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香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남자취미치고는 괴상한 취미지만 향수도 모으고 또 눈을 감고 맡아도 그 향에 취할 정도의 향을 태우기도 합니다.  어떤분들은 우리네 토속신앙과 결부짓거나 또는 불교와 결부시켜 향냄새라고하면 종교적 이유를 들어 무조건 반대를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기독교에서도 향을 사용하고(예수님을 향유로 씻겨드렸죠...) 불교에서도 향을 사용하고, 이슬람이나 힌두교에서도 향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향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인류의 탄생과 함께 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것 같기도 합니다(자세한 내용은 제가 좀 찾아봐서 알려드릴께요)

2. 향수와 향을 구분하는것은 사실 간단합니다. 향수는 액체로 보고 향은 고체로 보면 될까요?   아주 원시적 분류법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럴듯합니다. 샤넬 No.5를 저도 무척 좋아하고 그 향과 접한지도 꽤 오래 되었고 언제 맡아도 질리지 않는 향이 아닐까 합니다만 여기서는 뭐...흑해의 장미를 밤 12시에 따서 그것을 향의 원료...운운은 빼고 고체상태의 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누군가 "향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고..."라는 책으로 제법 돈도 벌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쩜 그런 당연한 일을 제목으로 써서 돈을 벌 수 있는지 그 머리씀에 감탄 할 따름이랍니다.

3. 각설하고, 향을 만드는 재료는 동물과 식물로부터 얻어지는 원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향에 미쳐 향을 만드는 공장도 가 보고 향의 제조과정도 지켜보고 배운적이 있었습니다. 해인사 스님이 만드시는 우리네 향에는 정말로 좋은 재료가 들어가고 그 향의 이름대로 각각의 효능이 달리 나타난다고 하여 지금도 가끔 향을 사르고 있습니다. "청향" "다보" 등등의 이름으로 판매되는 이 향은 국내에는 별로 광고를 하지 않고 비행기의 기내 잡지에 광고가 되고는 하더군요. 울릉도에서 나는 향나무(울향)를 사용한다던가, 침향을 사용한다던가....물론 재료의 희귀함에 따라 가격도 왔다갔다 합니다만 국산 향의 제작과정을 주욱 지켜본 결과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것은 천연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향은 그 종류도 무척 많지만 향이 마치도 화장품 냄새처럼 진하게 코 끝을 자극하기에 나름대로 빨리 향이 퍼지기를 원하신다면 일본 향을 사용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4. 중국향은 큰 대륙만큼이나 향도 크지만 향내음은 별로 입니다. 인도의 향은 대나무에 향을 발라서 만드는 향과 침향으로 나오는 것들이 있는데 "데레사" 수녀님이 계셨던 곳에서도 향을 만드는데 우리 향처럼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늘 향을 피우는 분들이 스님네들이신데 그분들에게서는 언제고 향내음을 맡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향싼 종이에서는 향이 나고.."라는 말도 맞는것 같은데 향을 가끔이라도 피운다면 아마도 조금의 향내는 몸에서 배어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5. 우리 선조들은 두 가지의 예를 무척 중히 여겼는데 그 한가지는 禮이고 다른 한가지는 藝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활에 따르는 품격과 멋을 중히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부터 예의범절을 가르키고 그림과 가무를 소중히 하였었는데 이러한 예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선비의 도로써 묵란도라하여 먹물을 이용하여 난을 쳤는데 난 잎의 자태는 매우 화려하여 이를 藝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藝는 화려함을 담고 있는데 이에 반하여 香은 심오하고도 유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藝를 쫒기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살찌울 香을 채우는 일이 훨씬 보람된 일이라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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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박 3일의 일정으로 우리 나라의 가장 험준한 지역에 자리잡은 최전방에 다녀왔습니다. 흔히들 '철책'이라고 부르는 남북 장벽이 가로 놓인 155마일의 휴전선중에서 가장 험난한 지역이라는 화천의 금강산 댐(운암댐이라고 합니다)이 바라다 보이는 지역이었습니다. 첫날인 월요일은 그리 춥지가 않아 이동중에도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는데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서울을 출발하였으나 그 지역에는 7시간 반이 걸려서 도착을 하였습니다. 중간에 워낙 지형이 험난하여 차량은 차량대로 보내고 사람은 또 걸어 올라가야했는데 1천미터가 넘는 산 꼭대기에 위치한 부대막사까지 올라가는 일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 부대가 위치한 지역은 역시 고산지역답게 매서운 바람이 온 몸을 감싸돌아 당장이라도 얼어버릴것 같았습니다.  가장 높은 지역에 올라가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눈 덮인 산악 지형 가운데 북의 초소가 눈 앞에 가물거리고 그 산 사이의 협곡에는 금강산 댐이 자리하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여분 지형 설명을 들었지만 어찌나 추위가 매운지 눈에서는 눈물이 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런 높은 산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쳐 경계임무에 임하는 장한 젊은이들은 군대에 들어와 나라의 소중함을 느끼며, 이곳 경계임무에 최선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3. 소초에 배정을 받고는 이른 저녁을 먹었습니다. 반찬이야 별로 특별하지 않았지만 어찌나 식욕을 돋우는지 두번씩이나 밥을 가져다 먹었습니다. 식사후에는 경계임무에 임하는 교육을 받고 바로 초소로 투입이 되었습니다.  경계근무를 체험한다는것이 자칫  정상적인 경계임무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를 걱정하면서 제가 담당한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그 시간도 짧은 시간이 아닐만큼 상당한 거리였습니다. 여기서 경계형태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저도 방한복을 지급 받아 착용을 하였음에도 잇빨이 딱딱~ 부닦치는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온도계의 눈금은 영하 15도....하지만 강하게 부는 바람을 생각하면 체감온도는 자그마치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 간다고 하는데, 역시 젊음이 좋은지 꺼떡도 하지 않는 병사들이 늠름해 보였습니다.  저도 긴장감속에서 아래윗니가 딱딱~ 부닦치는것을 겨우겨우 참아가며 전반야 근무를 마칠수 있었습니다.

