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서 번역 단상

 

  잘 번역된  문학서는 창작품 못지않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그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생산된 문학작품이 우리 정서나 문투에 꼭 맞게 옮겨지기를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다. 그들 문법으로는 허용되는 말이 우리말에 와서는 막히는 부분이 있고, 그들 풍습과 일상이 우리와 미묘하게 달라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안나 카레니나나』,『롤리타』,『위대한 개츠비』등은 번역자에 따라 책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담백한 문체에 경제적인 문투를 담은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산문체에다 설명적인 문투로 되어 있다. 또 어떤 책은 의역이 심해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번역서마다 개성이 다르니 독자로서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번역서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문 번역가 그 누구도 크고 작은 오류는 범한다. 처한 환경에 따라  문화와 언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정한다면 같은 작품을 두고 번역자마다 조금씩 달리 해석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다.

 

 

  『이방인』번역을 두고 한창 논쟁 중이다. 새로운 번역서를 낸 출판사의 도발적인 선전문구가 독자로서 불편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이방인』은 카뮈의『이방인』이 아니다.”라나. 기존의 김화영 작품이 엉터리라는 논리에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부분적인 문장, 상황의 의미 해석,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 등이 잘못되었다고 새 번역자는 격앙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오류는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이건 누구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 번역이 낫고, 어떤 상황에서는 새로운 번역자의 의미 해석에 타당성이 있는 정도이다. 싸잡아 기존 번역이 공격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번역서를 만나는 건 독자로서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될 실수를 엉터리라고 매도하는데 동참하면서까지 새 작품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의 호불호를 견주는 건 독자의 몫이다. 출판사가 설레발 칠 일은 아니다.

 

 

 

 

 

 

 

 

 

 

 

 

 

 

 

 

 

  2. 마들렌느 조개 과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른 데다 내용은 방대하고 문체 또한 산만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문장은 접속사와 반점의 향연일 정도로 부담스럽다. 고전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정복하려 하지만 십여 권이 넘는 이 대하소설을 아직도 1, 2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 읽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마 1부「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마들렌느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장면에서 독자로서의 호기심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마들렌느가 어떤 과자일까, 하는 소설 외적인 호기심이 생긴 적이 있었다. 마침 만화로 된 책도 나왔기에 얼른 샀었다. 완간 소식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마들렌느 과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쁨이었다. 평범한 조개 모양 과자 하나로도 우리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 홍차에 찍은 마들렌느 과자, 그 향과 촉감에 주인공 마르셀은 불현듯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일요일 아침, 이모가 권하던 그 마들렌느 맛이 겹치면서 마르셀은 완전무결하게 제 어린 시절을 글로 복원하게 된다. 마들렌느라는 소박한 촉매제 하나가 위대한 소설을 탄생시킨 셈이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는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적신 마들렌느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웠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섬세한 감각의 영혼이라니.

 

 

  저마다의 감각에 겨운 봄꽃은 저리도 앞 다퉈 피고 지는데, 내 온몸과 마음에 숨어 있는 오감의 꽃은 피어날 줄 모른다.

 

 

 

 

 

3. 사랑한다면 직접 말하기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그 비판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 비판이라는 것이 비난을 내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염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공지영 소설의 『높고 푸른 사다리』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실은 감정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 뚜껑을 열게 되면 한없이 흔들리기만 한다. 인간 존재의 바탕엔 용기와 관용뿐만 아니라 나약함과 비겁함이란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직함과 너그러움을 동시에 지닌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개 우리는 나약함과 비겁함의 생활 패턴에 쉽게 길들여져 있다. 금세 후회하면서도 약해지는 의지력 앞에서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이처럼 약점 많은 게 인간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타인을 비판하거나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공교롭게도 인간에게는 양심이나 염치라는 게 있다. 그러다 보니 비판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건강하고 온전한 의견일지라도 드러내놓고 상대를 향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대개의 비난의 목소리가 에둘러서 오고 바람결에 감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그 비판은 직접적일수록 좋고, 비판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백 마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뭐하나. 한 마디 에둘러서 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그 사랑이 의심 받는데. 아무리 건전한 비판이라도 몇 번의 고개를 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의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어이없는 인신공격이란 허울만 남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면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게 최선이다. 해야만 할 때는 에두르지 말고 정공법을 쓰는 게 좋다. 직접 말할 수 없는 모든 비판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는 심술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4.도리언의 경우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정의에서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는 ‘아름다움’이다. 한마디로 미적 탐색이 없는 예술의 본질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에 꼬리를 물다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대한 내 정의는 ‘진실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개별자의 인식’ 이다.

 

 

집착이나 열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일어나 밥 먹고 일하고 웃다가 허기지면 또 먹고 일하고 울다 잠자리에 드는 것, 이런 단순한 패턴을 일러 예술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술이 되려면 일상성이 개인의 고유한 내면 정서와 충돌해야 한다. 그 양상은 평범한 삶에 대한 염증, 도덕적 일탈, 평정을 넘어선 의식의 과잉 등의 행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예술은 도덕이나 선함과는 무관하다. 심미안에 눈 뜨면 추함과 아름다움엔 경계가 없고, 행과 불행의 사슬도 실은 그 엮임에 경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추함과 불행까지도 포괄하는 게 예술이다.

 

 

  오스카 와일드의『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예술의 본질과 인간의 고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알레고리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다. 쾌락주의와 감각을 앞세워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위선을 질타한다. 그렇다고 주인공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삶이 결코 최선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삶을 경계 없는 예술로 인식하고 개인적 감각만을 추구하던 도리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젊음을 유지하고 그 대신 초상화가 늙어간다 해서 제 영혼의 충족까지를 보장 받는 건 아니다.

 

 

  도리언의 파멸 과정을 통해 와일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술과 도덕은 무관하다는 것. 그럼에도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의 영역이란 것. 예술과 예술적 삶이 맞장 뜨는 그 자리엔 공허와 허무만이 가득하다는 것. 그렇지만 예술의 본질인 아름다움은 인간과 함께 영원하리라는 것. 예술과는 별개로 우리 삶 또한 나름 지속된다는 것.  것.                                                                                                                                 문                                                                                                   

 

 

 

5. 슬픔에 꽃불을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이준규 시인의「문장」(『네모』,문학과 지성사) 전문이다.

 

 

  이 짧은 산문시를 발견하는 순간 온몸으로 화르르 벚꽃이 피었다.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처럼 전신이 달아올랐다. 멀리 누워있던 그림자마저 제 심장에 펌프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을 벼리는 시인의 순간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문장으로 저녁을 기다리고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며 문장으로 겨울을 나고 문장으로 봄을 맞고 문장으로 웃음 강을 건너 문장으로 숲에 이르는 시인의 시간. 다시 저녁은 오고 그 순환되는 문장 속으로 내딛는 시인의 영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옷깃에 묻은 얼룩 같은 허물을 탕감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눈물로 국숫발을 삼키던 당신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계단 앞 주춤하던 당신의 무릎 관절이 내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한 생애에 드리운 눈썹 밑의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내 무딘 눈동자가 놓친 당신 손끝의 피로를 만질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울분 서린 당신 연둣빛 스카프에 내 연민의 방점을 보탤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너무 빨리 피고 지는 저 봄꽃이 야속타는 당신의 혼잣말을 되뇔 수 있을까. 감춰둔 오금 밑 당신 슬픔과 내 슬픔이 같음을 눈 맞출 수 있을까. 저렇게 숲은 멀리 있는데.

 

 

  시인의 말처럼 삶은 들여다볼수록 슬픔만 남는다. 삶을 슬픔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몇 개의 문장을 쓰는 순간 저녁은 온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웃음 같은 봄을 맞으면 남는 건 문장이 아니라 몇몇의 슬픔이다.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섣불리 지나친 먼지 낀 시간들을 살릴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기꺼이 껴안지 못한 슬픔의 영역에 꽃불을 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숲은 멀기만 한데.

 

 

  

 

                                                       

 

 

 

 

 

 

 

 

 

 

 

 

  6. 현명하게 말하기  

 

  “군주가 아첨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사실대로 말해도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들의 존경심을 잃고 만다.” 마키아벨리도 군주, 아니 인간의 심리에 대해 어지간히 파악한 자였다.

