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01 | 102 | 103 | 10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어지는 페이퍼인데,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행을 돌이켜보면서 정리하기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보 여행이 아닌 기차 여행이었기에 내가 여정은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 떨어지자 역사에 상징처럼 서 있는 표트르 동상 앞에는 페테르에 있는 후배들이 마중나와 있었다(거의 동일한 역사 구조인데, 동상으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역사는 구별된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에는 레닌동상이 서 있다). 아래는 '모스크바'역의 야경.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때의 기록을 잠시 따라가본다: "며칠 전 소시지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났다는(그래서 못나온) 후배가 집에서 저녁을 준비해놓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네프스키) 거리와 바로 통한다. 넵스키의 밤거리는 보도블록 공사를 하느라 좀 어지러웠는데, 함께 간 후배가 '남대문 시장 같다'는 얘기는 하는 바람에 페테르의 문화시민들에게 핀잔을 들었다(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페테르를 보통 문화의 도시라고 지칭하며 장사꾼들의 도시인 모스크바를 보통 무시한다). 택시는 네바강을 건너서 바실리 섬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더 달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페테르의 거의 끝에서 끝까지 타고 온 셈이었다(나중에 버스를 타보니 종점에서 종점이었다)." 아래는 그 넵스키 거리의 이미지이다(이 거리를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고골의 '넵스키 거리'이다. 이 거리명은 '네바'강에서 따온 것이다). 흑백 사진은 1906년의 넵스키 거리. 이하에서는 여행기를 간추린다.

 

 

다음날 아침 늦게서야 식사를 하고 우리는 투어에 나섰다. 페테르부르크 초행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첫번째 목적지는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었다(참고로, 학생증을 소지하면 에르미타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이다). 소장 작품들을 전부 보려면, 5 7개월이 걸린다는 둥, 10년이 걸린다는 둥 하도 전설이 많은지라 우리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3시간만 돌기로 하고 후배의 가이드를 받으며 인상파의 그림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상파부터 둘러보기로 시작한 게 아니라,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인상파 그림들이 튀어나왔다. 19-20세기 프랑스 회화 방부터 돈 것이다(143-146번 방). 아래 사진이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는 에르미타주박물관이다.  

 

 

여행안내 책자인 'Lonely Planet'을 참조하면(여행안내서로서 훌륭하다. 에르미타주의 경우 각 방별로 소개돼 있다), 고호, 고갱을 비롯하여 이 방에 있는 모네, 드가, 르느와르, 세잔, 피카스, 등의 그림 74점은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훔쳐온 것이다(물론 원래 독일 것이 아니고, 독일은 프랑스에서 훔쳐왔다). 이 그림들을 러시아에서는 50년 동안 입다물고 보존하고 있다가 종전 50년이 되는 1995년에 숨겨진 보물들의 전시회를 개최했다(그러니까 이 그림들이 에르미타주에서 전시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안된다). 물론 '가진 자가 임자'라고 그 시점부터 소유권은 러시아로 넘어와 있다(프랑스도 훔쳐온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걸 가지고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서 이득이 될 게 없다). 하여간에 이 그림들을 포함해서 대표적인 전시물들은 에르미타주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두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3시간의 관람에서 이런저런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구경했지만(그리고는 <포켓용 에르미타주>란 책을 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푸슈킨과 동시대인이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가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이다('Portrait of Henrietta Sontag', 1831). 다음날 이곳의 전문가이드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니까 그림이 걸려 있는 방번호와 위치까지도 정확히 기억해내고 있었다(내심 자기도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하여간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학 1학년 때인가 방에 걸어놓았던 듯하다(내 방에는 선물로 받았던 시슬레의 풍경화와 함께 이 여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니 그녀는 잊혀진 여인이다. 그런데, 17년이 지나서, 먼 객지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그것도 오리지널로). 물기를 약간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여인을, 나는 앞으론 오래도록 잊지 못할/않을 것이다(그래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았다!). 우리가 걸작들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인연의 그림들이다.

 

여정을 조금 건너뛰어서 푸슈킨시로 향한다. 푸슈킨시는 원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이란 뜻)라고 불렸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여름궁전)이 위치하고 있다(이 궁전은 소설 <대위의 딸>의 결말 부분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궁전과 연결되어,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특수학교, 리체이가 위치하고 있는바, 푸슈킨은 그 학교의 제1회 입학생으로서 6년간의 요람기를 보내게 된다(입학 동기생은 30). 그걸 기념하여 이 차르스코예 셀로는 1937, 시인 사망 100주년을 맞아 푸슈킨시로 개명된다. 일정상 여름정원과 푸슈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 일행은 푸슈킨을 골랐다.  

이 리체이 건물 역시 지금은 푸슈킨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4층짜리 건물에는 학생시절 푸슈킨의 스케치 그림들과 함께 성적표 등이 보존돼 있고(4층에 있는 그의 기숙사방은 내 방보다 작았다), 박물관 가이드들은 푸슈킨이 앉았던 책상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얽힌 각종 일화들을 유머와 감동을 섞어가며 설명해준다. 하지만, 기대만큼 잘 꾸며진 박물관은 아니었는데, 푸슈킨이 1815 1월 상급반 시험장에서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제르자빈(1743-1816)을 앞에 두고 전해의 가을에 쓴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을 낭송함으로써 일약 2의 제르자빈으로 호명된 문학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인상을 더욱 굳게 했다. 문화적 신화는 러시아의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I. Repin, 1844-1930)의 그림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 속에서도 전승되고 있는데, 소위 러시아 국민문학이 탄생하는 장면이다(아래 그림).

 

 

