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얘기를 간단히 몇 자 적는다. 알라딘을 돌아다니다 보면,  책과 관련된 이런저런 리스트들을 보게 된다. 그게 '마이리스트'라는 건데, 내 생각에 그 '마이리스트'의 기본적인 기능은 '뚜쟁이'의 그것이다. 즉, 이 책과 연결/접속될 만한 '다른 책'을 소개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이리스트라는 뚜쟁이는 수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은유의 역할을 하기도 환유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령, '나에게 감동을 준 책'이란 제하의 리스트를 만든다면, 거기에 묶인 책들은 순전히 '감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붙들려나온 은유적 계열체들이다. 반면에, '들뢰즈의 책들'이라든가 하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리스트들은(나는 이런 리스트는 왜 만드는지 모르겠다. 검색어로 '들뢰즈'를 치면 되는 것을) 들뢰즈를 구성하는 환유적 통합체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더 의미있는 리스트란 은유적인 리스트, 은유적인 짝짓기이다(그런 리스트에서 우리는 '타자'로서의 책과 대면하게 된다).

아쉬운 것은 그런 류의 마이리스트를 만나기란 아주 드물다는 것.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은유라는 것 자체가 '천재'의 소산이기도 하지만(다름 속에서 같음을 읽어내는 게 '천재'이다), 너무 범상한 리스트들만이 넘쳐나고 있는 것. 아직 한 건의 리스트도 만들어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마이리스트의 조건'이란 걸 생각해 보았다.  

첫째, 10권 이상은 안 넘는 게 좋겠다는 것(맥시멈 20권). 가령 베스트5나 베스트10 같은 게 좋겠다. 무작정 늘어놓는 게 아니라. 리스트란 단순히 '목록'의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라 '선정'이란 뜻도 내포한다. 허다한 책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권할 만한 책들을 꼽아보는 것. 그럴 경우, 너무 많은 '목록'은 제 살 깎기 식의 목록이며, 스스로의 가치와 품위를 떨어뜨리는 선정이다. 그래서 리스트에 필요한 건 랭킹감각이 아닌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책만은 꼭!'이란 생각이 리스트에는 가미되어야 한다.

둘째, 코멘트는 반드시 붙여야 하다는 것. 이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런 책을 꼽은 이유를 간략하게라도 제시해야 하는 것. 일반 연구서들을 읽다가도 그런 코멘트가 붙은 참고문헌 서지를 읽다 보면 간혹 감동하게 된다. 먼저 읽고 나서 나중에 읽을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정신, 그게 코멘트의 정신이다. 이 책은 이런저런 장단점을 갖고 있다든가, 어디에 핵심이 있다든가, 어떤 의의가 있다는가 하는 내용들이 코멘트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개인적 사연이라도('내가 어젯밤 밤새 읽은 책'이란 식으로). 그런 코멘트 달기가 요구하는 것은 일단 자신이 읽어본 책들에 대해 리스트를 만들라는 것이다(물론 '내가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란 주제의 리스트라면 예외이겠지만, 그 경우에는 왜 읽고 싶은지 코멘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너무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리스트는 곤란하다는 것. 어떤 분야별 리스트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목록은 클릭을 몇 번 하면 찾아볼 수 있는 목록이다. 해서 필요한 건 '창의성'이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지역'으로,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안내하고자 하는 서비스 정신(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스토커>에서의 주인공처럼). 이왕이면, 그런 정신이 담겨 있는 리스트를 '읽고' 싶다. 그냥 '보는/보여지는' 리스트 말고.

이렇듯 조건을 몇 개 달아놓았으니 조만간 나서서 시범이라도 보여야 할 판이지만, 언제일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저 동의하시는 분들의 동참이 있으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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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4-1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엄한 잣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제 생각만 그럴까요?
어차피 이 곳 서재라는게 (아니 이 곳뿐만 아니라 요즘 모든 블로그가 그렇지만) 그냥 본인의 독서생활과 취향을 올리는 곳이 아닌가 하거든요
책을 자꾸 주문하다보니 이 곳도 알게되고 또 그렇게 각 서재를 꾸려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아 이런 분들은 이런 책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재미가 제겐 있답니다.
그리고 나의 서재 나의 리스트라는게 물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금상첨화겠으나 자기 독서기록이나 정리의 목적으로 만드는게 당연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책만 주문하고 서재에 별 신경안쓰다가 얼마전부터 공개로 해놓고 사이버서재로 이용할려는 마음을 먹었던 저로선 갑자기 주춤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로쟈님 서재에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람인데 제 수준상 전혀 코멘트달 기회가 없다가 첫 인사를 이렇게 드립니다.

