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교시에 강의를 위해서 만원버스와 지하철을 연거푸 타고 출근한다.  시간강사로서 주제넘게 '시간표'를 탓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9시 '문학'수업을 비인간적이라고 내내 툴툴거리면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1시간 반을 보내게 된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언제나 그렇듯이 조간신문을 읽어나가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키워드는 '커밍아웃'인 모양이다. 19면의 기명칼럼 제목이 '커밍아웃'이고, 같은 면의 두번째 사설에도 '커밍아웃'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물론 둘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망언'에 대한 것인바, "이번에 친일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충격적인 글은 전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다시 한번 커미아웃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황대권칼럼>); "그런 그의 주장은 한 개인의 갑작스런 돌출 의견일 수 없다. 그는 이른바 '친일파 세력'이 공유해온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아닌 그들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사설>) 종합하면, 이번 한교수의 기고발언은 친일파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논리를 대변하고 있는 '커밍아웃'이다.

영한사전에서 coming out은 '데뷔'란 뜻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어쨌든 지난 주말 이후 '한승조'란 이름은 전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으므로  데뷔로서 화려하고 성공적이다. 더구나 그는 반일 민족감정/정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용기있게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고, 끄집어냈다. 나는 그의 발언이 몰고온 물의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자세 자체는 지극히 치하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정신분석의 윤리에 기대자면,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거의 본능적인 욕망(기득권 보존욕과 일본에 대한 충실성)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니, 이 얼마나 윤리적인 것인가!

 

 

 

 

정신분석의 윤리란 무엇인가? “Wo es war, soll ich werden; Where it was, I shall come into being.” 즉, 보통은 “이드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생성되어야 합니다.”(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강의>, 열린책들)로 해석되는 이 문구는 보통 '이드의 자리를 대체하는 자아'로 해석되는데, 라캉/지젝은 뒤집어서 '이드의 자리에서 이드화되는 자아' 쯤으로 해석한다. 이드, 그러니까 '그거' 혹은 '거시기'에의 충실성이 정신분석의 윤리가 되는 것. 이전에 이런 류의 윤리를 십분 발휘했다가 고초를 겪은 이로 마광수 교수를 떠올려볼 수 있다(아마도 그는 원조 '커밍아웃'이라 할 만하다. '커밍아웃'의 유사-저작권은 홍석천에게 있지만). '즐거운 사라'에의 충실성을 모토로 하여 그는 뭐라고 공언했던가?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그것이 바로 커밍아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한승조 교수의 발언 또한 그러한 윤리적 사명감에 들려 있는 건 아닐까? 대낮에 자신의 거시기를 드러내기, 혹은 "일본 만세!". 나는 이런 류의 윤리적 행위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하며(우리는 '하나된 한국인'이란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전선은 보다 분명해지고 대오는 보다 정연해질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점잖은 체하면서,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면서 친일파 이상으로 남들을 등쳐먹고, 나라를 말아먹는 쪽들보다는 얼마나 고마운가!(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사꾸라꽃처럼 말이다.)  해서, 한 교수의 망언에 대해 여기저기서 모욕하고 규탄하는 태도는 좀 삼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장려까지는 못하더라도, 좀 참아두어야, 나머지 '친일파'들도 모조리 '커밍아웃'을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이 '두더지'들의 면면을 제대로 다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닌가?  

하여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조간신문의 다른 면에서는(물론 어제 TV뉴스에 이미 보도된바 있다) 그가 "적절치 못한 단어와 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힌 걸로 돼 있다. 여론에 떠밀려 슬쩍 꼬리를 내린 셈인데, 한 교수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의 친일 망언이 아니라 이 사과성명에 두어진다. 그런 성명이란, 자신의 윤리(커밍아웃)를 한갓 해프닝 정도를 격하시키는 비윤리적인 행위 아닌가? 안티고네의 고전적인 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요구되었던 '윤리'가 아니었을까? 흔한 말로,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인가?

 

 

 

 

귀국해서 지난 달에 빌려다 본 비디오들 중에는 <바람의 검 - 신선조>와 <라스트 사무라이>도 들어있었는데,  일본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둘 다 사무라이 시대가 마감되는 시기의 '마지막 사무라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에 연민을 느끼면서도(그들은 인문학 시간강사를 좀 닮았다) 그들의 사무라이다운 고집에 눈물을 흘렸다(가령, <바람의 검>에서 주인공이 할복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회한의 말들을 읊조리는 장면 등).

물론 요새 내가 눈물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사무라이의 윤리로서의 고집(충실성)은 숭고한 여운을 님긴다. 그리고 그건 정신분석의 윤리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해석에도 그런 게 좀 들어가 있다. 미시마의 죽음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지만, 그건 '윤리적인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 충동의 붙들린. 명분이 아무리 시대착오적이더라도. 물론 그런 죽음은 실용주의자들이 보기에 '개죽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조금 돌려서 말했지만, 요컨대 한 교수가 진정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감사하고 그 정신에 감화받은바 있다면, 마땅히 할복함으로써 자신의 고집/의지를 표명할 일이다.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고 수습할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그의 신념이란 것은 사꾸라꽃만도 못한 것이다. 야쿠자는커녕 양아치 수준밖에는 안되는 것. 한국 친일파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인가?(적어도 반세기 이상 이 남한 땅에서 떵떵거리며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의 기개와 윤리가 그 정도라면 창피하고 남세스러운 일이다.) 바라건대, 이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기를.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하는 불명예를 감수함으로써 꼬리를 빼지 말고 '명예'교수로서 당당하게 처신하기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교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친일파를 위해서라도(이들도 동족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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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가도 될까요?

종이 2005-03-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교수 건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정리된 글을 보니 시원합니다.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5-03-0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물론입니다... 종이님/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시아일합운빈현(?)님/환경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