푸슈킨시는 페테르부르크 남쪽으로 25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시내로부터 가는 데는 40-5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교외로 빠져나가서 20분쯤 차를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푸슈킨 동상과 함께 <푸슈킨>이란 표지판이 등장하는 데(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 동상으로 유명한 것은 러시아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다), 우회전해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림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이 푸슈킨시의 리체이 박물관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궁정 앞의 정원은 기대 이상이었다(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궁전 안은 둘러보지 않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을의 차르스코예 셀로는 각종의 조각상들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오리떼들이 뛰놀고 있는 호수의 정경이 눈길을 끌었는데, 푸슈킨이 <예브게니 오네긴>(1831)에서 자신의 시들을 물오리떼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바로 그 호수였다. 여제(女帝)의 궁전이 서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날 저녁은 네바강변의 일식집에서 보드카를 양껏 마셨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이 네바강에 한번 빠져봐야 한다고 손님을 독려했지만, 물에 빠지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여름이었다면 도전해봤겠지만).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저녁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오후 시간을 친구와 함께 도스토프예프스키의 행적을 찾아 다니며 보냈다. 먼저, 지난번에 얘기한 쿠즈네츠느이 5번가의 박물관을 찾아가서 1시간 동안 안내 테이프를 들어가며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방과 그가 생활했던 방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새삼스러운 그의 작품세계가 아니라 그의 생활이었다(아래 세번째 이미지가 도스토예프스키 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속기사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두번째로 결혼한 이후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1870,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을 전후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첫아이와 막내 아이는 일찍 죽는다(1868 2월에 태어난 첫딸 소피야는 그해 5월에 죽고, 1875년에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알료샤는 78 5월에 죽는다). 특히 알료샤의 죽음은 작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안나의 회고에 의하면, 남편은 곧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을 병적일 정도로 사랑했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묘사하는 절절한 장면이 나온다). 성격이 괴팍할 것 같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지만,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아빠여서 그는 언제나 저녁식사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당연히 낮에는 집필에 몰입할 수 없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11-12시부터 서재로 들어가서 아침시간까지 소설을 집필했다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그림인 라파엘의 성모상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선물한 것이라 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해서 느낀 건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할 수 없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 그걸 관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형이상학적 고뇌만을 흉내낸다고 해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과 염려이다. 그의 소설이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리얼한 소설이 되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작가의 성실한 아내, 안나의 책상에는 남편의 작업량과 원고료 등이 빼곡하게 적힌 가계부가 놓여 있었다(안나는 작가 톨스토이도 부러워한 작가의 아내였는데, 사실 톨스토이의 아내 또한 객관적으로 말해서 조강지처였다. 하다못해 그녀는 아이를 열셋이나 낳았다! 하여간에, 악처를 요구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작가에게는 처복이 좀 있어야 한다). 작가의 사후에 쓴 그녀의 회고록은(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최근에 안 것이지만, 그의 딸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쓴바 있다(좀 얇은 책이다). 아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나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란 큰 지도와 함께 같은 제목의 팜플렛을 샀다. 팜플렛의 말미에는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술학교에 다니기 위해 형 미하일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1837(그의 어머니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부터 1881년 사망할 때까지의 주소지들이 적혀 있는데, 모두 22곳이다. 1867 2월 안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14년의 결혼생활 중 8차례 주소지가 바뀐다(그러니까 7번 이사했다).

 

 

내가 박물관에 이어서 찾아간 곳은 결혼 바로 직전에 그러니까 1864년부터 67년까지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을 쓴 집인데, 이전 지명은 메샨스카야 거리의 알론킨의 집이었지만 현재의 주소는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 7번지이다. 이 건물의 벽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상 부조와 함께 <죄와 벌>의 씌어진 곳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몇몇 지명을 찾아 나섰는데, 정확한 주소를 안 가지고 있어서 약간 애를 먹었다. 사실, S. 벨로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2002)란 책에 주소들이 다 나오는데, 나는 방심하고서 그 책을 안 갖고 갔던 것. 팜플렛에서 대략적인 주소와 판화 그림만을 찾아가지고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소냐의 집과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은 카즈나체이스카야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 730걸음 떨어져 있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찾아나섰는데, 걸어서 간 게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가는 거라서 오히려 더 찾기가 힘들었다. 친구와 합의를 봐서 어느 집이겠거니 하고 찍었지만 맞는지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참고로, <죄와 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재의 주소를 벨로프의 책을 참조하여 밝히면 이렇다.

 

<라스콜리니코프 그라주단스까야 거리 19번지>

enlarge

 

<전당포노파 그리보예도바 운하 104번지>

enlarge

 

<소냐 그리보예도바 운하 73번지>

enlarge

 

<포르피리의 경찰서 발샤야() 포쟈체스카야 거리 26번지>

enlarge

 

대략 그런 것이 나의 공식적인 여행 일정이었다. 투어 첫날 카잔성당과 이삭성당 등을 둘러보고,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있었던 원로원광장(지금은 제카브리스트 광장)을 거쳐서 네바 강변의 청동기마상(푸슈킨의 <청동기마상>을 모른다면, 이 동상을 구경하는 일도 별 의미가 없다)을 구경한 다음에 넵스키 거리를 종주한 일 등은 따로 기록하지 않겠다. 아래 이미지가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의 1782년작 '청동기마상'. 오른쪽은 알렉산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가 그린 <청동기마상>의 삽화(1904). 에르미타주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청동기마상'에 대해서는 따로 그에 걸맞는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여정을 마무리하자.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서 내가 탄 모스크바행은 밤 9 55분발 열차였다. 플랫홈까지 친구가 배웅을 나왔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열차는 정시에 또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스르르 플랫홈을 출발했다. 밤기차라 침대차였는데, 내가 끊은 건 좀 싼 6인용이었다(역시 13,000원 가량). 그보다 비싼 건 꾸페라고 해서 4명이 한 객실에서 타고 가는 식이다. 6인용이라고 한 건 통로쪽으로 2층짜리 잠자리가 더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따름이고 이건 객차 전체가 그냥 다 개방돼 있다. 침대보 등의 침구는 30루블(1,200)을 주고 객차 승무원에게 사와서 잠자리는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자리가 위층이었는데, 대략 옆에서 하는 걸 보고 나름대로 처음은 아닌 듯이 행세하며 잠자리를 만들고는 누웠다. 8시간쯤 앉아서 가면 어떠랴 싶었는데, 눕고 보니까 역시 누운 게 편했다. 게다가 조명도 끄기 때문에 책을 읽을 형편도 아닌지라 나는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View along a River (still Sparrow Hill)

 

기차는 5 55분에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그라드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한 시간 전에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고 승무원들이 침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즉 자기 잠자리를 정리해서 다시 반납해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종착역에 이르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방송도 없었고 승객들은 알아서들 내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지하철을 타고 슬레두유샤야 스딴찌야-(다음역은-입니다)란 낯익은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비로소 모스크바에 안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몇 달 정이 붙은 지라 모스크바가 내겐 더 편한 느낌을 준다(사진은 모스크바국립대학이 있는 '참새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의 전경.하절기에는 유람선이 왕래한다. 본래 더 장쾌한 이미지를 축소할 수밖에 없어서 아쉽다). 남성명사인 페테르부르크와 달리 모스크바는 여성명사이다. 여자들은 화려한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더 좋아할 만하지만, 남자인 나로선 수더분한 모스크바가 더 맘에 든다. 모스크바(=여자)는 페테르부르크(=남자)의 미래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06. 01. 28-29.

 

P.S. 연휴가 지나면 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지 딱 1년이 된다.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에서의 추억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현재'가 아닌 '추억'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정도이다. 나이 먹는 일에 대해서 내가 별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주변의 눈총 속에서 그나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2006년의 오프닝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메인이벤트'로 넘어가야겠다. 아시겠지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승주나무 2006-01-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어린이를 학살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오싹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던져올리고 칼을 받친다든지, 아이와 얼굴을 한참 맞대다가 해맑게 웃기 시작하면 방아쇠를 당긴다든가 하는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장면인 것 같군요. 즐거운 설 선물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6-01-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로소지음'이라고 하는데,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6-01-3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들의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문제이지만, 채산성을 앞세워 절판시키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유유상종하는 수밖에요...