어쨋든 댓글은 그것도 비공개로 하나 추천이 네 개인걸 보면 남들도 저처럼 널럴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만..하하


로쟈 2005-04-1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그동안의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사야님/ 제가 제시한 조건은 물론 '강요사항'이 아니라 '제안사항'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중요한 책들이라면, 그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요? 아무런 코멘트 없이 수십 권의 책들을 목록에 올려놓은 리스트들은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애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찍어놓은 '이성'의 리스트들을 보는 것처럼...

비로그인 2005-04-2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쉽지가 않더라구요..;; 누군가에게 '제대로' 도움 되는 리스트 좀 만들어보고 싶은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투른가봅니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사서 읽은 한국일보에는 눈길을 끄는 글이 둘 있었다. 먼저, 매주 연재되는 고종석의 시인산책. '시인공화국 풍경들'이란 타이틀이 연재의 제목인데, 내가 어제 처음으로 읽은 이 연재는 김영승의 <반성>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오늘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나머지 4회분의 연재를 마저 읽는다. 그간에 그가 다루었던 시인들은 김소월, 김정환, 성미정, 김수영이었다.



김소월에 이어서 김정환의 시집을 다루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어서 성미정의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을 읽는 건 파격적이다(이 시집을 나는 안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런 파격은 의도된 것인 듯하다. 김수영은 물론 이름값하는 시인이고("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안 시인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이어서 어제 다루어진 시인은 '아름다운 폐인'으로 자칭하는 김영승.

고종석이 연재하는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은 내게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며 그래서 반갑다. 매주 한번씩은 한 명의 시인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나로서도 할말이 없지 않은 시인들임에랴. 해서, 고종석의 시인산책은 한동안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재가 될 것이다. 나중에 책으로 묶여도 좋을 것이고.

내가 이런 식으로 고대했던 연재는 아주 오래전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과 김성우 논설위원의 '러시아문학기행'이었다. 1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나서 한참 후에 김훈의 '자전거 기행'이 있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세월이지만, 그런 기행/연재는 그 세월에 품위를 부여한다. 그 품위는 비록 얇은 신문지에 실려오지만, 그걸 읽는 마음에 얇지 않은 부듯함을 전달해준다. 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런 시대에 대한 회고만으로도 당분간은 풍족하다.

두번째는 사르트르(1905. 6. 21 - 1980. 4. 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에서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정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그와 병행하여 국내에서도 기념행사들이 기획/진행중이라고 전한다. 그의 마지막 대저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번역출간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1964) 40주년을 계기로 몇 마디 거든 바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만큼 나도 뭔가 '준비'는 해야겠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해본 김에 '비로소' 좀 읽기도 하고.

  

사르트르에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그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 나 자서전 <말>을 집어들 만하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이다. 거기서 사르트르에 관한 장은 역설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식인들'에 대한 이 냉혹한 비판서를 통해서 거품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에 문제적인 저작들을 읽어보는 게 내가 권할 만한 순서이다. 가령,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였다"라는 걸 미리 알고서 사르트르를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그래야지 지식인들은 그 '모순' 속에서 제값을 발휘한다.

존슨의 책은 이전에 <지식인들>(한언, 1993)이라고 처음 출간됐었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벌거벗은 지식인들>(1999)도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까지 역자가 모두 다르다. 제일 처음 나온 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기사들과 함께 전철에서 (다시) 읽은 건 아즈마 히로키의 글 '우편적 불안들'(몇년전에 동서문학지에 번역돼 실렸다)인데, 이 글은 자신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 대한 해제적 성격의 강연문이다. 지난 2월초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 마자 (우연히 복사물이 눈에 띄어) 읽게 된 것인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계발적인 글이다. 해서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을 '모스크바 통신'에 이어지는 마무리로 기획하기도 했었지만, (병치레 때문에) 결과적으론 실현되지 못하고 미루어졌다. 뒤늦게 작성되는 만큼 이 글은 원래의 의도를 다 포괄하거나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히로키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첨언을 할 생각이다.

