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아아, 힘들었지?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 높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란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그의 이력이 이 한 마디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철강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많이 알고, 잘 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아 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나아가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증거로 삼았다.
누구나 카네기처럼 부자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성, 이런 마인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앤드류 카네기는 경험으로 깨쳤다. 카네기는 어릴 때 토끼 한 쌍을 선물로 받았다. 한두 마리 토끼를 키울 때는 제 이름을 짓고 불러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번식력 강한 토끼가 열 마리, 스무 마리로 늘어나면 그 이름을 짓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쉽지 않다. 카네기는 출석부에서 힌트를 얻어 반 친구들의 이름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각 토끼마다 걸어주었다. 그러자 제 이름 팻말이 걸린 토끼에게 친구들은 관심을 가지고 먹이까지 챙겨 주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존재 증명을 바란다. 카네기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토끼 키우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나 오백 명으로 늘어났을 때나 카네기는 그들 개개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강조하는데 앞장섰다. 평생을 거쳐 그가 가장 즐겨하고 자주한 말은 ‘자네, 힘들었지?’라는 한 마디였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도 없다. 카네기는 인간의 이런 근본 정서를 기업 경영에 접목한 셈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바탕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현명한 카네기는 사람이 최선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멋진 명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친 누군가의 얼굴에 그걸 감당하려는 안간 미소가 보인다면 무심한듯 다가가 가만히 손 잡아주고 싶다. 오늘 그대 힘들었지? 아주 뜬금없지만 지금 당장 그 한 마디 하고 싶다. 연아야, 힘들었지? 심판 판정 논란이나 재심 청원 따위에는 개인적으로 전혀 관심 없다. 다만, 계급장 없는 평범한 아줌마도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연아아, 힘들었지?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 같은 맘으로 마오야, 너도 힘들었지?
2. 몸으로 하는 말
<힐링 캠프>에 이상화 선수가 나왔다. 명랑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다 가족애도 넘쳤다.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한데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성급한 편성을 한 방송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아직 다른 선수들의 경기가 남아 있는데다, 그들이 안을 심적 고충을 헤아린다면 올림픽이 끝나고 방송을 해도 좋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상화 선수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마저 불편하게 다가왔다.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이게 다 심리학 책 탓이다. 인간 행동 패턴으로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책들의 잔상이 내 심사를 건드렸다.
말만이 언어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말보다 몸의 언어, 즉 비언어적 태도가 더 많은 정보를 준다고 강조한다. 행동 심리학 책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동작 하나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타인의 몸말을 허투루 보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이 입구 쪽을 바라보는 건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는 제스처야.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추는 걸로 보아 저이는 자제심을 발휘하는 중일 거야. 다리를 갑자기 흔드는 저 남자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책의 영향으로 타자를 향해 이런 분석을 하게 된다. 한데 이런 면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심리학 서적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심층적이라 해도 타자의 몸 언어를 명확하게 분석해주지는 못한다. 반은 받아들일만하고 나머지 반은 무시해도 좋다.
인간 행동 패턴에 관한 심리서는 필요악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긍정의 수단도 되지만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봤을 때는 공감도 된다. 내 실수를 줄이고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한 지침서로 삼을 만하다. 타인을 적극 수용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이라면 인간의 몸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3. 모두가 피해자 - 쇼트트랙에 관한 짧은 생각
소치 동계올림픽이 중반을 넘어섰다. 우리 선수가 등장하면 맘부터 졸인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정서와 근원적 모성이 절로 발동한다. 특히 쇼트트랙 경기에서는 그런 맘이 더하다. 아시다시피 쇼트트랙은 스피드보다 경기 운영의 묘미에서 승패가 좌우되는 경기이다. 눈치작전도 필요하고 그만큼 몸싸움도 치열하다. 관전하는 이도 덩달아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다. 숱한 변수들을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그 재미에 개인적으로 쇼트트랙을 좋아한다.
사랑받는 국민 스포츠인 쇼트트랙에 관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올림픽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회자된다. 파벌 싸움이란 큰 틀은 이제 온 국민이 알 정도가 되었다. 잘못은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있고 책임 또한 그들 몫이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고, 그들 싸움의 제일 희생양은 선수들이란 사실만 남았다. 실력 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경기다 보니 선수들은 여러 요구 사항으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항이 합당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내 갈등과 반발과 상처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보란듯이 성과를 낸 안현수 선수는 그나마 심리적․경제적 보상을 얻게 되었다. 다행이다. 빙상연맹 관계자들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국민정서 또한 그러한 안현수를 응원한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한 때는 선수였거나 지금 선수인 이들이 받을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나? 선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 수 없다. 모두 피해자들일 뿐이다.
성과 최고주의, 금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한 자아의 건전한 성취욕이나 올곧은 투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올림픽은 충분한 감동을 선사한다. 개인의 영광이 타인에게 긍정의 자극을 주는 선만으로도 스포츠의 역할은 충분하다. 나부터 자국 선수가 나오면 떨려서 제대로 경기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서와 과격한 스포츠 국가주의와는 다르다. 금메달을 애국이나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사태를 방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4. 깨지기 쉬운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약고 발 빠른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눈치 없는데다 느리기까지 한 사람은 위기가 왔다는 것조차 모른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닥치면 당황하고 허둥대다 무너지기 쉽다. 나심 탈레브는『안티프래질』을 통해 이러한 위기의 본질과 속성, 그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기술한다.
탈레브는 프래질(fragile,깨지기 쉬운)과 안티프래질의 개념에 대해 촛불과 장작불을 예로 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쉬 꺼진다. 외부 충격에 약한 프래질 상태가 된다. 반면에 장작불은 바람이 셀수록 더 세게 타오른다. 외부 충격에 강한 안티프래질이 되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조합한 용어인 이 안티프래질의 특성을 갈파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프래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다. 예측가능한데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다. 이에 반해 프래질은 예측불가능하고 비선형적 형태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위기 상황, 이를테면 IMF 사태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프래질이 되어 버린다. 반대쪽에 안티프래질이란 공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사이 프래질을 예측하고(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대비한 이들은 고스란히 반사이익을 챙긴다.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안티프래질의 사람들은 위기의 주범이지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비선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면죄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무지한 일반인들일 뿐이다.
프래질을 감지하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주에 자족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단다. 한마디로 속아 넘어가지 않는 전략이 요구되며, 우리 스스로 안티프래질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깨지기 쉬운 일반인이 단단하기만 한 글로벌 이익 집단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처하려는 투지만으로도 안티프래질의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