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차례씩 진행하는 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의 일부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206144638§ion=04 참조). 이달의 읽은 책은 오항녕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이다.

 

 

 

프레시안(12. 12. 07) 2012 광해의 맨얼굴, 박정희인가 노무현인가?

 

(...)

 

김용언 :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읽다가 광해군이 폭군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다른 의미로서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칠게 표현했을 때 일반적으로 성군으로 꼽히는 정조나 세종대왕이 인문학적 왕이라면 광해군은 어떤 점에선 이과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궁궐 중축만 해도 물론 본인의 안전에 대한 신경증적인 집착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 외에도 궁궐을 짓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거든요. 중국에서 무슨 원료를 수입해라, 기와는 이런 걸 써라 하면서 본인이 하나하나 다 따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토건이나 건축, 혹은 나중에 나오는 외교적인 문제까지 광해가 관심을 갖는 건 문과적인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조선이 요구했던 왕은 아니라도 그 자체가 좋은 장관 내지는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조선에는 문치주의라는 강고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경연을 거부하고 다른 분야에만 집중했던 이 사람이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제 인상 비평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들께선 광해가 어떤 왕이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권우 : 오항녕 교수는 경연의 힘을 중요시하지만 한명기 교수는 그다지 크게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전작 <조선의 힘>에서 강조했던 조선 문치주의의 힘에 대한 연역적인 방법으로 광해군을 본 측면이 있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경연에 대해선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라는 책을 참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는 기대승의 <논사록>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가 번역되어 실려있는데요. 거기 묘사되는 경연의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학>의 몇 구절을 놓고 왕과 신하들이 함께 토론해요. 양쪽 다 고전에 대한 이해가 되게 높은데, 고전의 한 두 구절을 놓고 원뜻이 무엇이었는지, 중국 역사에서 어떻게 이해됐는지를 이야기하다가 곧바로 조선 현실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경연은, 고전에 비추어봤을 때 오늘의 정치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팽팽한 논쟁인 거죠. 임금은 제자가 되고 신하가 스승이 되면서 팽팽한 새로운 균형이 이뤄져요. 현실의 힘과 이상의 힘이 동시에 관철되면서 아주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진다는 거지요.

 

그런 걸 봤을 때 오항녕 교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설득당하고 설득하면서 거기서 도출되는 합의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과정에서 경연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대체로 폭군들이 경연을 등한시 하죠. 연산군도 경연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 대리 출석시켰다는 거 아닙니까. (웃음) 대체로 경연하라고 요구하는 건 신하들이고요. 원활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합의 시스템을 요구하는 거라고 전 느꼈어요. 그런 면에서 광해가 즉위 초반부터 왕권 위협 세력들에 대해서는 직접 친국을 가할 만큼 열성적이었는데 경연 자체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현우 : 왕권 견제 장치로서 문치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지요. 조선이 왕조 국가이긴 하지만 동시에 선비들이 지배했던 나라잖아요. 그게 권력의 전횡을 제한하는 효과도 가져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개혁이든 지지부진하게 만들기도 했죠. 대표적인 예가 대동법일 텐데요.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 지역에 한정해서 시험적으로 시행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요. 결국 5년 만에 흐지부지되면서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고요.

 

광해군 자신이 여기 대해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유가 있어요. 광해군의 지지 세력들이 방납(防納 : 일정한 대가를 받고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대주는 전문 업종)과 관련된 폐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뒤집어서 얘기하면 광해군의 실패는 광해군이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왕권을 좌지우지하던 당대 권신들 때문이기도 하죠. 그 잘못을 광해군에게 다 전가시킬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광해군이 조선 왕들의 평균보다도 못한 왕이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실리 외교도 그렇습니다. 파병할 때 후금에 비밀리에 전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공식적인 외교 노선이 될 수 없었죠. 왜냐하면 대신들 대부분이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에요. 저는 그런 것을 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해군은 우리가 배운 것만큼 개혁 군주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강력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 오항녕 교수가 얘기했던 문치주의라는 조선의 힘이, 그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권우 : 문치주의 시스템 내에서는 상대방의 주도권을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광해군 시절에는 문치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옥사가 자주 발생했죠. 저는 문치주의 시스템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광해군과 그의 지지 기반인 북인들이 공동 책임을 질 필요는 있다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현우 : 전 북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선비 계급 자체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과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폐해가 없어졌는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두 차례 호란을 불러오는 데 그쳤죠. 제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 갖는 불만 중 하나는 그거에요. 광해군 이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아요. 광해군 시절의 '잃어버린 15년' 때문에 조선 후기가 완전히 망가진 걸로만 나오잖아요. 이건 좀 과도한 인과관계 설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권우 : 음, 그 부분은 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봐도 당시 조선은 인조 반정 이후, 기미책(羈靡策)이라고 하죠, 명과 후금 모두 도발하지 않고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폈어요. 인조 때에도 배금을 한 건 아니라고, 책에 보면 "친명의 기치는 확실하게 유지되었"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 그들 역시 후금을 자극하여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명시했어요. 사실 인조 부분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선 광해군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의 가정은 가능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광해군이 권력을 유지했다면 병자호란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현우 : 적어도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했지요. 당연히 후금은 조선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인조 반정 이후 바로 명나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명백해지니까 그제서야 비로소 조선 침공의 명분을 찾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인조 얘기를 굳이 꺼내려던 건 아니고,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광해군의 잃어버린 15년을 바로잡은 게 인조라는 결론 때문에 의문이 들어서였습니다. 인조 시기를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건지 말이죠.

