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차례씩 연재하는 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111113847§ion=05 를 참고하시길). 지난 연말에 가진 좌담에서 다룬 책은 존 그레이의 <불멸화 위원회>(이후, 2012)였다.

 

 

 

프레시안(13. 01. 11) 냉동된 지도자의 시체…그는 신이 되려 했다!

 

(...)

 

이권우 :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는 다윈주의 충격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한 세속주의의 대응 같아요. 구체적으로 34쪽을 보면 "인간과 지각 능력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토록 기나긴 진보의 과정을 기껏 거치고 나서 완전히 소멸할 운명에 이른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다. 하지만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의 소멸이 그리 끔찍한 전망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나오죠. 이 구절이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기본적 속성 같아요. 우리 육체가 불멸한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사후에도 지속된다는 것, 이 사후에 지속하는 영혼이 계속 진화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19세기 말 고전학자 프레더릭 마이어스는 "과학은 죽는다는 것이 '더 이상 물리적인 재앙으로 중단되지 않고 무한히 먼 목적을 향해 계속 움직여 나가는 도덕의 진화 과정' 상에 있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줄 터"라는 믿음을 가졌지요. 심지어 본인이 죽기 전에 봉인된 편지를 친구에게 남기고, 나중에 유령이 되어 영매를 통해 그 편지와 똑같은 내용의 신호를 보내겠다고 했죠. 결국 같지 않다는 게 드러났지만.(웃음)

 

김용언 : 영국 심령주의자들의 한계는 엘리트라는 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다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자, 교수, 물리학자, 작가 등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꿈꿨던 사후 세계라는 게, 자신들의 그 좁은 귀족 그룹 이외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잖아요. 상류층 사람들이 그 상류층의 삶을 사후에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이미 19세기 말에 이르면 자신들이 누려왔던 특권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자신의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는 상황에 대한 불안한 예감도 심령주의 부흥에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권우 : 맞습니다. 101쪽에 보면 유령과의 교차 통신에 '정신적 우생학' 실험이 포함되잖아요. 우생학은 결함을 없애는 걸 목표로 하는 학문입니다. 심령학자들은 사후 육신에 결함이 없을 거라고 믿었고요. 그러니까 양쪽 모두 과학의 어떤 성과를 받아들이면, 인류가 과거에 발생한 그 어떤 수준보다도 더 높이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거지요. 우생학이 대체로 엘리트 중심이고 지배권력 중심이다 보니까, 심령주의에 빠진 인물들도 엘리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영국인들의 불멸의 꿈은 엘리트 중심 우생학이 심령주의와 얽히면서, 다윈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그에 저항하려 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이현우 : 이 책에선 영국과 러시아의 공통점으로 진보에 대한 관념을 꼽지요. 지금이야 모두들 진보와 진화가 다르다고 얘기하고, 진화의 동력이라는 건 우연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계기에 따라 진행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죠. 당시에는 그런 관념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관념 자체를 전부 폐기하지 못했지요.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에선 마르크스적인 진화론을 종교적 관념과 결합시켜요. 부르주아 사회가 폐기된 이후에 새롭게 도래될 사회라는 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이고, 그 사회주의적 인간 자체도 훨씬 더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팽배합니다. 흥미로운 건 '더 나은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도 얘기했지만, 죽음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됐어요.

 

이권우 : 책 53쪽에 보면 그렇게 왜곡된 방향으로 대중화된 진화론에 대해 나옵니다. "진화에 완전함을 향해 가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으며 "진화는 하등한 생명 형태에서 고등한 생명 형태로 가는 과정"이라는 속설 말이죠. 그걸 퍼뜨린 대표적 인물이 허버트 스펜서와 프랑스의 생물학자 라마르크라고 지적합니다.

 

이현우 : 오늘날에도 통속적으로 많이들 그렇게 오해를 하지요. 라마르크 식 유물론, 스펜서 식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요. 보통 우파 이데올로그들도 적자생존이 진화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잖아요. 이 라마르크 진화론은 러시아의 스탈린 시대에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수용됩니다. 책에 언급된 유명한 예로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가 나오지요. 사실 다윈 식 진화에는 이념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인간이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자연의 유전적 특성을 바꾸면서 개선시키고 발전시킨다는 노력에 라마르크 식 진화설이 잘 들어맞기 때문에, 리센코는 바로 그 라마르크 식 진화론을 채택합니다.