  

 

 

 

 

 

 

 

먼저 히로키에 대해서. 1971년생인 그는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1991년 약관 20세에 '솔제니친 사론'을 통해서 등단한다. 프랑스 현대사상과 데리다 철학에 능통한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데뷔작을 통해서 제2의 아키라란 평을 듣는데, 아키라는 <구조의 힘>(국역본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을 쓴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를 말한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비교하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바를 참조하면 가라타니 고진 - 아사다 아키라 - 아즈마 히로키 정도의 계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히로키는 '젊은 피'이자 비평의 제3세대, 혹은 새로운 세대쯤 되는 듯하다.

일본의 비평공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고진이나 아키라를 흥미롭게 읽었고, 그런 흥미 면에서라면 히로키 또한 뒤지지 않는다(거기에 대응할 만한 한국 비평가를 거명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존재론적, 우편적>이나 <우편적 불안들>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근래에는 동경대 대학원쪽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도 많이 있으므로 번역자원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로키는 이 강연문의 서두에서 먼저 '콘스타티브(constative)'와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들어가는데, 전자는 '사실확인적'이란 말이고 후자는 '행위수행적'이란 뜻이다. 그걸 드러내는 문장을 우리말로는 각각 '진술문'과 '수행문'이라고 보통 번역한다. '진술문'은 맞다, 틀리다를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말하지만, '수행문'의 경우엔 그런 진위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다. '수행문'은 대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즉 '통하였는냐?'가 수행문의 기준이다). 때문에 수행문은 현실(컨텍스트)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기능이 이해될 수 있다.

히로키의 전제는 사회의 단편화, 포스트모던화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시점이 부재하다는 것. 이른바 총체적 시점, 혹은 총체성의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하루키 번역본의 표현의 빌자면, '상실의 시대')이 전면화되는 것이 1990년대이며(그러니까 소련과 동구권의 대몰락 이후이며) 그러한 처지에서는 자신의 메시지(편지)가 제대로 도착하는 건지 마는 건지 불확실하게 된다. '우편적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1983)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퍼스펙티브를 제시하고자 애를 쓰는데, 거꾸로 말하면 1980년대에는 그래도 우편적 불안이란 걸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히로키의 상황판단이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더 아주 작은 '취미 공동체' 내의 소통으로 축소된다. 오타쿠 문화는 그러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다.

정리해서 얘기하면, 포스트모던화는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처음엔 "문화전체(사회전체)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명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좀비처럼 살아남아 있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아직 '우편적 불안'이 전면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의 전망이란 건 날조이고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아사다 아키라가 제시한 전망이 이미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되었다는 데에서 확인된다(그러니까 <구조와 힘>에 열광하는 소수의 '취미 공동체'가 있었을 따름).

두번째 단계를 히로키는 1989년경부터로 보는데, 이 단계에서는 사회전체를 예측한다는 게 더더욱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자잘한 우편적 불안에나 시달리게 된다. 90년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이다(한국소설사의 지형에서라면 윤대녕, 신경숙의 소설들이 통하던/먹히던 시대이다. '은어낚시통신' 같은 취미 공동체!). 그걸 부정하고, 날조이더라도 전체이론에 계속 매달리게 되면 오움진리교 같은 현상을 낳게 된다고 히로키는 지적한다.