4. 소초 내무반은 경계근무를 마친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습니다. 페치카나 갈탄 난로가 아닌 보일러 시설로 밖의 기온과는 거의 40여도 차이가 날 정도로 아주 훈훈했습니다. 장비 검사를 마치고 더운물로 간단히 씻고는 바로 병사들은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눈을 뜨고 잠시 밖에 나가니 역시 매서운 바람(진짜 칼바람이라는 말이 맞았습니다)이 회오리 바람처럼 계곡을 감싸며 후려쳐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황쏘가리만 빼고 다 잡는다"....  내무반 입구에 붙여진 구호였습니다. 참 이상하죠? 적은 다 잡는다도 아니고 왜 황쏘가리인지...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자유롭게 황쏘가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연기념물이라는것은 알고 있었고 저도 크다는 황쏘가리를 몇번 본적이 있지만 여기의 황쏘가리는 어른 하체만한 길이라고 합니다. 수명이 몇년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남북이 대치되기 시작할 때 살기 시작한 황쏘가리라도 벌써 50년을 넘게 살았으니 ...  그만큼 크게 자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남북대치 속에서도 천연기념물인 황쏘가리는 잡지 않고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읽을수 있었습니다.

5. 이곳의 여름은 보통 장마가 져서 북한의 운암댐을 열면 물의 깊이가 30~40미터는 올라간다고 합니다. 한동안 여론에서 금강산댐의 방어댐이 사기다 뭐다하고 떠들어대고 그나마 대응댐 공사도 채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실상은 정말 위험하다는 것이 병사의 말이었습니다. 직접 경험을 했기에 북의 금강산댐이 같은 위험성에 대해 너무도 잘 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사병은 나중에 전역을 하고 사회로 복귀를 하더라도 금강산 댐의 위험에 대해 알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저도 의아합니다만 여론의 힘에 밀려 대응댐의 건설이 사기라는 말로 넘어가 버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정말로 금강산댐이 위험하다는 그 병사의 말처럼 위험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명확하게 판단을 해야할것 같습니다. 금강산 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는 병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모두가 군에 가기 싫어하고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해외로 줄행랑을 놓는 비겁자도 있는 반면 대한의 남아임을 인식하고 군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며 여기를 지키는 장병들 모두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었고 저도 마음속으로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5. 2박 3일간의 전방 GOP체험은 제 입장에서는 무척 힘이 들고 괴롭기도 했으나 마치고 부대를 떠나올때는 무엇인지 모를 쾌감이 가슴속에 자리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세대 병사들이라서 안보의식이 해이되리라던 생각은 완전히 고칠 수 있었고 오히려 신세대 병사들에게 맞는 근무여건을 조성해 주려는 군 당국의 세심한 배려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계임무에 단 한치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우리 나라의 가장 험준한 지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북 분단에 이은 대치상황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가운데 존재하는 그들이 겪는 고충을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고 있는지 몰랐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 전방 경계체험을 다녀오는 일행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한결같이 한가지 결론이었습니다.  "우리는 편하게 살고 있다" 였습니다. 그 편함이 바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던 체험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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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05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이 많으셨군요! 