 

다윈주의 진화론을 신봉했던 생물학자들은 리센코의 정적으로 간주되어 전부 숙청당해요. 특히 세계적인 육종학자였던 니콜라이 바빌로프도 그 와중에 희생당하고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을 못 했고, 소련의 생물학은 약 30년 동안 퇴보 상태에 머무릅니다. 이념적으로 옳은 것, 이념적으로 받아들이기 좋은 것, 실제 과학적 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데, 그 중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큰 재앙의 결과를 맞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러시아 작가 보이노비치의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추어 생물학자인 한 등장인물이 육종 개량 시험을 하는데, 그 프로젝트 이름이 '사회주의로의 길'이에요. 토마토 줄기에 감자 뿌리를 결합시켜 아래는 감자가, 위에는 토마토가 열리게 하는 거죠. 절반의 성공을 거둡니다. 감자 줄기에 토마토 뿌리로.(웃음) 현실 사회주의 실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동시에 리센코주의의 비판이기도 해요.

 

이권우 : 방향이 자연스럽게 러시아 쪽으로 넘어왔는데요, 러시아의 불멸의 의지에는 건신주의(建神主義)가 결합되어 있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건신주의가 정확히 어떤 건가요?

 

이현우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신을 만들어야 한다' 내지는 '우리가 신이다'라는 믿음입니다. 그게 함축하는 바는 '신이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거지요.(웃음)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강철 인간' 정도는 돼야죠.

 

러시아 혁명기 때 문화적으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새로운 인간'이었어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인가, 내지는 어떻게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이건 니체 식 초인(위버멘쉬)이기도 합니다. 1900년대 초 러시아에서 니체주의가 굉장한 반향을 얻었어요. 그들을 매혹시킨 건 초인 혹은 새로운 인간에 대한 관념이었고, 볼셰비키 역시 모든 인민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 이후 무자비한 학살 내지는 죽음에 대한 방조가 벌어진 상황의 이념적 배경은 바로 그겁니다. 레닌과 트로츠키, 스탈린 모두 공통적으로 대단히 무자비했습니다. 특히 농민 계급에 대해서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 5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는데 죽어 마땅하다며 일부러 방치했어요.

 

이권우 : 러시아 혁명사를 살펴보면 혁명 이후 농민들이 식량을 안 내놓았잖아요. 그 문제와 관련된 조치였던 건가요?

 

이현우 : 그렇진 않습니다. 농민은 노동자들과 다르게 취급되었어요. 러시아 혁명 자체가 노동자들의 연대 혁명으로 설명됩니다. 깃발에도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잖아요. 망치가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고 낫이 농민 계급을 상징해요. 볼셰비키 혁명가 내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었지만, 국민 전체적으로 봤을 때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어요. 그들만으로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전복할 수 없기 때문에 농민들의 연대가 필요했던 거죠.

 

당시 농민들이 혁명에 동조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런 거예요. 그동안 귀족 계급에 예속되어 자기 땅을 가질 수 없었거든요. 농노 해방 이후에도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을 전전했는데, 세상이 바뀌면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에 동조했던 겁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는 상황이 달라져요. 부농을 러시아 어로 '쿨락(kulak)'이라고 하거든요. 주먹을 뜻하는 '쿨락'에서 나온 말이지요. 무얼 쥐고 있는 계급이에요. 바로 농민들의 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유욕을 뜻하는 것이고, 그런 본성으로는 새로운 인간이 될 수가 없다는 주장이 대두됩니다. 결과적으로 농민은 새로운 사회의 적으로 간주되고 치밀하게 척결이 추진됩니다.

