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님들의 명절은 안녕하신지요?
나처럼 명절을 편하게 보내는 며느리도 없다. 사남 일녀 집안의 막내며느리인 나는 명절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네 명의 며느리는 각자 할당된 음식 -나는 야채 전 담당이다. 파전, 부추전, 고구마튀김을 준비한다. 고기를 너무 싫어하고 야채 종류를 무척 좋아하는 집안이라 다른 집에 비해 많이 부치는 편이다. -을 해서 큰집에 모인다. 새벽 네 시에 출발하면 명절 당일 아침 9시 전후에 큰집에 닿는다. 역귀성이라 갈 때는 차가 막히지 않으니 에헤라디여~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휴게소에 들러 어묵 한 그릇 사먹는 호사마저 누릴 수 있으니 귀성 자체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설 차례에 앞서 세배를 하는데 아뿔사, 가장 중요한 인물인 어머님이 자리에 안 계신다. 다른 도시에 사는 어머님은 허리가 편찮아 장시간 차를 탈 수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본가를 사수하고 계실 수밖에. 그렇다고 구순이 가까워오는 노인네가 제사를 모실 수도 없고. 차례를 지내야 하는 후손들은 어쩔 수 없이 큰집에 모인다.
이럴 때 드는 의문 하나. 죽은 조상이 먼저인가, 산 조상이 먼저인가? 아무래도 죽은 조상이 먼저인 거 같다. 죽은 조상한테 잘 보이기 위해 제사 지내러 큰집에 먼저 가지 산 조상의 안부를 여쭈러 어머님집에 먼저 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 어머님은 평소에 자주 찾아뵈어라, 이런 뜻일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평소에 산 조상을 찾아뵙는다는 게 그리 쉬운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어른을 못 찾아뵙는 핑계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말이 없는 네 형제는 오직 귀갓길 정보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씩 지도까지 곁들여 어떤 길이 가장 ‘막히지 않는 길’인지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데 조용한 코미디 같다. 어쩌면 수십 년째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지치지도 않고 덕담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성인 남자들이 교통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며느리 네 명은 식탁에 둘러 앉아 밀린 회비(?)를 정산한다. 일 년에 네 번 있는(설, 추석 포함) 제사 비용을 똑 같이 분배해 연회비로 선납한다. 세 번은 큰댁에서 지내고 추석은 나머지 세 며느리집(?)에서 번갈아 지낸다. 그러니 삼 년에 한 번씩은 추석 명절 상을 막내며느리인 나도 차리는 셈이다. 물론 이때도 할당된 각자의 음식을 준비해온다. 철저한 분담이 원칙이다. 사람 사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명절이 아닌 일반 제사 때에는 지방에서 올라갈 여건이 못 되는 나(남편) 같은 경우는 야채 전을 못 보낼 때가 많다. 사람이 못 가는 게 아니라 야채 전이 못 올라가는 게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연이 조금 있는데, 여기서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
차례 상 물린 걸로 한 끼의 아점을 먹은 뒤 그렇게 오후 한 시경이면 각자 집으로 헤어진다. 결론은 우리집 명절은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거다. 한 마디로 사람은 모이되 정은 모이지 않고, 말은 있되 정담은 없다. 음식은 많으나 미감은 떨어지고, 세뱃돈은 주고받되 온기는 오가지 않는다. 나부터 그 형식적인 것에 별 불만이 없다. 불만은커녕 적극 동조한다. 이 부조리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온 가족 것이다. 누구나 그걸 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정을 낼 기회도 없이 정을 뗄 일들이 운명처럼 먼저 다가오는 게 보통 며느리들이 겪는 시댁 문화이기 때문이리라.
힘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 나는 일도 없는 이 무덤덤한 명절 풍경. 이번 설에는 그마저도 방콕했다. 유행하는 신종플루에 딸내미가 감염되는 바람에 간호를 해야 했다. (딸내미는 며칠이 지난 아직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미열이 남아 있다.) 예의 숙제인 야채전을 부쳐 남편과 아들 편에 보냈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이때 어울리는 말이 될까.
역귀성 행렬의 교통 사정도 귀가 때는 다르다. 갈 때보다 두 배나 걸린 시간을 뚫고 중간 기점인 어머님집에 들러 남편과 아들은 세배를 하고 왔다. 설 나시라고 드린 용돈의 몇 배가 넘는 세뱃돈을 손주에게 되챙겨 보내신 노구의 어머님. 짠하다는 말은 또 이때에 어울리렷다. 사람 자체야 무슨 죄인가? 영혼 없고, 명분만 남은 명절이 죄인 게지. 어느 누구도 쉬 거절하지 못할(특히 며느리 입장이라면) 한국적 정서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저마다의 분분한 넋두리는 명절이 지속되는 한 되풀이될 것이다.
님들의 명절도 여여하신지 조심스레 여쭤보고 싶다.