몇개월 전 군에 갔던 청년 하나가 첫 휴가로 집에 왔다가 저희 병원에 왔었습니다. 그때가 11월 초 밖에 되지 않았었는데도 귀랑 손에 동상이 걸려 있었어요.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는 안스러운 눈빛만 보일 뿐, 아무 말도 않구요.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수고 덕분에 편히 지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가을산 2004-02-0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제가 고등학교때 아주 친했던 친구가 '군인 마누라'가 되어서 계룡대에 있습니다.
그동안은 저도 수련 받느라 바빴고, 친구는 결혼하고 계속 전방에서 근무하는 남편 따라 살다보니 연락이 끊겼다가 작년에 비로소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났답니다.
학생 때 공부를 참 잘 했던 친구인데(S대 나왔어요), 사회 활동도 못하고 십여년 만에 후방으로 와서 지금 최고로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 친구 재능이 아깝고 속상한데 본인은 '군인 마누라 정신'으로 이겨내고 있네요.

어제 몇달만에 같이 점심을 했는데요, 이 친구는 자기도 고생이 많으면서 대전에 나올 때면 직장 다니느라 살림이 엉망일거라며 김치나 밑반찬까지 챙겨주어서 마치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로그인 2004-02-0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사관생도의 모습이 뭇 여성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답니다. 그러나 군인(특히 육군)의 아내라는 자리는 멋과 위엄을 동반하지는 않는다는것을 친구분은 아마도 뼈져리게 느끼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분은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자기의 남편이 늠름하게 수행해 나감에 아마도 크지는 않을지라도 긍지를 가지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인으로서 그 어느 임무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일이지만 최 전방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을 대할때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것은 아마도 저 자신이 그와는 반대로 편하게 생활을 했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껍니다. 가을산님 친구분은 군인의 마누라가 아닌 "군인의 아내"로서 언제나 부하들을 챙겨주는 자상함이 몸에 배어 가을산님께도 먹거리를 가져다 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한가지 부탁이요~~ 친구분 잘 대해드리세요...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셨을꺼거든요~~~

마립간 2004-02-0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외가가 문산이고, 군복무지역이 그 동네여서, 도라 전망대도 방문하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군부대는 춥습니다. 부대가 신도시 옆에 있었는데 도시로 나오면 추운 것을 잘 모르겠는데, 부대안에만 들어가면 추웠습니다. 처음에는 정신적인 것이 아닌가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도시에서 내뿜는 매연과 난방시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부 전선에는 대학생 전방입소때 가 보았습니다. 저의 학년이 마지막 입소였습니다. (이거 자동적으로 학번이 나오네.) 둘러보니 산만 보이더군요. 군의관 가족(아내)중에는 이런 환경을 견디지 못해 정신과 상담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텐데.

가을산 2004-02-0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도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고, 제 여동생도 아이디가 manura라서 무심코 쓴 단어가 좀 적절치 못했나보네요, 죄송!

그리고, 저도 한가지 부탁 드립니다. 여촌재님께 부탁해서 될 일은 아니겠지만....
군인의 아내로서 친구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오지에서의 생활이나 박봉, 문화생활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라, 군인 아내들 사이의 역학 관계였습니다.
남편의 지위와 부인의 지위가 동일시 되는 분위기와 남편을 위한 치맛바람 등...

