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저널 담비에서 리뷰 기사를 하나 옮겨온다. '두 얼굴의 근대국가'가 리뷰대상이 된 논문의 제목이자 리뷰의 제목이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5859). 필자는 '리뷰팀'이어서 성별은 모르겠지만, '논문 읽어주는 남자'도 우리 주변엔 '책 읽어주는 여자'만큼이나 요긴하다.

담비(07. 09. 11) 두 얼굴의 근대국가
<한국사회학> 제41집 3호(2007)에 ‘두 얼굴의 근대국가: 상상의 국가와 실재의 국가’라는 논문이 실렸다. 미시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병호 씨의 논문이다. 그는 이 논문이 제프리 페이지 교수의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서두에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국가의 두 얼굴은 무엇인가. 먼저 이 씨가 논문을 작성한 목적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첫째, 근자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정체상태를 극복하고자 했다. 맑스 대 베버로 상징되는 이항대립적 구도를 지양하고 국가관료제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 둘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재검토한다. 둘째, 그간의 연구들이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던 상상과 실재가 병존하는 ‘두 얼굴’의 근대국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고 한다.
근대국가는 한편으론 비인격적인 속성을 가진 국민이란 ‘관념적 허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선 외교와 안보행위 같이 사회영역이 가지지 않는 국가 고유의 기능들을 수행하는 ‘구체적 행위자’다. 즉 국가는 신화적인 허구이자 동시에 구체적인 실재이다. 그동안 전자의 논의는 국가의 실재를 부정하는 일부 맑스주의자들이, 후자는 국가권력의 자율성을 강조한 베버주의 진영에서 나타난다. 그 두 관점을 엮으려는 시도는 제솝의 ‘전략-관계적’(strategic-relational) 국가론이나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 이론 등을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었다.
이 씨는 국가관료제에 대한 맑스와 베버의 의견을 종합하면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맑스와 베버의 대립은 국가 관료제론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먼저 맑스와 베버 모두 국가 관료제의 근대적 속성을 지적했다. 맑스는 국가형식주의인 관료제는 오로지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보았고, 베버는 전근대적인 가산적 관료제가 근대국가에 들어와 비개인적이고, 객관화되고, 계산가능하고, 합리적-법적 근거로 작동하는 관료기구로 전환되었음을 주목한다. 베버가 보기에, 국가관료제가 정당성을 가지고 독점하는 물리적 폭력수단은 바로 비인격적 규범과 힙리적이고 명문화된 규칙에 의한 합리적-법적 권위를 바탕으로 한다. 맑스는 국가를 구성하는 공민이란 주체는 비인격적 투명인간이며, 국가 관료기구의 권위는 모든 공민들의 동등성과 형평성을 외치는 ‘허구적 보편성’에서 얻어진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합리화된 형식주의가 지배하는 관료기구를 운용하는 주체는 실존하는 개인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생각은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모두 비인격적 국가 관료제가 실재적-구체적 형태로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해 나간다고 보았다. 베버는 합리적 지배를 달성하는 관료제의 불가피성을 예측하면서도, 한편으론 관료제란 유령이 그 창조자인 인간 위에 군림하며 인간성이 말살된 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강하게 경고한다. 이에 대한 베버의 해결방안은 민주주의적이면서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정치리더십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가들이 “관료 지배를 상쇄하는 권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한편 맑스는 이런 관료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완전한 인간해방을 이루려면 “사회 위에 군림하는 기관으로서의 국가를 철저히 사회에 종속시키는 전환”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꼬뮨주의를 제시했다. 국가 관료기구를 움직이는 관념화되고 비인격화된 개인들은 분명 명목적이고 허구적이지만, 관료기구는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다스리고 통제해가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객관화된 실재로 공민들에게 다가간다. 이런 물화과정을 정당화시키는 ‘비밀’은 도덕적인 존재로 의인화되는 국가이념인데, 이는 체제를 떠받치는 관료집단과 이들이 이용하는 물적 행정수단들에 의해 체현되는 것이다.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국가는 인간의 귀와 같이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이데올로기적 허구라고만 할 수도 없다. 국가는 신화적 허구이자 복합적 실제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국가란 허구적 관념은 공민의 실제 행위유형과 사고체계를 틀 지우고 다스린다. 맑스가 말하듯, 이런 근대국가의 양면성은 모순적 현상이다. 이점에서 근대국가는 얼마 전 작고한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모든 실재의 인위적 모조품인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가상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맑스가 말했듯 허구적 보편성으로 가득 찬 가상적 주권 하에서 도덕적 공민이란 존재로 살아간다.