아키라와 히로키는 각각 이 두 단계에 각각 대응하는 비평가이며, 아키라에서 히로키로의 이행은 들뢰즈에서 데리다로의 이행이다(그럼 오움진리교에 해당하는 건 네그리?). 그러한 상황인식을 전제로 하여 히로키는 자신의 <존재론적, 우편적>이 '우편적 불안'을 '우편적 향락'으로 바꿔보려는 기획의 소산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상징계'의 힘이 약화된 것이 요즘의 현실이 아닌가 지적하면서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 <미녀전사 세일러문>을 만든 감독 이쿠하라 구니히코의 말을 인용하는데, 내가 보기엔 혜안이다. 그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가까운 것과 아주 먼 것밖에 모른다. 즉, 연애 아니면 세계의 종말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들의 감각으로는 연애나 가족문제 같은 지극히 자기주변적인 문제와 세계의 파멸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지적을 라캉식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계와 현실계(=실재)에만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리얼한 것(=실재) 아니면 이미저리한 것(=상상계) 밖에 없다. 심볼릭한 것(=상징계)가 약화되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이어받으면서 히로키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포스트모던해져 버린 결과 요즘 사람들은 세계가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서 느끼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우주 이외의 '일본'이나 '국가'라는 중간 레벨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쏙 빠져버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라캉도 말했듯이 맨먼저 약해지는 것이 언어의 힘인 셈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지금 일본에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얼핏 '대-한-민-국'을 열호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양극화로부터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이 이들에게서 '중간항'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거나 '먼 것'으로서의 '대한민국'은 아닐는지? 어쨌든 "상징계, 즉 심볼릭한 레벨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적인 인간관계나 '세계의 종말'로 집중"된다. 이런 경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지구의 소멸'이라는 거대서사적 테마는 그저 주인공과 애인 사이의 작은 인간관계를 부각시키는 소재로서나 쓰인다.

한국적인 드라마에서라면 '세계의 종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마도 죽음일 듯싶다. <가을동화>인지 <겨울동화>인지 하는 드라마들에서 연애(상상계)-결혼(상징계)-죽음(실재)이라는 3항에서 '결혼'이 배제된 것이 주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과 가족들간의 오손도손, 티격태격을 다룬 일일드라마들에서도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주제(이런 경우에는 국가)가 다루어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런 건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저마다 오타쿠가 된다(요즘 언론에서는 '진보상업주의'라는 말을 쓰던데, '진보오타쿠' '좌파오타쿠'란 말도 가능할 것이다. 거기서 소수의 취미 공동체에 대응하는 것은 소수의 이념 공동체이다).

데리다에 대한 좀 특이한 책을 쓴 히로키는 이런 시각을 내비친다: "데리다의 저서를 즐거이 읽는 독자는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에서 천명, 유럽에서 이천 명, 아메리카에서 이천 명이 다일 것입니다(*그런 셈법이라면 한국에서는 오백 명 미만이다). 그들은 하나의 취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만나면 국적이나 문화적 배경이달라도 단번에 얘기가 통합니다. 데리다를 둘러싼 '수다'가 점점 증식되고 데리다에 대한 메일 리스트가 개설되곤 하지요. 저의 책이 번역되는 것은 이 '수다'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나 또한 그런 수다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진단을 좀더 확장하자면, 들뢰즈를 기치로 내세운 수다 공동체, 알쏭달쏭한 타자 담론을 중심으로 모인 수다 공동체 등이 공통의 언어 없이 난립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공부와 삶의 괴리이면서 나는 이게 인문학 위기의 본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두 가지. 공통의 언어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쪽과 작은 취미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쪽. 히로키는 그 중간에 서 있고 싶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대한 시도로 자신의 저작을 규정짓는다(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 그리고 그게 데리다 철학의 의의라고 평가한다: "제가 좋아하는 데리다의 말 중에 위대한 사상가란 언제나 조금 큰 우체국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실제로 이 세계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은 편지(정보)를 배달하는 우편적인 기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가 주목하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우편엽서>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 글의 절반이다(시간/분량상 여기서 끊는다. 이후에 내용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에 대한 평으로 이어지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참조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많은 걸 평정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취미 공동체의 수다거리가 돼 버린 문학에 대해서도(우리 주변의 쿤데라 오타구, 하루키 오타쿠, 도스토예프스키 오타쿠, 지젝 오타쿠 등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공동체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공동체를 넘어선 공화국을 꾸릴 수 있는가? 질문은 아직 열려 있다.