 

(...)

 

12.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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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말판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강의에서 읽은 게 계기가 돼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문학동네, 2011)을 다뤘다. 방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작품이어서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인 '한밤의 아이들 VS 인디라 간디'만을 글감으로 삼았다. 영화화된 <한밤의 아이들>도 조만간 볼 수 있었으면 싶다... 

 

 

 

한겨레(12. 12. 08) 독재권력에 절제당한 신생 인도의 가능성

 

살만 루슈디에게 세계적 유명세를 치르게 한 작품은 이슬람교를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파트와(사형선고)를 받은 <악마의 시>이지만, 그를 영어권의 대표적 작가로 떠오르게 한 작품은 그보다 먼저 쓴 <한밤의 아이들>이다. 영문학의 대표적 문학상인 부커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이 전례 없는 소설 덕분에 루슈디는 일약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시작은 단출했다. 1975년 첫번째 장편소설을 출간하면서 받은 인세로 루슈디는 인도를 여행하면서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관한 자전소설을 구상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인도의 초대 총리로 17년 동안 통치했던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 인디라 간디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인도는 1977년까지 ‘어둠의 시대’를 통과하게 되는데, 그러한 환경에서라면 개인의 삶과 역사가 분리될 수 없다는 통찰이 자연스레 얻어질 만하다.

 

루슈디는 새 소설의 주인공 살림 시나이를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인도가 독립국가로 새롭게 탄생한 1947년 8월15일 자정에 똑같이 태어난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통찰을 정면으로 밀어붙인다. “나는 불가사의하게 역사에 손목이 묶여버렸고 나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져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는 게 살림의 말이다. 그렇게 하여 마치 역사에 수갑이 채워진 것처럼 살림의 개인사는 인도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전개된다. 루슈디의 두번째 소설 <한밤의 아이들>의 탄생이다.

 

 

그런데 왜 ‘한밤의 아이들’인가? 열번째 생일을 맞은 살림은 1947년 8월15일 자정부터 1시 사이에 자신을 포함해 모두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다. 그 가운데 420명이 영양실조와 여러 질병 등으로 사망하고 581명의 아이들이 살아남았다. 이 아이들은 모두가 자정이 선물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어떤 아이는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몸의 크기를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도 있었다. 저마다 변신과 비행, 예언, 마법의 능력을 보유한 가운데, 살림이 가진 초능력은 사람들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살림을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한밤의 아이들은 협회까지 결성하게 된다. 그들의 초능력은 신생국가 인도의 잠재적 역량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밤의 아이들은 비상사태 속의 계엄 하에서 불순한 음모를 꾸미는 집단으로 내몰려 모두 체포돼 희망을 절제당한다. 살림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인디아는 곧 인디라, 인디라는 곧 인디아”라고 생각한 간디 여사에게 한밤의 아이들은 경쟁자이자 흉악한 범죄자 집단으로 치부된 것이다. 새로운 인도의 가능성은 ‘한밤의 아이들’과 함께 열렸다가 그렇게 닫힌다.

 

12.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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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낮에 어렵사리 아이템을 잡아서 쓴 것인데, 생각해보니 대선 전에 쓰는 마지막 칼럼이다. 자연스레 변화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최소한 '청춘이 절망하는 나쁜 사회'와는 결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자면 물론 청춘들 자신의 적극적인 투표참여가 필요하다. 이제 20일 남았다. <현시창>(알마, 2012)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도 골라놓는다.