 

 

  현명한 리더는 제 약점을 맘껏 말해도 좋다고 주변인들을 안심 시킨다. 누군가 리더 자신의 허물에 대해 말한다면 요즘말로 쿨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나아가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논평을 한다 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리더의 현명함은 여기까지다. 모든 약점과 온갖 실패에 대한 충언까지 감당할 수 있는 군주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 대부분의 CEO들이 왜 저마다의 근엄함으로 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저 명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현명한 군주는 열린 마음이 준비 되어 있다. 그렇다고 제 명예심을 해칠 정도로 사람들의 솔직한 언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존경 받고 있다는 자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 어디 군주만 그럴까. 세상 누구나 자의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 또는 평가나 비난을 받아들인다. 상대가 발 들일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으니 이 정도의 열린 마음만 있어도 모두 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언행의 한계치는 누가 정하나. 현명한 사람 곁에 현명한 친구가 모인다는 전제하에 그것은 발언하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그들은 상대의 맘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시 말하면 서로의 자존에 폐가 되지 않는 정도의 진솔함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다. 타자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 자존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첨과 진솔함의 경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말을 현명하게 부릴 줄 안다. 넘친다거나 모자란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군주가 그것을 알아채도록, 제 현명함의 한계치를 잘 활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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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4-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첫 댓글의 영광을 안는 건가요?

오랜만의 출현에 반가움을 표합니다. 잘 지내셨나요?
글이 좋습니다. 특히 3번과 6번에 꽂히는군요. 여러 번 읽게 만들어요.

3번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6번 열린 마음이 있으되 자존을 지킬 정도로만... 이것 어렵겠네요.
늘, 무엇과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게 어렵지요. 뛰어난 기술을 필요로 해요.
저는 비판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혹시 지적할 게 있으면(틀린 게 있으면) 비밀댓글로 직접 말합니다. (틀린 걸 그냥 놔둘 순 없잖아요. 의리가 있지... ㅋ)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건 망신 주기, 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글 읽을 수 있도록 자주 나타나 주시길... ^^

다크아이즈 2014-04-12 10:39   좋아요 0 | URL
모두 게으름의 소치지요.
시간을 쪼개가며 알라딘을 접수하는, 페크님을 비롯한 바지런한 알라디너들이 새삼 위대하게 보입니다.
봄날, 잘 지내시지요?
늦은 안부 여쭙니다.^^*

세실 2014-04-1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외국문학작품 읽을때는 한 출판사 책만 읽게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 개츠비로 마음을 굳혔어요^^
님 마음의 꽂을 활짝 피게 해드려야 하는데.....ㅜㅜ

다크아이즈 2014-04-13 01:18   좋아요 0 | URL
안나 카레니나는 어디 걸루요? 박형규(문동) 번역 골랐을 것 같구요.
개츠비는 누구 걸 선택하셨을까요? 저 수수께끼 풀어라고 어떤 출판사 걸로
읽으셨다는 걸 안 밝혀 주시네ㅋ

세실 관장님 그날 볼일 잘 봤어요?^^*
세상사 어디 지 맘대로 되기나 하던가요? 제가 만날 하는 말이지요.ㅋ
나날이 짙어 가는 봄 잎들... 이쁜 모습 눈에 선해요~~


세실 2014-04-15 10:43   좋아요 0 | URL
호호 문동!!
개츠비도 당연히 김영하 문동으로!!!! 읽었답니다.

그날 관장님이 매우 흡족해하셨어요^^
돌아가셔서는 메일도 보내주셨는데,

'예쁘고 글 잘쓰는 관장님!
오늘 매우 감사했습니다.
연가도 미루고 환대해 주시고
점심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도서관을 참 섬세하게 관리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장님의 하루가 온통 기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했답니다. 언니들께는 죄송했지만요. ㅠㅠㅠ
조만간 꼭 뵈어요~~~

다크아이즈 2014-04-16 08:36   좋아요 0 | URL
암만요, 그랬을줄 알았어요.
이쁘고, 글 잘 쓰고, 도서관 관리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세실님...
좋은 인상 남겼다니 아쉬움이 다 보상 받은 기분인걸요.
날로 정진하는 대단한 세실관장님, 파이팅~~^^*

2014-04-13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4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연아아, 힘들었지?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 높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란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그의 이력이 이 한 마디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철강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잘 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나아가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증거로 삼았다.

 

 

  누구나 카네기처럼 부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성, 이런 마인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앤드류 카네기는 경험으로 깨쳤다. 카네기는 어릴 때 토끼 한 쌍을 선물로 받았다. 한두 마리 토끼를 키울 때는 제 이름을 짓고 불러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번식력 강한 토끼가 열 마리, 스무 마리로 늘어나면 그 이름을 짓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쉽지 않다. 카네기는 출석부에서 힌트를 얻어 반 친구들의 이름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각 토끼마다 걸어주었다. 그러자 제 이름 팻말이 걸린 토끼에게 친구들은 관심을 가지고 먹이까지 챙겨 주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존재 증명을 바란다. 카네기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토끼 키우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나 오백 명으로 늘어났을 때나 카네기는 그들 개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강조하는데 앞장섰다. 평생을 거쳐 그가 가장 즐겨하고 자주한 말은 ‘자네, 힘들었지?’라는 한 마디였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도 없다. 카네기는 인간의 이런 근본 정서를 기업 경영에 접목한 셈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바탕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현명한 카네기는 사람이 최선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멋진 명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친 누군가의 얼굴에 그걸 감당하려는 안간 미소가 보인다면 무심한듯 다가가 가만히 손 잡아주고 싶다. 오늘 그대 힘들었지? 아주 뜬금없지만 지금 당장 그 한 마디 하고 싶다. 연아야, 힘들었지? 심판 판정 논란이나 재심 청원 따위에는 개인적으로 전혀 관심 없다. 다만, 계급장 없는 평범한 아줌마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연아아, 힘들었지?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같은 맘으로 마오야, 너도 힘들었지?

 

 

 

 

 

 

 

 

 

  2. 몸으로 하는 말

 

  <힐링 캠프>에 이상화 선수가 나왔다. 명랑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다 가족애도 넘쳤다.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한데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성급한 편성을 한 방송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아직 다른 선수들의 경기가 남아 있는데다, 그들이 안을 심적 고충을 헤아린다면 올림픽이 끝나고 방송을 해도 좋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상화 선수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마저 불편하게 다가왔다.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이게 다 심리학 책 탓이다. 인간 행동 패턴으로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책들의 잔상이 내 심사를 건드렸다.

 

 

  말만이 언어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말보다 몸의 언어, 즉 비언어적 태도가 더 많은 정보를 준다고 강조한다. 행동 심리학 책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동작 하나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타인의 몸말을 허투루 보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이 입구 쪽을 바라보는 건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는 제스처야.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추는 걸로 보아 저이는 자제심을 발휘하는 중일 거야. 다리를 갑자기 흔드는 저 남자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책의 영향으로 타자를 향해 이런 분석을 하게 된다. 한데 이런 면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심리학 서적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심층적이라 해도 타자의 몸 언어를 명확하게 분석해주지는 못한다. 반은 받아들일만하고 나머지 반은 무시해도 좋다.

 

 

 

  인간 행동 패턴에 관한 심리서는 필요악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긍정의 수단도 되지만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봤을 때는 공감도 된다. 내 실수를 줄이고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한 지침서로 삼을 만하다. 타인을 적극 수용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이라면 인간의 몸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3. 모두가 피해자 - 쇼트트랙에 관한 짧은 생각

 

  소치 동계올림픽이 중반을 넘어섰다. 우리 선수가 등장하면 맘부터 졸인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정서와 근원적 모성이 절로 발동한다. 특히 쇼트트랙 경기에서는 그런 맘이 더하다. 아시다시피 쇼트트랙은 스피드보다 경기 운영의 묘미에서 승패가 좌우되는 경기이다. 눈치작전도 필요하고 그만큼 몸싸움도 치열하다. 관전하는 이도 덩달아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다. 숱한 변수들을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그 재미에 개인적으로 쇼트트랙을 좋아한다.

 

 

  사랑받는 국민 스포츠인 쇼트트랙에 관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올림픽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회자된다. 파벌 싸움이란 큰 틀은 이제 온 국민이 알 정도가 되었다. 잘못은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있고 책임 또한 그들 몫이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고, 그들 싸움의 제일 희생양은 선수들이란 사실만 남았다. 실력 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경기다 보니 선수들은 여러 요구 사항으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항이 합당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내 갈등과 반발과 상처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보란듯이 성과를 낸 안현수 선수는 그나마 심리적․경제적 보상을 얻게 되었다. 다행이다. 빙상연맹 관계자들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국민정서 또한 그러한 안현수를 응원한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한 때는 선수였거나 지금 선수인 이들이 받을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나? 선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 수 없다. 모두 피해자들일 뿐이다.

 

 

  성과 최고주의, 금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한 자아의 건전한 성취욕이나 올곧은 투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올림픽은 충분한 감동을 선사한다. 개인의 영광이 타인에게 긍정의 자극을 주는 선만으로도 스포츠의 역할은 충분하다. 나부터 자국 선수가 나오면 떨려서 제대로 경기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서와 과격한 스포츠 국가주의와는 다르다. 금메달을 애국이나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사태를 방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4. 깨지기 쉬운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약고 발 빠른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눈치 없는데다 느리기까지 한 사람은 위기가 왔다는 것조차 모른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닥치면 당황하고 허둥대다 무너지기 쉽다. 나심 탈레브는『안티프래질』을 통해 이러한 위기의 본질과 속성, 그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기술한다.