이런 내용의 글을 다시 읽은 건, 그리고 3월의 마지막날에 (뒤늦게라도) 정리해두는 건 어제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 넘게 걸린 셈인데, 아무튼 비로소 나의 '도착'은 완료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내내 했던 일 중의 하나는 통신문을 쓰는 거였는데, '모스크바여 안녕'이란 마지막 통신문이 비로소 제값의 무게를 갖게 된 것. '모스크바여, 다시 안녕!' 다스비다냐!..

05. 03. 31

P.S. '우편적 불안'에 이어서 지난 2월에 내가 쓰고자 했던 건 윤동주와 정현종, 두 시인에 대한 것이었다(2월 16일이 윤동주의 기일이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다. 그리고 2월말에 정현종 시인은 '문학교수'로서 정년퇴직했다. 시인으로선 정년이 없겠지만) . 물론 타이밍을 놓친 터라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선 다른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삐딱하게 보기>의 3장 읽기(생각보다는 오역이 많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국가'(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이 요긴한 읽을 거리였다)가 당분간 읽고 생각해볼 거리이다. 생각이 모이면,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P.S.2. 어제 잠시 '로쟈'란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가 몇몇 블로그에 나의 글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한 블로그에서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인 걸로 소개돼 있었는데(모스크바로 되돌아간?), (이미 귀화하여 한국인이긴 하지만) 박노자만큼 내가 (한국어를!) 잘 쓴다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좀더 따져보아야겠다(내가 그보다 한국어를 더 오래 배우고 써왔건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나는 서평을 쓴바 있으며, 그 중 한 구절이 한동안 신문광고에 인용되기도 했었다. 박노자는 누구처럼 자기 책의 서평을 쓸 만한 위인은 아니므로 '로쟈=박노자'란 오해는 불식되었으면 한다. 다시 밝혀두지만,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무관하며)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 '로지온'의 애칭이다(왜 그 이름을 쓰게 됐는지는 내년쯤이면 아시게 된다).

P.S.3. 눈에 띈 오타를 손보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 그렇게 적은 분량을 쓴 건 아니지만, 급하게 작성하다 보니까 본문을 충분한 분량으로 쓰지 못했다(모스크바에서였다면 지금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보완할 수는 없고, 오늘(만우절) 아침에 읽은 글 한 대목을 인용해두기로 한다. 이번주 <한겨레21>은 '태극기 세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특집의 한 꼭지는 '그 불안하고 기이한 개인주의'(전효관)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필자의 지적을 잠시 들어본다.

"나는 촛불시위와 월드컵을 통해 광장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든지, 공적 영역에 개인 욕망의 문제를 투사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놀이와 연대의 소재가 왜 민족과 국가고 태극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여전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일 듯하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화를 통해 형성된 감수성의 연장선에서 개인의 권리에 민감하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권리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은 태극기 세대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 주장이 생존을 위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제한되어 사회적 공간과 연대 능력의 발전으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고, 작은 주체들의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매개 영역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는바,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내가 본문에서 거론하고자 했던 중간항이다. 그 중간항의 프로이트적 상관항이 바로 자아이며, 현대는 그러한 자아의 약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일본의 오타쿠 세대나 한국의 태극기 세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사드와 함께 칸트는 넘쳐나지만, 그걸 매개해주는 자아는 약화되어 있으며 무시되고 있다.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약해지는 것은 (라캉-히로키도 지적하다시피) 언어의 힘이다. 그때 언어라는 건 코드화된 랑가주, 즉 랑그를 말한다. 서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 문법, 규칙. 그게 상징계이다.

어린애들의 옹알이 같은 말들과 UFO성 언어들이 인터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은 상징계의 약화/무시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젊은이들의 '유아화'이다. 히로키가 예로 들고 있는 건 이런 식의 대화이다. "저거 괜찮지?", "이게 좋다", "그건 안돼." 혹은 언어를 생략한 이미지만의 소통, 혹은 음악을 통한 소통. "좋지?" "응, 좋아!" 오직 그들만이 통하는('논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통하는) 언어로 은밀하게 소통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랑그는 최소화되는 것. 이런 것들이 게임세대, 비주얼 세대, 넷세대들에게서 지배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 히로키 등의 지적이며 내가 동의하는 바다.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를 다시금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조건에서 작은 공동체의 한계를 '트랜스'해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안주하며 '바깥'으로의 외출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남은 선택지는 대략 그 세 가지이다. '우편적 향락'이란 아마도 그 두번째 길이 인도하는 선택지에서 누릴 수 있는 향락이지 싶다.

