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에서 '강유원의 Book소리'를 옮겨온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255). 이달의 책으로 올려놓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다루고 있어서다(오늘 교보에 나갔었지만 책은 구경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권도 비치돼 있지 않은 것인지?). 겸사겸사 요즘 문제가 된 '영어몰입' 교육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있는데, 십분 동감한다.

미디어오늘(08. 02. 05) 번역·일본·단테의 신곡

요즘 대통령직 인수(引受)위원회인지 국민에게 인내심을 닦게 하는 인수(忍修)위원회인지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가 드디어 아주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어 교육에 관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이런 번역의 성과가 잘 드러난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우선 이 책 뒤에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신곡’ 완역본 목록이 나와있는데 15종이 넘는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이마미치 교수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엔젤 재단이 개최한 이 강연은 끝난 후 매회 바이올린 연주와 다과회를 함께 열었으며, 단테와 관련있는 이탈리아 포도주도 마셨다고 한다. 청중석에는 학계의 인사나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쇼와 전공 주식회사 최고고문과 같은 이도 참여했다. 비디오 촬영과 강의 녹음은 후지제록스 종합연구소가 담당했으며, 그것에 후지제록스의 회장과 사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된 경위를 적은 저자 후기를 읽다보면 부럽다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이마미치 교수의 이 강연은 일본이 학문에 있어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고대 희랍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서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강자들은 알아듣는 외국어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일본어 번역본들을 놓고 필요에 따라 골라가며 읽는다.

전문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놓은 덕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주고받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흥미진진하게 습득한다. 2007년에 한국에서 클래식음악 돌풍을 불러일으킨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은 또 어떤가. 이런 게 되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30대 후반의 새파란 나이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까지 역임한 이경숙 위원장은 orange juice(나는 영어 발음이 엉망이니 그냥 로마자로 적겠다)를 앞에 두고 서양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혹시 ‘신곡’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영어번역본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의 총장이면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들어줘야 기본을 갖춘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발음이 엉망이어서 선진국 못된다는 그 발상, 한마디로 상스럽다.(강유원_철학자)

08. 02. 05.

P.S. 이마미치 교수의 책으론 <동양의 미학>(다할미디어, 2005)이 더 번역돼 있다(중국과 일본의 전통미학을 다루고 있는데, 와병으로 한국에 관한 장은 마저 채우지 못했다고). 간단히 소개된 약력으로 보면 그는 "192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8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을 거쳐 파리대학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1962년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교수를 지내고, 1982년에 정년 퇴직했다. 1996~1999년 파리대학 국제연구소 소장, 국제 형이상학회 회장, 국제 미학회 명예회장, 국제 에코에티카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기억에는 박이문, 정명환 교수 등의 책에서 이름을 본 듯하다.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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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8-02-06 00:09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신곡은 지난주에 주문하고서 미리 볼겸 교보에 갔을 때도 품절 상태여서 실망스러웠는데, 아직도 갖춰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실제로 책을 받아보니, 알라딘 미리보기에서와는 달리 단테의 옆얼굴 초상이 들어간 부분은 책 표지가 아니라, 책의 케이스라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실은 신곡강의에 단테 초상이라는 디자인이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라서 재미없다 싶었거든요. 실제 책 표지는 좋은 질감의 깔끔한 백색이라서 공들인 책이라는 느낌이 제법 들더라구요. 신곡은 사놓은지는 오래인데 아직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이 책을 읽을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기분이었습니다. 발간소식을 듣고서부터 워낙 기대했던 책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로쟈님께서 학술원 회원님들께 원하시는 저작은 '신곡 강의' 같은 책인가요? 아니면 '동양의 미학'같은 책인가요? 두 책의 차이도 잘 모르지만, 괜한 궁금증이 들어서요. 제 생각엔 신곡강의가 그 난이도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열려있다면, 동양의 미학은 역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비교적 학자들 사이의 저작이라는 느낌입니다.

