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일본인의 역사관
출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오늘 관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이학사, 2007)도 그런 책이다. 필요 때문에 일본 근대사와 근대문학에 관한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상당히 다양한 주제, 혹은 난제를 다루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새삼 주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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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11. 24) 동아시아 ‘근대성’ 해명에 도전하다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는 야심찬 책이다. 저자는 서구 근대의 보편성을 주장한 막스 베버의 테제를 문제 삼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베버의 테제는 근대화를 논의하는 이론적 출발점으로서 독보적인 위력을 발휘해왔다. 그 점에서 저자의 문제 제기는 야심찬 기획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막스 베버가 말한 서구적 합리성이… 그대로 보편성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에 근거하여 저자는 비유럽 사회, 특히 동양에도 독자적인 ‘합리성’(p.21)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문제 제기 자체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주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주물러 닳고 닳았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적절한 답안이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저자의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낡은 문제에 새로운 피를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학자의 임무가 아닌가.
저자는 근대 일본 사상의 역사 속에서, 베버 테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음을 잘 안다. 그 다양한 시도들을 뛰어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런 논의를 진행할 경우, ‘자칫하면 서양인의 유럽 중심주의적 이해(오해)를 힐난하거나’, ‘민족주의가 얼굴을 내밀어 자아(민족) 의식으로 가득한 논의를 하게 될 위험성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일본에서 그 위험성은 ‘일본의 독자성론’으로 나타난 바 있다. 최근에 유행 담론이 되어 버린 근대 비판론은 첫 번째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일본인으로서 저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새삼스럽게 근대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지독한 난제(아포리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자는 ‘아시아인들의 고뇌를 망각한’ 일본적 오만함을 넘어서, 즉 일국적(一國的) 관점을 넘어서 그 난제를 검토해보겠노라고 한다.(p.22) 동아시아의 근대를 일국적 관점을 넘어 검토한다는 그 점이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한 국가로서 일본은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여전히 오만함의 늪에 빠져 있다. 이 책은 그 늪에 빠진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내부에서 점검하고 반성하며, 그 궤적을 다시 그리고자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아시아의 근대, 특히 일본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수많은 이름과 논제들을 만날 수 있다. 근대 연구의 어려움은 도처에서 연구자를 가로막는다. 언어적 난관들, 엄청난 사료들, 극과 극을 달리는 시각들, 가치관의 대립이 얽히고 설키어 어려움은 가중된다. 전문화가 진행될 대로 진행된 학문 상황은 애초부터 근대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가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구나 자기 영역 지키기를 학문적 미덕으로 여기는 작금의 풍토에서 저자의 고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서 근대를 새롭게 파악하려는 ‘난제’가 한 사람의 연구자에 의해 속시원히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야심찬 시도가, 어설픈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안다. 일본인으로서 저자는, 일본인의 도취적 자기 인식을 극복하여, 비틀거리며 나온 동아시아 근대의 상(이미지)을 그려보이고자 한다. 그것은 학문적 작업을 넘어서는 자기 고백을 포함한다. 그 고백은 진정한 소통을 소망하는 한 학자의 순수함의 표백이고, 초대의 손짓이다. 그 손짓에 우리는 화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재 동아시아는 반성과 화해의 손짓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 근대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해도, 그 인식과 반성의 계기는 단일하지 않다. 계기가 다르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달라진다. 근대가 난제인 이유는, 그것이 탈-근대의 전망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가 단일하지 않은 것처럼, 근대를 넘어서는 그 길 역시 단순하지 않다. 중국이 동아시아라는 개념 자체에 무관심한 이유, 우리가 동아시아 연구에 소극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근대’는 학문만의 문제이거나, 순수한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애초부터 순수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의 확대, 관용과 대화가 요청된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 동아시아의 소통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역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이용주|동양학자)
10. 01. 06.
P.S. '근대라는 아포리아'가 무얼 뜻하는지 서평기사에서는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이에 대해선 공역자의 한 사람인 야규 마코토의 '후기'가 참조할 만하다. 두 문단만 옮겨놓는다. 인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며칠 전에 포스팅한 '러일전쟁과 일본인의 역사관'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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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 메이지유신부터 러일전쟁까지의 시기는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하고 청나라, 러시아 같은 대국에 승전한 영광에 가득 찬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메이지유신 전후부터 러일전쟁 사이에 활약한 인물들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소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자기 역사에 긍지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같은 시기에 근대화에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일본인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오만함과,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동양 국가 일본"과 "문명화에 실패한 아시아"라는 대립 구도에 입각한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와 맑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근대주의)의 위력으로 기존의 사회형태나 고유의 가치관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일본에서는 "근대의 초극(극복)"론으로 연결되었고 독일에선 나치즘이 대두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근대의 극복"론은 결국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나치즘은 히틀러와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의 박해, 말살,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유럽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를 감안할 때 현대의 근대 비판은 동시에 어설픈 반근대론을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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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말하자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가 근대가 떠안겨주는 난제(아포리아)다. <근대성의 아포리아>는 함동주 교수의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창비, 2009), 그리고 스즈키 사다미의 <일본의 문화내셔널리즘>(소화, 2008)와 함께 책상맡에 놓아두고 있다. 피터 두으스의 <일본근대사>(지식산업사, 1983/2006), 김용덕 교수의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지식산업사, 1991/2005)도 최근에 집으로 나른 책들이다. 일본 근대 관련서는 상당히 많기 때문에 얼마간 읽고 나야 '감'이 잡힐 듯하다. 이달말까지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2005)을 정독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로 넘어가는 게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