털세곰 2008-01-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위의 뻬쩨르부르그 도-끼와 "죄와 벌" 주변의 파노라마 사진들, 어디서 좀 더 크고 "장쾌한" 버전으로 구할 수 있나요...? 예전에 뒤져보다 저도 어디선가 보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수가 없네요. 러시아쪽 인터넷이 그 열악한 인터넷 사정에 비춘다면 컨텐츠는 정말 우리보다 풍부하고 압도적인데 이상하게 사진 등의 이미지는 확실히 약하더군요. 혹시 원본 옮겨오시면서 줄이고 하셨으면 원본 어디서 구할수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
 

설 연휴를 맞아 아침부터 일찍 채비를 차려서 어머니댁으로 왔다. 1시간 거리이기에 '민족 대이동'과는 거리가 멀며 하룻밤을 자고 내일 오전이며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특별히 수고스러운 것도 아니다. 차례도 없는 탓에 어른들께 새배를 드리는 것과 김치만두만을 잔뜩 빚어서 두어 끼를 해결하는 것이 집안의 행사를 모두 가름한다. 이런 명절이면 으레 만드를 빚어먹는 게 집안의 내력이며, 이제 만두 속만 다 준비되면 곧 '장정'에 돌입하게 된다(조촐한 식구이지만 보통 200-300개는 빚어야 한다). 그런 틈틈이 이런 페이퍼를 쓸 수 있는 건 지난 가을에 어머니댁에 컴퓨터(와 인터넷)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재작년 가을/겨울에 모스크바에서 써놓은 글을 다시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오늘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忌日)이고 내일은 푸슈킨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력의 경우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1월 28일에, 그리고 푸슈킨은 1837년 1월 29일에 (이틀 전에 입은 결투에서의 총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각각 2월 9일과 10일이 되며, 러시아에서의 기념행사는 이때에 맞추어 치러진다.

 

enlarge  

 

작년 이맘때 나는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귀국 준비에 마음이 바쁘던 차였는데, 맨마지막으로 띄운 모스크바통신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바로 며칠 전 1월 29일을 돌이키며) "그날은 구력으로 푸슈킨의 사망 168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푸슈킨은 1837 1 27일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이틀 후인 29일에 숨을 거둔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2 10일이 되는바, 이날엔 그가 죽은 집(현재는 박물관인, 페테르부르크의 모이카 12번지)에서 매년 기념행사가 치러진다." 위의 사진이 모이카 강변 12번지이며 왼편 출입문이 푸슈킨 박물관의 입구이다. 에르미타주박물관으로부터 도보로 15-20분 정도의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왼쪽 이미지는 푸슈킨 박물관. 마당에 그의 동상이 하나 서 있고, 이 2층짜리 건물이 시인의 마지막 저택이자 그가 숨을 거둔 곳이다(재작년 가을에 나는 이 마당까지만 들어가봤다. 둘러볼 당시엔 무슨 행사로 인하여 박물관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았었다). 그리고 오른쪽 이미지는 죽기 이틀전 그러니까 1837년 1월 27일 푸슈킨이 단테스와 결투한 장소. 아래는 그걸 수평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사진인데, 두 결투자가 서 있던 자리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이미지는 결투에서 푸슈킨을 쓰러뜨린 단테스기 사용했던 총(단테스는 프랑스군 장교 출신으로 네덜란드 공사 헥케른의 양자였다).

 

 

 

하지만, 당시 나로선 설 연휴 이전에 귀국을 결정했던바, 아쉽게도 이번 러시아 체류기간에는 그 행사를 참관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날 나는 푸슈킨의 동상이 있는 푸슈킨거리의 푸슈킨광장에 가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시인에게 바쳤다(겨울이라 그런지 장미 한 송이에 120루블, 4,800원이었다. 꽃과 초코렛 선물에서만큼은 아주 유별난 게 러시아 사람들이다. 하지만, 러시아식 예법에 따르자면 붉은 카네이션 두 송이 정도를 바쳤어야 했다). 우중충한 날씨만큼 침울한 표정으로 시인은 여전히 건너편 맥도널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돌아서는 마음이 좀 무거웠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유명한 푸슈킨동상이다.

  

 

동상의 후면에 보이는 극장이 '러시아'극장으로 모스크바영화제의 개/폐막식이 개최되는 메인극장이다(재작년 여름에 유일한 한국영화 출품작 <귀여워>를 본 곳이기도 하다). 내가 동상을 마지막으로 보던 날은 좀더 어둡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이어서 단대의 계단이 미끄러워 단상에는 못 올라가고 눈덮인 계단에다 헌화했다. 참고로, 동상에 머리에 비죽 올라 있는 것은 비둘기나 갈가마귀 같은 새 종류이다(러시아의 회청색 동상들은 대개 이 새똥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이 푸슈킨 동상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러니까 대각선쪽에, 스크바에서 두번째로 매출이 좋다는 맥도널드가 있다(가장 매출이 좋다는 곳은 크레믈린에 있는 맥도널드).

 

모스크바의 이 푸슈킨 동상이 유명한 것은 시인의 사후에 최초로 건립된 동상이기 때문이다. 푸슈킨 사후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선배시인이자 문학적 후견인이었던 주코프스키를 중심으로 해서 나오지만,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거절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푸슈킨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80 6월에야 이르러서이다. 이 동상 단대에서 정면을 제외한 면에는 푸슈킨의 시 <기념비>(1836) 1-3연이 새겨져 있다(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데, 역시나 이 동상만 보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 제막 기념연설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별로 의미없는 구경이 된다(이 연설의 우리말 번역은 <작가의 일기>(벽호)와 <러시아 이념>(제이엔씨, 2004)에 실려 있다. 동상제막식에 운집한 군중을 찍은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서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당장은 큰 사이즈의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아서 작은 걸 옮겨놓았다. 마지막 이미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례식). 

나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노라,

그리로 가는 민중의 오솔길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고,

기념비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보다도 더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솟아올라 있다.

 

아니다, 나는 아주 죽지 않으리라 - 영혼은 신성한 리라 속에서

나의 유골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아 썩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영광을 얻으리라,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시인이라도 살아남아 있는 한.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

 

오 뮤즈여, 신의 뜻에 따르라,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왕관을 바라지 말 것이며,

칭찬과 비방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투지 말지어다.

 

Thumbnail of Dostoevsky's funeral

 

푸슈킨 주간으로 선포된 3일간의 기념행사 마지막 날에 행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에서 푸슈킨은 다시 예언자적 시인으로 호명되고, 위대한 천재로서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전 세계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시인으로 간주된다. 투르게네프를 비롯하여 여러 시인/문인들이 기념연설을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연설은 군중들을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으며 이렇듯 열렬한 반응에 대해서는 정작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조차 감동할 정도였다(때문에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다시 푸슈킨의 <기념비>로 돌아오면, 전체 5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의 1연에 나오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이 바로 궁정광장(현재 에르미타주박물관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화강암 원주이며(동생 니콜라이 1세가 형 알렉산드르 1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1834년에 건립했다), 푸슈킨은 이 시에서 자신의 사후 문학적 영광이 황제의 그것을 능가할 거라고 자부하고 있다. 시에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기념비’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념비(=황제의 기념탑)와 대조되는 것이다푸슈킨은 자신의 문학(행위)을 국가권력과 대응하게 맞세운 최초의 러시아 시인/작가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는 최초의 근대작가이자 최초의 망명작가이다.

 
이 시가 씌어진 곳도 아마도 모이카 강변 12번지인지 모르겠다. 푸슈킨이 생애의 마지막 1년을 살았던 곳이 바로 그곳인데, 모이카강은 네바강의 작은 지류이며(우리로 치면 청계천쯤 된다) 에르미타주에서 나와 모이카 강변을 따라서 10-15분쯤 걸어가면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저택에 이르게 된다. 생애의 마지막 1년이라고 했지만, 그의 방 시계는 1837년 1월 29일 그가 사망한 시각인 2시 45분에 맞추어 멎어있다. 아래 사진은 푸슈킨의 서재. 

