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은 내 오랜 친구의 생일이었다. 우린 아홉 살에 처음 만났고, 그러니 앞으로도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같이 했던 친구로 남을 것이다.
친구는 일찌감치 시집을 가서 두 아이의 엄마다. 큰 아이는 초등 3년이고, 작은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는 매번 내 생일에 문화상품권을 선물한다. 책 사보라고. 그리고 자신의 생일에는 아이들 책을 보내달라고 한다. 친구는 아이들을 전집만 읽혀서 단행본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좋은 책들을 골라서 보내주곤 했다.
그런데 금년에는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 중에서 도전을 했다. 그래서 일단 우리 집으로 먼저 배송을 시켰고, 그 다음에 내가 추가할 것들을 더 보태어서 다시 친구 집으로 보냈다.
내가 주문한 책들은 이렇다.
'다르다넬 왕 이야기'는 반 세기 전 작품임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어른들이 읽기에 더 좋은 책으로 보였다.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은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만큼이나 좋았다. 그림도 여전히 환상. 그렇지만, 이 책도 역시 나는 어른용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있는 나이의 사람이 더 뜨겁게 느낄 것 같았다.
'달을 줄 걸 그랬어'는 내용 자체가 '禪'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른용이었다. 그렇지만 그림은 여전히 훌륭. '세 가지 소원' 때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생각하는 개구리'도 내 생각엔 역시 어른용.
최고봉은 '마지막 휴양지'였다. 이건 초등학생이 읽을 책이 아니었다. '신데렐라' 이후 로베르토 이노센티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도서관에서 슬쩍 들쳐보고는 사서 읽을 책이라 판단하고 도로 꽂아놓고 나왔었다. 그 후 하이킥에서 확 뜨면서 이미 읽은 책인데 왜 내용이 생각이 안 날까 의아해 했다. 읽은 게 아니라 나중에 읽으려고 보류했던 것을...^^;;;
'자장자장 잠자는 집'은 아직 읽기 전인데 아무래도 너무 어린 취향일 것 같아서 우리집 다현양에게 더 어울릴 책. '파울 클레'는 꼽사리 낀 나를 위한 책이었다. ㅎㅎㅎ
그리하여 사실상 친구 딸내미들에게 주기로 작정한 책은 '호주머니 속의 귀뚜라미'와 '한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 '고흐',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가 되었고, 여기에 사계절 행사 때 사온 '소 찾는 아이'와 내가 쓴 '몽골'과 '베트남' 책을 넣었다. 이 책은 내게 모두 세 세트가 왔는데 조카네 한 세트 주고 나 한 세트 보관하고, 친구 한 세트 주는 거였다. 그리고는 이집트에서 사온 기념품이랑 내 사진(ㅎㅎㅎ)도 담았다.
지난 주에 배송받아야 했는데 배송이 늦어져서 화요일에 책을 받았고, 수요일에 친구한테 보냈고, 친구네 집에는 목요일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의 무심한 친구는 뭔가 선물을 보내고 나면 잘 받았다는 연락을 자주 안 하곤 한다. 궁금해진 내가 잘 도착했냐고 전화하기 일쑤.
오늘도 그랬다. 잘 받았냐고 전화를 했더니 어제 도착했는지 그제 도착했는지 마구 헷갈려 한다. 친구야 그제였어.ㅎㅎ
그런데 얘길 해보니 아직 박스도 풀지 않았다 한다. 아!
딸 아이 학교 시험이 다다음 주여서 그때까지 안 보여줄 셈으로 안 뜯었다고 한다. 맙소사.
나는, 음... 섭섭했다.
아이 시험 공부 봐주느라 이번 달에는 만나지 못하겠으니 다음 달에 보자고 한 것까진 충분히 이해했는데, 집에 도착한 선물 상자를 뜯지도 않고, 앞으로 2주 동안 안 뜯을 생각이었다는 게 나는 좀...
뭐랄까. 우리 언니를 봐도 그렇고, 요즘 초등학생 엄마들은 너무 바쁘다. 무수한 숙제들은 아이 숙제가 아니고 엄마 숙제가 되어버렸고, 엄마들은 아이의 학교 성적과 사교육에 올인하고 문제 하나 맞고 틀리고에 일희일비한다. 내 친구가 다소 무심하기도 했지만 초등학생 아이를 둔 엄마들의 일상은 대체로 이렇게 되어버리나 생각하니 좀 우울했다. 아직 아가씨인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도 분명 있지만 아무리 봐도 미친 게 분명한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교육 풍토가 넌더리 난다. 김규항 씨는 자주 엄마들의 그런 경쟁 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엄마가 되면 그게 가능할까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천천히 가고 싶은데 모두들 전력질주를 해버리고, 그 아이들이 골인하고 나면 아직 달리고 있는 아이들은 들어오거나 말거나 경기장 문을 닫아 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닌가 싶어서.
'한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지 않은 책을 산 건데 모두 흡족했다. 다만 읽어보니 아이용 보다는 어른을 위한 책인 경우가 많아서 사심이 깃들었음을 인정한다. ㅎㅎㅎ
그리고 살까말까 고민했지만 역시 아이보다 내 입맛에 더 맞을 것 같아서 유보한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