모든 실재가 0과 1의 디지털 코드로 변환된 가상현실이 인터넷이란 물적 기반을 토대로 블로그, 사이버뱅킹, 사이버몰, 디지털음악 등의 형태를 통해 우리들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어가듯, 근대국가란 가상현실 또한 국가 관료기구를 토대로 벌이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사업(국민의무교육, 국립대학, 국민연금, 국민의료보험, 훈장수여, 대중선전, 사법자본 독점, 사적 소유권 통제와 조정, 전쟁, 외교활동, 인구센서스 등)을 통해 점점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국가가 가상적, 허구적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인터넷의 실재성에 의해 깨지고 있다)
국가가 국민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려면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근대국가는 민족주의, 법치주의, 공화주의와 같은 국가이념을 만들어가고 이를 다양한 채널을 통해 선전한다. 맑스적 입장에서 이런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허구이며, 베버적 시각으로는 국가에 의한 합리적-법적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명분이다.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국가이념을 충직하게 따르는 도덕적 공민이 될 것을 요구 또는 강요하며, 이에 대한 저항은 국가폭력을 통해 제압해간다. 국가의 허구적 보편성에 의해 규정된 도덕적 공민은 관념적 주체이며 어떠한 인간적인 속성을 갖지 않는 투명인간이다.
이런 공민의 이미지는 계급, 인종, 젠더라는 물화된 관념들을 경계로 양분된다. 즉, 부르주아-백인-남성이란 관념적 주체가 도덕적 공민의 원형이며, 그 허상의 반대편에는 프롤레타리아-흑인-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허상이 존재한다. 비록 구체적 담론과 시각 차는 존재하지만, 맑스의 ‘도덕적 공민’, 베버의 ‘금욕적 청교도’, 푸코의 ‘규율화된 자아’는 모두 근대국가의 주체가 어떻게 이념화되고 관념화되는지를 보여준다. 근대국가의 대다수 공민들은 이런 관념화된 범주들을 당연시하고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국가란 행위자는 공민들에 대한 자원동원을 극대화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베버와 부르디외가 말하듯 국가의 물리적-상징적 폭력수단에 대한 정당한 독점을 전제로 하며, 자율화된 국가 관료기구가 물적 행정자원을 이용해 달성해간다. 가령 징병제도는 국가가 물리적 억압 혹은 상징적 폭력을 사용해 공민으로부터 육체적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다. 또한 세금은 국가가 독점하는 경제적 기반이며, 세금징수는 국가의 관료적 행정기구가 강제력을 동원해 이뤄진다. 따라서 국가 안에서 유적존재인양 간주되는 공민들은 실상 관례화된 국가폭력을 겪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혹은 강요된 도덕적 역할을 수행할수록 본래적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더 물화되어간다.
국가란 행위자를 움직이는 동력은 근대성에서 유래하는 비인격적 국가 관료제이다. 관료제는 비개인적 인간관계가 그물망처럼 얽혀진 관념적 허상이며, 그 자체가 자기영속화 하려는 속성을 가진 거대한 통치기구이다. 국가 관료제는 또한 물리적 강제력과 상징적 폭력을 독점해가면서 주권국가 영역 안의 공민들을 동원하며, 통제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을 ‘실질적으로’ 바꿔간다. 바로 이것이 국가 관료제가 가지는 구체적 효과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근대국가가 가진 두 가지 얼굴의 본질이다.

이 씨는 근대성이 나타내는 여러 현상들이 관념적 허구와 구체적 실재가 병존하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근대성의 양면성은 국가 영역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신용카드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용카드는 말 그대로 사용자들이 이를 돈으로 신용한다는 ‘주관적인 관념’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현금지급기와 카드결제기는 이런 사람들간의 계약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적 장치들이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이 경제행위를 하는 것은 실재적-구체적 행위과정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신용카드란 추상화된 체계는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민족과 민족주의 역시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민족공동체의 기본적인 구성 원칙은 베버의 주관주의적 명목론-즉, 민족은 존재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신념을 갖는 개인들의 유의미한 행위에서만 발견된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민족관념은 언어, 지역, 정치체제, 집합적 기억, 신화 등의 기반을 통해 구체적인 사회과정에서 실체화된다.
그 좋은 예가 얼마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단군이란 ‘신화’를 ‘역사적 실재’로 ‘개정’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다. 이보다 더 극적으로 ‘신화적 허구’이자 ‘구체적 실재’라는 민족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한편 현재 사회과학계에선 민족허구론과 민족실재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최근 신용하(2006)는 민족실재론의 입장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 씨는 두 얼굴을 가진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해야한다고 강조한다.(리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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