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350호) 특집 '출판전문지가 사는 길'의 한 꼭지를 청탁받아 쓴 글을 옮겨놓는다. 주제는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잡지를 받아보니 '나는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란 제목이 붙여졌는데, 머리글은 '책에 살고 책에 죽는 서평가'다. 아마 두 가지를 두고 왔다갔다 했던 듯싶다. 나대로는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붙여놓는다. 공식적으론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와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 두 권의 서평집을 냈지만, 특집의 다른 꼭지 글을 보니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0)도 서평도서로 분류돼 있다. '독서에세이'가 더 적당할 듯하다. 아무튼 터울로 봐서는 내년쯤에 세번째 서평집을 내게 될 것 같다...

 

 

 

기획회의(13. 08. 20) 나는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란 주제의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단 떠넘기기가 어려웠다. 누구누구가 더 적임자라고 ‘대타’를 내세울 수 있었다면 빠져나가기가 용이했겠지만, 남들이 다 ‘현역’ 서평가로 알고 있는 처지라 둘러댈 수가 없었다. 물론 서평가로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정색할 수는 있었겠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서평쓰기는 생계의 방편이 아니라 책값의 방편이니까. 게다가 ‘시인’처럼 명예를 드높여주는 직함도 아니기에 명함에 ‘서평가’라고 박아놓지도 않았다(그렇다고 명함에 다른 직함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자리에 이렇게 내몰리게 됐다. 하긴 '서평가'란 호명에 구시렁거리는 일도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일부인지 모를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책 얘기를 좋아했을 뿐이다. 전공은 러시아문학이었지만, 철학책을 취미로 읽었고 영화비평을 기웃거렸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공간이 열리면서 책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과 촌평이 조금씩 눈길에 올랐다. 다음카페 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알라딘 블로그로 거점을 옮겼고 북매거진 <텍스트>에 서평류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을 가리켜 한겨레 고명섭 기자가 ‘인터넷 서평꾼’이라고 호명했고, ‘로쟈’는 그 대명사가 됐다(특이하게도 '인터넷 서평꾼'이란 호칭은 내게만 붙어 다닌다). 이후에 시사주간지와 일간지 등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는 생활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두 권의 서평집까지 출간했고, 서평가란 직함까지 얻게 됐다. 무슨 일이든 오래 하다보면 어떤 직함이건 얻기 마련이다. 하지만 잘해서 오래 하는 게 아니라 마땅한 후임이 없어서 오래 하게 됐다고 가끔 투덜거린다(왜 없는지는 ‘책값의 방편’이란 대목에서 추측해보시길).


그래도 서평가라고 하면 제법 출세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혹은 고작해야 자투리 서평을 쓰는 주제에 무슨 서평가 행세를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로선 언제라도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다. 서평가는 내게 어떤 역할이지, 결코 천직이 아니다. 부러워하는 이들은 나보다 열심히 할 사람들이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은 나보다 잘할 사람들이다. 이들이 조금만 용기를 내거나 엉덩이의 무거움을 떨쳐낸다면, ‘서평계’의 앞날이 지금보다 훨씬 창창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는 덕분에 책을 읽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를 한껏 누리면서 ‘서평가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게 서평가로서 갖는 꿈이다.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  

 

서평과 비평의 차이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직함으로 활동하는 이상 나름대로의 서평관이 없을 리 없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의식은 갖고 있어야 하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서평은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할 터이지만 언제부턴가 과거와는 다른 위상을 갖게 됐다. 달라진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일단 어느 때보다도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 누구도 더 이상 모든 책의 독자를 자임할 수 없게 됐다. 어떤 책에 대한 독서는 동시에 다른 책에 대한 비독서를 뜻하는 게 오늘의 독서 현실이다. 어떤 타개책이 있는가. 필독할 만한 책을 서로가 걸러주고, 동시에 미처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해선 핵심이라도 챙겨놓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서평의 역할이다.  