 

 

 

푸슈킨의 죽음은 당시 전 러시아의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는바, 기록에 따르면 그의 결투 소식이 전해진 직후 1837 1 28-29일에 그의 집 주변에는 대략 2-5만 명의 문상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좁은 거리와 넓지 않은 마당을 보건대, 얼마나 대단한 인파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푸슈킨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요주의 인물로 간주했던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문상 인파에 놀라서 장례식 장소조차 비밀리에 변경하고 그의 6만의 군대로 하여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한편으로 그는 황제의 주치의를 푸슈킨에게 보냈고, 당시에 불법이었던 결투에 대해서 사면하며 마지막으로 러시아 정교식의 죽음을 맞을 것을 시인에게 당부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을 보살펴주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애꿎은 것은 시인의 아내 곤차로바를 황제가 은근히 좋아했었다는 점이다

 

 

아래의 두 이미지는 당대 절세의 미녀였다는, 시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1812-1863). 왼쪽은 1831년의 초상화인데, 푸슈킨은 곤차로바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곤차로바는 시인의 사후에 1844년 란스키 장군과 재혼했으며,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곤차로바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한다...

 

분량상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자리를 바꿔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06. 01. 28.

 

 

 

 

 

 

 

 

  

P.S. 푸슈킨과 곤차로바에 대한 읽을 만한 참고문헌은 한 일본작가가 쓴 <러시아의 사랑과 고뇌>(고려원, 1991)이다(체르니셰프스키 부부의 사랑 이야기도 읽을 만하다). 푸슈킨의 사생활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푸슈킨 비밀일기>(작가정신, 1997)도 흥미로운 자료이긴 하다.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이 책을 위작으로 간주하지만, 푸슈킨의 돈후안적 기질과 젊은 시절의 연애행각(?)은 결혼 이후 그의 '성생활'에 대한 (위작일 경우) 이러한 '추정'을 아주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는 연애시와 포르노그래피적 시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포르노적 이미지에 도용되는 것도 이유가 없지는 않은바, 최근에 발견한 오른쪽 이미지(*다운됐다)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푸슈킨이라면 분개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음학기 강의계획서를 올리기 위해 PC방에 왔다가(비가 온다는 핑계로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예전의 쓴 글들의 '편집' 작업만 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학의 학사정보 화면이 로그인 되지 않아 그냥 죽치고 않아 있는 신세가 돼버렸는데, 또 놀면 뭐하겠는가? 창고 정리라도 해야지. 역시나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인데,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과 레르몬토프의 시 '나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한 몇 마디 코멘트이다. '고독에 대하여'란 제목을 그냥 새로 붙여보았다. 아래의 글을 쓴 건 재작년 가을이고 러시아 TV에서 방영되던 <아비정전>을 보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가며 쓴 것이다.  

갑자기 ‘회고적’ 정서에 물든 건, 지금 STS채널에서 왕가위의 <아비정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열혈남아>가 나왔고, 그 전에는 <타락천사>가 나왔었는데, 당분간 왕가위의 영화들이 나올 예정인가보다, 하고 다음주 TV프로그램을 보니까, 아니다. 다음주에는 리안의 <와호장룡>이다.

<아비정전>은 내가 최초로 본 왕가위의 영화이며, 내가 단번에 매혹된 영화이다. 아주 옛날 대학가에서 하숙하던 시절에 동네 비디오점에서 주말이면 비디오와 함께 테이프 5편을 한꺼번에 빌려다가 밤새 보곤 했었는데, 어느 주말에 빌려온 테이프 중 하나가 바로 <아비정전>이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연거푸 봤는데, 이후엔 ‘왕가위의 모든 영화’이다. 그리고도 매년 생일쯤 되면 ‘청승맞게도’ 비디오방에 혼자 가서 이 영화를 봤다. 어떤 때는 동행이 있기도 했지만, 곧 다시 혼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 테이프를 아예 집에 소장하고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소장한 이후에는 한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열혈남아>는 <아비정전> 이후에 찾아 본 영화이다.

<중경삼림> 이후에 왕가위는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만의 왕가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비정전>뿐이라고 해야겠다. 이후에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을 많이 읽었고 거기에 대부분 수긍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러한 ‘상징적’ 읽기 이후에도 남아있는 어떤 잔여물이 있다. 지젝은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상징적인 중층결정’에 의해서, ‘은유적인 의미’에 의해서 다 설명될 수 없는 “라캉적 의미에서의 사물(Thing)”이라고 불렀지만,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잔여물이다.



영화에서 장국영이 '발 없는 새'의 우화를 얘기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거대한 잔해’도 남기지 않고 그냥 바람처럼 너울거리며 지나가버린다. 즉, ‘사물’ 대신에 거기에 있는 건 나르시시즘적인 맘보춤이고 허물(虛物; Nothing)이다(‘허물’은 ‘없지만 있는 것’이란 의미에서 ‘증상’에 대응한다). 해서 모성, 혹은 어머니-타자(mOther)의 부재에 관한 영화(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혼자가 된다. 즉 그들은 어떠한 2자적 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모두 울며 겨자 먹기의 나르시시스트들로 남는다)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물질적인 잔여물’이 아니라 허무/허물을 채우는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드디어, 양조위가 구두를 닦고 손수건을 양복에 꽂고 기름 바른 머리를 빗어 넘긴 다음에 외출했다(<아비정전>은 미완의 영화이다). 즉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타이틀이 올라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가버린다. 영화의 시작에서 장국영과 장만옥이 잠시 함께 했던 시간처럼(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 시간에 대한 기억 또한). 그 장국영도 “발 없는 새”처럼 어느 샌가 우리 곁을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아비정전>에는 “왕가위적 의미에서의 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며, 그것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요컨대, 왕가위의 영화들은 우리의 고독과 불가피한 나르시시즘의 증상이다.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왕가위의 영화들은 모두 외로움에 대한 영화이고 고독에 대한 영화이다(이건 왕가위의 ‘전속’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화관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들은 ‘해피 투게더’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가 당시에 유행하던 ‘홍콩영화’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면(유덕화와 장만옥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남자들/‘형제들’ 간의 ‘의리’였다), 두 번째 영화인 <아비정전>은 온전하게 왕가위만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고독의 기원, 이자적 관계(=투게더)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외상(=트라우마)이 놓여 있다. 그것은 모성의 부재, 혹은 모성과의 단절이다.

