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에게'는 '목마와 숙녀'로 잘 알려진 박인환(1926-195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이지만, 언젠가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그래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시이다(이미지에는 윤석산 교수의 평전이 올라와 있지만, 내가 읽은 건 이동하 교수의 평전 <박인환>(문학세계사, 1993)이다. 대표시들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인데, 요절한 시인인지라 작품집이 한권으로 카바된다). 흔히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시와 노래(박인희)대표작의 감상성에 기대어(과거 음악다방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시인이 박인환과 (성산포의 시인) 이생진이었다. 혹 이런 시의 낭송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 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 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때까지

(...)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하여간에 이름은 카페로 돼 있는 다방에 앉아 있으면 누굴 기다리거나 말거나 들려오는 건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아니면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이었다(거의 유사한 목소리의 성우가 낭송했던 듯하다. 언제였던가? 스무살이 되던 무렵?). 아, 하나 더 있긴 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카페를 겸하던 서점의 이름조차 '홀로서기'였다(그 시를 내게 또박또박 적어서 보내준 여학생도 지금은 다 학부모가 되었겠군).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해서 연배는 다 제각각이지만 박인환, 이생진, 서정윤은 내게 한국시의 센티멘탈리즘 3인방이다('센치멘탈리즘'이라고 읽어야 한다). '어린 딸에게'는 그런 박인환이 남긴 몇 안되는 '리얼리즘' 시이다(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수록돼 있다).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哀訴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데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내가 시를 다 암송하지는 못하는 대신에 자주 중얼거렸던 구절은 "엄마는 너를 껴안고 3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이다. 딸아이가 생기기 훨씬 이전의 일인데, 얼마전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려던 '혁명'이 불발로 그친 뒤에 간혹 떠올리게 된다. '혁명'이 아니라 '전쟁'인 셈인가?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얼마전부터 집사람과 자주 '냉전'에 돌입하는 까닭에 나는 자주 딸아이의 '행복'에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지만(덕분에 딸아이는 '스트레스'란 단어를 내 방에 와서 써놓고 가기도 한다. '아빠 미워'란 말과 함께), 그런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다. 

20대 총각시절 나의 소망은 나중에 딸아이가 7살이 되면 한방 가득 도서관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딸아이도 한때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요즘은 '아빠처럼 책 좋아하는 남자는 안 만날 거야'라고 미리 선언을 한다. 적어도 한 여자에게서만큼은 존경받는 남자이고 싶었고, 딸이라면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얄팍한' 계산이었는데, 일이 만만치 않게 됐다(이러다간 인생 헛사는 게 시간문제겠다). 그 아이의 가장 최근 모습이다.

'조작' 시비가 있을까 하여 사이즈는 그대로 놔두었다. 스스로 발가락만 아빠를 닮았다고 하니까(더 추궁해야 입술도 닮았다는 정도의 얘기를 듣는다) 내가 기여한 바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하여간에 아이는 나의 DNA정보를 1/2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동료 인간이다. 참고로, 아이가 언젠가 그린 아빠 얼굴은 아래의 모습이다(거의 닮은 바가 없어, 옆집 아빠를 그려놓은 게 아닌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나마 웃는 모습이어서 다행이다).

아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게될 무렵 사람의 손가락을 다 그려놓는다고 한다. 그러니 아이는 이미 '자기'에 대한 주관과 고집과 땡깡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며칠전 책정리 기념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찍은 사진(사진은 모두 엄마가 찍어준다).

하필이면 의자도 아닌 애매한 박스 위에 앉아서 찍었는데(그것도 잠옷만 입고) V자에 좀 어정쩡한 미소가 아이의 전형적인 포즈이다. 우리 부부가 싫어하는 포즈이기도 한데, 이건 어떻게 살아남은 사진이군. 서재의 한쪽 벽면에는 주로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교양과학과 정신분석학쪽도 포함해서). 이 방면이 지난번 '쓰나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생존률이 높다. 아직 안 읽은 게 많다는 얘기이고, 니체 등과 관련해서는 계획중인 글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이기도 하다. '쓰나미' 이후엔 상당히 깨끗해져서 요즘은 '들어갈 수 있는' 서재의 전경이다(사진이 흐릿하게 나와서 무슨 책들이 꽂혀 있는지는 다 염탐이 안 되실 듯하다). 눈밝은 이라면 왼편 상단에 프로이트 전집 몇 권이 꽂혀 있는 걸 알아보실 수 있을 듯. 그 아래로는 대개 정신분석학 관련서들이고, 가운데 서가는 대부분 현대 프랑스 철학책들이다. 하단부엔 벤야민과 손택, 아렌트의 책들도 몇 권 보이는데, 읽기 위해서 혹은 쓰기 위해서 가까이에 배치해 놓은 것들이다. 전공서적이나 문학관련서들은 대부분 다른 방에 가 있다(아이의 방으로 꾸며주지 못한 방).

