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날이자 가을의 첫날 비가 내렸다. 원래 비가 오는 날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는 '좋아한다'는 표현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기분을 한껏 가라앉게 만드는 가을비는 은근히 '이렇게 끝나는구나' 내지는 '이렇게 끝나겠구나'란 예감과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곧 몰락의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리라. 책은 대책이 될 수 없지만, 대책이 없기에 책을 집어든다. 이달에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선정한 '9월의 읽을 만한 책'을 따라가보기로 한다.
1. 문학
문학분야의 책은 황석영의 신작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 2008)이다. 이미 출간과 함께 화제를 모은 책이기에 군말이 필요없을 듯하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소개는 이렇다. "책 맨 앞에 “젊은 시절 언제나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시던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칩니다” 라는 헌사가 붙어있는 황석영의 성장자전소설이다. 지나간 시대나 현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했던 작가의 변화무쌍했던 인생 이력 중에서 십대시절이 60년대 우리 사회 상황을 뒷배경으로 소설 안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요컨대, 황석영 문학의 '원점'을 가리키는 작품이다. 특이한 것은 작년의 '9월의 읽을 만한 책'도 황석영의 <바리데기>(창비, 2007)였다는 점. 내년 9월도 기대가 된다.
자전적인 소설이란 점에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중국 작가 장룽의 <늑대 토템>(김영사, 2008). 방대한 분량 자체가 '대륙풍'이다. 소개에 따르면,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내몽골에서 늑대와 생활하며 깨우친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늑대와 인간이 벌이는 생존을 위한 두뇌싸움이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장대하고 긴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여기에 작가가 품고 있는 문명관, 역사관, 세계관, 사상, 지식 등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로 꿰뚫고 있다." 요컨대, 1960년대 개밥바라기별을 바라보던 청년이 한국에 있었고, 초원에서 늑대들과 뒹글던 쳥년이 중국에 있었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씨가 고른 역사분야의 책은 '백범학' 연구자 배경식의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너머북스, 2008)이다. 이 선정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데, 얼마전 '당신은 백범을 정확히 아는가'(http://blog.aladin.co.kr/mramor/2231110)란 리뷰도 옮겨놓은 적이 있다. 이덕일씨에 따르면, "교양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치고 『백범일지』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기라는 뜻의 ‘日誌(일지)’가 아니라 숨은 일을 기록한다는 뜻의 ‘逸志(일지)’라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그런 처지이므로 이번에 나온 (현재까지로는) '정본'을 손에 들어봄 직하다. 이미 한번쯤 읽은 독자라도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가 어떤 것인가 살펴보면 좋겠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건국절' 논란의 중심인물인 우남 이승만에 대한 책들이다. 최근 우파 계열에서 앞다투어 책을 냈지만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를 넘어서는 저작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적어도 분량으론 넘어서는 책이 없다). '다이제스트'급으로는 서중석의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 2007)을 들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책이로군...
3. 철학
철학분야의 책으로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것은 제롬 뱅데가 엮은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문학과지성사, 2008). "이 책은 완전히 변하고 있는 세상, 21세기의 전망을 담은 책이다. 지구촌의 공적 교육을 책임진 유네스코가 기획했고, 철학에서 정책 실무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명망을 자랑하는 전문가 49인이 참여했다. 가령 데리다, 리쾨르, 보드리야르, 미셸 세르, 크리스테바, 제레미 리프킨 등과 같은 인사들이 그들이다." 49인이나 참여한 만큼 분량도 두둑하다. 가치가 어디로 가는지 알기도 전에 9월이 먼저 지나갈 것이다. 겨울밤까지 읽을 '양식'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겨울까지 읽을 만한 책에 <알랭 바디우와 철학의 새로운 시작>(새물결, 2008)도 있다. 저자인 김상일 교수가 거물급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존재와 사건>의 독해를 시도한 책인데, 아직 <존재와 사건>이 번역되지 않은 마당인지라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그러한 사건을 재촉한다는 의미는 갖겠다. 소개에 따르면, "알랭 바디우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도덕경>으로 대표되는 동양 철학을 동서양 공통 언어인 수학을 통하여 설명해보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독자에 따라서는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짐작에 김상일 교수는 동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스케일에 있어서 김형효 교수와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싶다(이제까지 '원효에서 화이트헤드까지'였는데, 이젠 '노자에서 바디우까지'이다!). 남는 게 여가/여유뿐인 독자라면 따라가볼 만하겠다.