 

 

 

경향신문(12. 11. 30) 나쁜 사회가 만든 청춘의 절망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서두다. 어디 가정에만 적용되랴. 사회나 국가도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좋은 사회는 서로 엇비슷하지만 나쁜 사회는 제각각의 이유로 나쁘다. 오늘의 한국사회를 나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 하나가 ‘청춘의 절망’이다. 현역 기자가 쓴 우리시대 ‘벼랑 끝’ 청춘들에 대한 취재보고서 <현시창>에 저자가 붙인 서문의 제목이 ‘청춘이 절망하는 나쁜 사회’다.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이니만큼 우리 시대 불행의 절대치가 유난한 건 아니겠지만 그 성격을 특징짓고자 할 때 ‘청춘의 절망’을 우선순위로 꼽을 만하다. ‘현실은 시궁창’의 줄임말 은어로 ‘현시창’이란 말이 입에 오르는 것만 보아도 절망의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냥 ‘현실은 시궁창’이라고만 하면 현실에 대한 치기어린 냉소 정도로만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구는 원래 가수 에미넴의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가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걸 줄여서 ‘꿈높현시’라고도 부른다고. 사실 ‘현시창’이란 현실 인식이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꿈은 높은데’라는 말과 대구를 이루는 ‘현실은 시궁창’은 오롯이 청춘의 현실을 떠올려준다.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앞으로가 더 힘들 것 같아요”라고 하소연하는 게 그 현실이다.

<현시창>에서 저자는 오늘을 사는 청춘들의 힘겨운 사연을 노동, 돈, 경쟁, 여성 등의 키워드에 따라 분류했는데, ‘일터의 배신’을 다룬 첫 장의 첫 번째 사례가 2011년 7월 일산의 한 이마트 매장에서 냉동기 점검 작업을 하다가 누출된 냉매 가스에 질식사한 서울시립대생 황승원씨다. 안타까운 사건으로만 잠시 기억되고 말았을 일이지만 기자는 황씨의 여동생을 만나 그의 스물두 해 짧은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낯설지 않은 사례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황씨는 학원도 제대로 못 다니며 독학으로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했다. 어렵게 한 사립대학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800만원 가까운 등록금이 너무 부담이 됐다. 두 학기 등록금 1000여만원이 고스란히 빚이 됐고, 결국 장학금을 받고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황씨는 수능을 봐서 등록금이 훨씬 적은 서울시립대에 다시 입학한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은 군대에 갔다 온 뒤에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복학하기 전에 대출금을 갚기 위해 냉동설비 수리업체에 취업한 그는 사고 당일 야간작업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고 진상 규명이 늦어져 가족들은 병원 냉동고에 보관돼 있던 그의 주검을 사망 40여일 만에야 발인했다. 그러고도 유족에겐 학자금 대출이 그대로 남았다.사고사만 제외하면 황씨의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청춘의 초상이다. 높은 등록금과 구직난으로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게 그들의 시궁창 현실이다. 한두 사람이 겪는 불운이라면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한 세대가 통째로 겪는 불행이라면 사회적 문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적 문제는 개개인의 분발이 아닌 사회적 처방과 해법을 요구한다.

 

“알바해서 학자금 대출부터 갚을 거야”라는 소박한 꿈이 좌절된 자리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새로운 꿈이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치부되는 것에 대한 꿈이다. 지난 대선의 공약이기도 했던 반값등록금은 왜 도입되지 않고 불가능한 것으로 도외시됐는가? 마음의 부담을 절반으로 줄여주겠다는 공약이었다고? 시립대의 사례에서 알 수 있지만 문제는 의지이고 결단이다. 이번 대선이 우리가 ‘현시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1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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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272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분기별 책꽂이가 특집이라 타이틀은 '겨울의 책꽂이'로 돼 있다.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석달간 출간된 책 가운데 주목할 만한 책 다섯 권을 선정해달라는 요청에 응했고 그중 한권에 대한 서평을 쓰게 됐는데, 바로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가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가 그 대상이었다. 아직도 하드를 복구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메일함에서 찾아다 옮겨놓는다.

 

 

 

시사IN(12. 12. 01) 현대 중국을 흔든 두 개의 혁명

 

중국 공산당의 제18차 당대회가 폐막하고 시진핑을 당 총서기로 하는 5세대 지도부가 출범했다. 알려진 대로 시진핑은 공산혁명가의 자제들 그룹인 태자당의 일원으로 분류된다. 자오쯔양과 당 총서기직을 다투기도 했던 혁명원로 시중쉰의 아들이어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기에 실각했던 부친 때문에 시진핑은 어두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산골마을의 동굴 움막에 살면서 7년간 강제노역을 한 경험이 있고 그의 공산당 가입도 10전 11기 끝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인상적인 인생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시진핑의 사례가 특별히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실상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은 중국의 현대사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진핑보다는 조금 아래 연배이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에서 중국의 대표작가 위화가 열 개의 단어로 집약해서 전해주는 중국의 모습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파란만장하고 흥미롭다.