서평은 어떤 책이 읽을 만한가를 식별해주는 데 일차적인 의의가 있다. 반면에 비평은 어떤 작품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한다. 서평은 일독의 권유이지만 비평은 재독의 제안이다. 서평이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원칙적으로 비평은 한번 읽은 독자를 상대한다. 만약 한번 읽은 독자가 많지 않다면, 즉 독서 경험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비평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바로 오늘의 상황이 그렇다. 독서량이 현저하게 부족한 마당에 독서 경험의 공유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 결과 한국에는 비평 독자보다 비평가 수가 더 많다는 웃지 못 할 얘기까지 나온다. 한마디로 그렇게 비평의 역할이 쇠퇴하는 가운데 서평의 역할은 증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한편 서평의 역할 증대는 온라인서점에 독자 리뷰 공간이 마련된 것에도 힘입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리는 활동이 독서활동의 자연스런 일부가 되면서 서평쓰기도 대중화되었다. 아무래도 진입장벽을 가질 수밖에 없는 비평과 달리, 서평은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제 몫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각자 자기가 선호하거나 일반 독자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분야에서 책을 읽고 그 정보나 판단을 공유하는 ‘품앗이 서평’이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서평은 분량 부담에서 자유롭다. 어떤 책이 일독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발 빠르게 일별해주는 것이 서평의 핵심적인 기능이기에, 40자평, 100자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분량의 글을 누구도 비평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서평이라 부르는 건 결코 억지가 아니다. 오히려 서평은 너무 길어질 경우 그 의미가 반감된다. 적은 분량을 통해서 책에 대한 평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서평으로선 최적이다.


자격불문, 분량불문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서평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서평가가 필요할까? 그렇다, 온라인에서라면 필요하지 않다. 전문가와 대중의 구분조차도 무의미해진 지 오래인 게 인터넷이라는 집단지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터넷 서평꾼들의 지치지 않는 활발한 활동만이 기대될 뿐이다. ‘로쟈’는 좀 유명한 인터넷 서평꾼 정도이지 그 대명사일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 영향력이 점차 줄어가는 추세라지만, 일간지와 주간지 등의 서평란에는 출판담당 기자 외에도 서평가나 북칼럼리스트, 출판평론가 등 유사 직함의 필진이 아직 필요한 상황이다. 나로선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는 활동을 6-7년째 해오고 있는데,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칫 10년도 넘어갈 기세다.

 

 

서평가, 책만큼 대단하고 책만큼 하찮다
소위 서평가는 어떤 일을 하는가? 현재 내가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 등에 쓰고 있는 서평은 대략 원고지 8-12매 정도의 분량이며 보통은 신간으로 나온 책 한권을 다룬다. 그런 서평이나 북칼럼을 평균적으로는 1주일에 한두 편, 마감이 몰릴 때는 서너 편 정도 쓴다(지면에 쓴 글을 옮겨놓는 경우도 많지만, 온라인에서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는 건 별도의 일이다). 지정된 책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기도 하지만 보통 서평도서는 스스로 선택한다. 서너 권의 후보도서를 미리 골라서 중복여부를 확인한 후에 최종적으로 그중 한권을 골라 쓴다. 1주일에 두 편을 쓴다면 산술적으로는 6-8권 정도를 일단 손에 들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다 읽을 수 없지만 적어도 책의 실물은 확인하려고 한다.


그렇게 고른 책을 4-5시간 안에 읽고, 3-4시간 안에 원고를 작성한다. 급하게 쓸 경우에는 2시간 안에 원고를 완성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그러면 평균적으로 원고지 매당 1만원의 원고료를 받는다. 전체적으로 읽고 쓰는 데 8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원고 노동자로서 서평가의 일당은 10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일당은 통상 도서구입비로 쓰인다. 서평이 ‘책값의 방편’이란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외국에는 전업 서평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서평가가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적절한 명칭은 ‘서평 알바’다).  


그렇다면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명감으로 산다고 적으려다가 어쭙잖아서 자기만족으로 산다고 고친다. 책에 파묻혀 지내는 게 소원인 분이라면 서평가는 최적의 소임이다. 좋은 책을 읽고 널리 알리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면 서평가로서 적격이다. 요컨대 책에 살고 책에 죽고 하는 것이 서평가다. 그게 대단하다면 딱 책이 대단한 만큼이고, 하찮다면 딱 책이 하찮은 만큼이다.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묻는다면 적어도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은가, 정도로만 답하겠다. 조금 범위를 좁혀서 출판계에는 얼마만큼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한다면 대답은 ‘글쎄’다. 나대로는 ‘독서 전도사’ 역할도 꽤 오랫동안 해왔다고 자임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한국인의 평균독서량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출판시장도 지속적으로 하향세다. 그런 고민을 떠안느니 그래, 그냥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13.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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