4. 정치
김광웅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프로네시스, 2008)이다. 얼마전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프로네시스, 2008)와 같이 나온 책으로 이미 '반-반미주의 좌파'(http://blog.aladin.co.kr/mramor/2220146)란 페이퍼에서 소개한 바 있다(<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에 대한 박홍규 교수의 리뷰는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728 참조). 추천의 변은 이렇다. "'나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자칭하는 저자는 ‘권력과 언어’, ‘권력과 역사’, ‘자본주의와 죽음’ 등에 남다른 통찰력을 발휘하면서 “권력 없는 사회는 없고, 남용 없는 권력은 없다”라는 명제를 앞세워 인류역사상 인간의 얼굴을 한 전체주의와 내일의 천국을 가장하는 자본주의를 맹박한다. 기술·욕망· 사회주의 등 세 비극의 원형을 없애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성취될 수 있을까?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수단, 앙골라 등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부정되는 지역을 누비며 인간사회의 모순을 설파한 ‘신철학’을 접하기 바란다.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비교하며 읽으면 와 닿는 것이 더 있을 것이다." 해서 여차하면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2권은 개정판이 안 나온 것인지?). 한데, 포퍼도 '내일의 천국을 가장하는 자본주의'를 맹박했던가?..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고른 경제/경영서는 역시나 전폭적으로 동의할 만하다. 게다가 시의적절하다. 찰스 모리스의 <미국은 왜 신용불량 국가가 되었을까?>(예지, 2008)이 그것인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계속 악화 전망이 나오고 있는 미국경제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우리도 사정은 좋지 않아서 9월 위기설도 나오는 등 뒤숭숭한데(오늘도 환율은 폭등하고 코스피 주가는 폭락했다) 미국 경제의 전망은 어떨까? "저자에 따르면 미국경제의 장래는 결코 밝지 않다. 향후 1,2년간 금융기관들은 자산상각의 공포와 도가니 속에서 들끓고, 부도는 급증할 것이며, 아마도 2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집을 잃고, 소비는 위축되어 경기침체가 오래 갈 것이다. 미국은 대전환을 할 시점에 왔다. 규제완화로 인해 불투명해진(위험)금융상품에 대한 ‘정보’를 다시 투명하게 유통하여 금융시장의 대기를 뒤덮고 있는 독기를 걷어내야 한다. 그것은 정부의 몫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결론이다."
더불어 떠올린 책은 마쓰후지 다미스케의 <미국경제의 종말이 시작됐다>(원앤원북스, 2008). 거기에 '국제금융기구와 외채에 관한 진실, 세계 밖의 세계'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다미예 미앵 등의 <신용불량국가>(창비, 2006)와 'IMF, 세계은행, WTO는 세계를 어떻게 망쳐왔나'를 따져본 리처드 피트의 <불경한 삼위일체>(삼인, 2007) 등은 포개 읽을 만한 책. 사실 후자의 두 권은 미국보다는 한국 경제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을 법한 책들이겠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유승호의 <문화도시>(일신사, 2008)이다. 생소한 책인데, 일종의 교재인 듯싶다. "애초에 학술서로 기획된 이 책이 일반 독자층에 널리 읽힐 수 있는 교양서로 꼽힐 수 있게 된 데에는 저자의 아기자기한 필치가 한몫하고 있음이 분명하나, 세계 문화도시 성공사례를 사진과 함께 간결이 제시한 기획력이 보다 결정적이라고 본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지역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부제.
개인적으론 '문화도시'보다 '시민사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지라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창비, 2008), <시민사회의 다원적 적대들과 민주주의>(후마니스트, 2007),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 등을 고른다. 고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7. 과학
과학분야의 책으로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건 로이 스펜서의 <기후 커넥션>(비아북, 2008)이다.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기상학자가 쓴 이 책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상식의 교정을 의도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인정하지만 그 원인이 인간이 사용한 화석연료를 포함해 다양한 요인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재의 기후 모델이 기후시스템에 민감한 강수, 구름, 바다 같은 변수를 포함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류를 지구온난화 공포로 몰아가기보다 정교한 기후모델을 개발하는 데 투자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는 '회의적 환경주의자' 비외른 롬보르의 <쿨잇>(살림, 2008)을 떠올리게 한다('7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았었다).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과 맞장뜰 만한 책은 모두 '지구 온난화'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토로하고 있는 책들이다. 앨 고어의 '긴급환경리포트' <불편한 진실>(좋은생각, 2006)이 아마도 널리 알려진 경우이겠다. 거기에 마크 라이너스의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돌베개, 2006)의 부제는 '투발루에서 알래스카까지 지구온난화의 최전선을 가다'이고, 팀 플래너리의 <지구 온난화 이야기>(지식의풍경, 2007)의 부제는 '기후 변화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최고의 안내서'이다. '불편한 고백 vs 불편한 진실'의 구도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이영재, 이영수의 <추사정혼>(선, 2008)이다. 그러고 보니 추사(秋史)의 '추'가 '가을 추'였다. "20대 후반부터 70대 만년에 이르기까지 추사가 남긴 200여 편의 작품에 대한 세심한 감평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글도 글이지만 추사의 아름다운 서화들이 오래된 색을 그대로 머금고 책 속에 단아하게 편집이 되어 책갈피를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평한다.
