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을 타면서 이번주 <씨네21>을 집어들었고("포르노 혁명은 어떻게 시작됐나"라는 기사제목도 눈에 띄고 해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끄트머리쯤에서 씨네 블로그 소식란에 '타르코프스키가 묻혀 있는 묘지에 다녀오다'(http://blog.cine21.com/spotkanie)를 읽었다. 내용은 대략  "1986년 12월 29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2005년 12월 28일,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러 레지던스 감독들 셋과 그의 친구들이 파리 근교에 있는 묘지에 다녀왔다. 파리에 러시아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다."라는 것. "기념일이니 많은 추모객이 와 있고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라는 정보에 쉽게 무덤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묘지는 너무 조용했다"고.

일행은 20주년인 줄 알고 갔지만, 계산대로 20주년이 되는 건 올 2006년 12월 29일이다. 그리고 러시아식으로 하자면, 지난 7일이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내일 모레가 그의 사망 19주기가 될 듯하다. 망명감독이었던 만큼 그가 러시아 밖에 묻혀 있다는 건 자연스럽지만 그가 파리 근교에 묻혀 있는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두 달 전에 올해가 사망 20주년이 된다는 걸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기회가 닿은 김에 그에 대하 몇 가지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당연한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글을 한편 쓰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이다). 먼저 블로거님이 올려놓은 묘지 사진들 중 두 장(원경과 근경).

그의 묘비에 생몰연대와 함께 기록돼 있는 건 러시아어로 '천사를 본 사람에게 (바침)'란 뜻이다. 말하자면, '천사를 본 사람'이 그의 묘비명이 되겠다. 묘비 옆에 놓여 있는 건 러시아 정교의 상징물인 성모상(이콘화)이다. 아직 시들지 않은 붉은 카네이션(?)이 화병에 꽂혀 있는데, 마음으로나마 꽃송이를 더 보탠다.

'천사를 본 사람'이라고 돼 있지만, 사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을 천사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독일 감독 빈 벤더스가 그런 경우이다. 페터 한트케의 대사 “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하던 때가 있었다. 왜 나는 네가 아니라 나인가?"로 시작되는 그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영어제목은 <욕망의 날개>)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전에 천사였던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아 트뤼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친다는 자막이 엔드타이틀로 들어가 있다(내가 그 영화를 제일 처음 본 건 아주 오랜 전 남산 독일문화원에서였다. 미어터지는 관객들 때문에 끼니도 굶었던 그날 나는 줄곧 서서 영어자막의 이 '흑백' 영화를 봐야했다. 그 전에 보았던 <파리, 텍사스>가 아니었다면 그런 수고를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벤더스 영화제가 연초부터 개최되어 진행중이기도 하다(일시 2006년 1월 3일(화)~2006년 1월 10일(화) I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I 상영작 <베를린 천사의 시><랜드 오브 플렌티> 등 5편). 소식을 전한 기자는 70년대 대표작들인 <페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도시의 앨리스><길 위의 왕들>이 빠져 있어서 아쉽다고 했는데, 그 점은 나도 아쉽다. <베를린 천사의 시> 이후로 벤더스의 영화는 내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려나 이 참에 타르코프스키의 필모그라피를 한번 따라가본다(이미지들은 러시아의 타르코프스키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1. 증기롤러와 바이올린(1960, 46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모스크바영화학교 졸업작품이고 뉴욕학생영화제(1961)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나는 화질이 안 좋은 복사본으로 두어 차례 영화를 봤었는데, 길을 닦는 증기롤러 기사와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한 어린 학생간의 짧은 만남을 줄거리로 한 영화.

2. 이반의 어린시절(1962, 96분)

타르코프스키의 공식적인 '데뷔작'. V. 보고볼로프의 소설 <이반>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장르상 '전쟁영화'이면서 '비극적 서사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6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장상 수상작이고, 철학자 사르트르가 '초현실적 리얼리즘' 영화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나는 좋은 화질과 나쁜 화질로 두 번쯤 봤는데, 장편영화 중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지 않다.