2. 울화병
명절 끝 카페엔 여자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오늘의 주제는 단연코 울화병이다. 한의학 용어에 ‘화병’(火病)이라는 게 있다.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온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병이다. 뚜렷한 실체가 없어 과학적으로 풀이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앓는 이들이 있으니 생긴 병명이렷다.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소산물인 이 병은 명절과도 관련이 있는데, 여성들이 잘 걸리는 특징이 있다.
명절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니 넘어가자. 지친 영혼들은 명절만큼 지긋지긋한 연례행사도 없다며 커피 잔을 마주한 채 저마다 손사래를 친다. 명절을 치르면서 성인남녀 누구나 육체적․감정적 노동에 시달린다. 하지만 늙으나 젊으나 며느리 입장인 여성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더한 것은 우리 명절문화가 시댁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그 집안의 노동에만 적극적으로 동원될 뿐, 정작 그 문화의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기득권 시댁 문화에서 변방일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당당한 의견은커녕 ‘아니오’라는 최소한의 방어의 말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부당한 처사를 목도해도 안으로 삭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강요받았다. 만약 부당함에 대해 거절이나 항의라도 한다면 ‘본대없는’ 출신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감정을 삭이고 삭인 착한 여성들은 울화병이란 달갑지 않은 병을 선물로 얻었다.
화병은 단연코 약자들의 병이다. 그러니 약자의 화는 언제나 온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홀대 받으면 수치를 느끼고, 억압당하면 분노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다. 반면, 착한 행위에 대한 보답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잘못한 언행에 대한 감시는 얼음보다 차가운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다. 약자의 서글픈 굴욕은 강자의 이기적 욕심 앞에서 언제나 피해자다. 아니오, 라고 말하지 못해 울화병 난 여자들, 뒤늦은 방언 터지듯 말꽃 피우러 물안개 피어나는 카페 창가에 모여든다. 말로써 말을 치유하는 명절 끝 카페 풍광,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
3. 어리석은 게 아냐
세상에서 가장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이라 말할 테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이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랑에 빠질 숱한 후대인들을 위한 그의 경고는 옳았다. 지구촌 어디에나 사랑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기에.
사랑에 눈시울 붉어진 개그우먼이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고백한다. 공감하되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 없고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웃음보다 자기연민에 겨운 날이 더 많은 건 그 ‘대상’은 내 감정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별개인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
사랑 자체는 환희의 꽃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고행의 절벽과도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때문에 힘겨운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곧추 세운다. 무분별하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흩어지는 분수거나 날아가는 포탄처럼 속수무책의 감정이어야 사랑이지,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반듯한 나무 한 그루의 이미지라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의 향연이라니!
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누군들 어리석고 힘들지 않을 것인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곁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 따윈 소용없다. 자신이 투자한 에너지와 눈물이란 원석이 ‘시간의 흐름’이란 보석으로 가공 된 뒤에야 그 허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보석은 고맙게도 평생 삶의 지침서 같은 반려의 반지가 되어준다. 그러니 까짓 것, 어리석은 그 사랑에 한 번쯤 된통 당한다 한들 진실로 어리석다 할 것인가.
4. 거품은 제때 걷어내야
뭇국을 끓인다. 간편해 보이지만 제 맛을 내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우선 양지 부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무는 반개 정도 어슷썰기 한다. 반듯한 깍둑썰기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다 맛도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찬물에서 건진 양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소끔 끓으면 거기에다 무를 넣고 이십여 분 중불로 끓인다. 중간에 소금 간을 한다. 기왕이면 천일염이 좋다. 마지막에 다진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오 분 정도 더 끓인다. 먹기 직전 식성에 따라 청양 고추를 넣기도 한다.
쓴 글대로만 하면 제법 시원한 뭇국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번의 뭇국을 끓이면서 실패한 경험이 이 단상을 쓰게 했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 레시피에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뭇국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제때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다.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기 핏물도 뺐고, 주재료도 일부러 기름에 볶지 않았다. 그래도 아차하면 텁텁한 맛이 난다. 바로 거품 때문이다. 불순물이 모여 몽글몽글 거품으로 끓어오르는데 귀찮다거나 깜박한 나머지 제때 걷어내지 않으면 실패한 뭇국이 되고 만다. 때깔도 지저분하고 맛 또한 텁텁하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선 지키고 선 채, 넘치기 전에 불을 조절하고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타이밍을 놓쳐 국물이 넘치면 가스레인지와 냄비 뚜껑이 지저분해지고, 거품 또한 걷어내지 못하면 국물맛이 엉망이 되고 만다.
끓어오르는 화는 넘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야 하고, 해야 할 숙제와 미뤄둔 인사는 그때그때 하는 게 몸과 맘에 가볍다. 결심한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는 것만큼 찜찜한 것도 없다. 이미 식은 국 앞에서 그 맛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다. 국물 맛을 잘못 낸 건 거품 제대로 걷지 않은 내 잘못이지 식재료 탓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제때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고 빈둥거리다 허둥대는 자화상 하나 식은 뭇국 속에 얼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