로쟈 2008-02-06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연휴가 끝나야 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 건 <단테 신곡 강의>를 염두에 둔 것이긴 한데 <동양의 미학>도 상관은 없겠다 싶습니다. 학술적이긴 하나 '교양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드팀전 2008-02-06 00: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새해에 드린 복이 조금 부족했다면 설날 다시 담아서 보냅니다.
지젝이 저를 즐거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미로에 빠지게도 하는군요.켁켁...
명절 연휴에 서울 본가에 가고 또 처가에 가고 바쁩니다.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잠깐 책이나 볼 수 있을까 싶군요...읽던 지젝은 명절과 어울리지 않아서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달린 수잔 손택의 서문을 화장실에서 봤는데...대단한 펌핑이군요.

설 연휴 평화롭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8-02-06 00:42   좋아요 0 | URL
네, 드팀전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명절과 어울릴 만한 책은 저도 찾기가 어렵네요.^^; 손택의 서문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쓰려고 했다가 몇 주째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문학은 자유다>에도 수록돼 있는데 비교해서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람혼 2008-02-06 00:56   좋아요 0 | URL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이 말을 오늘의 명문(明文)으로 꼽고 싶군요.^^

로쟈 2008-02-06 11: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40대만 돼도 그냥 서열로 '원로급'이 되는 분들이 많아져서요. 학자는 '학식'과 '업적'으로 원로가 되어야 하는데...

수유 2008-02-0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교보에 갔다가 없어서 영풍에서 구입했습니다. 딱 2권 있더군요...

로쟈 2008-02-06 11:53   좋아요 0 | URL
동네서점도 아니고 교보에도 없기에 좀 어이없었습니다...

이름없는괴물 2008-02-06 11:24   좋아요 0 | URL
얼마전 일본 가서 정말 놀랬습니다. 일본의 교보문고라는 기노쿠니야에 갔더니 정말 놀랄 노자더군요. 우리나라엔 기껏해야 주저만 근근히 번역된 철학자들의 전집이 없는 게 없더라구요. 칸트 전집, 헤겔전집, 플라톤 전집, 하이데거 전집, 라이프니츠 전집, 자본론 2종, 중세 철학 전집, 키케로 전집 등등등... 정말 일본어가 배우고 싶은 순간이었고, 우리나라와 격차를 실감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2   좋아요 0 | URL
'학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해서 좀 회의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륀지'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바벨의도서관 2008-02-06 11:36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저작 중에 [에코에티카](솔출판사)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어판 서문도 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이 나네요. 얇은 책이었는데. 한국 학자들과도 교분이 많은 분이죠...

biosculp 2008-02-06 12:09   좋아요 0 | URL
요즘 인수위에서 시작된 영어논란의 편차가 너무커서 종잡을수가 없네요.
십몇년전 부터 영어학하시는 분들은 실용영어를 주장하셨는데, 그정도 영어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것이고요. 더불이 시험제도자체를 바꾸어야 되는것도 애기를 하구요.
그렇다고 영어애기 나오기 전에 한국번역상황이 뭐 좋은것도 아니고, 앞으로 좋아질것 같은 희망이 크게 보이지도 않고요.
인수위 얘기가 워낙 우좡좌왕이지만 비즈니스나 실용영어 애기하는데 단테의 신곡번역얘기하는것이 뭔가 어긋나는것 같기도 하고요. 종잡을수가 없네요.
아예 영어 애기에 공무원시험에 영어 없애도 되지 않냐 이런 애기가 더 맞는것 아닌가도 생각이 되고요.
민추가 국가기관이 된것도 작년이고 대학에서 번역으로 학위준다고 신문에서 본것이 작년인것 같은데.

로쟈 2008-02-06 22:22   좋아요 0 | URL
영어를 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건 좋은데, 그게 가능한지 그리고 '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의견들이 다른 것이죠('1000단어 회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한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모국어라 할지라도). '오렌지' 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는 건 요즘 힘깨나 쓰는 발언자들의 비상식적인(천박한) 문제의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늘 뉴스를 보니 '고1학생'도 잘 지적을 했더군요. 저는 도구적인 언어관 자체부터가 지극히 '비즈니스-후렌들리'한 상(商)스러운 이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