슬로베니아의 늙은 공산주의 혁명가 요제 유란치치의 운명은 스탈린주의적 왜곡의 가장 완벽한 은유로 꼽을 만하다.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했을 때 유란치치는 아드리아해 라브 섬의 한 강제수용소에서 유고슬라비아 포로들이 일으킨 반란을 지휘했다. 그의 지휘하에 2,000명의 굶주린 포로들은 단독으로 2천 200명의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체포되어 인근의 작은 골리 오톡(‘벌거벗은 섬’)의 악명 높은 공산주의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1953년 다른 죄수들과 함께 1943년 라브섬에서의 반란 10주년 기념비를 세우는 데 동원되었다. 요컨대, 공산주의자 죄수로서 유란치치는 그 자신이 지휘한 반란을 위한, 곧 그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운 셈이다. 만약 ‘시적 불의’(이 경우엔 ‘시적 정의’가 아니다)라는 게 있다면, 유란치치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실 이 혁명가의 운명이야말로 스탈린 독재시절 전체 인민의 운명, 처음엔 혁명을 통해서 구체제를 영웅적으로 전복시키고, 그 다음엔 새로운 규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혁명적 과거에 대한 기념비를 강제로 세워야 했던 수백만 인민의 운명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 혁명가는 그 자신의 운명이 전체의 운명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아주 탁월한 ‘보편적 단독자’이다.   
여기서 진정한 과제는 10월 혁명의 비극을 사유하는 것이다. 곧 그 위대성, 유례없는 해방적 힘과 함께 그것이 스탈린주의로 귀결된 역사적 필연성을 동시에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혹에 맞서야 한다. 하나는 스탈린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우발적인 일탈에 불과하다고 보는 트로츠키식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 기획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전체주의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트로츠키에 대한 최고의 전기를 펴낸 아이작 도이처는 그 셋째 권에서 1920년대 말 강제 집산화와 관련하여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외부를 향하여 확장하는 데 실패하고 소련 안으로만 한정되자 혁명의 역동적 힘은 내부로 향하게 되고 소비에트 사회의 구조를 한 번 더 폭력적으로 재구축하기 시작했다. 강제적인 산업화와 집산화는 혁명 확산의 대체물이 되었고 러시아 부농계급(kulak)의 일소는 국외 부르주아계급 타도의 대용품이 되었다."(127-8쪽)

 

마지막에 인용된 아이작 도이처의 책은 '트로츠키 3부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5), <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6),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 2007)로 번역돼 있다. 그 셋째 권은 물론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를 가리키는데, 책을 갖고는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조해보진 않았었다. 미주를 보니 편집부에서 해당 쪽수를 찾아놓았다. 이렇게 번역됐다.  

"러시아혁명의 충격이 유럽에서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 추동력은 아직 소진되지 않았음이 판명됐다. 그러나 그 추동력이 밖으로 작용하거나 확장되지 못하고 소련 안으로 응축되면서 내부지향적인 것이 되고 다시 한 번 격렬하게 소련사회의 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강제적인 공업화와 집단화가 혁명의 전파를 대체하게 됐고, 러시아 쿨라크의 해체가 해외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전복을 대신하는 대용품이 됐다."(166-7쪽) 

이하 '오늘날의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10. 01. 24. 

P.S. 교정을 한 차례 보긴 했으나 잘못 옮기거나 이해한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용한 대목에서도 "새로운 규정의 노예가 되어"란 말은 "새로운 지배의 노예가 되어"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옮길 때는 'rules'라고 복수형으로 돼 있어서 '지배'란 단어를 피했었다). 그리고 134쪽에서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 등가적 요구의 사슬에 엮어 들어갈 수 있다."는 "야만적인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조차도, 포퓰리즘 등가적 요구 사슬에 엮여 들어갈 수 있다."로 수정돼야 한다. 교정시에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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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5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과 개인의 기억은 여진처럼 사라지지 않군요. 개인의 마음속에서 의심을 품었던 그 힘들이 물방울처럼 모여 새로운 변혁의 힘으로 작용하군요.