 

 

  탈레브는 프래질(fragile,깨지기 쉬운)과 안티프래질의 개념에 대해 촛불과 장작불을 예로 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쉬 꺼진다. 외부 충격에 약한 프래질 상태가 된다. 반면에 장작불은 바람이 셀수록 더 세게 타오른다. 외부 충격에 강한 안티프래질이 되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조합한 용어인 이 안티프래질의 특성을 갈파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프래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다. 예측가능한데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다. 이에 반해 프래질은 예측불가능하고 비선형적 형태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위기 상황, 이를테면 IMF 사태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프래질이 되어 버린다. 반대쪽에 안티프래질이란 공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사이 프래질을 예측하고(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대비한 이들은 고스란히 반사이익을 챙긴다.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안티프래질의 사람들은 위기의 주범이지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비선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면죄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무지한 일반인들일 뿐이다.

 

 

  프래질을 감지하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주에 자족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단다. 한마디로 속아 넘어가지 않는 전략이 요구되며, 우리 스스로 안티프래질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깨지기 쉬운 일반인이 단단하기만 한 글로벌 이익 집단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처하려는 투지만으로도 안티프래질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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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3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3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2-23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쓰신 글 중에

"같은 맘으로 마오야, 너도 힘들었지?"<이 부분 읽고 왜 눈물이.. ㅠㅠ >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


이걸 보실 줄 아시는 분, 이것이 행위에 담겨 있으신 분, 비록 글이지만.. 그걸 뵐 수 있었고.. 아.. 그건 큰 가르침이셨어요.. 팜므느와르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39   좋아요 0 | URL
연아도, 마오도 다 짠하고 고마울 뿐.
세상에 태어나 한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든 분들께 감정이입이 되면서 울컥해지네요.
오래 한 분야에 몰입하다 보면 연아처럼 그릇이 커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못한 나는 뭔가, 이런 자조도 따라오네요. 새벽님의 정감어린 댓글에 힘을 얻어 조금씩 나아지려 노력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2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래질 하니 김영하의 굴비낚시가 생각나네요.
개인적으로 에세이가 참 마음에 드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 김영하인데 ( 하루키보다 잘쓴다고 생각합니다. ) 깨지기 쉬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전 김연아는 자랑스러운데 그 김연아'를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상품 가치로 팔려는 장사꾼과 정치꾼 그리고 그녀를 애국심으로 바라보려 하는 무조건 지지'가 참 촌스럽더라고요...
박근혜도 참 소갈머리없으신 게 아니 지금 한창 경기 펼치고 있는 와중에 빙상 연맹 어쩌구저쩌구하는 거 자체가 부덕의 소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남자 쇼트트랙 노메달은 아마도 이러한 여론의 공격에 의한 부담감이 적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43   좋아요 0 | URL
김영하의 에세이라, 곰발님이 추천하시면 무작정 믿고 찾아 읽는 거지요.^^*
동계 올림픽 포함한 스포츠 관련 일련의 곰발님 페이퍼 다 읽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완벽하게 해주시는 바람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답니다.

곰발님이 아무리 명석하게 분석해 주셔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훨씬 많다는 게 서글픈 현실이긴 하지요. 우린 너무 길들여졌고, 여전히 길들여지고 있어요ㅠ. 맛난 저녁(술?) 드시길^^*

Jeanne_Hebuterne 2014-02-24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 심리학이나 인지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몇몇 책을 읽어보았는데도 제가 여러번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찾았더랬습니다. 제겐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나 봐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세히 보려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누가 얼른 장소를 벗어나고 싶어 계속 출입구 쪽을 바라본다 한들, 그 사람의 얼굴을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말은 늘 자신을 가두죠. 음악이나 몸짓이 더 정확하지 않은가, 나 자신조차 말로 나를 잘 풀어낼 수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요즈음, 팜므 느와르 님의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48   좋아요 0 | URL
어쩐지 에뷔테른님은 자신에게 몰입하는 타입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분들이 진짜 고수지요. 타자로부터 너무나 자유로워 거리낄 게 없는 영혼, 여기서 자유롭다는 건 무대뽀가 아니라 타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만큼 자신에게 몰입하는 유형이라는 거지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지표지요.
자신을 가두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라는 게 맞겠지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생각은 분산되고, 에너지는 고갈되고, 체력은 저질이고...
여하튼 핑계만 많아요. 나자신조차 나를 풀어낼 수 없다는 말, 제게도 해당됩니다.^^* 미세 먼지는 물러설 줄 모르고 이른 저녁니 오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4-02-2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에 속지마라>는 요즘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심리상담 열풍의 문제점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책이라고 봅니다.저자는 독일인인데 심리학을 통속적으로 이용하여 피상담자 위에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하는 유명강사들을 비판하고자 저 책을 썼더군요.전세계에 널리 퍼진 심리치료용 문답지의 문제점도 파헤쳤다고 합니다.IQ테스트의 문제점이 드러나니까 EQ라는 것을 개발해내는 약삭빠름도 지적하구요.요즘 유행하는 감성 혹은 공감 열풍을 차분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믿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24 17:56   좋아요 0 | URL
저 책은 아직 안 읽었어요. 근데 웬체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 금세 사서 읽게 될 것이야요. 심리학 서적이 다 옳지도 않고, 거기에 온전히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만 많은 참고로 삼으면 좋은 점이 꽤 많다는 걸 알았어요.

심리치료용 문답지, IQ,EQ 이런 것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그러니 더욱 이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4-02-2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 글쓰기에도 꼭 필요한 자세겠지요.
낯설게 하기, 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알아야 할 많은 것들을 잘 읽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24 18:00   좋아요 0 | URL
낯설게 하기, 라고 하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때 어떤 책에서 좋은 예시로 말해준 것이 '우산과 침대'라는 말이었어요.
우산과 침대는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잖아요. 그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 만나
그럴듯한 묘사를 이루면 그건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이젠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도 익숙한 것이 되어 버려 더 새롭고 자극적인 것이 아니면 시큰둥해져버리는 시대가 되었지 뭡니까?^^*

감은빛 2014-02-2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부터 올림픽, 월드컵 뭐 이런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이 불편해요.
의식하지 않을 때는 당연히 우리나라 팀을 열심히 응원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저들을 응원할 이유가 또 뭔가 싶기도 해요.
혹 상대국가에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들을 응원해도 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언급해주신 책들 중 몇 권에 관심이 가네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길~ ^^

다크아이즈 2014-02-24 18:08   좋아요 0 | URL
저는 맘 졸이며 우리 선수를 응원합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거지요.)
하지만 그게 스포츠 애국주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연아가 잘 하기를 바라는 만큼 마오가 욕 먹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요.
연아더러 <대한민국>이 되어 주기를 갈망하는 건 폭력이지요. 연아는 연아일 때 가장 연아답잖아요.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멀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감은빛님도 맛난 저녁 드시길. 전 콩나물밥을 할까, 콩나물을 무칠까 고민 중입니다.^^*
 
최고의 글쓰기 연습법, 베껴쓰기
송숙희 지음 / 대림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에게 이르노니 - 노력 없는 글쓰기는 없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다 한 글이 좋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쓰는 이나 읽는 이 두 쪽이 다 만족할 수 있다면 길든 짧든 분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은 안다. ‘글 한 번 제대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를 들자면 시작할 때는 분명 ‘수다의 즐거움’에 대해서 써야지 했는데, 마무리 단락에 가면 어느새 ‘잔소리의 폐해’로 변질되고 마는 제 글의 모순 앞에서 낭패감에 휩싸이던 때가 하 몇이던가.

 

 

 

75쪽 - ‘문장을 짧게 쓸 것’, ‘첫 문단을 짧게 쓸 것’, ‘활기찬 표현을 사용할 것’, ‘긍정적인 표현을 쓸 것!’ 헤밍웨이가 근무했던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사의 문장 지침이다. 동시에 헤밍웨이 소설 문장의 특징이며, 세상으 소설가들이 헤밍웨이로부터 배우려는 문체의 핵심이다. 헤밍웨이는 신문기사를 쓰며 글쓰기를 업으로 삼았고, 신문기사를 쓰며 글쓰기를 단련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기사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정확한 것이 생명이다. 그래야 가독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다. 글쓰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재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오히려 기술에 가깝다. 이는 공부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인 것과 같다. 가끔씩 쓴다는 것에 대해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그것이 재능이나 예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글쓰기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그리하여 드물게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건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이다. 그러니 쓰고 싶다면 미리 기 꺾일 필요는 없다.

 

 

 

 

64쪽 - 나는 백석의 새로운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은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 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안도현

 

 

 

 

 

132쪽 -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지금껏 회자되는 작품을 남긴 슈퍼스타급 화가다. 반면에 라파엘로는 평범하게 태어나 노력만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화가다.