알다시피, 엄마와 아이간의 이자적 관계는 3자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상징적 정체성 이전에, 정서적 안정감 혹은 정서적인 정체성이 형성되는 기본관계이다. 따라서 엄마와 아이간의 안정적인 관계의 형성, 기본적인 애착관계의 형성은 이후의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인 안정감/신뢰감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자 바탕이 된다(즉 이자적 관계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 그런데, 엄마의 (너무 이른) 상실은 이러한 바탕을 미처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후에 아이는 상실한 이자적 관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반복적인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하며 불안해 하게 되는 것. <아비정전>의 영어 제목은 인데, 이때 ‘사나운’이란 뜻의 ‘wild’는 다르게는 ‘길들여지지 않는’이란 뜻이다.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은 멀쩡하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모두들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그건 정작 필요할 때 아무도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가 단지 유행/겉멋으로서의 ‘고독’을 넘어서는 대목이 있다면, 나는 그의 영화에 드리워진 이러한 외상적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나는 실제로 그가 모성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에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타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고독의 주제화는 문학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유리 레르몬토프(1814-1841)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이란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시인 또한 젊은 나이에 결투로 죽었는데, 그의 문학적 유언이라 할 만한 시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씌어진 '나 홀로 길을 나선다'(1841)이다(이 시에 가락을 붙인 곡이 우리 드라마에서 몇 차례 주제가로 사용됐었다. “브이하주- 아진- 야 나 다로-구”라고 느리게 시작하며 서정적인 음색의 여가수가 부른다. 이 노래만큼은 여가수들이 더 어울린다). 이 시를 러시아어와 함께 옮기면 이렇게 된다.

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
Сквозь туман кремнистый путь блестит,
Ночь тиха. Пустыня внемлет Богу,
И звезда с звездою говорит.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 속으로 자갈길이 빛나고,
밤은 고요하다. 황야는 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별들은 별들과 속삭인다.

В небесах торжественно и чудно!
Спит земля в сиянье голубом...
Что же мне так больно и так трудно?
Жду ль чего? Жалею ли о чём?
하늘은 장중하고 아름답구나!
대지는 푸른 빛 속에 잠들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Уж не жду от жизни ничего я,
И не жаль мне прошлого ничуть;
Я ищу свободы и покоя!
Я б хотел забыться и заснуть!
이미 나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와 평온을 찾고 있다!
나는 모든 걸 잊고서 잠들고 싶다!

Но не тем холодным сном могилы,
Я б желал навеки так заснуть,
Чтоб в груди дремали жизни силы,
Чтоб, дыша, вздымалась тихо грудь;
하지만, 무덤 속의 차가운 잠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잠들었으면,
생명의 힘이 가슴 속에서 조곤조곤 잠들어,
숨쉴 때마다 조용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게.

Чтоб всю ночь, весь день мой слух лелея,
Про любовь мне сладкий голос пел,
Надо мной чтоб, вечно зеленея,
Тёмный дуб склонялся и шумел.
밤새도록, 하루 종일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달콤한 목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내 위로는 영원히 푸르른,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수군거렸으면.



전체 5연의 이 시는 1841년 5월에서 6월초에 씌어졌다.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 7월 15일이므로 죽음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1연에서부터 눈에 띄는 것은 ‘혼자/홀로’라는 서정적 화자, 레르몬토프의 자의식이다(러시아어의 ‘고독’을 영어로 옮기면 ‘oneness’가 된다. 나는 왕가위 영화의 중핵이 이 ‘Oneness’라고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그를 둘러싼 자연이 서로 화합하고 호응하는 시간에도 혼자만의 무거운 상념으로 이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이러한 상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으며 자연과의 불화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2연의 4행, 그리고 3연에서 보듯이, 서정적 화자에게서 기다림의 대상으로서의 미래와 후회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라는 시간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시간은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전락이나 비약 또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와 평온의 상태로서 그가 지향/소망하는 것은 ‘잠’이다. 이 잠의 내용을 꿈꾸는 것이 그에게서 상상력이 갖는 몫이다.

‘하지만’이라는 4연의 서두가 말해주듯, 그의 잠은 죽음을 상징하는 일반적인 잠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무덤 속 차가운 잠’(=죽음)으로서의 잠은 삶의 중단을 전제로 하는 죽음 이후의 다른 삶, 다른 시간의 체험이지만, 이 시의 4-5연에서 묘사되는 잠은 삶의 연속으로서 현재의 시적 자아가 더 확충되는 경험이다. 즉 여기서 ‘나’와 자연의 조화는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나’라는 자의식의 소멸을 통해서 자연과 합일/통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나’에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에서의 상상력은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자아의식의 확대/심화에 봉사한다(아래 사진은 모스크바에 있는 레르몬토프 박물관). 

Lermontov House-Museum, Moscow, Russia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자궁회귀로의 충동 혹은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4연에서 생명이 가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잠이란 (모체의 자궁 속에서의) 태아의 잠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5연에서, 밤낮으로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어머니이며(시인 레르몬토프가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목소리뿐이었다), 동그만 ‘나’의 무덤/자궁 위에 있는 ‘울창한 참나무’는 아버지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궁 속 ‘어린아이’이다. 다만, 이 ‘어린아이’는 실제의 태아와는 달리 ‘나’라는 자기의식을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그는 자신이 즉자로서의 태아임을 의식하고자 하는, 행복의 극대치를 경험하고자 하는 대자(‘나’)이다.

물론 이러한 즉자-대자적 존재는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하며, 이 상상 속의 ‘나’와 대조되는 것이 1연에서 혼자 길을 나서는 불행한/무거운 현실의 ‘나’이다. 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일찍 여읨으로써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의 결여와 일찌감치 마주하게 된 고아 레르몬토프의 형상이다(시인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생각건대, 엄마들은 아이를 놔두고 일찍 죽으면 안된다. 아이가 나중에 시인이 못 되더라도 말이다(아래 사진은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숨진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

06. 01. 13.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레르몬토프의 고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02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twoshot 2006-01-1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 좋은 의미와 나쁜의미에서 그는 똥폼의 대가인 거 같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그러니까 영화의 본질을 눈치 챈)이 있지만 허전합니다. 있는 "척"하는 거의 대가.
2046은 그의 정점인 거 같습니다. 어디로 가려나...왕가위..

로쟈 2006-01-1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세의 <형사>를 보다 보면, 왕가위 '똥폼'도 얼마나 드문 것인가를 되새기게 됩니다. 영화의 본질이 '있는 척하는 거'란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있는 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
 

'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란 페이퍼에서 리센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 러시아 소설을 읽고서라고 했는데,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 그 소설의 제목이다. 작가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대학원 시절에 발표용으로 써두었던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서사성과 풍자성이 아주 강한 재미있는 장편소설인데(줄거리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어서 '공개적'으로 소개한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아래 이미지들은 작가의 근영과 러시아본, 그리고 영역본). 보이노비치의 책으론 그의 소비에트 문명 비판서인 <혁명 70년의 소련사회>(지식산업사, 1988)가 유일하게 소개돼 있는 듯하다. 기억에 독역본의 번역이다.

먼저, V. 보이노비치(1932- )에 대해서 러시아 문학사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의 수도 스탈리나바드(현재의 두샨베)에서 1932년 9월 26일 출생. 아버지는 세르비아계로서 저널리스트이자 번역문학가(세르비아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로 활동했고, 어머니는 유태계로서 교사였다. 5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후 집단농장과 건설공사장,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1951년에서 55년 사이에 붉은 군대의 병사로 복무하였다.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낮에는 목수로 일하고 저녁엔 교사로 활동. 1960년에 모스크바 라디오에서 일자리를 얻고 소비에트의 비공식적인 우주비행사가의 작사가로서 유명해졌다(50여편의 노래를 작사하였고, 그 중에는 당시 소련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들도 많다고 함).

