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간 자리는 힘들어
한창 회자되는「겨울왕국」을 보러 갔다. 남들보다 한 박자 늦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볼 날만 잡고 있었는데 설이다, 딸내미 신종플루 앓는다 어쩐다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물론 영화 이야기는 아니다. 자리에 관한 거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선호하는 자리는 뒤쪽 중앙의 왼쪽 통로 쪽이다. 일반적으로 중앙의 중간 자리부터 예매되는 것에 비하면 내 취향은 약간 특이하다. 한데 이번「겨울왕국」을 볼 때는 예외였다. 꼼짝 않고 일주일을 앓고 난 딸내미와 첫 동반 외출로 잡은 스케줄이 ‘겨울왕국 관람하기’였다. 딸내미의 주장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은 치밀한 스토리가 아니라 화려한 영상 자체가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야 한단다. 더구나 3D 영화를 제대로 맛보려면 가운데자리가 그만이란다. 이번만은 내 취향이 아닌 지 소신대로 중간 자리를 예약하잔다. 일리 있는 말 같아 두 말 없이 동의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중앙의 중간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한데 내가 우려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중간에 꽉 낀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은 갑갑해져왔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덩치 큰 앞사람이 자꾸 고개를 흔드는 바람에 자막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그 좋은 화면을 앞에 두고 초반 몇 분은 졸기까지 했다. 딸내미가 창피하다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래서 가운데자리는 싫다니까, 하는 자조가 절로 나왔다.
중간 자리를 꺼리는 나름의 이유는 오직 개인적 경험에 연유한다. 우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깜깜한 곳, 전후좌우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건강 검진 때 MRI 기계 안에서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끔찍한 경험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숨구멍이 막히고 심장은 조여오고 맥박은 빨라진다. 뭉근하게 주리 틀리듯 온몸은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장시간 비행기 탈 때의 느낌도 이와 비슷하다. 해서 웬만하면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 자리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창 쪽보다는 통로 쪽을 선점한다.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잘 모르겠다. 다만 별로 착하게 살아오지 않은 자의 괜한 자격지심 같은 게 누적되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예를 들면 오래 전, 아부지의 죽음 앞에서 불효했다는 자책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험이 있다. 자책은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공포로 변해갔다. 온몸에 한기가 들 정도로 전신이 떨려왔다. 따뜻한 봄날이었건만 솜이불을 꺼내 덮어도 전신에 감도는 두려움의 한기는 쉬 가시질 않았다. 세세한 불효의 내역들은 돌이켜보면 별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당시로는 아부지나 나 둘 다 심리적 뾰족탑을 쌓던 시절이라 나름 심각했었다.
엉뚱한 데로 새버렸도다. 각설하고 두 번째는 요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 콜라와 팝콘이라도 먹게 된다면 긴장도와 몸 상태에 따라 중간에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간 자리에 앉는 건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다음 세 번째는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자리가 화면을 보기에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는 앞사람들의 빽빽한 몸피와 들쑥날쑥한 머리 라인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일 수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신이면서 앉은키만 높은 저질 체형이라 그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 머리통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듯, 나 또한 뒷사람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고 엉덩이는 밀어 내리게 된다. 그렇게 엉뚱한데 신경을 쓰다 보면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졸음도 그 이유가 된다. 피곤한 날인데다 취향마저 내 것이 아닌 영화 앞에서는(나는 영화를 잘 모른다.) 십중팔구 초반 십 분 이내에 졸게 된다. 중간이 아닌 한쪽 자리에 앉았다면 내 창피함이 덜 들킬 것이다. 같이 간 사람들조차 민망해지는 그런 그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로 가까운 왼쪽 뒷자리가 내겐 안성맞춤이다.
오늘의 내 결론, 누가 꼬시더라도 절대 영화관에서는 중앙의 중간 자리에는 앉지 말자. 무조건 왼쪽 뒤 통로 쪽이라고 학씰하게(!) 외치자. 편하게 또는 이기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의 이 익숙함과 무서움이라니!
2. 실패 없는 성공 이야기라니
성공과 실패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일견 명백해 보이는 답 앞에서 가끔은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성공담이 넘치는 사회이다.
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업종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예술계든, 산업계든, 학계든, 연예계든 현실적인 성공을 눈앞에 둔 사람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매의 눈을 가진 출판 업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속된 말로 ‘물건 되겠다’ 싶으니 재빨리 움직인다. 기획, 집필,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낸다. 이름값에 비례해서 책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저자는 하루아침에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바삐 불려 다닌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신화의 경지에 이른다.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효 기간 5년 미만인 그 성공기는 또 다른 기획품에 의해 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중은 누군가의 성공담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하지 그 성공담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만을 바라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사회상일까. 성공담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실패담이다. 누구나 성공만을 얘기한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성공하지 못한 삶은 잘못된 것일까. 남의 성공을 보면서 희망의 자긍심 못지않게 열패감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자식 자랑하는 옆집 아줌마는 한 사람이고, 들어주는 아줌마는 아홉 명이다. 옆집 아줌마의 나 홀로 큰 목소리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풀죽은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성공이다, 스펙이다, 신화다 등등으로 흉흉한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충분히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는 이들 앞에 너무 많은 ‘성공담 기획 상품들’이 쏟아지는 건 아닌지. 99퍼센트의 실패담이 깃털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성공담이라면 무슨 소용일까.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나. 성공만 권하는 사회에 괜히 종주먹 한 번 날리고픈 아침이다.