라파엘로가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을 때 이미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는 화가로서 명성을 구가하고 있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그들의 재능과 명성 앞에 참패할 게 뻔했다. 선배들의 작품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라파엘로는 자신에게 부족한 능력과 기술을 알아냈다. 그리고 피렌체로 떠났다. 시의회 홀을 찾아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밑그림을 살펴보며 그들의 스케치를 따라 그렸다. 라파엘로는 선배 화가들의 아이디어와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긴 세월과 노력을 바쳤다. 그 결과 미술사학자들은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라파엘로를 승자로 꼽기도 한다.

 

 

 

 

 

 

 

  글쓰기는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아무나 도전할 수 있다. 다만 재능이 덜 필요한 만큼 감각과 열정은 더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예민한 손끝과 묵직한 엉덩이가 준비물로 필요하다. 그 두 도구를 활용해 읽고 쓰기만 하면 된다. 우선 ‘예민한’ 감각으로 다른 사람의 잘 쓴 글을 베껴 써본다. 좋은 시나 산문을 읽고 베껴 쓰다 보면 감이 온다. 지속적인 이 연습은 자연스레 나만의 문체와 나만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때도 사람들은 착각한다. 머리(재능)와 가슴(감각)이 글을 쓰게 하는 줄. 단언컨대 글을 쓰는 원동력은 그 둘 다 아니다. 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묵직한’ 엉덩이다.

 

 

 

 

 

81쪽 - 하루키는 말없고 근면한 마을의 대장장이처럼 누군가의 부탁이 없어도 꾸준히 부지런히 써간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이 방식은 전업자가가 아닌 생업이나 학업 등 우선은 더 바쁘고 중요한 일들 틈에서 글쓰기를 훈련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유용하며, 베껴 쓰기야말로 우리들에게 아주 걸맞은 글쓰기 훈련법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한 편씩 신문칼럼을 베껴 쓰는 것은 그가 말한 글쓰기에 반드시 필요한 근육인 집중력과 지속력을 강화하는 데 더없이 좋다. 하루키나 작가들은 쓸 게 없어도, 쓰지 못해도 무조건 일정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의식을 집중한다. 아직 쓸 게 없는 우리들은 매일 일정시간 신문칼럼을 베껴 쓰며 집중력과 지속력을 훈련시키기에 그만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하루키의 말처럼 ‘견뎌나가는 사이에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진짜 재능과 만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글 한 번 써보고 싶은가? 우선 취향에 맞는 책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고 싶은가? 잘 된 글을 필사하라. 글을 오래토록 잘 쓰고 싶은가? 당장 엉덩이부터 의자에 앉힌 뒤 손가락을 자판에 올려라. 그리고 두드려라. 네 튼실한 엉덩이가 의자의 존재를 잊을 정도가 되고, 더 이상 예민해질 손끝이 없어질 정도로 쓴다는 것에 푹 빠지게 된 당신은 온몸으로 이렇게 적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기술)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단계 중의 하나라고.

 

 

 

 

 

 

*** 생일을 맞이하야 알라딘 친구들이 보내준 책과 음반.

     원하는 걸 말하라기에 뻔치 좋게 넙죽 받았다.ㅠ

     고맙습니다, 님들^^*

     그 중 한 권이 이 책인데, 글쓰기 입문자는 한 번 쯤 읽을 만하다.

     동어반복이 심해 나로선 별을 네 개만 줄 수밖에 없었다.

     1000자 칼럼 열심히 베껴 쓰다 보면 글 잘 쓰게 된다는 게 요지.

     웬만하면 글쓴이들의 노고를 생각해 별 다섯을 쏘는 데 이 책은 깊이와 넓이가 살짝 부족했다.

 

 

     고흐의 아몬드 트리 시리즈는 딸내미 선물. 센스 있네! 일인용 찻잔 맘에 쏙 든다.

     차 마시면서 스맛폰질 열심히 하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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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2-14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프로 공감입니다. 요즘 제 화두랍니다^^ 글 잘 쓰고 싶어요~~

댓글 수정,
언제 사진을? ㅎ
오홋 고흐 그림의 우아한 잔이랑 스마트폰 케이스 딱 제 스타일입니다. 역쉬 센스있는 따님^^

다크아이즈 2014-02-14 12:26   좋아요 0 | URL
이미 충분히 잘 쓰고 계시잖아요. 독서 관련 기고하신 글 보면 고수 중의 상고수^^*
세실님 덕에 책 언능 읽고 잠시나마 달아올랐어요. 열심히 쓰자, 뭐 이런 다짐.
작심 세 시간 갔지만요. 늘 고맙고 사랑스런 님~~
찻잔은 쪼깨 이쁜 것 같아요. 흐흐~~

비로그인 2014-02-13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기 꺾인 사람 여기있어요. 팜므느와르님. ~~^^




안도현의 글은 읽다가 울컥하네요.
필사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저렇게 많은 작가들이 필사를 하셨군요.. 음..

한글 한글 모두 다 꼼꼼하게 읽어보았는데 모두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제게.. ~~

다크아이즈 2014-02-14 12:29   좋아요 0 | URL
에이, 새벽님 때문에 기 꺾일 사람은 있지요.(여기, 저요!)
에세이적 감수성이 빼어난 님 글 보면서 건조한 문체를 구사하는 저, 막 반성하고 부럽고 그랬지 뭡니까?^^* 깊어져야 님처럼 쓸 수 있지요. 눈여겨 보고 있답니다.

페크pek0501 2014-02-13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벌써 이 책을 사서 읽으신 건가요?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 놓고 살까, 말까 결정을 못했어요.
이런 류의 책은 여러 권 읽었지만 여전히 끌리거든요.

필사하는 노력에 대하여 공감 공감...

다크아이즈 2014-02-14 12:30   좋아요 0 | URL
새 글이 안 올라오네요.
산뜻한, 청명한 글 기다립니다.
페크언냐님 페이퍼 읽으면 막 관련 책이 무조건 사고 싶어지는 심리는 뭘까요?
그만큼 관련 지어서 글을 잘 생산해낸다는 뜻이지요. 역시 배울 게 많은 님~~

감은빛 2014-02-1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저도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다 제대로 읽진 않았지만, 글쓰기 책들은 제법 사모았는데,
그거부터 제대로 읽어야지 생각 중입니다.(여전히 생각만 -_-;;)

그래도 글을 이정도라도 쓰는 건 예전에 좋아하던 작가들 글을 열심히 배껴쓴 덕이 아닌가 싶어요.

다크아이즈 2014-02-14 12:3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이 정도' 라니요 - 감은빛 님은 그 정도 선이 아니지요. 이미 어느 경지를 넘어섰잖아요. 잘 쓰셔도 고민이 되는 게 글쓰기인가 봐요. 열심히 배울게요. 역시 감은빛 님도 베껴쓰기 과정을 거치셨군요.^^*

2014-02-13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4-02-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글 잘 쓰고 싶어요. 글 잘 쓰신분들 글 읽으면 정말 부럽고 부끄럽고 그렇더라구요.

다크아이즈 2014-02-14 12: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부럽고 부끄럽고.... 이런 복합적인 심사.
꿈섬님도 열글 쓰시고 잘 쓰는 분인데도 이런 고민을 하시는군요.
끝이 없는 게 글 수련 과정인가 봅니다.^^*

기억의집 2014-02-14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저는 글쓰기도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글을 쓰는 관점이 사람마다 달라서 글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것 같아요. 저는 죽어도 감상적인 글을 못 써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안 되더라구요.좀 차분하게 마음이 느끼는,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는데 지식위주의 글을 선호해서 그런지 안되더라구요. 단 글은 쓰면 쓸수록 늘어나긴 하지만,,,,, 글쓰기에 재능 있는 사람은 못 쫒아갈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4-02-14 12:42   좋아요 0 | URL
재능 맞아요. ㅋ 그런 분들은 글쓰기 관련, 범인들이 하는 고민을 아무래도 덜하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재능 없는 보통 사람들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쓸 수 있게 된다는 거였어요. 일등 아닌 이등은 할 수 있다, 뭐 이정도 타협안이요.
그나마 글쓰기는 타 예술 분야와 달리 노력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는 분야 같습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는 님 말에 동의하는 거지요. 물론 재능 있는 사람은 열외예요.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게야. ㅠㅠ

노이에자이트 2014-02-14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년에 노트 1000페이지 이상(하루 3페이지 이상) 쓰기를 10년 이상 하고 있는데 그래도 일필휘지는 안됩니다.글을 한번 쓴 뒤에는 반드시 다시 검토해야겠더라고요.꼭 주술관계가 애매한 비문이 나오니까요.

