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게네프가 말년에 쓴 산문시들은 국내에 일찍 소개되어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가장 대표적으론 '거지'란 시를 들 수 있다. 여러 차례 번역됐는데, 그 중에는 장만영의 번역도 있다. 기억엔 1930년대이고, '비렁뱅이'란 제목이었다. 윤동주의 산문시로 돼 있는 '투르게네프의 언덕'도 이 '거지'를 패러디한 것이다. 지난주 아트앤스터디 러시아문학기행에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다루면서 참고자료로 읽어본 김에 여기에도 옮겨놓는다(번역의 출처는 잊었다). 대학강의에서도 투르게네프 시간에는 곧잘 나눠주곤 한다. 국내에서는 이미 논문들도 나와 있을 만큼 두 시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는데, 나도 기회가 되면 제대로 된 규모의 해석을 붙이고 싶다('윤동주와 앙드레 지드' '윤동주와 투르게네프' 등이 내가 쓰고픈 글감이다).
거지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어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 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헤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 없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그는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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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통조림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10.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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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윤동주에 관해선 작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푸른역사, 2004 개정판)이 기본서이다. 찾아보니 이상섭 교수의 <윤동주 자세히 읽기>(한국문화사, 2007), 권오만 교수의 <윤동주 시 깊이 읽기>(소명출판, 2009)도 그간에 새로 나왔다. '방학'이란 이런 책도 읽을 수 있다는 뜻인데, 요즘 같아서야 '노예'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