군인이 서로를 평가할 때 아내들의 행동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아내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느라 그런가봅니다.
위에서부터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솔선수범 해서 없앨 수는 없는지...

비로그인 2004-02-0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의 답글에서는 제가 일부러 그런 말을 빼버렸습니다만, 실은 가을산님에 대한 배려가 역학관계에 있어서의 아내의 역할속에서 몸에 밴 행동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육군이 아니라서인지 이런 역학관계는 80년대말에 벌써 사라진지 오래 됩니다만, 아직도 전방 오지에서 근무하는 육군의 입장에서는 음성적으로 자행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다만, 그런 정도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것이 사실이지만 자칫 관행을 벗어나고자 하는 일이 되바라지고 건방진 모습으로 비칠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내조라는 탈이 자존심을 버려야만 하는 현실로서 진급이나 보직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직도 계시기에 상급자가 원하지 않아도 바득바득 그런분들도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하급자의 아내가 악착같이 그렇게 하려고 해도 단호하게 물리친다면 그런 나쁜 관행은 점차적으로 사라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매우 투명한 사회가 되었고 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정착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어느 한 사람에게 총애를 받아 출세를 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그런 가운데 진급이나 보직이 결정됨을 알수 있습니다. 저도 국방부라는 정책부서에 오래 근무를 하였지만 이제는 많이 사라졌다는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답니다.
 

1.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구미의 C병원에 입원해 투병중이던 B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직 마흔이 채 안된 그녀는 위암으로 오랜기간 고생을 하였고, 위를 제거했음에도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일반인과 똑 같이 자신의 일에 메달리다가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하고야 말았습니다. 최근까지 서울의 원자력병원에서 치료중이었는데 아마도 가망이 없다는 판정으로 고향 인근의 병원으로 옮겼던 모양입니다.

2. 그녀는 알게된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5년전인가.... 단청 기술자 자격을 획득하고 단청일을 하다보니 학문적 궁금증과 미술사학적 호기심으로 석사과정에 입학하였을 때 그녀를 처음 보았었습니다. 마치 대리석 같은 얼굴의 야무진 그녀는 눈빛만 살아 있는 느낌이었고, 수업시간에도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는 하였었던 그녀 였습니다. 그녀가 위암으로 투병중인것을 알게 된것은 그 후였습니다. 그녀가 투병중임을 알고나서부터는 식당에서나 평시에도 그녀의 행동을 눈여겨보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3. 위를 잘라낸지라 식사에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이 좋아진 것으로 판단을 하였지만 감히 상태가 어떤가를 물어보는 일은 주변의 모두들 금기시하고 피하는 일이었는데 저녁모임 등에서도 그녀는 한번도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함게 자리하였고, 늦었으니 먼저 들어가라고해도 그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임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늘 함께 하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증세는 많이 호전된 것으로 알 정도였습니다.