다크아이즈 2014-02-15 09:22   좋아요 0 | URL
노이에님은 베껴쓰기가 아니라 노이에님의 글을 쓰시는군요.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베껴쓰기는 눈과 맘으로만 하게 되고 실제 글을 씀으로써 훈련합니다. 하루에 천 자 정도... 일필휘지는커녕 만날 헬렐레~~ 이런 상태에서 씁니다.
비문 생산이야말로 기본적 오점(누군가 시는 비문이 허용된다고 역설하는데 이것도 갖춘 뒤에나 가능한 일이지요.)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완벽하게 쓴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

오늘도 천 페이지를 겨냥하는 노이에님을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파이팅을 외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2-15 1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팜므느와르 님도 힘내세요.

테레사 2014-02-1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재능이 아니라 감각과 열정이라고 한 말이, 뜨끔하면서도....희망을 주네요^^.

다크아이즈 2014-02-23 11:02   좋아요 0 | URL
최고로 잘쓰려면 재능이 필요하겠지만
잘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겐 재능보다는 노력만으로도 가능한 게 글쓰기라고 생각해요.^^*

성에 2014-03-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오니 사람 사는 동네 같습니다. 너무 좋은 분위기.
희망이 오래도록 현실이 되지 못하면 < 저주 >가 된다고 합디다.
내게 희망은 저주의 단계에 들어 있어요 . 그만큼 나에게 희망은 절실하게 닥아 옵니다.
내겐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꼭 이루고 싶은 마음은 더욱
초조하지요. 글쓰기에 대한 성찰 , 하마 뒤뚱대는 내게 더없이 좋은 가르침입니다.
힘이 나고 또 용기도 생깁니다.
재능 보다는 노력, < 노력>은 아직 자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중간 자리는 힘들어

 

  한창 회자되는「겨울왕국」을 보러 갔다. 남들보다 한 박자 늦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볼 날만 잡고 있었는데 설이다, 딸내미 신종플루 앓는다 어쩐다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물론 영화 이야기는 아니다. 자리에 관한 거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선호하는 자리는 뒤쪽 중앙의 왼쪽 통로 쪽이다. 일반적으로 중앙의 중간 자리부터 예매되는 것에 비하면 내 취향은 약간 특이하다. 한데 이번「겨울왕국」을 볼 때는 예외였다. 꼼짝 않고 일주일을 앓고 난 딸내미와 첫 동반 외출로 잡은 스케줄이 ‘겨울왕국 관람하기’였다. 딸내미의 주장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은 치밀한 스토리가 아니라 화려한 영상 자체가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야 한단다. 더구나 3D 영화를 제대로 맛보려면 가운데자리가 그만이란다. 이번만은 내 취향이 아닌 지 소신대로 중간 자리를 예약하잔다. 일리 있는 말 같아 두 말 없이 동의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중앙의 중간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중간에 꽉 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은 갑갑해져왔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덩치 큰 앞사람이 자꾸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자막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 좋은 화면을 앞에 두고 초반 몇 분은 졸기까지 했다. 딸내미가 창피하다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서 가운데자리는 싫다니까, 하는 자조가 절로 나왔다.

 

 

 

  중간 자리를 꺼리는 나름의 이유는 오직 개인적 경험에 연유한다. 우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깜깜한 곳, 전후좌우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건강 검진 때 MRI 기계 안에서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끔찍한 경험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숨구멍이 막히고 심장은 조여오고 맥박은 빨라진다. 뭉근하게 주리 틀리듯 온몸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장시간 비행기 탈 때의 느낌도 이와 비슷하다. 해서 웬만하면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 자리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창 쪽보다는 통로 쪽을 선점한다.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다. 다만 별로 착하게 살아오지 않은 자의 괜한 자격지심 같은 게 누적되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면 오래 전, 아부지의 죽음 앞에서 불효했다는 자책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험이 있다. 자책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공포로 변해갔다. 온몸에 한기가 들 정도로 전신이 떨려왔다. 따뜻한 봄날이었건만 솜이불을 꺼내 덮어도 전신에 감도는 두려움의 한기는 쉬 가시질 않았다. 세세한 불효의 내역들은 돌이켜보면 별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당시로는 아부지나 나 둘 다 심리적 뾰족탑을 쌓던 시절이라 나름 심각했었다.

 

 

 

  엉뚱한 데로 새버렸도다. 각설하고 두 번째는 요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 콜라와 팝콘이라도 먹게 된다면 긴장도와 몸 상태에 따라 중간에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간 자리에 앉는 건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세 번째는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자리가 화면을 보기에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는 앞사람들의 빽빽한 몸피와 들쑥날쑥한 머리 라인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일 수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신이면서 앉은키만 높은 저질 체형이라 그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 머리통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듯, 나 또한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고 엉덩이는 밀어 내리게 된다. 그렇게 엉뚱한데 신경을 쓰다 보면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졸음도 그 이유가 된다. 피곤한 날인데다 취향마저 내 것이 아닌 영화 앞에서는(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 십중팔구 초반 십 분 이내에 졸게 된다. 중간이 아닌 한쪽 자리에 앉았다면 내 창피함이 덜 들킬 것이다. 같이 간 사람들조차 민망해지는 그런 그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로 가까운 왼쪽 뒷자리가 내겐 안성맞춤이다.

 

 

 

  오늘의 내 결론, 누가 꼬시더라도 절대 영화관에서는 중앙의 중간 자리에는 앉지 말자. 무조건 왼쪽 뒤 통로 쪽이라고 학씰하게(!) 외치자. 편하게 또는 이기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의 이 익숙함과 무서움이라니!

 

 

 

 

 

 

 

2. 실패 없는 성공 이야기라니

 

  성공과 실패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일견 명백해 보이는 답 앞에서 가끔은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성공담이 넘치는 사회이다.

 

 

  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업종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예술계든, 산업계든, 학계든, 연예계든 현실적인 성공을 눈앞에 둔 사람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매의 눈을 가진 출판 업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속된 말로 ‘물건 되겠다’ 싶으니 재빨리 움직인다. 기획, 집필,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낸다. 이름값에 비례해서 책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저자는 하루아침에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바삐 불려 다닌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신화의 경지에 이른다.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효 기간 5년 미만인 그 성공기는 또 다른 기획품에 의해 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중은 누군가의 성공담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하지 그 성공담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만을 바라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사회상일까. 성공담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실패담이다. 누구나 성공만을 얘기한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성공하지 못한 삶은 잘못된 것일까. 남의 성공을 보면서 희망의 자긍심 못지않게 열패감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자식 자랑하는 옆집 아줌마는 한 사람이고, 들어주는 아줌마는 아홉 명이다. 옆집 아줌마의 나 홀로 큰 목소리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풀죽은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성공이다, 스펙이다, 신화다 등등으로 흉흉한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충분히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는 이들 앞에 너무 많은 ‘성공담 기획 상품들’이 쏟아지는 건 아닌지. 99퍼센트의 실패담이 깃털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성공담이라면 무슨 소용일까.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나. 성공만 권하는 사회에 괜히 종주먹 한 번 날리고픈 아침이다.

 

 

 

 

 

 

 

3. 평판에 대하여

 

  절대 도덕을 실천하는데다 완벽한 염치를 가진 이가 있을까. 반대로 절대 모순을 보여주거나 완벽한 악행만 일삼는 이가 있을까. 누군가를 일컬어 옳은 삶만 산다고 규정할 수 없듯이 또 다른 사람더러 나쁜 삶만 산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평판이란 게 따라 다닌다. 불완전하기만 한 존재들끼리 서로를 판단하는 우습고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소한 것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누적되는 양심 불량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좋아질 수가 없다. 한 번 잘못된 평판은 되돌리기 어렵다. 좋은 말은 십리를 가다 끊기지만 나쁜 말은 천리를 가고도 힘이 남는다. 찬란한 타인의 미덕에는 덤덤해질 수 있지만, 사소한 남의 실수는 악행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보이다.

 

 

 

  한 예를 들자.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나간 한 사람에 대해 한 부류에게는 그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부류에게는 원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깜박 잊은 거라고 변명해줬단다. 마지막 부류에게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단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집단적 교류 속에서 이뤄지고 부정적 평가일수록 날개가 빨리 달린다. 평판은 맞장구에 그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누군가를 안 좋게 얘기했을 때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 집단 전체는 그를 나쁘게 보게 된다. 반면 맞장구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면 처음 부정적인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타자에 대해 소극적인 부정의 평판에 가담하긴 쉬워도,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평판을 위해 팔 걷어 부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4. 괴물 되기는 순간이지

 

  인간은 결속의 동물이다. 무리 만들기를 좋아하고 니 편 내 편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나아가 유교권 국가일수록, 단일종족이라는 환상이 깊을수록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로 경계 짓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객관성을 잃게도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김연아의 완벽한 점프에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면, 아사다 마오의 불완전 점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조목조목 반박하게 된다. 이 정도야 사실 관계 증명을 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치지만 대개 서로 인신공격성 발언에다 국가 간 모독성 발언으로 넘어가고 그 수위도 높아진다.