그의 첫번째 단편 <우리는 여기에 산다>가 1961년 <노브이 미르>에 발표되어 명성을 얻게 된다. 집단농장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한다는 그의 창작방법은, 그러나 곧 논란을 불러일으킴). 1973년(1963년?) 5편의 다른 단편과 혁명가 베라 피그너에 대한 한 편의 소설 발표. 아파트 공사장의 냉소적인 일꾼들에 대해 묘사한 <나는 정직하고 싶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탄압은 그가 1966년에서 68년까지 진행된 시냐프스키와 다니엘 재판과 솔제니친의 작가동맹으로부터의 축출에 반대(그는 솔제니친을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민”이라 부름)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국 1974년 2월 21일 그 자신 작가동맹으로부터 축출됨에 따라 소련에서는 더 이상 출판할 수 없게 되었다. <메트로폴에서 생긴 일>(1975)에서 그는 1975년 KGB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보이노비치의 대표작이자 풍자소설인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1963-70)은 지하출판(사미즈다트)을 통해 널리 읽혀졌고 해외에서 출간되었다(이 소설은 속편을 포함해 2부작이며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1부의 내용이다. 물론 영화화돼 있다). 1976년 미국에서 러시아어로 출간된 <이반키아다>에서 그는 모스크바에서 아파트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묘사, 상층 관료집단을 가감없이 그려내기도 했다. 결국 어느 날 한 장교가 찾아와 “나는 소련 정부와 국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당신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통고한다. 다행히 바로 체포되지는 않고 망명을 권유받아 1980년 12월 21일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강제 이주당한다. 이어서 6개월 후 당시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에 의해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81년 무니흐에 있는 바바리안 미술 아카데미에서 강연, 1982-3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 역임를 역임했다. 현재는 다시 러시아에 귀향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보이노비치의 주된 테마는 사실보다는 환상에 가치를 두는 국가-통제 체제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 찾기가 얼마나 힘든가이다.  장편 희극 서사시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에서 이반 촌킨이라는 농민 반-주인공을 통해 보이노비치는 NKVD를 포함한 소비에트의 생활양식의 거품을 모조리 빼버린다(마음껏 풍자한다). 보이노비치의 탁월한 풍자적 재능과 상상력은 몇몇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를 '새로운 고골'이라 칭하게 한다. 하지만 19세기의 고골이 단순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노비치 또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라는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그에겐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고골의 <외투>가 보여주는 ‘눈물 속의 웃음’과도 같은 짓궂음이 그에게도 있는 것이다.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하 <촌킨의 모험>)은 일차적으로 재미있다. 러시아에서 보이노비치는 대단한 인기이며, 그의 문학을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촌킨'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제대로 된 풍자작가에게라면 당연히 뒤따르는 대중성을 그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주로 단편을 쓰긴 했지만 1920년대의 풍자작가 조셴코 또한 우리가 이 방면에서 기억해 두어야 하는 이름이다. 보이노비치 자신의 조셴코의 탄생 90주년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러시아풍자문학의 전통과 계보의 맥락안에서 보이노비치를 위치시키고 다른 작가들과 비교․평가하는 일은 기본적인 일이면서 해볼만한 일로 보여진다, 당장은 아니지만.)  

 

먼저 줄거리. 이야기는 러시아의 어느 변두리 콜호즈인 크라스노예(어원상으론 '빨간 마을'이면서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와 병영을 오가며 시작된다. 때는 1941년 5월말에서 6월초.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6월 21-2일)을 불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다. 비번인 날에 우체국 직원인 노처녀 뉴라가 밭을 매고 있을 때 러시아군 비행기 한 대가 엔진고장으로 이 크라스노예의 한 텃밭에 불시착한다. 마을 면장인 골루베프는 자기 스스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물인데, 이제나저제나 ‘검찰관’이 오지 않을까 하던 차에 그런 방문을 받고서 애써 의연해진다.

 

그리고는 병영. 숏다리에다 앙가발이(O자형 다리)인 촌킨은 제대를 1년 정도 남겨둔 붉은 군대의 사병인데, 한창 얼차려를 받고 있다. 이미 이름(바보 이반)에서 예상할 수 있지만, 촌킨은 단순/소박의 무지랭이형으로서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는 고문관 타입으로 땔감이나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군대는 그의 체질이 아니다). 정신교육 시간에 그는 자주 놀림거리가 되는데, 순박한 촌킨은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태연하게 “스탈린 동지에게 마누라가 둘 있다는 게 사실이냐?”는 식의 황당한 질문으로 교관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사령부에서는 비행기 불시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사병 하나를 보초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엉겹결에 남는 사병(으로 여겨지는) 촌킨이 발탁된다. 한 조용한 마을에 덩그러니 놓인 비행기에 새 엔진이 도착할 때까지 일주일 가량 경계근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게 시작이다. 왜 하필 이런 인물이 주인공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는 다른 똘똘한 주인공들(가령,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강철 같은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들이 다 데려가고 물렁쇠 같은 촌킨만 남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 아무리 모자란 주인공이라도 제 자식이 이쁘고 똑똑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로선 애착이 간다면서. 하여간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경계근무를 서는 보초수칙에 의하면 잡담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도 금지이지만, 일주일간 보초를 서면서 그런 수칙을 지킨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지레 내린 촌킨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또 밭을 매던 뉴라를 보게 되고 수작을 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일은 농부로서의 촌킨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는 사실(농사일은 그의 체질이다). 촌킨의 일솜씨에 뉴라는 반하게 되고 내친 김에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집안 청소며 가축들 먹이 주는 일에도 촌킨은 열성이고 남는 시간에 자수를 하는 자상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으니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다(더구나 밤에는 잠도 못자게 한다).

 

이런 촌킨과 비행기에 대해서 사령부에서는 까맣고 잊고 있는데,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속에서도 문득 자신의 공적인 임무는 잊지 않고 있던 촌킨은(꿈에서 스탈린 동지가 근무지 이탈을 추궁한다) 왜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아무런 연락이나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가 의아하게 여기며 옆집 친구인 글라드이셰프의 손을 빌어 사령부에 보고편지를 내지만, 이 편지는 촌킨과 헤어질 것을 우려한 뉴라에 의해 몰래 소각된다. 그래서 당분간 촌킨은 뉴라의 집에 기숙하면서 크라스노예에 죽치고 있게 된다. 이런 그를 면장인 골루베프는 또 찾아와 “나는 주정꾼이다, 잡아갈테면 잡아가라.” “나는 애가 여섯이다, 그래도 잡아갈테냐”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물론 촌킨으로서는 영문을 알 리가 없다.

 

 

옆집 사는 글라드이셰프는 종자개량에 열성인 유사-과학자이다(리센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물론 글라디이셰프는 사기꾼은 아니며 논문을 조작하거나 하지도 않는 '순수' 과학자이다. 아마추어라는 게 문제일 뿐). 그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종자교배(그걸 그는 “사회주의로의 길”이라고 이름붙인다. 러시아어 약자로는 '방귀소리'가 된다)에 몰두하고 있는데, 거의 성공하여 토마토 뿌리에 줄기가 감자 비스무레한 식물을 얻는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는 아내를 아프로디테라 부르고 아들은 헤라클레스라 부르면서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집안일은 소홀히 하고(퇴비냄새가 진동한다), 또 입만 열면 자신의 업적과 관심에 대해 떠벌이기 일쑤이다(그래서 친구가 없다).