4. 그러던 그녀가 원자력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것은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이제 완쾌되는줄만 알고 있었는데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을때는 다소 의아했지만 원래 암이라는 증상이 인간을 끈질기게 괴롭힌다고 알고있는지라 잠시 치료를 마치면 퇴원을 하게 될줄 알았었습니다. 저의 게으름으로 병문안을 갈 수 없었기에 지난 설에는 전화로라도 새해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했었는데 그녀 대신 보호자가 전화를 받았고, 방금전 쿠토를 했기에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에 그럼 안부를 전해줄것을 당부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5. 비단 그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일로 인해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게 됩니다만, 제가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위암으로 인하여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열정을 쏟았던 단청에 대하여는 마치 단청을 자신이 꼭 지켜가야할 과제로 알고 메달릴 정도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 퍼부었다는 것입니다. 단청일은 지붕부분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기에 공사장의 주변에 얼기설기 얽어 놓은것 같은 보조물을 타고 올라가서 작업을 해야하며, 또 몸을 뒤집고 서까래나 천장에 각종 문양을 그려야하는 매우 고단한 작업임에도 그녀는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인냥 애착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던것이며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단청의 미술사학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 학문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6. 답사때의 식사시에도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식사선택에 지장을 주지 않기위해 별도의 식단을 주문하지 않는등 메뉴선택에 애써 태연했고 단체로 주문한 식사매뉴에 단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으며, 산길을 오를때도 자신으로 인해 일행의 전진이 늦을까봐 늘 앞장을 섰던 그녀도 암이라는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그 악착같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녀가 운명했다는 전화 한통을 받고 나서 그녀의 평시 모습이 눈에 떠오르며 자신의 생애에 그래도 무엇인가 남기고자 최선을 다하며 정상인과 같은 행동으로 노력하던 그녀의 모습이 안타깝게 떠오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언젠가는 세상과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과연 세상을 떠나며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라는 명제를 다시한번 떠올리게 하는 안타까운 전화였습니다. 그녀의 명복을 진정으로 빕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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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을 맞아 방을 정리하던 중 또 한번 게으름으로 인한 혼란을 맞게 되었습니다. 늘 '나중에 한꺼번에 하지..."라는 생각이 결국은 게으름의 덕지가 되어 막상 정리를 하려면 헷살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몇가지 중요한 취미가 있습니다. 취미라면 좀 그렇지만 일단은 취미의 영역으로 넣도록 하겠는데 그 첫번째는 클래식 음반 수집입니다. 두번째는 세계 각국의 동전과 티스푼, 그리고 미니어춰 양주와 자동차, 각 나라의  담배와 술을 모으는 것이고 세번째는 우표를 비롯한 초일봉피, 시트등 우정관련 수집이며 네번째는 도서 종류로 필요한 책은 물론이고 창간호도 열심히 모았습니다.

2. 그런데 웬만한것은 취미로 수집하면서 그냥 쌓아만 둬도 되는것이 있지만(양주, 미니어춰 자동차와 양주, 동전, 우표,티스푼 등) 반드시 목록이 필요한것이 음반과 서적, 그리고 사진 원고입니다. 대학때부터 정말 죽어라고 모아온 음반은 몇 달을 걸려 분류를 하고 정리를 해서 잘 꽂아 두었기에 이제는 어느 음반에 어떤 곡이 담겨 있다는것 정도는 안보고도 훤히 알 수 있게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리가 된 음반은 그 후 CD라는 아날로그에 비해 조금은 날카로운 기계적 음색을 갖는 연주가 생기고 나서도 덧붙이기만 하면 되기에 크게 불편함을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우표는 종류별로 분류된 수집 책에 그냥 넣기만 하면 되기에 그것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주나 동전, 담배등은 그냥 잘 두기만 하면 되기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담배는 시간이 흐르면 담배속의 습기가 다 빠져버려 피우기는 조금 어렵게 됩니다.

3. 그런데 문제는 도서류와 자료로 찍은 필름입니다. 지금도 알라딘의 소장함에 넣고자 열심히 목록 정리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가면 다 정리가 되겠지만 가장 어려운것이 바로 필름의 정리입니다. 제가 보통 자료사진을 위해 촬영하는 필름의 양은 적게는 5통에서부터 많게는 50통에 이르는데 한롤이 통상 36컷이니까 적게는 180컷에서부터 아주 많을때는 자그마치 1800컷이라는 막대한 양으로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도 찍어와서 바로 현상소에 맡기면 되는데 이것 마져도 자꾸 쌓이고 현상소에 마음먹고 가기 전 까지는 그냥 방치되다시피합니다. 그냥 집 근처의 사진점에 맡기면 편하지만 저의 경우는 1통당 현상료에서만 천원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니 일부러라도 전문 현상소에 현상을 맡기는 편입니다.

4. 설을 마치고 지난 월요일 그 동안 쌓아둔 필름(100통이 조금 넘었습니다)을 왕창 현상소에 맡겨서 현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툼한 필름덩어리를 찾아 라이트박스에 비춰보는 순간부터 문제가 생긴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사진 자료가 각각의 피사체가 다르다면 별로 어려울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탑을 촬영한다해도 대부분의 탑은 그 특성이 있어 어디에 있는 탑이라는것을 금방 알수가 있는데 문제는 건축물이나 그림, 그리고 건물에 칠해진 단청 사진입니다. 건축물들도 특별한것은 전경을 촬영을 하기에 대부분 조금 노력을 하면 구분이 가능하지만 단청은 대부분의 건물이 비슷하여 도통 구분을 하기가 어렵다는 겁입니다.  이번에 필름을 현상하여보니 대부분이 불화와 단청 사진이었습니다.