 

 

  괴물 되는 건 순간이다. 괴물은 우리 맘속에 분명 존재한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것은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모습만큼 괴물의 형상에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의 형식은 옹졸한 국수주의나 지나친 애국주의 나아가 위험한 호전주의로 나타난다. 내가 너보다 옳고,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르지 않고, 우리 가족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우리 국민성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라고 성급히 결론 내릴 때에 그만큼 쉽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 번득이며 온 거리를 뛰어다니고, 독도는 저들 땅이라고 지치지도 않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자들 모습이 그 좋은 예이다.

 

 

 

  자애며 가족애며 조국애도 현상 자체를 보는 눈에 앞설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인류 공영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의 옳음과 우위를 한정하는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데 능통한 인간이긴 하지만 불멸의 신념처럼 그것을 한쪽에선 주입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뇌당해야만 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사람은 사람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패 짓는 것의 가치와 긍정 위안은 분명히 인정할 만하다. 적당한 무리 짓기야 인간사 권장할 일 아니던가. 다만 도가 지나치면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금세 괴물이 되는 것이다.

 

 

 

 

 

 

5. 폭설 단상

 

  오랜 만의 폭설이다. 한낮이 가까웠음에도 사위가 온통 흰빛 적요의 난무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까운 대로엔 차들이 서다 가다를 반복한다. 이마저 고요한 풍경화 같다. 꼭 닫힌 창 너머로 움직임만 보일 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다. 이 모순적 평화가 낯설기만 하다. 차들의 느린 행렬, 갓길에 멈춰선 트럭, 이차선에서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미니밴, 헛바퀴 굴러 갓길과 삼차선에 비스듬하게 꽂혀버린 버스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실상은 낭만적 정서보다 현실적 불편함이 더 크구나. 폭설은 사람을, 풍경을 삼킨다.

 

 

 

  오디세우스는 10년간 끌어 온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부하들과 귀향선에 오른다. 온갖 시련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 중에 바다 요정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날 때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현혹되어 배가 좌초되거나 사람들이 물에 뛰어내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다.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묶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일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겨워 스스로 풀어달라고 청한다면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 결심 덕에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도 들으면서 무사히 그 섬을 지날 수 있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오디세우스 군단이 현혹되듯이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눈을 우리는 내심 낭만적 정서로 기다린다. 하지만 그 눈의 꼬임은 현실적 불편함이 되어 자칫하면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제 몸을 묶어 외적 결속을 꾀하면 좋으련만 밥벌이의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속을 위해 그저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암초를 만나거나 물에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이 떡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낭만적 정서만 기대한다면 내 몸을 묶어서라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으련만 현실 속 눈 풍광은 그것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차들은 거북이 운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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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1 2014-02-1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멋진 글입니다. 형식은 같되 내용은 매번 다른...
같은 그릇에 다른 맛있는 음식을 매번 담는 이 유능함을 읽고 갑니다.

아, 저 페크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3 11:24   좋아요 0 | URL
홋홋, 가끔씩 저도 로긴 안 하고 덧글 달 때 있는데, 스맛폰으로 급하게 알라딘 찾을 때.또는 로긴이 제대로 안 될 때... 페크언냐님도 그런 상황일까요?
글쓰기는 저 못지 않게 페크님께도 큰 숙제인 듯. 모쪼록 페크의 유익함에 미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늘 성실한 언냐님^^*

2014-02-12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4-02-12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폭설의 풍경글은 영화처럼 그려지도록 생생합니다.

 글이 아름답습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13 11:28   좋아요 0 | URL
어휴, 새벽님. 폭설 풍광에 몰입해서 써야 했는데, 마침 세이렌 이야기를 접하던 중이라 연결하느라 약간은 횡설수설했지 뭡니까. 제가 서정적인 글에 많이 약합니다.
의도적으로 쓰지 않는한 그쪽은 좀 오글거려요. 근데 필요하기 때문에 될 수 있음 시집이나 감성적인 글도 접하려고 노력합니다. 새벽님 서재가 제 그런 노력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옵니다.^^*

꿈꾸는섬 2014-02-1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맨뒷자리 중앙 통로쪽 예매하는 사람 저요.ㅎㅎ
극장 정중앙 자리는 저도 불편하고 싫더라구요.

신종플루 엄청 고생했겠어요.

다크아이즈 2014-02-13 11:30   좋아요 0 | URL
앗, 동지를 만났습니다. 에헤라디여~~
뒷자리 중앙 통로쪽 콜!

덕분에 신플은 다 나았어요.
딴 얘긴데 이제 그거 이름 구종 플루래요.흐흣~~

단발머리 2014-02-1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

이 구절 너~~ 무 좋아요. 내 자신에 대한 변명은 얼마나 세밀하고 꼼꼼한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평가를 내리는지...
아침부터, 고개 숙여지는 페이퍼예요.
언제나 그렇지만, 역시 오늘도 님 글 잘 읽고 갑니다~~

다크아이즈 2014-02-13 11:32   좋아요 0 | URL
진짜 저 말 제가 만든 거지만 실감해요.
저부터 자신을 알면서도 자신에 대한 잣대를 들이대기 전 타자에 대한 평가는 객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누가 누구를 평할 수 있단 말일까요?
지 한 몸, 지 한 영혼 간수하기도 벅찬 세상이고만... 늘 경계하고 다독입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게 인간사이지요. 단발님, 오늘도 눈눈, 벌써 닷새째네요.ㅠ

oren 2014-02-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딧세우스의 이야기 가운데 저는 '로터스의 열매'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그 열매를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어버린다던 식연족(食蓮族) 이야기 말이지요.

이번 폭설때 '귀농'해서 고향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보내온, 온통 하얀 눈으로 가득 뒤덮인 '고향 풍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는 얼마나 사무치게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던지요.

다크아이즈 2014-02-13 11:36   좋아요 0 | URL
식연족이라. 첨 들어보지만 제가 또 호기심은 있는 편이니 마구 검색 들어갑니다.
오렌님의 고전 경지의 끝자락은 도대체 어디일까요?
알라딘에 없어서는 안 될 분^^*

전 향수가 없는 부류에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힘들고 지치면 달려갑니다. 일년에 한 번 정도는 그저 물 밑에 잠긴 고요 속 풍광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오곤 합니다. 저얼대 향수병 같은 건 없음에도요, 이 무슨 조화일까요ㅠ

기억의집 2014-02-1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 예약하면 언제나 가장자리 예약해요. 그래야 드나들긴 편해서요. 전 영화보는 게 너무 싫어서 극장 잘 안 가는데 요새 변호인하고 또하나의 약속은 극장 가서 보는데... 몸이 베베꼬이지 않아서 다음부터는 영화 나들이 자주 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극장 가서 영화 안 본지 꽤 되었는데 두 영화는 절 극장으로 불러줍니다~ 저의 애들은 3디 볼때 젤 앞좌석에 앉아요. 거기가 젤 좋다고...

자기계발하니 생각나는 글 중에 누가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어요. 한국에선 김난도 공병호 이지성 글은 피해라. 재탕삼탕 자기 복제의 달인 공병호 원래 젊으면 그래 자위의 달인 김난도 R=VD 자계서의 종교화 이지성...핵심을 찌르는 댓글을 읽으면서 큭 진짜 공감되더라구요.
실패 없는 자기계발이 어딨겠어요. 그쵸!

다크아이즈 2014-02-14 12:44   좋아요 0 | URL
동지 또 만났네, 그려. 에헤라디여2~~
기억님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통로쪽 선호하는 분 의외로 많네요.
근데 예매 상황보면 중앙의 중심부터 차 들어가요. 신기하지요.
저 세 분다 패스하는 것도 저랑 같네요. 덧글 쓴 분 넘 예리하십니다.

근데 저런 책 읽고 긍정의 자기 선언으로 연결시키는 분도 많으니 인정하고 또 인정합니다. 저부터 저렇게 열심히 못 산 건 분명하니 ㅠ
 

 

 

 

 

 

 

 

 

 

 

 

 

 

 

 

 

 

 

 

  1. 님들의 명절은 안녕하신지요?

 

  나처럼 명절을 편하게 보내는 며느리도 없다. 사남 일녀 집안의 막내며느리인 나는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네 명의 며느리는 각자 할당된 음식 -나는 야채 전 담당이다. 파전, 부추전, 고구마튀김을 준비한다. 고기를 너무 싫어하고 야채 종류를 무척 좋아하는 집안이라 다른 집에 비해 많이 부치는 편이다. -을 해서 큰집에 모인다. 새벽 네 시에 출발하면 명절 당일 아침 9시 전후에 큰집에 닿는다. 역귀성이라 갈 때는 차가 막히지 않으니 에헤라디여~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휴게소에 들러 어묵 한 그릇 사먹는 호사마저 누릴 수 있으니 귀성 자체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설 차례에 앞서 세배를 하는데 아뿔사, 가장 중요한 인물인 어머님이 자리에 안 계신다. 다른 도시에 사는 어머님은 허리가 편찮아 장시간 차를 탈 수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본가를 사수하고 계실 수밖에. 그렇다고 구순이 가까워오는 노인네가 제사를 모실 수도 없고. 차례를 지내야 하는 후손들은 어쩔 수 없이 큰집에 모인다.