로쟈 2010-01-25 09:25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기표의 문제입니다. '레닌'이란 이름을 호명하고 소환하는 문제...

2010-01-2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혁명의 시대, 레닌을 생각한다

2009년에 이어서 2010년에도 '1월의 책'은 '레닌'이다. 두툼한 분량의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부제는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아래가 원서의 표지이고, 번역본의 표지는 좀 크게 넣었다.
 

 

<레닌 재장전>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에 이어서 개인적으로는 '레닌 시리즈'의 '3탄'쯤 되는 책으로 평하고 싶다. <레닌 재장전>의 원서 목차와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http://books.google.co.kr/books?id=YCk5GA0QhrYC&dq=Lenin+Reloaded&printsec=frontcover&source=bn&hl=ko&ei=BiE_S_H5G5CgkQWpjM36CA&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4&ved=0CCkQ6AEwAw#v=onepage&q=&f=false 를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한 꼭지 번역에 참여했는데, 어떤 모양새의 책이 나올지 궁금하다. 다른 역자분들과 편집진의 노고와 마음 고생이 많았다. 조만간 축하의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 

10. 01. 14.  

P.S. 책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책이 나오는 대로 풀어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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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혁명의 교훈과 레닌주의적 제스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4 10:55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드디어 출간됐다(아직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알라딘에도 입고돼 있다). 책은 어제 배송받았는데, 표지가 깔끔하고 책도 분량에 비해 가벼운 것이 마음에 든다. 속표지(표2)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1월 '번역자 간담회' 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췌돼 있다(7명의 역자 중 5명이 참석했었다). 사진은 마티출판사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지난달 중대 대학윈신문의 기획대담에 응한 적이 있는데, 대담 내용이 기사화되었기에 옮겨놓는다.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과의 대담이었다. 편집위원의 질문에 두 사람이 대답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읽어보니 교정을 봤다면 수위를 조절했을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슈화'는 저널리즘의 숙명인가 보다...   

중대 대학원신문(09. 12. 02) 사유의 레드바이러스, 지젝을 말하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고민하게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참여방식과 방향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통해 이 시대에 ‘공부를 한다는 것’의 의미와 ‘지식인의 자세’에 관해 고민해본다. <편집자주>

  

●대담 일시 및 장소: 2009.11.19, 서울대입구

●대담자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의원, 난곡연구소의 연구원이자 지젝 전문 번역가
             이현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이자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 운영중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젝을 읽는다는 것이 ‘공부’라는 행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이성민 제가 요즘 세대를 보면 확실히 조금만 어려워도 책을 못 읽더라고요. 지젝이 이런 독서능력 부족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젝 책을 읽다보면 난해하면서도 끝까지 읽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헤겔이나 칸트 같은 다른 사상가들을 매력적인 누군가로 만들기도 하고요. 심지어 진지한 학문접근 대상이 아닌 영화나, 광범위하게 말하면 현실에 대해서 ‘여기 무언가 읽어내야 할 것이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하니까요. 이런 읽어내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현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선택하는 것처럼 하나의 ‘결단’이라고 생각해요. 80년대에는 독서가 의무이자 부담이었다면, 지금은 독서가 ‘선택’인 것 같아요. 읽지 않는다는 것은 파란 약을 선택하는 것처럼 안온하고 체제 순응적인 상태에 자족하는 거예요. 적어도 대학원생이라면 전투적이고 적극적인 책읽기가 필요해요. 스스로가 강제할 수 없으면 서로가 서로를 ‘갈궈줄’ 수 있는 친구나 선배가 필요한 거죠. 대학원에서도 요즘은 지젝의 ‘관용적 아버지’처럼 “네가 선택해서 공부해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포장되기는 자유로워 보이죠. 그보다는 무자비한 선배나 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이해 못하면 때려주기도 하는. 

이성민 그런 측면에서 지젝이 어떤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젝을 발견하기 직전에는 공부에 대한 욕망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를 읽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새로운 독법이 안 나와서 칸트, 헤겔이 이미 낡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을 때, 지젝이 그들을 다시 읽어 근본적 물음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여겼거든요. 

