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면허를 따고 싶어졌다.
면허는 운전을 할 수 있을 때 따야지, 그렇지 않으면 장농 면허 되기 십상이라고, 지금 당장 차를 몰 일이 없으니 면허를 딸 필요 없다고 여겨 왔는데, 갑자기 면허를 따고 싶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언니의 2000년산 마티즈가 폐차를 하네 마네 말이 오가서 폐차하기 전에 운전 연습 하고 싶었고, 11월이면 시험이 어려워진다는 풍문을 들었고, 그냥 올해가 가기 전에 기념할 만한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게 고작 면허라고 하면 좀 허무하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과정이 참 미끄럽지 못했다. 일단 당일배송 주문한 문제집이 늦게 도착했다는 이야기는 지난 번에 했고, 그 와중에 바쁜 일 겹쳐서 운전학원에 등록한 게 10월 29일이었다. 면허시험장에서는 한 시간이면 끝나는 교육이 운전학원에서는 무려 5시간이나 잡혀 있다. 출근 시간이 겹쳐서 이틀에 나눠서 교육을 받고 10월 31일에 필기 시험을 봤다. 이날 머리 쾅 박은 얘기, 저번에 했던 것 같다.(기억이 가물가물...;;;;;) 암튼, 98점으로 안정적으로 합격!
11월 1일에 바로 기능 시험 볼 생각이었는데 멀리 전주에서 친구가 올라와서 2일로 미뤘다.
11월 2일에 40분씩 두 차례 학원 안에서 차량 작동법을 배웠다. 처음엔 전조등과 깜박이, 그리고 와이퍼가 어찌나 헷갈리던지.... 간단한 작동을 마치고 50미터 달리다가 급제동 한 번 하고서 멈추면 끝나는 쉬운 시험이다. 여기에 좌측으로 꺾는 게 하나 있다는 걸 놓친 게 살짝 아쉽지만, 그래서 차선 밟아서 15점 감점되었지만, 어쨌든 85점으로 무사히 합격! 내가 첫번째 시험이었는데 뒤이어 시험본 남학생이 어찌나 환호성을 지르던지... 들어보니 세번째 시험에 합격했단다. 첫번째는 주차브레이크 안 풀었고, 그 다음에는 후진에 놓고 달려서 실격했다고... 뭐 암튼 모두 다 무사히 합격.
그리고 주행 10시간이 잡혀 있었는데 스케줄표를 받아보니 일주일 뒤다.
11월 9일에 학원에 가서 40분씩 두 차례, 역시 두시간 동안 주차 연습을 했다. 우로 한번, 좌로 두 번 꺾기!. 우좌좌, 우좌좌, 우좌좌!!! 원래 50분 수업이어야 하는데 여긴 강사들이 모두 40분 수업을 한다. 은근슬쩍 10분씩 잘라 먹음...;;;;;
도로에 처음 나간 것은 11월 12일이었다. 기능 시험을 10월 안에 보았다면 A,B코스 두 개 연습해서 원하는 코스 선택해서 시험을 본다고 한다. 어이쿠, 나는 몰랐다. 알았다면 필기 시험 본 날 기능까지 마치는 건데...;;;;
암튼, 나는 A, B, C, D 코스를 배워야 했다. 11월 12일에 세 코스를 달렸고, 13일에는 남은 한 코스와, 앞의 코스를 복습했다. 14일이 시험 날이었으니까.
A와 C가 비슷한데 난이도가 좀 있고, B와 D가 비슷한데 역시 난이도 차이라는 걸, 달리면서 몰랐다. 알다시피 나는 심하게 길치이니까. 월요일에 가르쳐준 분은 나한테 차가 멈췄을 때 중립 기어로 놓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화요일에 다른 강사분이 왜 안 하냐고 마구 야단쳐서 알았다. 아씨, 뭐야 이거..ㅜ.ㅜ
입이 걸걸한 강사샘의 지도 하에 열심히 뱅글뱅글 돌았다. 셔틀 버스가 두시간 간격이어서 시간이 남았던지라 추가 결제하고(4만원!) 1시간 동안 B, C, D코스를 빠르게 한번 돌아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날 시험에 덜컥! 붙을 줄 알았다.
그.런.데.
14일 오전에 두시간 남은 걸 타는데 강사샘한테 무지 깨졌다. 전날 가르쳐준 분하고 깜박이 켜는 위치에 차이가 있고, 앞차와의 간격도 차이가 있다. 브레이크 밟는 법도 차이가...;;;; 자신감이 마구 사라져 갔다.