3. 평판에 대하여
절대 도덕을 실천하는데다 완벽한 염치를 가진 이가 있을까. 반대로 절대 모순을 보여주거나 완벽한 악행만 일삼는 이가 있을까. 누군가를 일컬어 옳은 삶만 산다고 규정할 수 없듯이 또 다른 사람더러 나쁜 삶만 산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평판이란 게 따라 다닌다. 불완전하기만 한 존재들끼리 서로를 판단하는 우습고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소한 것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누적되는 양심 불량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좋아질 수가 없다. 한 번 잘못된 평판은 되돌리기 어렵다. 좋은 말은 십리를 가다 끊기지만 나쁜 말은 천리를 가고도 힘이 남는다. 찬란한 타인의 미덕에는 덤덤해질 수 있지만, 사소한 남의 실수는 악행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보이다.
한 예를 들자.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나간 한 사람에 대해 한 부류에게는 그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부류에게는 원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깜박 잊은 거라고 변명해줬단다. 마지막 부류에게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단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집단적 교류 속에서 이뤄지고 부정적 평가일수록 날개가 빨리 달린다. 평판은 맞장구에 그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누군가를 안 좋게 얘기했을 때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 집단 전체는 그를 나쁘게 보게 된다. 반면 맞장구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면 처음 부정적인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타자에 대해 소극적인 부정의 평판에 가담하긴 쉬워도,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평판을 위해 팔 걷어 부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
4. 괴물 되기는 순간이지
인간은 결속의 동물이다. 무리 만들기를 좋아하고 니 편 내 편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나아가 유교권 국가일수록, 단일종족이라는 환상이 깊을수록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로 경계 짓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객관성을 잃게도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김연아의 완벽한 점프에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면, 아사다 마오의 불완전 점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조목조목 반박하게 된다. 이 정도야 사실 관계 증명을 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치지만 대개 서로 인신공격성 발언에다 국가 간 모독성 발언으로 넘어가고 그 수위도 높아진다.
괴물 되는 건 순간이다. 괴물은 우리 맘속에 분명 존재한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것은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모습만큼 괴물의 형상에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의 형식은 옹졸한 국수주의나 지나친 애국주의 나아가 위험한 호전주의로 나타난다. 내가 너보다 옳고,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르지 않고, 우리 가족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우리 국민성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라고 성급히 결론 내릴 때에 그만큼 쉽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 번득이며 온 거리를 뛰어다니고, 독도는 저들 땅이라고 지치지도 않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자들 모습이 그 좋은 예이다.
자애며 가족애며 조국애도 현상 자체를 보는 눈에 앞설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인류 공영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의 옳음과 우위를 한정하는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데 능통한 인간이긴 하지만 불멸의 신념처럼 그것을 한쪽에선 주입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뇌당해야만 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사람은 사람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패 짓는 것의 가치와 긍정 위안은 분명히 인정할 만하다. 적당한 무리 짓기야 인간사 권장할 일 아니던가. 다만 도가 지나치면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금세 괴물이 되는 것이다.
5. 폭설 단상
오랜 만의 폭설이다. 한낮이 가까웠음에도 사위가 온통 흰빛 적요의 난무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까운 대로엔 차들이 서다 가다를 반복한다. 이마저 고요한 풍경화 같다. 꼭 닫힌 창 너머로 움직임만 보일 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다. 이 모순적 평화가 낯설기만 하다. 차들의 느린 행렬, 갓길에 멈춰선 트럭, 이차선에서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미니밴, 헛바퀴 굴러 갓길과 삼차선에 비스듬하게 꽂혀버린 버스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실상은 낭만적 정서보다 현실적 불편함이 더 크구나. 폭설은 사람을, 풍경을 삼킨다.
오디세우스는 10년간 끌어 온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부하들과 귀향선에 오른다. 온갖 시련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 중에 바다 요정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날 때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현혹되어 배가 좌초되거나 사람들이 물에 뛰어내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다.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묶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일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겨워 스스로 풀어달라고 청한다면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 결심 덕에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도 들으면서 무사히 그 섬을 지날 수 있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오디세우스 군단이 현혹되듯이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눈을 우리는 내심 낭만적 정서로 기다린다. 하지만 그 눈의 꼬임은 현실적 불편함이 되어 자칫하면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제 몸을 묶어 외적 결속을 꾀하면 좋으련만 밥벌이의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속을 위해 그저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암초를 만나거나 물에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이 떡하니 기다리기도 한다.
낭만적 정서만 기대한다면 내 몸을 묶어서라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으련만 현실 속 눈 풍광은 그것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차들은 거북이 운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