이현우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에요. 비평이란 게 다시 읽도록 요구하는 것이거든요. 아감벤이 말하듯 현재 ‘정치’ 내지는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고, 지젝은 그게 ‘행정’으로 대치된다고 표현해요. 그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하는 개념적 범주가 다 낡아빠져서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지시대상이 텅 비어있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야 되죠. 그런 개념창출이 저는 공부라고 생각해요. 또 그런 걸 도와줄 수 있는 멘토를 찾는 게 중요하죠. 아감벤이든지 지젝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고 자신을 다음 단계로 끌어줄 수 있는 역할. 사고의 바이러스 역할이랄까요. 신종플루 걸리면 열이 나듯이 맹렬하게 공부하겠다는 자극을 주죠.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공부의 절박함’이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현우 지금의 정세 속에서 사고하지 않으면 자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죠. 사르트르가 드는 예가 있잖아요.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편모슬하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셔야 하냐, 활동을 해야하냐’고 질문하니까 사르트르는 ‘네가 선택하고 책임져라’ 그렇게 답변하는데, 지젝은 ‘너의 어머니한테 가서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고 레지스탕스에 가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그래라.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라.’ 그러니까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은 굉장히 절박한 선택이에요. 레지스탕스 운동과 맞먹는 공부이고 어머니를 혼자 보살펴야 하는 그 절박함을 견딜 수 있는 공부죠. 도피적인 공부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책임을 최대한으로 끌어안기 위한 공부이고요. 대학원생이 현실에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게 필요해요.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현우 레닌이 나폴레옹을 인용하면서 한 말이 “알기 때문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 알게 된다”는 거죠. ‘공부해야지’하고 10개년 계획과 마스터플랜 세워서 공부하는 건 난센스고, 일단 하나 닥쳐서 해보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알게 되요. 그게 일상과 유리되지 않는 공부겠죠.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바뀐 생각이 새로운 공부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이성민 계속 공부를 한다면 앞으로 정치계나 연예계가 아니라 학계에 소속될 텐데, 이곳에 남아서 나와 같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흥미로운 논쟁과 토론을 하며 살 거라면, 다른 곳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해요. 특히 정치 쪽에 너무 관심을 갖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학계가 이 모양이기 때문에 정치가 저 모양인 거예요. 학계나 정치가 각자의 할 몫이 있는데, 정말로 공부를 할 사람이라면 나를 기준으로 학계를 판단해야 돼요. 그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죠. 학계의 무엇이 문제고 학자들이 무엇을 공부하지 않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현우 전 초점이 약간 다른데요. 학문과 공부를 구별을 해서 본다면, 제도권 대학에서의 ‘학문’과 달리 ‘공부’는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비단 적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저항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고 사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공부가 더 왕성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이성민 그건 다른 말로 하면 학계의 기능은 포기하겠다는 게 아닌가요? 특히 인문학이요. 

이현우 흔히 전공자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게 사실 어떤 직업을 얻기 위한 공부를 요구하죠. 특히 논문 편수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 그런데서 좀 자유로울 수 있는 어떤 공부가 필요하다고 봐요.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면 ‘내파적인 공부’죠. 영문학 한다면 반영문학적인 영문학 같은. 지금 학계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성민 선생님과 제가 좀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거 같은데, 오늘날 대학이 형편없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는데, 본디 학문의 이념이 그런 것은 아닐 거 아니에요. 오늘의 학계가 그런 학문의 이념을 놓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는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아니라(다른 것이 필요하다)고는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이현우 대중지성이란 말도 쓰고 그러잖아요. 저는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관리되는 학문으로서의 공부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위 인민주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민들이 주권자로서의 학습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교양이나 독서 같은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전문적인 영역의 공부가 필요하지만, 그걸 떠받칠 수 있는 평균수준의 일반 대중의 공부도 필요하고, 그 거리는 좁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가령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두가 다 아는 작가잖아요. 그런데 그에 관한 논문을 소수 전문가들만이 읽고 토론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요. 누구나 읽는 작품이라면 그에 관한 논의도 일반화되어야 한다는 거고 그러자면 ‘위’에서도 조금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이성민 어떤 전문적 지식인 집단이 있고, 이들이 고급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폐쇄적이기 때문에 아래와 소통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모든 가정의 전제는 ‘위’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제가 보기엔 그런 것은 없다고 보거든요.   