5. 불화도 절마다 걸려있는 그림이 다른데 필름에 특정 절의 명칭이 나타나지 않으니 그 구분이 정말 어렵습니다. 지붕에 칠해진 단청의 구분은 정말 난감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나마 절에 걸린 탱화나 불화는 그래도 어느 절에 걸린 것이라는것은 대부분 알기에 사진을 세심히 살피면 구분이 가능하지만 단청은 일부분만 찍은것이라 정말 구분이 어렵습니다.  어제 밤새 필름을 가지고 씨름을 했는데도 아직 1/10도 구분을 못했습니다. 현상된 필름이 어디의 단청이라는 것을 알아내야 하고 그 필름을 잘라서 마운트에 넣고 컴퓨터에서 필름마운트에 붙이는 제목을 출력하여 붙이고, 마지막으로 보관함에 넣어야 분류가 끝이 나는 것인데 도무지 구분하기가 힘들어 어제는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였습니다(꼴에 오기는 있어서 일을 끝내야만 속이 시원하고 잠도 자게 된답니다)

6. 지금도 책상위에는 필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뭐...어디의 건축물을 찍었다는것은 알수 있지만 그 건축물의 어느 부분을 찍었는가는 건축물마다 단청의 문양에 큰 차이가 없으니 구별이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충해서 분류를 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게되지요...나중에 학회에서 발표를 한다거나 비교 연구를 한다면 전혀 엉뚱한 자료로 비교 연구를 하는 셈이 되어버리니 그 결과는 엉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발표하는 자료에만 사용하여 잘못 된다면 제가 비난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만에 하나 남에게 빌려준 필름이 잘못 된다면 그 책임은 더더욱 커지겠지요.

7. 그러다보니 그 못된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게으르면 빌어 먹지도 못한다"는 말도 있듯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게 되어버렸지요. 가장 좋은 방법은 촬영했던 지역에 다시 가서 필름을 보고 구분을 하는 방법인데 그것도 어디 지척간이라야 가능하지 지방이고 먼곳이거나 또는 해외라면 더 막막해지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간...이 모든것이 게으름 덕(?)이랍니다.  필름에 가위질을 해가면서 몇번이고 다짐하는 것이 "에고...다음부터는 좀 바지런을 떨어서 이런 일을 겪지 말아야지..." 하지만,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께서는 저 처럼 게으름으로 인해 곤란을 겪지는 않으시는지요?  저도 다시 필름과 씨름을 해야합니다만, 제 경우를 웃어넘기지 마시고 그 때 그 때 처리하시라는 의미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게으른것이 뭐 ...자랑이라도 되는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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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1-28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카메라라면 찍을 때 마다 생기는 파일명을 갖고 노트에 간략한 메모를 적어두면 도움이 될텐데...필름카메라면 ^^;; 음, 필카도 순서대로 적어두면 되긴 하겠네요^^; 건망증이 심한 저로서는 정말 바로바로 처리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때가 자주 있지요; 방금 들은 전화번호도 고개만 돌리면 잊어버리니까...

비로그인 2004-01-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맞는 말씀이지요.....찍을때마다 적으면 되는데(물론 한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찍어야 되는 경우에는 그렇게 합니다만) 그것도 게으름 때문에 잘 안된답니다. 말은 게으름이지만 제한된 시간도 있고, 또 사진을 그냥 짤깍~거리면서 막 찍을수도 없기에....그리고 사진을 많이 찍는 분들은 대부분 오래 사시는데(신영훈 선생과 콤비를 이루는 김대벽 선생도 팔순이 얼마 안남았답니다) 그 이유는 사진을 찍기 위해 피사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호흡을 멈추는데 이 동작이 아마 자동적인 단전 호흡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촬영을 하게 되면 호흡을 얼마 안한탓으로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호흡은 심호흡을 하게 된답니다. 이래저래 사진 찍는 취미는 여러가지로 고약한 취미 같지요? 비싼 장비에 또 슬라이드 필름 가격도 장난이 아니지요?(대부분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8000원 내외랍니다) 거기다 현상료도 비싸고, 인화료는 또 어때요? 일반 필름의 몇 배나 되고.... 그래도 누가 지은 책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디카가 아무리 번성을 해도 픽셀에서 필름 사진을 따라잡기 힘들고 다양한 용도나 확대는 역시 필름이 유용하답니다. 하여간...무엇을 하든 게으름은 항상 뒤에 말썽을 부리는 아주 고약한 버릇인것만은 틀림이 없는것 같아요...
 