그런 즐거움에 몰입하다 보면 '추사에 미치'는 지경도 남의 일만은 아닐는지 모른다. 이상국의 <추사에 미치다>(푸른역사, 2008)가 그런 경지 아닐까. '150년 전의 천재와 사랑에 빠진 빈섬의 황홀한 지적 탐험'이 담겨 있다. 작가 한승원 선생도 <추사1,2>(열림원, 2007)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추사'에는 중독성이 있나 보다. 섣불리 읽어서는 곤란하겠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서는 안나 레드샌드의 <빅터 프랑클>(두레, 2008)이다. 보통은 '빅터 프랭클'이라고 표기되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랑클(1905-1977)의 평전이다.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 등으로 잘 알려져 있기에 어인 평전인가 싶긴 하다. "그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훗날 ‘의미의 심리학’으로 불리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법까지 창안했다. 1945년 수용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인간의 의미를 찾아서’는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이 팔리는 필수교양서로 자리잡았다. 이 책은 미국의 교사인 저자가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빅터 프랑클의 생애와 작업을 잘 압축해놓았다." 그러니까 '학생용'인 것.
정신의학자를 다룬 또다른 평전에 디어드리 베어의 <융>(열린책들, 2008)도 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를 다룬 이 두툼한 평전은 무려 1166쪽 짜리다. 저자나 역자나 놀라울 따름이고, 이 책을 집어들 독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책 3권 정도 읽는다 치면 독서가 불가능한 건 아니겠다(융처럼 재력가 아내를 만난다면 훨씬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카더라'에 만족하는 수밖에...
10. 기행
얼떨결에 평전까지 교양에서 다루는 바람에 '여유'가 생겼다. 중앙아시아(실크로드) 기행쪽에 투자하고 싶다(돈 드는 투자가 아니니!). 얼마전에 출간된 피터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사계절출판사, 2008)이 빌미가 되어준 것인데, 그의 전작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출판사, 2000)까지 챙겨도 좋겠다(관련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2256615 참조).
제국주의 영국과 러시아의 쟁탈전이 벌어졌던 장소라는 사실에서 떠오로는 책은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르네상스, 2003). 우파 이데올로그로 유명한 저자의 전략적 기행문이다. 소개에 따르면, "지은이는 터키와 시리아, 레바논과 그루지야 등 중앙 아시아와 이슬람, 동유럽 일대를 직접 여행하면서 체득한 내용들을 기행문 형식으로 서술한다. 기행문의 형식을 빌어오긴 했지만, 카스피해 송유관을 둘러싼 국제적 암투와 이란과 시리아, 그루지야 등의 정치적 불안, 동구권 몰락 이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경제 침체에 따른 혼란 등을 낱낱이 분석해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견줄 만한 국내서들로는 물론 정수일 선생의 책들이 있지만, 한권만 고르려니까 <실크로드, 움직이는 과거>(강, 2007)가 떠오른다. "변호사 차병직이 동료 변호사 문건영과 함께 한겨울의 실크로드를 다녀와 펴낸 에세이집. 실크로드학의 대가 정수일 선생과 함께했던 한겨울의 실크로드 여행에 대한 기억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생동감 넘치는 실크로드 여행기와 깊고 풍부한 문학ㆍ역사ㆍ인문학적 에세이가 겹쳐있다." 아, 언제쯤에나 여행기 한번 써보나...
08. 09. 01.
P.S. 이달의 고전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하지만, '여행'에의 유혹 때문에, <이탈리아 기행>으로 바꾸었다. 여러 종의 번역본이 이미 출간돼 있다.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그의 이탈리아 여행은 1786-1788년까지 약 2년에 걸쳐 이루어진다(그는 9월에 떠났다가 6월에 돌아온다). 그의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아래는 티슈바인의 그림 <로마의 숙소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괴테>. 며칠전부터 이 그림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