이현우 그건 이성민 선생님 기준에서 그런 거고, 일반 대중들은 박사, 그러면 굉장히 권위있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이성민 그래서 번역을 해야 되요. 들뢰즈와 바디우와 지젝을 번역해야 되는 거죠.

지젝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숨기기 때문에 ‘수동적인 철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또 ‘행위’를 통해서 현실을 돌파해야한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접합될 수가 있을까요? 

이현우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임시노동직이 한 달을 일하고 해고됐어요. 몇 사람이 이걸 문제로 지적했고 알라딘 불매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저는 불만스러웠던 게, 사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다 그렇게 되어있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놀랍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알라딘에 항의를 하고,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게 웬 순수한 가장인가, 이게 과연 시급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성민 그럼 결과는 악으로 나타나겠죠. 시작은 선이지만. 지젝의 말마따나 하면 할수록 악화된다고, 제발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전에 신문불매운동을 했을 때 가장 손해를 본 곳이 제가 알기로는 <경향신문>이에요. 광고주들이 광고를 특정 신문사만 안하는 게 아니라 신문사 전체에 안하기 때문에.  

이현우 그러니까 ‘나는 옳은 행동을 할 테니 뒷감당은 니들이 해라’는 식은 안 되는 거죠. 전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어요. 선한 행동이 항상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기부하는 것에도 이면적 기능이 있어요. 전체적인 것에 책임을 지는 것을 고려하라는 거죠. 국지적인 선행이 전체적인 국면에서 오히려 마이너스나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저는 소위 자칭 급진좌파라고 포지셔닝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답답함을 느끼는데, 그 사람들은 주된 목적이 좌파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확인인 것 같아요. 노무현이나 이명박 이나 똑같으니 나빠질 게 없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은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죠. 

이성민 그렇죠. 정작 떠맡아야 할 것을 안 하는 거죠.  

이현우 김규항 씨가 최근 칼럼에서 “너희가 이명박을 욕하지만, 너희 안에 이명박 있다.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욕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는데, 막상 다르게 사는 게 뭔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요. 그러면 아이들 학교를 보내지 말건가? 학원에 안 보내는 정도가 다른 삶인가? 구체적인 상이 없어요. 아주 래디컬한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종 자체가 생태계에 암적 존재잖아요. 가장 좋은 것은 터미네이터처럼 스스로 사라져주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런 선택지를 얘기하는 거냐. 대한민국에 저항하는 극단적 방법 중 하나가 자살하는 거 아녜요. 산다는 거 자체가 타협이죠. 무엇이 정말 급진적인 선택인가, 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 확인의 포즈만 잡는 것은 문제라고 봐요.

지젝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격차와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이런 시각에서 우리 사회에 당면한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  

이성민 민주주의는 어떤 막다른 곤궁이기도 한데, 정신분석에서는 곤궁의 지점이 바로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의 지점이라고 보고 있어요. 저는 우리 사회에 라캉과 지젝처럼 일종의 ‘사회적인 정신분석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체를 탄탄하게 만들지 말고 주체를 자극하는 사람들. 우석훈 씨가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현우  그건 우석훈 씨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우리가 그를 일종의 알리바이로 만드는 거죠. 진중권 씨도 마찬가지고, 한 사람에게 그런 역할을 몰아주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면제하는 거예요.  

이성민 그건 우리사회에 사회적 분석가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입지가 굉장히 좁기 때문인 거죠. 그리고 요즘은 말이 힘을 잃은 시대라 그런지 ‘선생’이라는 용어가 욕처럼 부정적으로 쓰여요. 꼰대라고 하나? 가르침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존중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 같아요.  