시험 시간. 나와 짝으로 시험을 볼 여자분은 코스를 전혀 외우지 못했다. 우린 둘다 D코스를 원했지만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가 제일 어려운 C코스 당첨! 그리고 앞서 시험보게 된 그 여자분은 D를 가는데, 중간에 차선을 변경 못해서 엄한 데서 우회전을 하고 엉뚱한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선생님 짜증내시고, 뒷좌석에서 나까지 덩달아 당황하고, 저렇게 길 까먹을까봐 무지무지 떨리는 거다. 지도 펴고 열심히 내가 가야 할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길을 잊으면 안돼, 길을 잊으면 안돼!
그렇게 노선만 달달달 외우며 출발하다가, 학원 문 앞을 통과하기 직전 왼쪽에서 오는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급제동! 그리고 나는 실격이 되고 말았다. 학원 문도 통과 못해 보고. 흑흑흑....ㅜ.ㅜ
선생님의 아량(?)으로 실격됐지만 코스는 한바퀴 돌았다. 엄청 구박받으면서...ㅎㅎㅎㅎ 주차도 해봤는데 연석 위에 올라타 주시고...;;;;;
감독하신 선생님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다나. 그래도 뭐 칭찬할 만한 거는 없었나요? 하고 물으니, 침착하게 운전하는 건 좋았다 한다. 그랬나??
암튼, 그래서 다시 그 다음 시험 일정을 잡았다. 사흘 뒤에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이어서 잡힌 나의 시험 날짜는 11월 19일. 오전에 한 시간 추가 결제해서 난코스인 C와 D를 한바퀴 돌고 와서 시험에 응시했다. 감독관 왈, C와 D만 열심히 몰고 왔을 것 같아서 A와 B를 골랐다 한다. 내 앞에 운전한 사람이 제일 쉬운 A를 주행했고, 나는 그 다음 쉬운 B를 돌았지만, B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급당황해 버린....;;;;
주차도 삐뚤어져서 재도전했는데, 처음보다 더 멀어져버린..ㅜ.ㅜ 여러모로 땀 흘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끝에 합격!(78점 받았다. 하아, 힘들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번주 월요일에 나는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만세!
화요일엔 급한 일이 생겨서 면허증을 찾으러 가지 못했고, 수요일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요일 밤에 퇴근해 보니 욕실 하수구가 막혀 있다. 이사 올 때부터 하수구 물 내려가는 게 시원찮기는 했는데 아예 꽉 막혀서 물이 역류할 지경이다. 대충 아래층에서 씻긴 했는데 수요일 오전에도 해결이 되질 않아서 목욕탕에 다녀왔다. 목욕재계하고 면허증 찾으러 강서 면허 시험장으로 향했다. 발산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눈을 들어보니 이미 마곡역! 그래서 발산 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버스를 탔는데, 이 버스 마곡도 지나가네. 헐...;;;;
시험장에 도착해서야 지갑을 목욕 가방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갑에 제출해야 할 사진이 있는데...ㅜ.ㅜ
그래서 아쉬운 대로 시험장에서 급히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5도 정도 기울어진채 나온 사진은 딱 6천원 짜리다웠다.
이 사진으로 10년을 버틴다는 게 슬펐지만, 아무튼 사진 제출하러 접수처에 가보니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아아아, 내 신분증은 당연히 지갑 안에 있을 뿐이고...ㅜ.ㅜ
그래서 돌아나와야 했다. 돌아갈 때 호두과자 한봉지 사먹으려고 했는데 수중에 버스카드 한장 밖에 없었고, 물이라도 마시자! 하고 냉온수기에 종이컵을 들이댔는데 물이 텅비어 있어서 한방울도 안 나올 뿐이고.....
제기랄!
결국 출근하기 위해 다시 버스에 몸을 던졌다. 문자로 언니에게 이 사실들을 고했다. 언니는 마티즈를 폐차했다고 알려왔다.
흑...ㅜ.ㅜ 나 그 차 몰아보겠다고 50만원 들여 면허 땄는데.... 한번도 못 몰아보고 안녕을 고했다...
그렇게 슬프게 씩씩대다가 그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버려...;;;;
하아, 힘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출근해서는 더 큰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완전 뚜껑 열려서 면허증 삽질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
그래서, 면허증은 오늘 찾아왔다. 3주 전에 찍은 뽀샵으로 턱을 깎아 놓은 사진으로. 나중에 면허증 제시했는데 나인줄 못알아보면 어쩌지??
오늘처럼 버스 파업이 있을 법한 날에 한번쯤 나도 운전을 해보고 싶었는데, 일단은 장농 면허 되게 생겼다. 당장 차몰 일이 없는데 추가로 연수 받는 것도 무리이고...
그래도, 면허증 받고 나니까 기분은 좋았다. 하핫, 수고 많았어! ㅎㅎㅎ
참, 하수구는 오늘 뚫었다. 안에서 걸레 조각이 나왔다고 한다. 전에 살던 사람 소행이지 싶다. 출장비 오만원 지출했다. 아, 슬프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