몇 마디 덧붙여 보았는데, 본문의 내용이 좀더 수월하게 전달되었는지?..(알 도리가 없는 건가?)

05. 04. 01.

 

 

 

P.S. 분문에서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근간 소식은 작년부터 접하고 있었던 터인데, 생각보다 분량은 얇다. 예전에 이 책과 관련한 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854169 에 모아놓은 바 있다. 그의 <존재론적, 우편적>도 근간 예정이라고 하니까 모아서 읽어봄 직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07.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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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04-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기대됩니다. 로쟈님...

로쟈 2005-04-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랄 게 없는 건데요.^^ 한 가지, 본문에서 언급한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서가 나온다는군요...

sqiz 2020-12-0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의 존재론적,우편적을 해설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아침 1교시에 강의를 위해서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연거푸 타고 출근한다.  시간강사로서 주제넘게 '시간표'를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9시 '문학'수업을 비인간적이라고 내내 툴툴거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1시간 반을 보내게 된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언제나 그렇듯이 조간신문을 읽어나가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키워드는 '커밍아웃'인 모양이다. 19면의 기명칼럼 제목이 '커밍아웃'이고, 같은 면의 두번째 사설에도 '커밍아웃'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물론 둘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망언'에 대한 것인바, "이번에 친일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충격적인 글은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다시 한번 커미아웃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황대권칼럼>); "그런 그의 주장은 한 개인의 갑작스런 돌출 의견일 수 없다. 그는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공유해온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닌 그들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사설>) 종합하면, 이번 한교수의 기고발언은 친일파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커밍아웃'이다.

영한사전에서 coming out은 '데뷔'란 뜻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어쨌든 지난 주말 이후 '한승조'란 이름은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므로  데뷔로서 화려하고 성공적이다. 더구나 그는 반일 민족감정/정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용기있게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고, 끄집어냈다. 나는 그의 발언이 몰고온 물의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자세 자체는 지극히 치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자면,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거의 본능적인 욕망(기득권 보존욕과 일본에 대한 충실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니, 이 얼마나 윤리적인 것인가!

 

 

 

 

정신분석의 윤리란 무엇인가? “Wo es war, soll ich werden; Where it was, I shall come into being.” 즉, 보통은 “이드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생성되어야 합니다.”(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강의>, 열린책들)로 해석되는 이 문구는 보통 '이드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아'로 해석되는데, 라캉/지젝은 뒤집어서 '이드의 자리에서 이드화되는 자아' 쯤으로 해석한다. 이드, 그러니까 '그거' 혹은 '거시기'에의 충실성이 정신분석의 윤리가 되는 것. 이전에 이런 류의 윤리를 십분 발휘했다가 고초를 겪은 이로 마광수 교수를 떠올려볼 수 있다(아마도 그는 원조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 '커밍아웃'의 유사-저작권은 홍석천에게 있지만). '즐거운 사라'에의 충실성을 모토로 하여 그는 뭐라고 공언했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그것이 바로 커밍아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한승조 교수의 발언 또한 그러한 윤리적 사명감에 들려 있는 건 아닐까? 대낮에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혹은 "일본 만세!". 나는 이런 류의 윤리적 행위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우리는 '하나된 한국인'이란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전선은 보다 분명해지고 대오는 보다 정연해질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점잖은 체하면서,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친일파 이상으로 남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말아먹는 쪽들보다는 얼마나 고마운가!(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사꾸라꽃처럼 말이다.)  해서, 한 교수의 망언에 대해 여기저기서 모욕하고 규탄하는 태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려까지는 못하더라도, 좀 참아두어야, 나머지 '친일파'들도 모조리 '커밍아웃'을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이 '두더지'들의 면면을 제대로 다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닌가?  