 

그런 그가 촌킨과는 막역한 친구가 되는데, 그로선 촌킨이 무식한데다 아무런 군소리 없이 자신의 열변을 다 들어주기 때문이고, 촌킨으로선 또 나름대로 대화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다(이전의 촌킨은 주로 말과 대화를 나누던 정도). 진화론자인 글라드이셰프는 원숭이가 인간이 됐다는 자신의 지식을 떠벌이지만, 왜 열심히 일하는 말은 인간이 되지 못했느냐는 촌킨의 반문에 머리를 싸맨다(손가락이 없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편 촌킨은 뉴라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돼지 보르카에 대해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보르카를 쏴죽이겠다고 하여 뉴라가 다투게 되고 홧김을 잠시 집을 나와보지만 딱히 갈곳은 없다. 잠깐 잠이 든 새에 그는 보르카와 뉴라가 결혼식을 하고 모두가 즐겁게 꿀꿀대는 꿈을 꾼다).

 

 

 

 

 

 

 

 

 

그러던 차에 촌킨이 크라스노예에 안착한 지 3주쯤이 지나고 전쟁이 터진다. 독․소 불가침조약(1939)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소련군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 마을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마을 공회당에 집결하여 마을의 면장인 골루베프와 당위원장인 킬린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한바탕 연설로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마을엔 사재지가 일어나는 등 어수선해진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뒤늦게서야 크라스노예에 누군가 보냈던 걸 기억해내고, 촌킨을 탈영병(근무지 이탈)으로 간주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한다. 이 와중에 사령부와 골루베프 간의 전화 교신 중 오해가 발생한다. 특이한 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골루베프가 '촌킨과 그의 여자'라고 한 것을 사령부는 '촌킨과 그의 여단'으로 알아듣고 ‘촌킨과 그의 여단’에 대한 소문은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독일군 첩보대로 간주된다.

 

 

 

 

 

 

 

 

 

사정도 모르고 있던 촌킨에게 일곱인가 여덟 명의 특수요원 체포조가 들이닥치지만 좀 엉성하면서 영웅적인 촌킨과 뉴라의 활약에 의해 오히려 이들이 촌킨의 포로가 되고 헛간에 갇힌다. 마침 전시라 곡물 수확량이 거의 없는 점에 착안해 촌킨은 이 유휴인력을 수확에 동원하고 크라스노에 마을은 가장 우수한 수확실적을 올린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체포조가 모조리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마을을 포위한다. 이때 체포조장이었던 밀랴가 대위는 어렵사리 촌킨의 헛간을 탈출하지만 기절한 상태로 붉은 군대에 잡혀 오는데, 붉은 군대는 그를 독일군으로 착각하여 촌킨 일당에 대해 독어로 심문하게 되고 밀랴가는 자신이 독일군에 체포된 줄 알고 더듬대는 독어로 ‘히틀러 만세’까지 부른다. 나중에 밀랴가는 자신이 붉은 군대에 둘러싸인 걸 발견하고 러시아군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 러시아어로 한 마디 하지만, 엉겹결에 말이 잘못나온다. ‘히틀러 만세’(그는 총살된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는 촌킨은 자신의 근무지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지만, 끝내 체포된다. 울먹이는 뉴라를 뒤에 남겨놓고...(여기까지가 1부이다. 이야기는 속편인 2부로 이어지지만 분량관계로 아직 읽지 못했다.)

 

 


크라스노예 마을의 별칭인 그랴즈노예('더러운 마을'이란 뜻)인 데서 드러나듯이 “촌킨의 모험”은 실재와 가면, 사실과 환상이 서로 뒤섞인 이야기이다. 스탈린이라는 절대 권력 하에서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보당한 채 끊임없이 어떤 역할(가면)들을 강요받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틀리게 읽고, 대부분의 웃음은 이 오인에서 비롯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회체제가 바뀌었으니 인민들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서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재탄생해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 변두리 마을 크라스노예의 사람들이 대표해서 보여주듯이 사람들의 심성도 지적 수준도 더 나아지지 않았고 또 달라지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주의적 영웅을 강요받지만, 가령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에서의 주인공은 혁명과 내전을 위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바쳤고 눈까지 멀었음에도 인민을 위해 마지막까지 봉사하려고 한다지만, 정작 어디 그런가, 누가 그런가? 이 점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밀랴가 대위의 경우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무능력하고(간간히 인물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한다. 가령 2차 대전이니, 독일의 소련 침공이니 하는 것과 촌킨과 뉴라의 달짝지근한 삶과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또 대단히 무식하다(이 무식함 또한 여러 군데서 독자를 웃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떡해야 하나? 종자개량이다.

 

 

이 점을 표나게 보여주는 것이 글라드이셰프의 “사회주의로의 길”이다. 토마토나 감자 가지고는 안 돼고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종자이고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고 있는가? 글라드이셰프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고작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가 전부이다. 이건 물론 죽도 밥도 아니다(즉 감자로도 토마토로도 쓸모가 없다). 과도기에 진통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그 70년의 과도기 끝에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했지만). 하지만 보이노비치는 단호하고 아주 결연하게 그러한 프로그램과 그러한 인간형, 그러한 종자개량에 반대하는 듯하다. 그저 바보 이반다움, 무식함, 순박함, 그런 걸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다운 세상,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는 듯하다.

 

이 점은 서술전략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주인공과 러시아 전래의 요술담 모티브들이 사용됨으로써 보강된다. 요컨대 전면전인 것이다.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속에, 크라스노예와 그랴즈노예의 대립이, '촌킨과 그의 여단'과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의 대립이,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러시아 민담의 대립이 날줄과 씨줄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촌킨의 모험>이 조만간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원조격 작품으로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1883-1923)의 <병사 슈베이크>(주우, 1983)도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06. 01. 1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6-01-1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디게 재밌네요. 번역 예정이 있긴 하답니까.

로쟈 2006-01-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좀 두꺼운 탓인지 아직 번역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데, 시장성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밝은 출판사를 기다려봐야겠지요...
 

아침에 전철을 타면서 이번주 <씨네21>을 집어들었고("포르노 혁명은 어떻게 시작됐나"라는 기사제목도 눈에 띄고 해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끄트머리쯤에서 씨네 블로그 소식란에 '타르코프스키가 묻혀 있는 묘지에 다녀오다'(http://blog.cine21.com/spotkanie)를 읽었다. 내용은 대략  "1986년 12월 29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2005년 12월 28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러 레지던스 감독들 셋과 그의 친구들이 파리 근교에 있는 묘지에 다녀왔다. 파리에 러시아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다."라는 것. "기념일이니 많은 추모객이 와 있고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라는 정보에 쉽게 무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묘지는 너무 조용했다"고.