 

일단 계급을 나눠요. 부농, 중농, 빈농. 맨 처음엔 부농 척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요. 그런데 기준이 참 애매합니다.(웃음)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이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부농입니다. 작으나마 자기 땅을 가졌거나 말 한 필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무조건 중농입니다. 빈농은 진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고요. 나중에 빈농 빼고 대부분이 계급의 적으로 타도 대상이 돼 숙청당합니다. 소유욕은 부르주아적 근성이며 이기적 본성이고, 그런 본성을 다 제거해야만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민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권우 : 이 건신주의라는 게 러시아의 전통적 영지주의와 관련 있다고 나오는데요. 여기에는 어떤 배경이 있나요?

 

이현우 : 러시아 종교철학자 중 니콜라이 표도로프(책에는 페도로프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원발음은 표도로프이다.-편집자 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사람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불멸화 위원회> 186쪽에 잘 나오는데, 표도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임무는 모든 죽은 자들, 우리가 잃은 모든 사람들, 우리의 아버지들과 선조들을 그들의 아들로서, 그들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영국하고 좀 다르게, 영혼만 계속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육신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고 하지요. 이런 러시아 정교가 사회주의와 결합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부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죠.

 

인간을 극대화하고 과대평가하면 '인간은 신'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잖아요.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는 존재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생겨나요. 상대적으로 평균적 인간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생겨나고요. 아이러니합니다.

 

 

자본주의의 강점은 인간에 대한 과소평가입니다. 인간은 다 하찮은 존재들이고 굉장히 속물적이고 천박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관념. 한편 이게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이기도 하죠.(웃음)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현 수준의 인간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고 강철 같은 인간, 새로운 인간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 사례가,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노동 영웅 운동이지요. 스타하노프 운동 같은 것이요. 스타하노프는 탄광 노동자였는데 열 몇 명 어치의 일을 혼자 해냈어요. 사회주의에는 인센티브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혼자 대가 없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점 때문에 인민 영웅이 되고 다른 노동자들의 모범이 됐죠. 당신이 스타하노프처럼 탄을 못 캐내는 건 열의가 부족해서고 당성이 부족하고 혁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착취의 방식이죠. 너는 이렇게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존재라면서 거꾸로 인간에 대한 굉장한 억압을 가하는 겁니다.

 

(...)

 

13.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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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4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왕의 초상'이다. 더 좁혀서는 조선시대 어진과 어진화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책&(13년 1월호) 궁중회화의 꽃, 어진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의 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달에는 전제군주국가에서 권력의 대표적 표상이라고 할 만한 왕의 초상에 대한 궁금증을 몇 권의 책을 통해서 풀어보도록 한다.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1)다. 조선사와 미술사 전공자들이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이모저모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이에 따르면 왕의 초상 곧 어진(御眞)은 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궁중회화였다. “조선시대 어진은 왕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 그 자체였으며, 어진의 보존은 왕실의 안위와 계승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궁중의 가장 중요한 회화 업무가 어진의 도사 혹은 모사였고, 도화서의 존재이유도 어진의 도사에 있었다.

 


왕의 초상 제작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에도 왕의 진영이 제작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영정의 특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같은 그림이 보여주듯이 왕과 왕후의 영정이 같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고려의 유습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돼 태조의 비 신덕왕후나 신의왕후의 초상이 그려져 사당에 봉안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자취를 감춘다. 숙종이 계비의 초상 제작을 명령한 적이 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다.


조선 시대 어진은 ‘터럭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론에 근거해 정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 실력자들을 선발하여 제작했으며 이들 어진은 다른 나라의 초상화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조선 태조, 영조, 익종, 철종, 고종, 순종의 초상이 전부다. 첫 임금 태조에서부터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되었음에도 소수만 남은 까닭은 창덕궁의 신선원전에 봉안된 어진들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보관창고의 화재로 그 상당수가 소실됐기 때문이다.