 

 

  이럴 때 드는 의문 하나. 죽은 조상이 먼저인가, 산 조상이 먼저인가? 아무래도 죽은 조상이 먼저인 거 같다. 죽은 조상한테 잘 보이기 위해 제사 지내러 큰집에 먼저 가지 산 조상의 안부를 여쭈러 어머님집에 먼저 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어머님은 평소에 자주 찾아뵈어라, 이런 뜻일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평소에 산 조상을 찾아뵙는다는 게 그리 쉬운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어른을 못 찾아뵙는 핑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말이 없는 네 형제는 오직 귀갓길 정보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씩 지도까지 곁들여 어떤 길이 가장 ‘막히지 않는 길’인지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데 조용한 코미디 같다. 어쩌면 수십 년째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지치지도 않고 덕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성인 남자들이 교통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며느리 네 명은 식탁에 둘러 앉아 밀린 회비(?)를 정산한다. 일 년에 네 번 있는(설, 추석 포함) 제사 비용을 똑 같이 분배해 연회비로 선납한다. 세 번은 큰댁에서 지내고 추석은 나머지 세 며느리집(?)에서 번갈아 지낸다. 그러니 삼 년에 한 번씩은 추석 명절 상을 막내며느리인 나도 차리는 셈이다. 물론 이때도 할당된 각자의 음식을 준비해온다. 철저한 분담이 원칙이다. 사람 사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명절이 아닌 일반 제사 때에는 지방에서 올라갈 여건이 못 되는 나(남편) 같은 경우는 야채 전을 못 보낼 때가 많다. 사람이 못 가는 게 아니라 야채 전이 못 올라가는 게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연이 조금 있는데, 여기서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

 

 

  차례 상 물린 걸로 한 끼의 아점을 먹은 뒤 그렇게 오후 한 시경이면 각자 집으로 헤어진다. 결론은 우리집 명절은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거다. 한 마디로 사람은 모이되 정은 모이지 않고, 말은 있되 정담은 없다. 음식은 많으나 미감은 떨어지고, 세뱃돈은 주고받되 온기는 오가지 않는다. 나부터 그 형식적인 것에 별 불만이 없다. 불만은커녕 적극 동조한다. 이 부조리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온 가족 것이다. 누구나 그걸 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정을 낼 기회도 없이 정을 뗄 일들이 운명처럼 먼저 다가오는 게 보통 며느리들이 겪는 시댁 문화이기 때문이리라.

 

 

  힘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 나는 일도 없는 이 무덤덤한 명절 풍경. 이번 설에는 그마저도 방콕했다.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딸내미가 감염되는 바람에 간호를 해야 했다. (딸내미는 며칠이 지난 아직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미열이 남아 있다.) 예의 숙제인 야채전을 부쳐 남편과 아들 편에 보냈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이때 어울리는 말이 될까.

 

 

  역귀성 행렬의 교통 사정도 귀가 때는 다르다. 갈 때보다 두 배나 걸린 시간을 뚫고 중간 기점인 어머님집에 들러 남편과 아들은 세배를 하고 왔다. 설 나시라고 드린 용돈의 몇 배가 넘는 세뱃돈을 손주에게 되챙겨 보내신 노구의 어머님. 짠하다는 말은 또 이때에 어울리렷다. 사람 자체야 무슨 죄인가? 영혼 없고, 명분만 남은 명절이 죄인 게지. 어느 누구도 쉬 거절하지 못할(특히 며느리 입장이라면) 한국적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저마다의 분분한 넋두리는 명절이 지속되는 한 되풀이될 것이다.

 

  님들의 명절도 여여하신지 조심스레 여쭤보고 싶다.

 

 

 

 

 

  2. 울화병

 

  명절 끝 카페엔 여자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오늘의 주제는 단연코 울화병이다. 한의학 용어에 ‘화병’(火病)이라는 게 있다.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온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병이다. 뚜렷한 실체가 없어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앓는 이들이 있으니 생긴 병명이렷다.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소산물인 이 병은 명절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성들이 잘 걸리는 특징이 있다.

 

 

  명절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지친 영혼들은 명절만큼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도 없다며 커피 잔을 마주한 채 저마다 손사래를 친다. 명절을 치르면서 성인남녀 누구나 육체적․감정적 노동에 시달린다. 하지만 늙으나 젊으나 며느리 입장인 여성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더한 것은 우리 명절문화가 시댁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그 집안의 노동에만 적극적으로 동원될 뿐, 정작 그 문화의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기득권 시댁 문화에서 변방일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당당한 의견은커녕 ‘아니오’라는 최소한의 방어의 말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부당한 처사를 목도해도 안으로 삭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강요받았다. 만약 부당함에 대해 거절이나 항의라도 한다면 ‘본대없는’ 출신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삭인 착한 여성들은 울화병이란 달갑지 않은 병을 선물로 얻었다.

 

 

  화병은 단연코 약자들의 병이다. 그러니 약자의 화는 언제나 온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홀대 받으면 수치를 느끼고, 억압당하면 분노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반면, 착한 행위에 대한 보답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잘못한 언행에 대한 감시는 얼음보다 차가운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약자의 서글픈 굴욕은 강자의 이기적 욕심 앞에서 언제나 피해자다.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울화병 난 여자들, 뒤늦은 방언 터지듯 말꽃 피우러 물안개 피어나는 카페 창가에 모여든다. 말로써 말을 치유하는 명절 끝 카페 풍광,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

 

 

 

 

  3. 어리석은 게 아냐

 

  세상에서 가장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이라 말할 테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이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랑에 빠질 숱한 후대인들을 위한 그의 경고는 옳았다. 지구촌 어디에나 사랑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기에.

 

 

  사랑에 눈시울 붉어진 개그우먼이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고백한다. 공감하되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 없고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웃음보다 자기연민에 겨운 날이 더 많은 건 그 ‘대상’은 내 감정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별개인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

 

 

  사랑 자체는 환희의 꽃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고행의 절벽과도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때문에 힘겨운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곧추 세운다. 무분별하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흩어지는 분수거나 날아가는 포탄처럼 속수무책의 감정이어야 사랑이지,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반듯한 나무 한 그루의 이미지라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의 향연이라니!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누군들 어리석고 힘들지 않을 것인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곁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 따윈 소용없다. 자신이 투자한 에너지와 눈물이란 원석이 ‘시간의 흐름’이란 보석으로 가공 된 뒤에야 그 허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보석은 고맙게도 평생 삶의 지침서 같은 반려의 반지가 되어준다. 그러니 까짓 것, 어리석은 그 사랑에 한 번쯤 된통 당한다 한들 진실로 어리석다 할 것인가.

 

 

 

 

 

  4. 거품은 제때 걷어내야

 

  뭇국을 끓인다. 간편해 보이지만 제 맛을 내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우선 양지 부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무는 반개 정도 어슷썰기 한다. 반듯한 깍둑썰기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다 맛도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찬물에서 건진 양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소끔 끓으면 거기에다 무를 넣고 이십여 분 중불로 끓인다. 중간에 소금 간을 한다. 기왕이면 천일염이 좋다. 마지막에 다진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오 분 정도 더 끓인다. 먹기 직전 식성에 따라 청양 고추를 넣기도 한다.

 

 

  쓴 글대로만 하면 제법 시원한 뭇국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번의 뭇국을 끓이면서 실패한 경험이 이 단상을 쓰게 했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 레시피에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뭇국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제때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다.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기 핏물도 뺐고, 주재료도 일부러 기름에 볶지 않았다. 그래도 아차하면 텁텁한 맛이 난다. 바로 거품 때문이다. 불순물이 모여 몽글몽글 거품으로 끓어오르는데 귀찮다거나 깜박한 나머지 제때 걷어내지 않으면 실패한 뭇국이 되고 만다. 때깔도 지저분하고 맛 또한 텁텁하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선 지키고 선 채, 넘치기 전에 불을 조절하고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타이밍을 놓쳐 국물이 넘치면 가스레인지와 냄비 뚜껑이 지저분해지고, 거품 또한 걷어내지 못하면 국물맛이 엉망이 되고 만다.