일행은 20주년인 줄 알고 갔지만, 계산대로 20주년이 되는 건 올 2006년 12월 29일이다. 그리고 러시아식으로 하자면, 지난 7일이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내일 모레가 그의 사망 19주기가 될 듯하다. 망명감독이었던 만큼 그가 러시아 밖에 묻혀 있다는 건 자연스럽지만 그가 파리 근교에 묻혀 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두 달 전에 올해가 사망 20주년이 된다는 걸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기회가 닿은 김에 그에 대하 몇 가지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당연한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글을 한편 쓰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이다). 먼저 블로거님이 올려놓은 묘지 사진들 중 두 장(원경과 근경).

그의 묘비에 생몰연대와 함께 기록돼 있는 건 러시아어로 '천사를 본 사람에게 (바침)'란 뜻이다. 말하자면, '천사를 본 사람'이 그의 묘비명이 되겠다. 묘비 옆에 놓여 있는 건 러시아 정교의 상징물인 성모상(이콘화)이다. 아직 시들지 않은 붉은 카네이션(?)이 화병에 꽂혀 있는데, 마음으로나마 꽃송이를 더 보탠다.

'천사를 본 사람'이라고 돼 있지만, 사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을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독일 감독 빈 벤더스가 그런 경우이다. 페터 한트케의 대사 “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하던 때가 있었다. 왜 나는 네가 아니라 나인가?"로 시작되는 그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영어제목은 <욕망의 날개>)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전에 천사였던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아 트뤼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는 자막이 엔드타이틀로 들어가 있다(내가 그 영화를 제일 처음 본 건 아주 오랜 전 남산 독일문화원에서였다. 미어터지는 관객들 때문에 끼니도 굶었던 그날 나는 줄곧 서서 영어자막의 이 '흑백' 영화를 봐야했다. 그 전에 보았던 <파리, 텍사스>가 아니었다면 그런 수고를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벤더스 영화제가 연초부터 개최되어 진행중이기도 하다(일시 2006년 1월 3일(화)~2006년 1월 10일(화) I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I 상영작 <베를린 천사의 시><랜드 오브 플렌티> 등 5편). 소식을 전한 기자는 70년대 대표작들인 <페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도시의 앨리스><길 위의 왕들>이 빠져 있어서 아쉽다고 했는데, 그 점은 나도 아쉽다. <베를린 천사의 시> 이후로 벤더스의 영화는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려나 이 참에 타르코프스키의 필모그라피를 한번 따라가본다(이미지들은 러시아의 타르코프스키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1. 증기롤러와 바이올린(1960, 46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스크바영화학교 졸업작품이고 뉴욕학생영화제(1961)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나는 화질이 안 좋은 복사본으로 두어 차례 영화를 봤었는데, 길을 닦는 증기롤러 기사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한 어린 학생간의 짧은 만남을 줄거리로 한 영화.

2. 이반의 어린시절(1962, 96분)

타르코프스키의 공식적인 '데뷔작'. V. 보고볼로프의 소설 <이반>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장르상 '전쟁영화'이면서 '비극적 서사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6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장상 수상작이고, 철학자 사르트르가 '초현실적 리얼리즘' 영화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좋은 화질과 나쁜 화질로 두 번쯤 봤는데, 장편영화 중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지 않다.

3.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185분)

장르는 사극, 즉 역사드라마인데, 제목 그대로 러시아의 전설적인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학교 동기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 함께 각본을 썼는데, 루블료프의 전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몇 개의 일화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야심작'이면서 그의 영화로선 가장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권력과의 마찰을 빚기 시작하면서 이후 감독으로서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게 된 작품.  

4. 솔라리스(1972, 169분)

알려진 바대로 스타니슬라프 렘의 SF소설을 원작을 한 영화(렘은 영화에 불만을 표시했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SF'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함으로써 다시금 관심을 끈 바 있다. 197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5. 거울(1975, 108분)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쳐진 가장 '자전적인' 영화. 그의 노모가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 이미지는 도입부에서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 '아르세니'는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이며 <거울>과 <향수> 등에 나오는 시들은 모두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이다.

6. 잠입자(1979, 163분)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은 마지막 영화. 러시아의 대표적 SF작가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하지만, 역시나 영화의 방점은 'SF'와 무관하다. 198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이미지는 영화 속 주인공, '잠입자' 혹은 '안내인'의 모습.  

7. 향수(1983, 127분)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배경을 한 영화이며, 1980년대 서구 평단에 '타르코프스키 르네상스'를 가져온 작품. '80년대 국내에서 타르코프스키가 '전설'로만 회자될 때 가장 자주 들먹여지던 작품이 이 <노스텔지아>와 유작인 <희생>이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올렉 얀코프스키는 최근까지도 현역 배우로서 영화를 찍고 있다. 이 영화로 타르코프스키는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공동 수상했다.

8. 희생(1986, 153분)

잉마르 베르이만의 주선으로 스웨덴에서 만든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영화를 찍을 당시 그는 암투병중이었으며,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들에게 바친다. 국내에는 1995년에 처음 개봉되어 예상'밖'의 관객들을 동원하기도 했었다(그리고 작년 봄에는 이를 기념하여 <노스텔지아>와 함께 재개봉되기도 했었다). 1986년 제39회 칸느 영화제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랑프리, 예술 공헌상, 기술상,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상 등 4개 부문 동시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작품. 곧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예술의 '신화'가 되었다. 여러 번 영화를 봤지만, 위의 이미지는 기억에 없다(어찌된 것인지?). 흔히 알려진 런닝타임(143분)보다 10분 더 긴 것과 관련돼 있는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미지는 아래와 같은 것이다.

영화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는 그냥 멋쩍음을 덜기 위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물론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영화들은 5작품 '컬렉션'을 비롯해서 모두 출시돼 있다. 그리고 <봉인된 시간>과 <순교일기>도 아쉬운 대로 소개돼 있고. 하지만, 본격적인 영화론이 할 만한 책이 김용규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4)밖에 없다는 건 유감이다. 전문가의 글로는 <세계영화작가론2>(이론과실천, 1994)에 실린 정성일의 타르코프스키론이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정도이다(언젠가 '러시아영화감상'이란 수업을 할 때 리포트를 받으면, 타르코프스키론의 1/3 정도는 이 글을 베껴쓴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빚진 바 없는 이들이라면 상관없는 얘기이지만, 그게 아닌 이들이라면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본격적인 감독론은 아니지만, 타르코프스키를 부분적으로 다룬 책들은 여럿이다. '클라시커 50'의 <영화감독>(해냄, 2004)에서 개괄적인 소개를 참조할 수 있고, '시사인물사전' <쾌락의 독재>(인물과사상사, 2000)에도 타르코프스키가 항목으로 포함돼 있다. 이윤영의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문학과지성사, 1999), 조광제의 <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동녘, 2000), 송희복의 <영화, 뮤즈를 만나다>(문예출판사, 1999) 등에도 타르코프스키론이 실려 있다(이윤영의 글 정도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들로는 한창호의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돌베개, 2005)와 김정란의 <빛은 사방에 있다>(한얼미디어, 2005)가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후자에 실린 '타르코프스키를 만나다’에서는 저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상상 속에서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이 두 권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06. 01. 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유 2007-05-0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가져가요. 필요해서. 그림이 안보여요. 영화포스터들.

로쟈 2007-05-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새 다운됐네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01 | 102 | 103 | 10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