1. 언제나 사고 현장을 벗어나고 며칠 지나면 겪는 일인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부상자들의 부상 정도가 밝혀지고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찾게 되니까....  관련자들이 아주 정신 없이 전화들을 걸어 옵니다. 우선은 사고 현장을 목격한 내용이 주가 되는 것들로서 가해차량이나 피해차량 모두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만한 말들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2. 사람의 말 한마디가 보상범위도 바꿀 수 있는지라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전화를 걸어오신 분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를 하며, 한편으로는 은근히 그쪽으로 답변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만 말할수 밖에 없고, 가감해서도 안된다는것을 잘 알고 있어서 제가 아는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데 상대방은 자신의 편에 유리한 설명이 아니라서인지 조금은 답답해 하는것 같았습니다.

3. 우선은 큰 부상이 아닌것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대퇴부 골절, 후속 차량의 부부는 갈비뼈 골절등인데 복합 부상이 아니라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경찰은 사고의 정황에 대해 정확한 사고 내용을 알기를 원했고, 특히 양 차량의 보험사는 자신의 보험회사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끼치기 위해서인지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를 캐 물었습니다.

4. 저도 바보는 아닌지라 그들이 묻는 의미를 다 알고 답변을 하였는데 의외로 당시 상황에서의 긴급조치및 안전조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집중적으로 물었습니다. 1차 사고 당시에 차량 운전자는 탑승인원에 대해 2차 사고를 예상하여 차에서 내리도록 하고 안전지대로 피신을 시켰었느냐...하는데 두 보험회사의 책임 한계가 첨예하게 대립이 되는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가 목격한것은 2차 추돌사고가 나기 전까지 일행은 찻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두 차량 모두 후속 사고 방지를 위한 비상등 점멸은 없었습니다.아마도 방금 일어난 사고이기에 그럴만한 짬도 없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일은 다른 사람의 사고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5. 솔직히 말씀드려 짧은 통화도 아니고 상황에 대해 앵무새처럼 반복을 해야 하는 전화를 10여통 받는다는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듯 싶습니다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제가 상대방의 입장이 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전화에 반복적인 답변이었지만 상대방이 혹여라도 제 답변이 짜증을 내는 답변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매우 조심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전화는 수 차례씩 더 받아야 할것 같지만 끝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줄 참입니다.

6. 사고라는것이 내고 싶어서 나는것이 아닌것은 누구나 다 알것입니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차량을 운전하는 동안은 운행을 마치기 전 까지는 항상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사고는 그나마 운전자나 탑승자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길래 망정이지 인사사고라도 났다면 그 후유증은 꽤나 심각했었을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 차량 운행시에는 한번더 안전에 유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일순간의 방심이 오랜 시간동안의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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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1-2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격자가 여촌재님이라서 다행이네요.
한 장소에 목격자를 찾는 플래카드가 전화번호를 달리해서 두 개 붙어있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저는 인정에 이끌리는 편이라 그런 경우에 놓이면 굉장히 당황하고 힘듭니다. 전 '목격자'가 된 적은 없지만 의사로서 소견을 이야기할 때나 상해진단서를 쓸 때 객관적이 되려고 무척 고심합니다.
예를 들어 중환의 예후를 설명할 때 보호자들이 바라는 대로 희망적으로 이야기 해도 결국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진단서나 공문서도 사정이 딱한 경우가 있는데 '사무적'이 되려고 아직도 노력이 필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