하여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간신문의 다른 면에서는(물론 어제 TV뉴스에 이미 보도된바 있다) 그가 "적절치 못한 단어와 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힌 걸로 돼 있다. 여론에 떠밀려 슬쩍 꼬리를 내린 셈인데, 한 교수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의 친일 망언이 아니라 이 사과성명에 두어진다. 그런 성명이란, 자신의 윤리(커밍아웃)를 한갓 해프닝 정도를 격하시키는 비윤리적인 행위 아닌가? 안티고네의 고전적인 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요구되었던 '윤리'가 아니었을까? 흔한 말로,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인가?

 

 

 

 

귀국해서 지난 달에 빌려다 본 비디오들 중에는 <바람의 검 - 신선조>와 <라스트 사무라이>도 들어있었는데,  일본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둘 다 사무라이 시대가 마감되는 시기의 '마지막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연민을 느끼면서도(그들은 인문학 시간강사를 좀 닮았다) 그들의 사무라이다운 고집에 눈물을 흘렸다(가령, <바람의 검>에서 주인공이 할복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회한의 말들을 읊조리는 장면 등).

물론 요새 내가 눈물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사무라이의 윤리로서의 고집(충실성)은 숭고한 여운을 님긴다. 그리고 그건 정신분석의 윤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해석에도 그런 게 좀 들어가 있다. 미시마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지만, 그건 '윤리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 충동의 붙들린. 명분이 아무리 시대착오적이더라도. 물론 그런 죽음은 실용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죽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요컨대 한 교수가 진정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감사하고 그 정신에 감화받은바 있다면, 마땅히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고집/의지를 표명할 일이다.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고 수습할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그의 신념이란 것은 사꾸라꽃만도 못한 것이다. 야쿠자는커녕 양아치 수준밖에는 안되는 것. 한국 친일파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인가?(적어도 반세기 이상 이 남한 땅에서 떵떵거리며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의 기개와 윤리가 그 정도라면 창피하고 남세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이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를.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하는 불명예를 감수함으로써 꼬리를 빼지 말고 '명예'교수로서 당당하게 처신하기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교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친일파를 위해서라도(이들도 동족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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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가도 될까요?

종이 2005-03-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교수 건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된 글을 보니 시원합니다.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5-03-0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물론입니다... 종이님/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시아일합운빈현(?)님/환경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집으로 택배 하나가 왔는데, 바로 열린책들에서 보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의 마지막 권이었습니다. 전집의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출판사측에서 이 문제에 성의껏 대응하여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책을 새로 찍고, 교열지까지 만든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 생각됩니다. 차후에 다른 출판사례들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좋은 책만들기의 기본은 저자와 역자의 몫이겠지만, 책'만들기'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중 초고를 교정하는 일이야말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게 평소 제 생각인데, 우리의 출판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맨 뒷면에 저자/역자와 함께 교정자의 이름이 표기된 걸 보곤 하는데, 어느샌가 그런 전통(?)은 없어져 버리고, 교정일이 마치 허드렛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일단 교정일에 대한 품삯이 기대 이하인 까닭에 유능한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어렵고 또 제대로 된 교정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대충 오타나 고치고 마는 것인데(요즘 나오는 책들은 그것도 제대로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좀 무성의하게 나온 책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책이나 저자에 대한, 또 출판사에 대한 경의의 마음이 사그라들게 마련입니다.

 

 

 
 

제가 근래에 읽은 책으로 민음사에서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라는 대담집이 있습니다. 13개의 대담 중 7-8편을 읽었는데, 우리 시대 지성들의 열기가 느껴지는 좋은 책이지만(그래서 뛰어난 기획이라고 칭찬을 많이 들은 책이지만) 역시나 교정은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를 지적하면,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표기된 것(233쪽, 226쪽에는 <구름과 장미>로 바로 표기돼 있음에도), 소설가 최인호의 약력에서 1945년생이 1954년생으로 표기된 것(115쪽),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표기하면서 '(집)가'자 대신에 '(거리)가'자를 쓴 것(312쪽, 카라마조프 거리의 사람들!) 등.