3.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185분)

장르는 사극, 즉 역사드라마인데, 제목 그대로 러시아의 전설적인 성상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학교 동기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 함께 각본을 썼는데, 루블료프의 전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몇 개의 일화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야심작'이면서 그의 영화로선 가장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권력과의 마찰을 빚기 시작하면서 이후 감독으로서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게 된 작품.  

4. 솔라리스(1972, 169분)

알려진 바대로 스타니슬라프 렘의 SF소설을 원작을 한 영화(렘은 영화에 불만을 표시했었다. 사실 타르코프스키는 'SF'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함으로써 다시금 관심을 끈 바 있다. 197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5. 거울(1975, 108분)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쳐진 가장 '자전적인' 영화. 그의 노모가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 이미지는 도입부에서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 '아르세니'는 러시아의 저명한 시인이며 <거울>과 <향수> 등에 나오는 시들은 모두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이다.

6. 잠입자(1979, 163분)

타르코프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은 마지막 영화. 러시아의 대표적 SF작가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하지만, 역시나 영화의 방점은 'SF'와 무관하다. 1982년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이미지는 영화 속 주인공, '잠입자' 혹은 '안내인'의 모습.  

7. 향수(1983, 127분)

이탈리아의 한 온천을 배경을 한 영화이며, 1980년대 서구 평단에 '타르코프스키 르네상스'를 가져온 작품. '80년대 국내에서 타르코프스키가 '전설'로만 회자될 때 가장 자주 들먹여지던 작품이 이 <노스텔지아>와 유작인 <희생>이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올렉 얀코프스키는 최근까지도 현역 배우로서 영화를 찍고 있다. 이 영화로 타르코프스키는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칸느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공동 수상했다.

8. 희생(1986, 153분)

잉마르 베르이만의 주선으로 스웨덴에서 만든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영화를 찍을 당시 그는 암투병중이었으며, 그는 이 영화를 자신의 아들에게 바친다. 국내에는 1995년에 처음 개봉되어 예상'밖'의 관객들을 동원하기도 했었다(그리고 작년 봄에는 이를 기념하여 <노스텔지아>와 함께 재개봉되기도 했었다). 1986년 제39회 칸느 영화제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랑프리, 예술 공헌상, 기술상,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상 등 4개 부문 동시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작품. 곧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예술의 '신화'가 되었다. 여러 번 영화를 봤지만, 위의 이미지는 기억에 없다(어찌된 것인지?). 흔히 알려진 런닝타임(143분)보다 10분 더 긴 것과 관련돼 있는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미지는 아래와 같은 것이다.

영화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는 그냥 멋쩍음을 덜기 위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물론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장편 영화들은 5작품 '컬렉션'을 비롯해서 모두 출시돼 있다. 그리고 <봉인된 시간>과 <순교일기>도 아쉬운 대로 소개돼 있고. 하지만, 본격적인 영화론이 할 만한 책이 김용규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4)밖에 없다는 건 유감이다. 전문가의 글로는 <세계영화작가론2>(이론과실천, 1994)에 실린 정성일의 타르코프스키론이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정도이다(언젠가 '러시아영화감상'이란 수업을 할 때 리포트를 받으면, 타르코프스키론의 1/3 정도는 이 글을 베껴쓴 것이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빚진 바 없는 이들이라면 상관없는 얘기이지만, 그게 아닌 이들이라면 분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본격적인 감독론은 아니지만, 타르코프스키를 부분적으로 다룬 책들은 여럿이다. '클라시커 50'의 <영화감독>(해냄, 2004)에서 개괄적인 소개를 참조할 수 있고, '시사인물사전' <쾌락의 독재>(인물과사상사, 2000)에도 타르코프스키가 항목으로 포함돼 있다. 이윤영의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문학과지성사, 1999), 조광제의 <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동녘, 2000), 송희복의 <영화, 뮤즈를 만나다>(문예출판사, 1999) 등에도 타르코프스키론이 실려 있다(이윤영의 글 정도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들로는 한창호의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돌베개, 2005)와 김정란의 <빛은 사방에 있다>(한얼미디어, 2005)가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후자에 실린 '타르코프스키를 만나다’에서는 저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상상 속에서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이 두 권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06. 01. 0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유 2007-05-0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가져가요. 필요해서. 그림이 안보여요. 영화포스터들.

로쟈 2007-05-0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새 다운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