 


조선미의 <왕의 얼굴>(사회평론, 2012)은 한·중·일 3국 군주의 초상화를 비교·소개하는 책인데, 한국 어진의 제작 과정과 현재 보존되고 있는 각 어진의 특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준다. 조선은 국초부터 태조의 진전(眞殿)을 서울과 지방 다섯 곳에 세우는 등 진전제도를 확립했다. 비록 왜란과 호란 때 많이 파손됐지만 어진 봉안 처소로서 진전의 존재는 경시되지 않았다. 어진은 제작과정에 따라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 세 종류로 나뉜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 시에 그리는 것이고, 추사는 사후에 그리는 것으로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모사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 진전에 봉안해야 할 때 기존본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도감이 설치되며 당대 최고의 화가가 천거나 시험을 통해 선발돼 어진화사를 맡았다. 어진화사에는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집필화사(執筆畵師) 또는 주관화사(主管畵師)가 얼굴 부분을 담당했고, 동참화사(同參畵師)가 몸체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맡았다. 그리고 수종화사(隨從畵師)는 채색을 거들었다. 대략 여섯 명 정도가 제작에 참여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어진화사는 직업화가로선 최고의 영예이지만 최고의 화가라고 하여 모두 어진화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단원 김홍도의 경우 빼어난 그림솜씨로 여러 차례 어진화사에 임명됐지만 한 번도 주관화사를 담당하지는 못했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화풍이 개성을 억제하고 묘사의 세밀함을 추구하는 어진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의 화가들>(돌베개, 2012)은 어진화사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재주를 시험한다’는 뜻의 시재(試才)를 통해 엄정하게 선발되면 어진화사는 밑그림을 그려서 제출하고 왕과 대신들의 평가를 듣는 봉심(奉審)을 거쳐서 어진을 완성해나간다. 어진이 완성되면 최종평가를 거쳐서 봉안 절차를 밟았다. 흥미로운 것은 중간평가 단계인 봉심인데, 화원들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해 애를 먹었다. 용안을 정면에서 응시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대신들조차도 초본을 보고서 닮음의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옆에 어진을 두고 용안과 초본을 비교해가며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봉심에서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면 가필(加筆)과 가채(加採)가 이루어졌다.   


한편 어진화사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17세기 후반에 마련된 기준에 따르면 화원들의 급여는 쌀 12두와 포목 1필로 돼 있는데, 다른 공장인(工匠人)들과 비교하여 훨씬 나은 대우였다고 한다. 급여뿐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는 관직도 주어졌는데, 주관화사에게는 특별한 경우 3품, 기본적으로는 6품 상당의 관직이 하사됐다. 어진화사들은 초상화만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고 산수, 인물, 화조는 물론 궁중 기록화와 장식화,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통해서 기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13.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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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zone 2020-11-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궁중화에 관심이 생기네요.
 

이번주 시사IN(278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오래 두고 읽는 책'이란 카테고리에 4주에 한번씩 서평을 쓰게 됐다. 처음 고른 책은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 2012)이다. 어제 KBS라디오 '신성원의 문화읽기'의 '책, 책, 책' 코너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와 함께 소개한 책이다(매주 두 권씩의 책을 소개하는 코너다).

 

 

 

시사IN(13. 01. 12) 식민지 시대 엘리트의 허영

 

교양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재검토하게 해주는 책이 출간됐다.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이다. 제목부터가 ‘교양의 탄생’이 아니라 ‘속물 교양의 탄생’이다. 무엇이 속물 교양인가? “문화적 취향을 전시하기 위해 차용된 명작, 엘리트임을 보증하기 위한 독서 목록, 성공적인 삶의 조건으로서의 학력 자본은 교양이 아니라 속물 교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그러한 속물 교양이 그동안 버젓이 교양 노릇을 해왔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가짜’였다고나 할까.