아이와 언제나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4살 때는 엄마가 시기할 정도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래서 아이가 거의 최초로 무슨 '어린왕자' 같은 그림을 그려놓았을 때도 나는 혹시 '아빠'를 모델로 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아직 손가락도 그려넣지 않았던) '좋았던 시절'에 관해 가끔 얘기가 나오면, 아이는 "옛날에, 내가 4살때..."라고 말한다. 옛날이라! 하긴 여섯 살 평생을 살아온 아이에게 재작년의 일들은 먼 옛날일 법하다. 내가 20대 초반을 회고적으로 기억하듯이 말이다. "이젠 내 곁을 떠나간 아쉬운 그대이기에..."

그리고 이건 아이가 옛날에, 그러니까 4살 때 한글을 처음 배우면서 연습장에다 처음으로 써놓은 한글 모음들이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작년엔 모스크바로 '아빠 사랑해요'라고 또박또박 적은 생일 축하카드를 보내오기도 했었다(이젠 그렇게 배운 한글로 '아빠 미워'라고 써놓는다!). 해서, 나는 루소나 레비스트로스처럼 이 야만적 문명, 혹은 문자의 폭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순수했던 시절, 그러니까 옛날에, 4살때, '성스런 야만인' 시절 아이는 이런 모습이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많이 왔었나 보다. 아, 옛날이여,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나, 그으날, 그날이여!..

05. 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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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2-1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너무너무 귀엽네요! 저 깜찍한 브이 하며... 허허. 앞으로는 더 존경받는 로쟈님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

깍두기 2005-12-1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공주님과 디엔에이 1/2을 공유하고 계시다면 로쟈님도 상당한 미모이실 듯^^

외로운 발바닥 2005-12-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이쁜 공주님이네요. ^0^
20대 총각인 저도 로쟈님과 같은 꿈을 꾸어보야야 겠네요.

stella.K 2005-12-1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따님이 정말 귀티나네요. 저만하면 딸래미를 위한 훌륭한 도서관 아닌가요? 딸에게 박인환의 시를 읽어주면 정말 멋질 것 같군요. 그렇다면 로쟈님은 멋쟁이신가요?
송구합니다. 사실은 오래전에 즐찾해놓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개하시는 책들이 저 보단 세수쯤 위라 섣불리 아는 척했다 민망한 일 당할까봐 도둑처럼 드나 들었습니다.
그나마 따님 얘기하시는 이 수준이 저에겐 딱 좋군요. 반갑습니다.^^

yoonta 2005-12-15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봐도 울집에 있는 책이 벌써 여러권 눈에 띄는군여..진리와 방법..저 영어본은
꽤 오래된 판본인가보군녀..

지나간 일이지만 정말 아깝슴당...로쟈님 책 2500여권..ㅠ.ㅠ

로쟈 2005-12-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저보다는 제 딸내미에게 더 관심들이 있으시군요. 그나마 책에 먼저 눈길이 가는 yoonta님이 예외이시듯한데, 필시 아직 미혼이실 듯하고 (제 전철을 밟으실 듯한) 장차의 부녀지간이 눈에 보일 듯합니다(말씀하신 <진리와 방법> 영역본은 89년쯤에 산 거 같군요. 번역 세미나를 두어 달 한 거 같습니다).^^

로쟈 2005-12-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 어젯밤에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는데(제가 읽은 것만 두번째), 아이가 미리 선언을 하더군요. 언젠가 자기한테 물려줄 거라고 한 아빠 책들은 나중에 다 갖다 버릴 거라고. 지금은 책읽는 거 좋아하지만, 크면 안 좋아 할 거라고. 해서, 제가 아빠 책들은 나중에 도서관에 기증하면 된다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도서관'은 물건너 간 거 같습니다...

이럴수록 2005-12-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속에 그대를 못잊어 그리워한다..........

이네파벨 2005-12-1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정말 이쁘네요....
동그란 이마랑 뽀얀 피부랑 웃는 눈이랑...

아빠에게 상처주는 미운 말 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되지만...
미운 일곱살이라는 말이 달리 있는게 아니라는걸 저 역시도 실감하고 있답니다
(제 아들내미도 일곱살이거든요.)



기인 2007-05-18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도 벌써 햇수로 2년 전이니.. '먼 옛날'의 일이군요 ^^
따님은 이제 또 어떻게 변했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