이현우 우리 애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데 선생님은 ‘교육 서비스업’을 한다고 생각해요. 마치 과외 교사를 ‘아, 나한테 안 맞는 거 같아’라고 판단하듯 하는 건데, 우리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이성민 그런데 외적으로 부과되는 권위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포기한 것은 잘한 거라고 봐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나간 거죠.  

이현우 저는 권위적인 어떤 포즈는 필요하다고 봐요. 아까 공부에도 강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듯이, 교사나 부모나 그런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는데, 그냥 방치해버리는 거죠. 그냥 솔직하게 ‘교사 별 거 아냐, 난 니네랑 똑같아’ 그런 포즈. 저는 노통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얘기한 게 제일 불만족스러웠어요. 저는 그런 포즈를 취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해요. 뭔가 가장하고 연기할 필요가 있었던 건데, 그걸 싫어했던 거잖아요. 저는 교사도 그게 큰 손실이라고 생각해요. 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민주적인 학습형태도 얘기하지만…. 

이성민 그런 포즈를 취하는, 어떤 새로운 주인을 향한 욕망은 있어요.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그런 욕망은 계속 살아남는 건데.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다른 권위를 원해요. 그런 권위주의적인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 주인이 아니면서 어떤 자극을 줄 수 있는 포지션. 지젝이라면 레닌과 예수가 그런 사람이라고 볼 텐데,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의 담화가 사회 속에서 일반성을 가져야만 주체들이 변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죠. 그거 말고는 개인적으로 별로 뾰족한 해결책이 안보여요. 

이현우 해결책이 없는 대신에 낙관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전략적 차원에서의 낙관. 전망이 없다는 것은 다 알지만 그럼에도 낙관하는 태도. 

이성민 우울증을 앓는 것 보다는 낫죠(모두 웃음). 

09.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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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앞 < 전상서>
    from 꼴초의 서재 2010-01-02 00:19 
      [뭡니까? 문제의 그 글엔 댓글도 못 달게 막아 두시다니.. 다른글은 삭제해 버리고.. 이쯤되면  할 말이 없소이다. 님의 파워의 실체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겁니까? 할수없이 내 블로그에 올려놓지만 논쟁과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철학은 더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금방  바닥 드러나는 사상누각일 뿐입지요. ~] 님! 정말  말장난이 뭔지 지대루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 우리 타이 풀
 
 
펠릭스 2009-12-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움직이다 쓸어질 네 이름이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니, 다시 일어서서 찾고 찾아라, 쓸어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너머 너네들이 지극하게 저항하며 참고 성실하게 계획하여 부딪쳐라. 그리고 혼자 가서 공부하라!

로쟈 2009-12-04 09:19   좋아요 0 | URL
공부도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가며 하는 것이죠...

2009-12-05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감벤과 도래해야 할 정치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글에 대해서는 두 역자가 자세한 해제(간주곡)를 붙이고 있어서, 나로선 '삶-의-형태'와 ''인권을 넘어서', 정치에 관한 노트' 등의 장을 중심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한겨레21(09. 11. 30) 벌거벗은 난민의 생명에서 탈주하라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 2008)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목적 없는 수단>(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09 11. 23.  

P.S. '인권을 넘어서'란 노트에서 아감벤이 주장하는 바를 좀더 적으면 이렇다.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리고 적어도 국민국가와 그 주권이 와해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난민은 오늘날 도래하는 정치공동체의 형태와 그 한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이다. 만일 우리가 맞닥뜨린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것의 주제를 대표해온 근본 개념들(인간, 권리를 가진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인민, 노동자 등)을 지체 없이 포기하고, 난민이라는 이 둘도 없는 형상에서 우리의 정치철학을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25-26쪽) 아감벤의 '난민'은 우리의 '철거민'으로 다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철학' 또한 철거민에서 바로 재구축되어야만 하리라. 그러한 정치철학이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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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2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인 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영전을 들고 한 발 한 발 걷는 모습은 참답합니다. 주검을 넘고 저 검은 구름사이를 향할때,,아이들(자식)은 어찌 마음을 다 잡겠습니까!

2009-11-24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4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