 

 

  끓어오르는 화는 넘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야 하고, 해야 할 숙제와 미뤄둔 인사는 그때그때 하는 게 몸과 맘에 가볍다. 결심한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는 것만큼 찜찜한 것도 없다. 이미 식은 국 앞에서 그 맛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다. 국물 맛을 잘못 낸 건 거품 제대로 걷지 않은 내 잘못이지 식재료 탓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제때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고 빈둥거리다 허둥대는 자화상 하나 식은 뭇국 속에 얼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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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4-02-04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해서 시댁(시가라는 말이 참 안 나와요. 우린 언어부터 시가를 시댁으로 높여 부르는 게 익숙해서, 시가라고 해야지 하면서도 말을 할 때도 글 쓸때도 언제나 시댁이네요)를 두 번 뒤집어 엎으니깐 이제 울화증도 홧병도 안 생기고 명절인가 보다란 여유가 생겼어요. 결혼 16년차의 인생 만만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가 드니 무서울 게 없네요. 시댁에 못 한다고 남편이 헤어지자고 하면 까짓 거 헤어지지 뭐 이런 배짱도 생기니 어느 정도는 할말 다 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세대부턴 변해야해요. 저도 아들 있지만 시댁 위주의, 남성 위주의 문화를 바꾸고 싶어요. 전 지금부터 남편을 세뇌시키고 있어요. 어머님 돌아가시면 우리 일년에 명절 한번 보낼거고 아들 며느리 안 와도 서운해 하지 말아라... 명절 때 아들며느리 손주 안 와 서운하고 속상할 거 없다...명절은 취미 생활하는 날로 알면 더 흥에 겨울 것이라고요... 결혼 후의 명절은 인생의 저주 같은 것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요?

팜님네 명절은 심플해서 좋네요. 전날 각자 음식해서 명절 당일 아침에 모여 차례 지내니. 저도 나중에 동서랑 이렇게 해야겠어요. 전날에 오니 마니 서로 한 집에 복달거릴 필요 없이...

다크아이즈 2014-02-05 09:37   좋아요 0 | URL
기억님,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변화가 오긴 하겠지만 저부터 노력하려구요.
막상 제가 시어머니 입장이 되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제가 자처한 개혁이 될 터이니 꿋꿋하게 버텨 볼게요. 기억님도 동참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들 내 것 아니고, 며느리 내 맘대로 해선 안 된다. 이게 제 미리 시엄마로서의 모토입니다.^^*

심플하긴 한데, 뭔가 빠진 것이겠지요. 정, 마음, 진심 기타 등등 ㅠ
심각한 갈등 있는 집에 비하면 행복하다 생각하고 쿨하게 넘어 가야지요.
기억님의 명절도 그러하셨겠지요?

단발머리 2014-02-04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시댁 쿨한 분위기 너~~~ 무 좋은데요. 물론....

"음식은 많으나 미감은 떨어지고, 세뱃돈은 주고받되 온기는 오가지 않는다."가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요. 시댁에서 따뜻한 분위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걸까요. 생각해 보니, 잘못된 거네요. 시댁 식구들 중에 아~~주 미운 사람이 없는 것만도 나름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ㅎㅎ

저는 아직 시어머니가 젊은셔서 (60대 중반ㅋㅎ) 대부분 어머니가 하시구요,
아래 동서랑 저는 전만 부친답니다. 하는 게 별로 없는데도, 시댁에만 가면 참 피곤하네요. 동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해서... 제가 말했지요.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야. 공기 자체가 피곤해." ㅋㅋㅋ

다크아이즈 2014-02-05 09:42   좋아요 0 | URL
아휴, 단발님 너~~~무 좋은 건 아니지요.
젤 중요한 정이 빠졌잖아요. 그것까지 기대하면 우리 시댁 문화가 천년만년 지속되겠지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이라면 없어도 무방하다는 제 쿨한 생각이
맞아 떨어진 건가요? 희생하길 원하지 않는데 희생을 강요해서라도 정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갈등이 생긴다고 봐요. 어쨌거나 명절은 여자에게 언제나 딜레마^^*

비로그인 2014-02-04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습니다. 음식과 일상이 책과 잘 어울려졌네요 ..~~

다크아이즈 2014-02-05 09:42   좋아요 0 | URL
새벽숲길 만하겠습니까. ㅋ
서재 갔다가 깜놀하고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좋은 친구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세실 2014-02-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형님과는 소원해요. 워낙 말이 없는 분이기도 하고.....
애써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주버님이 더 편합니다. ㅎ
제 담당도 전이라 동그랑땡 속재료 가지고 일반 동그랑땡, 깻잎전, 표고버섯전 부치고, 호박전, 고기전 부치면 끝! 신랑, 규환이랑 같이 하니 세시간이면 끝나네요.
그래도 설 명절은 부담스러워요.




기억의집 2014-02-05 10:37   좋아요 0 | URL
저도 시누하고 소원해요. 워낙 시누랑 결혼해서 사연도 많고 두번 엎는 것도 다 시누때문에 엎은 거라.. 안 보고 사니 편하긴 하더라구요. 저는 시누 전화번호도 몰라요. 그 면상 안 보려고 명절에도 일찍 올라와요. 다 집안마다 소원한 사람 한명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4-02-05 11:54   좋아요 0 | URL
세실님이 말하는 형님은 손위 동서일듯^^
전 한 분밖에 없는 손위 시누이가 천사예요^^ 마구 자랑질 ㅋ
못난 올케 탓한 적도 얼굴 붉힌 적도 없이 늘 물적 정신적 도움만 주는 분.
여기서도 울 시누님 자랑한 적 있는 듯 ㅋ

피 안 섞인 가족 관계가 완전 밀착형이 되길 바라는 게 모순이죠
물 흐르듯 섞이면 좋고 아니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래야 피차 덜 피곤하지요.

아주버님들이 더 편한 건 여자들만큼 세세하고 민감하지 않으니 그럴 거예요.
세실관장님 오늘도 즐건 파이팅하시어요. 귀엽고 우아한 에너자이저^^~
기억님도 얼굴은 못 뵈었지만 멋진 분이시겠지요.
즐건 점심 시간 맞이하시어요^^

감은빛 2014-02-0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닥 안녕하지 못했어요.
입안 두 군데와 코안이 크게 헐었는데,
아침마다 코에서 피가 나오고, 세수 할 때 코에 손이 닿으면 무척 아파요! ㅠ.ㅠ

다크아이즈 2014-02-06 08:19   좋아요 0 | URL
피곤하면 신체에 무리가 오지요. 운전하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요. 감은빛님, 감히 토닥토닥^^*
입안이 펑그 나는 사람, 코안이 허는 사람, 입주변에 헤르페스 현상 돋는 사람, 엉덩이 부풀어 오는 사람 등등. 명절 한 번 치르고 나면 흔한 증상인데, 단순히 육체만 힘들다기보다 심리적으로도 부대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페크pek0501 2014-02-0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명절은,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절 전날에 시어머님의 집에서 음식을 다 만들고 시누이형님의 집에 놀러가서 만두를
만들어 해 먹고 놀았어요.
아무리 즐겁다고 해도 명절이 돌아오는 게 싫은 건 꽤 고단하다는 것 때문이에요.
이번에 3박4일 갔다왔는데, 그 고단함의 후유증이 며칠 가더라고요.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음식 만들기까지 이어져서 말이죠.
시집 중심의 문화가 언제까지 갈까요?

님의 글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2-11 19:58   좋아요 0 | URL
대구가 시댁이네요. 저도 그래요. 친정도 시댁도 대구입니다.
이번 설에는 가지 못했지만 일주일 뒤에 인사하고 왔어요.
가서 음식 만드는 즐거움이 귀성의 고단함을 묻어 준다고 생각할 정도면 아름다운 맘씬데 전 고단함이 먼저 다가오니 그냥 만들어서 모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아무래도 편한 것만 찾나 봐요.^^*
저야말로 님께 많이 배우는 걸요~~

노이에자이트 2014-02-0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끝난 직후 이혼이 증가한다고 하더군요.친인척끼리 싸우기도 하고요.팜므 님처럼 여기에 자랑할 수 있으면 행복하죠.정을 너무 좋아할 것도 없어요.더럽고 질척거리기도 하는 게 정이니까요.

다크아이즈 2014-02-11 20:00   좋아요 0 | URL
울 아저씨 왈, 명절 마치고 둘 부부가 차 안에서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뭔지 아나?
나 - 몰라. 수다? 등 두드려주기? 설마 키스?
울 아자씨 - 이혼하자, 이 네 마디 말이란다.
나 - 맞다. 글켔다 ㅋ

노이에님 덕분에 며칠 전 상황이 떠올랐어요. ㅋ

꿈꾸는섬 2014-02-12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도 편한 명절 보냈어요. 오고가는 차 안이 불편하긴 했지만요.
저흰 결혼초에는 큰댁가서 차례지냈었는데 요샌 시골에 계신 부모님 찾아뵙고 맛난 것 먹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놀다가와요. 워낙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집이라 재밌어요. 아버님의 보수적인 정치성향만 피하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