 

 

 

지금은 ‘시진핑 이후의 중국’이 세계의 관심사이지만 중국현대사로 시야를 확장하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역사는 중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의 표현대로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로 나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민의 ‘영수(領袖)’ 마오쩌둥이 말년에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직접 써붙임으로써 촉발한 문화대혁명이다. 절대권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항상 군중의 힘을 빌려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결과는 중국 대륙 전체를 집어삼킨 군중의 광기였다.

 

1976년 마오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위화는 집단적 애도의 물결 속에서 문득 유머를 느낀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고 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부짖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유머였다”고 그는 적는다.  

 

“우리는 적이 반대하는 것을 옹호해야 하고 적이 옹호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게 마오 시대의 구호였다면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것을 위화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정리한다. 물론 그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가져온 기록적인 경제성장은 모두가 궁핍했던 중국을 경제대국임과 동시에 극도로 불균등한 국가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1980년대 중반부터 상하이 같은 동부 연해지역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마셨지만 1990년대 중반에도 중부 산간지역 출신들은 설을 쇠러 고향에 갈 때 코카콜라를 선물로 가져갔다. 같은 중국이라지만 10년 이상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치혁명과 경제혁명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읽어내는 게 위화의 통찰이다. 오늘날 중국 부호들 가운데 상당수는 빈손의 가난뱅이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억만장자가 된 이들이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위화는 마오의 문화대혁명과 덩의 개혁개방이 중국이 풀뿌리 계층에 두 차례 거대한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라고 말한다. 곧 문화대혁명이 정치권력의 새로운 분배였다면 개혁개방은 경제권력의 재분배였다. 시진핑의 중국은 이제 중국 인민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1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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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02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여러 권이 한꺼번에 쏟아진 스테판 에셀의 책들을 거리로 삼았다. 작년 여름에 <분노하라>(돌베개, 2011)에 대한 서평을 쓴 적이 있으니 이번이 두번째이다.

 

 

 

주간경향(12. 11. 27) 세상을 바꾸려면 공감하고 참여하라

 

유럽 국가들의 긴축재정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최근 유럽 전역 23개국에서 벌어졌다. 스페인에서는 수백만이 시위에 참가했고 프랑스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전면적인 경제 위기를 노동 계급의 희생을 통해서 넘어서려는 자본의 시도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저항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스테판 에셀의 책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2010년 그가 펴낸 소책자 <분노하라>는 프랑스에서만 300만부 가까이 팔려나갔고,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는 35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열광적인 반응이다. ‘분노하라!’는 간명하고도 시의적절한 메시지가 갖는 호소력이 그러한 반응의 한 요인이라면, 다른 요인은 아마도 그의 발언 자격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독일군에 체포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에셀은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전력이 있다. 이 선언문의 1조는 이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분노하라> 이후의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는 <분노한 사람들에게>(뜨인돌, 2012)에서 에셀은 이 조문의 갖는 이상적 성격을 인정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 ‘특별하고 놀라운 내용’을 아직 온전하게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것은 “희망이고, 목표이고, 강령”이다. 분명 아직은 실망스러운 상태이지만 1950년 이래 많은 진보도 이루어냈다는 게 에셀의 평가다. 하지만 2008년 세계경제위기 전후의 상황은 이러한 낙관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을 만들고 유럽에 평화를 정착시킨 세대로서의 자부심이 자칫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절박감이 에셀로 하여금 젊은 시절을 능가하는 활발한 활동에 나서도록 만든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또 대항해야 하는가. 되짚어보자면, 에셀은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세계의 양극화이다. ‘1퍼센트’가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나머지 절대 다수는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전 세계 70억 인구 가운데 최소 3분의 1이 비인간적인 조건 아래서 생존하고 있다면 그러한 사실 자체가 특단의 대책을 필요로 한다. 둘째는 환경의 파괴다. 지구라는 행성은 인간의 무차별적인 개발과 착취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의 분노를 촉발하는 위험들이다. 물론 분노만으로 충분하진 않다. 에셀은 연이어 펴낸 <참여하라>를 통해서 미래를 짊어질 젊은 세대에게 참여하고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이성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분노와 그러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참여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조건이다.


거기에다 에셀은 ‘공감하라’는 주문을 덧붙인다. 우리는 공감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옛 세계와 공감이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 사이의 문턱에 살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단합하는 것”이다. 변화는 연대 없이 가능하지 않다. 공감은 그 연대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연대는 물론 개인 간의 연대뿐 아니라 국가들 간의 연대를 포괄한다. 이러한 공감과 연대가 구축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증오의 테러리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셀이 좋아하는 릴케의 시구는 “그대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이다.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합니까? 여러분이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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