한국 근대문학 전공자로서 ‘정전의 문화사’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저자는 ‘속물 교양’의 기원을 식민지 조선시대로 잡는다. 당시 이름깨나 날리던 조선의 문사들은 하나같이 서양명작으로부터 받은 감화를 토로했고 항상 그에 견주어 조선의 문학을 평했다. 가령 이광수의 경우 <단종애사>는 <햄릿>에 가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셰익스피어에 비하여 어떨지 모르지만 오히려 <맥베스>에 비슷한 점이 많을 걸요”라고 답한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그 대표작들에 대한 견문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바로 그런 코드가 당시의 ‘교양’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한문으로 쓰인 ‘진서(眞書)의 세계’는 ‘원서(原書)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번역 이전의 책을 가리키는 이 말을 일본에서는 구미의 책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지만 조선에서는 일역본들까지도 원서로 지칭됐다. 조선은 ‘번역국’이 아니라 ‘중역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호화롭게 양장된 원서의 세계, 세계문학전집은 엘리트의 교양을 보증하는 것”이었고, 호화본과 양장본 원서들이 꽂힌 서재가 식자층의 ‘교양’을 대변하는 척도였다. 이 원서의 세계로 빨리 진입하기 위해 <태서문예신보>(1918)나 <해외문학>(1927) 같은 잡지가 창간될 정도로 조선에서는 서양명작에 대한 물신적 숭배도 팽배했다. 하지만 보통 ‘이름값’이었다. 가령 <레미제라블>은 ‘불국 문호 위고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추켜세워졌지만 발췌된 의역본으로나 읽혔다. 명작은 ‘좋은 책’이라기보다는 ‘유명한 책’이었고, ‘명작의 의미가 지워진 명작’으로 읽혔다. 속물 교양은 그렇게 탄생했다.


식민지 시대의 속물적 교양주의를 저자는 주로 서구식 교양에 대한 갈급하고 표피적인 수용이란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러한 경향을 거스르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일본산 세계문학전집들의 프레임과는 다른 시각에서 조선문학을 바라보고 재평가하려는 시도였다. 가령 문학사가 김태준은 ‘걸작, 춘향전의 출현’(1931)에서 춘향전이 신흥계급의 승리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갑오 이전 백여 년간 시대의 거울이며 그 시대가 낳은 문학적 보전”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193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대학’을 자처한 ‘조선문고’(학예사)가 발간되는데, 놀랍게도 <원본 춘향전>이 그 첫 권이었다. “현대의 문화는 벌써 소수 사람의 손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인의 공동한 참여 가운데 건설되어가는 것”이라는 발간사의 서두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발언으로 교양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만든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은 우리에게 속물 교양의 기원과 함께 진정한 교양의 ‘오래된 미래’ 또한 보여준다.  

 

13.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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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청탁을 받아 쓴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요한 하위징아>는 안 그래도 읽어보려던 책이었기 때문에 선뜻 응했다. 해맞이 버스여행 길에 읽은 기억이 새롭다. 하위징아의 대표작 네 권 가운데 국내엔 <중세의 가을>(1919)과 <호모 루덴스>(1938)만이 번역돼 있는데, <에라스뮈스>(1924), <내일의 그림자 속에서>(1935)도 마저 소개될 수 있으면 좋겠다. 거기에 더 얹어서 <미국의 개인과 대중>, <17세기의 네덜란드 문명> 같은 책들도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한다고 역자도 후기에 적었다.  

 

 

 

중앙일보(13. 01. 05) '놀이하는 인간'의 그 학자, 역사의 바탕은 문학이었네

 

“세상이 지금보다 500년 더 젊었을 때, 모든 사건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명한 윤곽을 갖고 있었다. 즐거움과 슬픔, 행운과 불행, 이런 것들의 상호간 거리는 우리 현대인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먼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경험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새겨지는 슬픔과 즐거움처럼 직접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런 대목을 기억하시는지? 요한 하위징아(1872-1945)의 『중세의 가을』(1919) 서두다. 제목대로 서양 중세를 다룬 역사책이다. 하지만 하위징아의 책은 좀 특별하다.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저명한 중세사학자는 여럿 더 있지만 “세상이 지금보다 500년 더 젊었을 때”라고 적는 역사학자는 하위징아뿐이다. 이 특별한 역사학자가 어떤 인물이었을까 궁금했던 독자에게 빌렘 오터스페어의 『요한 하위징아』는 반가운 선물 같은 책이다.

