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278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오래 두고 읽는 책'이란 카테고리에 4주에 한번씩 서평을 쓰게 됐다. 처음 고른 책은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 2012)이다. 어제 KBS라디오 '신성원의 문화읽기'의 '책, 책, 책' 코너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와 함께 소개한 책이다(매주 두 권씩의 책을 소개하는 코너다).

 

 

 

시사IN(13. 01. 12) 식민지 시대 엘리트의 허영

 

교양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재검토하게 해주는 책이 출간됐다. 박숙자의 <속물 교양의 탄생>(푸른역사)이다. 제목부터가 ‘교양의 탄생’이 아니라 ‘속물 교양의 탄생’이다. 무엇이 속물 교양인가? “문화적 취향을 전시하기 위해 차용된 명작, 엘리트임을 보증하기 위한 독서 목록, 성공적인 삶의 조건으로서의 학력 자본은 교양이 아니라 속물 교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그러한 속물 교양이 그동안 버젓이 교양 노릇을 해왔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가짜’였다고나 할까.


한국 근대문학 전공자로서 ‘정전의 문화사’ 연구에 몰입하고 있는 저자는 ‘속물 교양’의 기원을 식민지 조선시대로 잡는다. 당시 이름깨나 날리던 조선의 문사들은 하나같이 서양명작으로부터 받은 감화를 토로했고 항상 그에 견주어 조선의 문학을 평했다. 가령 이광수의 경우 <단종애사>는 <햄릿>에 가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셰익스피어에 비하여 어떨지 모르지만 오히려 <맥베스>에 비슷한 점이 많을 걸요”라고 답한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그 대표작들에 대한 견문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바로 그런 코드가 당시의 ‘교양’이었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한문으로 쓰인 ‘진서(眞書)의 세계’는 ‘원서(原書)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번역 이전의 책을 가리키는 이 말을 일본에서는 구미의 책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지만 조선에서는 일역본들까지도 원서로 지칭됐다. 조선은 ‘번역국’이 아니라 ‘중역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호화롭게 양장된 원서의 세계, 세계문학전집은 엘리트의 교양을 보증하는 것”이었고, 호화본과 양장본 원서들이 꽂힌 서재가 식자층의 ‘교양’을 대변하는 척도였다. 이 원서의 세계로 빨리 진입하기 위해 <태서문예신보>(1918)나 <해외문학>(1927) 같은 잡지가 창간될 정도로 조선에서는 서양명작에 대한 물신적 숭배도 팽배했다. 하지만 보통 ‘이름값’이었다. 가령 <레미제라블>은 ‘불국 문호 위고의 대표적 걸작’이라고 추켜세워졌지만 발췌된 의역본으로나 읽혔다. 명작은 ‘좋은 책’이라기보다는 ‘유명한 책’이었고, ‘명작의 의미가 지워진 명작’으로 읽혔다. 속물 교양은 그렇게 탄생했다.


식민지 시대의 속물적 교양주의를 저자는 주로 서구식 교양에 대한 갈급하고 표피적인 수용이란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러한 경향을 거스르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일본산 세계문학전집들의 프레임과는 다른 시각에서 조선문학을 바라보고 재평가하려는 시도였다. 가령 문학사가 김태준은 ‘걸작, 춘향전의 출현’(1931)에서 춘향전이 신흥계급의 승리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갑오 이전 백여 년간 시대의 거울이며 그 시대가 낳은 문학적 보전”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193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대학’을 자처한 ‘조선문고’(학예사)가 발간되는데, 놀랍게도 <원본 춘향전>이 그 첫 권이었다. “현대의 문화는 벌써 소수 사람의 손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인의 공동한 참여 가운데 건설되어가는 것”이라는 발간사의 서두는 오늘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발언으로 교양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만든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은 우리에게 속물 교양의 기원과 함께 진정한 교양의 ‘오래된 미래’ 또한 보여준다.  

 

13. 01. 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