이런 실수들이 분명 '죽을 죄'는 아니나, 책의 만듦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철학자 박이문 교수의 신간 <이성의 시련> 앞갈피에(저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실린 저자의 약력과 저서에서 <자비의 윤리학>이란 책명이 <비애의 윤리학>이라 표기돼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성의 시련'이자 '비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학 출판사 두 곳과 두 권의 책에 대해서만 예를 들었지만,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된다는 데 문제의 (사소하지 않은!) 심각성이 있습니다. 좋은 책은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만듦새에서도 정성이 느껴지는 책입니다. 제가 '교정'의 문제를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앞으로 더 많은 좋은 책들이 나왔으면, 그리고 더 좋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거기엔 '감시'의 눈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보다 좋은, 보다 완벽한 우리말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꿈꿔 봅니다...

01.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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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말하도록 하자. 니체에 대하여가 아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보다 反니체적인 것이 있을까?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우스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는 니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에 대한 사랑은 이만 걷어치우도록! 하여 나는 한편의 시와 그 주석을 니체에게 바치기로 한다.

⁂ ⁂ ⁂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더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나의 하루는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건
미친 생각이다 나는 안다

간혹 어깨가 결린다 무거운
돈가방이라도 들고 어디론가 튀고 싶다
꿈이다 아랫배가 고파오고 기온이 떨어진다
모든 것은 꿈과 같다 어젯밤에 본 영화 속의
치킨처럼 목 잘리고 잘 구워진 치킨처럼
잘만 하면 너도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는 결린 사람

나는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표백된 영혼
나는 은근히 다리를 절면서
저 온갖 벌레 같은 인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척한다
나는

미칠 지경이다
간혹 나는 사랑의 유언이며 시체가 아닐까
나는 벌레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다 자작나무 오동나무 오르지 못할 나무
내게 필요한 날들을 돈다발처럼 세어본다
꿈이다
내가 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

이걸 끌고 어디로 가나

어쩌면 이보다 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흥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나는 나의 과거는 과거의 한 조각은
기온이 떨어지면 따스한 곳을 찾는 꿈처럼
무말랭이처럼 입을 다문다

미친 척한 찔레나무와 찔레나무 한 그루를 기어
올라가는 벌레와 꽁무니에 고무풍선처럼 매달린 지구에
생각만 미친다 미친 생각이다 그건

왜 간혹 나는 어깨가 결리는 것일까?

⁂ ⁂ ⁂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믿음에서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나이 서른에 내가 배운 것이며 맨먼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의 몰락(Untergang)은 시작된다.

내가 꿈에 자주 결석하고 애린에 물들지 않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간혹 주체하지 못할 애린에 빠져 어디론가 튀고 싶어하는 것은 내가 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건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람(Űber-mensch)이 아니라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Unter-mensch)이다. 이걸 구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높이뛰기나 허들(장애물) 경기를 떠올리면 된다. 넘어지는 사람도 생의 정점에서는 한순간 넘어가는 사람 못지않은 날렵한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거의 넘어갈 뻔한다. 그러나 그게 전부이다. 넘어지는 사람은 여린 마음에 한 뼘만큼 이 지상의 중력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넘어가는 일 대신에 걸려 넘어져 주저앉는 일을 자신의 숙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결린, 기어이 걸린 사람.

결린 사람은 기어이 기어오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기어이 기어오르(려)는 그는 마치 시지프의 운명처럼 그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듯 명징한 의식 속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이 헛된 수난에 입문하게 된다. 편안히 나자빠져 있던 그가 문득 기어오르는 일이 혹 자기 생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 의문에 걸려들어 걸려 넘어진 이후의 삶은 이미 종친 삶이다. 그는 이미 사랑의 시체인 것이며 고작해야 사랑의 유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위대한 삶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과도Űbergang>이며 <몰락Untergang>이라는 점이다. 나는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살 줄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인식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인이 살 수 있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최승자 옮김)


 

 

 

하여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며, 모든 몰락하는 것들에 연민과 우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말고는 도대체가 더 적을 말도 없는 무능력한 나로서는 그저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걸로 나의 몰락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를 통과해서 읽어야 책은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니체와의 우정을 제안한다. 해서, 내가 할일은 끝났다. 더는 할만한 일도 없지만...

2003.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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