 

같은 네덜란드인으로 하위징아로부터 ‘글 읽는 방법’을 배웠다는 저자가 쓴 이 평전의 초점은 역사학자 하위징아가 아니라 ‘고전을 써낸 작가’ 하위징아다. 그에 따르면 하위징아는 몇 안 되는 네덜란드의 고전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물타툴리·루이스 쿠페루스·벨렘 엘스호트 등 함께 거명되는 네덜란드 작가가 모두 우리에게 생소한 걸 보면,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저자는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가를 넘어서 우리가 아는 유일한 네덜란드 학자인지도 모르겠다. 놀랍게도 그는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는 지근 거리까지 접근한 유일한 네덜란드 작가”이기도 했다.

하위징아를 고전작가로 조명하려는 게 저자의 특이한 의도인지라 평전임에도 불구하고 하위징아의 생애는 책에서 비교적 간략하게 다뤄진다. 네덜란드 북부 지방 도시인 흐로닝언 출신인 하위징아는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토의식을 갖고 있었고, 첫 번째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흐로닝언 대학에 몸담았다. 다섯 자녀를 위해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할 정도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대본을 쓰는 건 맏아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만두었다.

그는 평생 동안 시계처럼 정확한 삶을 살았는데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강의에 나가고 저녁에는 각종 언어의 문법책을 읽었다. 그는 십 수 개 언어를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단조로운 학자의 삶이었지만 다행히도 65세에 젊고 상냥한 두 번째 아내와 재혼하여 나치 지배하에서도 만년의 삶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러한 생애의 요약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대조될 수도 있지만 하위징아는 열정이 역사의 감각기관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에 대한 엄정한 인식과 객관적 학문 정신을 강조하는 꼬장꼬장한 역사학자는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를 좀 더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과거의 회화를 보아야 하고 과거의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테를 특별히 사숙했던 그의 책들이 풍부한 문학적 암시와 향취를 자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저자는 하위징아의 다양한 글쓰기 스타일과 공감각적 서술방식을 소개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데, 하위징아가 즐겨 쓰는 대조법은 이런 식이다. “감성에 이성이 필요한 것처럼 우둔함에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미학의 분야에서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학의 분야에 오면 충성심과 질서가 된다.” 이러한 대조 속의 조화는 그가 역사뿐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기도 했다.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과 같은 책이 어떤 정신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13. 01. 05.

 

 

P.S. 기사에서 <요한 하위징아>를 '평전'이라고 적었는데, 제목의 기대치이긴 하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원제는 <하위징아 읽기>이고 저자의 초점은 하위징아의 생애가 아니라 '작가 하위징아'의 '훌륭한 저작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략한 전기적 스케치와 연보를 통해서 하위징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게 이 책을 읽은 소득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건 하위징아의 우수에 찬 시선이었는데(인터넷에 뜨는 대부분의 사진에서 그는 공허하고 슬픈 눈빛을 보여준다) 그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연보에 따르면 대학시절의 하위징아는 "우울하고 감상적인데다 조울증의 기질이 있어서 흐로닝언 교외를 몽상에 빠져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아마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은 것, 아버지의 매독이 유전됐을까봐 두려워 이복동생이 자살한 것 등이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스무 살에 5세 연하의 마리아를 만나서 서른 살에 결혼하고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면서 그의 인생도 좀 피게 된다. "마리아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조울증 기질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연보는 적는다. 이런 게 '생의 대조법' 아닐까.

 

그렇지만 자신의 '베아트리체'이기도 했던 아내 마리아가 38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하위징아는 커다란 상심에 빠진다. 아내와 사별하고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 저녁 종말이 닥쳐왔다네, 아무런 의식도 고통도 없이."라고 그는 적었다. 게다가 48세 때는 장남이 1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후엔 무미한 학자로서의 삶이다. 하위징아의 뒤늦은 행복은 65세 때에야 다시 찾아온다. 노학자는 젊고 상냥한 28세의 처녀 구스테와 만나 다시금 열정에 빠지며 재혼까지 한다. 마지막 책을 아내에게 헌정하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 생애의 마지막 7년을 행복의 빛으로 가득 채워 주었고, 조국의 적들이 내게 강제 부과한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해준 여인에게 이 책을 바친다."

 

<요한 하위징아>의 저자는 하위징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문화의 카산드라였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빛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덕과 악덕에 따라 세상을 구분하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하위징아의 저서에서 처방 없는 묘사는 없고, 대조 없는 역사는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더 나아가면,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생애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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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올해도 격주로 서평은 게재한다. 첫 책으로 다룬 건 연말에 나온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다. 고진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저작인 만큼 앞으로도 여러 번 곱씹어보게 될 듯하다. 마무리가 아니라 이제 시작인 셈. 고진의 책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를 먼저 읽거나, 같이 읽으면 좋겠다. 절판된 <트랜스크리틱>은 더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서 참고해야 할 책이다(다시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주간경향(13. 01. 08) '마르크스의 헤겔비판'을 다시 한다

 

일본의 대표적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작 <세계사의 구조>가 번역돼 나왔다.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봄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전망을 열려는 시도”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적었다. 그런 시도 자체는 낯설지 않다. 교환양식이란 관점은 전작인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제시한 바 있다. 무엇이 달라졌고, 얼마나 더 전진한 것일까.

 

궁금증에 답하기라도 하듯 고진은 <트랜스크리틱>과 <세계사의 구조>의 차이부터 설명한다. 애초에 그는 “마르크스를 칸트로부터 읽고, 칸트를 마르크스로부터 읽는” 작업을 ‘트랜스크리틱’이라 명명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텍스트’로 읽는 독특한 방법을 제시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다. 하지만 2001년에 일어난 9·11은 자본과 국가에 대해 더 근본적으로 고찰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텍스트 독해’라는 방법론을 넘어서 독자적인 ‘이론적 체계’를 만들도록 부추긴 것이다. 즉 <트랜스크리틱>이 비평가의 저작이라면 <세계사의 구조>는 이론가 혹은 사상가의 작품이다.

고진은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그 연장선상에서 완성하고자 한다. “나의 과제는 어떤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다시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반복한다는 것은 동시에 마르크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과 네이션, 국가를 상호연관적으로 파악한 헤겔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제 경제를 하부구조로, 그리고 네이션이나 국가는 거기에 얹힌 상부구조로 간주했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하부구조를 철폐하면 국가나 네이션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는 관념은 거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은 국가와 네이션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진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끌어오지 않는다. 그의 독창적인 착상은 네이션과 국가가 자본과는 다른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점에 있다. 바로 교환양식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구조를 설명했지만, 이제 고진은 교환양식을 통해 그것을 해명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설명을 보완하고자 한다. 교환양식을 그는 A(호수), B(약탈과 재분배), C(상품교환), 그리고 D(X), 네 가지로 구분한다. 발생사적으로 보자면 A는 부족사회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이고, B는 국가사회의 지배적 교환양식이다. 그리고 C는 자본제 사회의 지배적 교환양식이며, 고진이 아직은 X라고 부르는 교환양식 D는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진 교환양식 A의 고차원적 회복으로서 앞으로 도래할 세계공화국의 하부구조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해명한 것은 주로 교환양식 C의 세계였다. 때문에 다른 교환양식이 형성하는 네이션과 국가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해명할 수 없었다. 반면에 고진은 교환양식이란 이론틀을 통해서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새롭게 해명한다. 더불어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확보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세계 시스템을 일거에 지양하는 ‘세계 동시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 마르크스의 이 신화적 비전은 전 세계적 차원의 폭력적 봉기라는 이미지로 각인돼 지금은 기각됐지만 고진은 그것을 다시금 복원한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가령 일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유엔에 ‘증여’하는 것이 일국혁명이다. 그러한 행위가 많은 국가로 확산된다면 그것이 바로 세계 동시혁명이다.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남은 가능성은 세계 전쟁이라고 고진은 말한다. 낙담할 필요는 없다.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도 세계대전의 산물이었으니까. 곧 세계공화국의 실현이 쉽지는 않더라도 그 가능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13. 01. 02.

 

 

P.S. <세계사의 구조>를 펴낸 이후 고진의 필력이 더 탄력을 받은 듯싶다. <'세계사의 구조'를 읽다>, <정치와 사상>, <철학의 기원> 등을 연거푸 펴내고 있다. 올해도 두어 권이 국내에 번역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그는 아직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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