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철학 - 꿈, 깨어남, 그리고 삶
강신주 지음 / 태학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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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야말로 백미이다. 강신주씨를 알게 된 건 다분히 그린비의 리라이팅 시리즈 중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하 리라이팅 장자)'를 읽게 되면서부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쓴 책들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 책이 눈에 띄더군. 리라이팅 장자가 대중이 읽기 편하도록 편집 되어 쓰여져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책은 대중서와는 격이 다른 중후함이 느껴진다. 좋게 말하면 중후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읽기에 좀 꺼려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이미 강신주씨가 풀어내는 장자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터라 별거부감 없이 집어들게 되었다. 내용은 강신주씨가 쓴 박사 논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식의 딱딱한 문체로 쓰여져 있을 뿐 아니라, 주까지도 상세히 달려 있다. (솔직히 난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깐, 원문이 달려 있는 이 책이 더 맘에 든다) 그런 까닭에 일반인이 보기엔 내용이 어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자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사람이나, 이미 리라이팅 시리즈의 '장자'를 읽었던 사람이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분명히 어려운 만큼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건 흡사 게임과도 같은 매력이라 할 것이다. 어려운 게임일수록 실패할 확률은 높지만 그걸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성공하게 된다. 그 때의 희열은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다. 나의 한계와 인내력을 넘어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책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특히 철학책들의 그 난해하고 이해 불가능한 문구들이 반복의 반복을 하면 어느 순간 하나의 줄기로 얽혀져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순간의 희열은 게임을 통해 얻었던 그것 이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렵다는 건,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거나,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 어떤 것이란 사실이다. 별 생각 없이 읽어도 술술 읽히는 책은 그 순간 순간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될진 모르지만, 막상 다 읽고나선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이미 나의 생각과 같다는 것이며, 그만큼 유아적인 발상으로 쓰여져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려운 책을 붙잡고 읽어보자. 읽는 순간 순간 갈등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네...'하면서 투덜투덜 댈지도 모른다. 그런 인내 속에 끝장까지만 다 읽게 된 것만으로도 다 읽었다는 뿌듯함이 드는데, 그걸 읽고 또 읽어 어느 정도 하나의 커다란 사유의 틀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그 기쁨은 과히 어떨지. 각자가 그런 기쁨을 몸소 느껴보며 독서의 즐거움을 경험해보도록 하자. 의식이 자란다는 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되며 세상의 풍파에 감정이 휩쓸리지 않게 된다. 이렇게 말하니깐 철학이 무슨 정신 수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면의 수양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능력을 키워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존재 이유일 터이니까.

  이미 리라이팅 장자가 나 자신의 비움과 소통의 문제를 다룬 것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또한 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박사학위 논문답게 학술적으로 본질적으로 치밀하게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더 강도 높은 철학적 탐구를 요구하기에 리라이팅 장자가 쉽게 느껴졌던 독자에겐 도전할만한 책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만만치 않다는 걸 몸소 느끼며 한 고비 한 고비를 넘는 희열로 이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예전엔 소통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비로소 리라이팅 장자를 읽으면서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당연히 난 '역지사지'의 정신만으로 남을 잘 이해할거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지사지의 정신에 늘 내 정신이 들어 있었으니 문제이다. 나의 생각으로 남의 정신을 제단한다는 것, '己所不欲 勿施於人(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는 유교적인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란 이야기이다. 타인을 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다보니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물론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는 같을지 모르나, 그 본질에 들어가면 모두다 각자의 개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모든 나의 관점에서 판단하려 하다보니, 어느 순간엔 '쟤가 왜 저러는지 정말 이해 안 가. 나 같았으면 저러진 않을텐데' 라는 정죄까지 하게 되는거다. 진정한 소통이란 나란 관점을 날카롭게 세울 땐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지사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의 기존 관념들과 편견들을 비워내는 것이다. 이런 소통에 관한 일화는 '송나라 사람이 가발을 파는 이야기'와 '조삼모사의 이야기', 그리고 '왕이 새를 길러내는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어떻게 철학이 하나의 치유제가 될 수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며 맘껏 느껴보길 바란다. 그렇게 세상과의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을 때, 나란 존재를 넘어서 타인과 맘껏 소통의 장을 펼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자의 글들은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기 쉽도록 풀어낸 강신주씨 또한 대단하고 말이다.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장자란 텍스트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부쩍 드는 요즘이다. 나중에 맘적인 여유가 생기면 장자와 함께 소유욕을 즐길 수 있으리라. 그 땐 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기대된다. '장자가 된 이자'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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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신체를 조성한다.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소명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사명이 되었다. 그건 어느 하나의 일에 매진하도록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결국 그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나 이뤄지고 난 후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쯤에서 무엇을 생각해보려 하는 것일까?

  "불행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기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잣대, 그리고 우리가 되고 싶은 이미지, 가장 갖고 싶은 것, 최고로 생각하는 가치 등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그것들은 어느샌가 우리 머릿속에 프로그램화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비추어 다른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과정은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실존하는 방식 그 자체이므로 완전히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다. -고병권 '공각기동대 분석 중'-"

  내가 교사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도 어느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찌하다보니 이 곳에, 안정적이라는 말을 따라 이 곳에 온 경우가 많다.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망각한 프로그램화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리라. 그런 프로그램화된 신체로 이 곳에 왔고 그 커리큐럼을 잘 마무리하여 교사가 되려 한다. 이런 이가 교사가 된 다음에 학생들에게 강요할 것은 뻔하다. 바로 '현실체제에 잘 순응하라는 것', '그것을 벗어나면 실패의 고통만 있을 거라는 것' 이리라.

  하지만 우린 이 때까지 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음을 상기하자. 주위의 여건들이 날 교사가 될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화 시켰고 결국엔 그게 나의 주어진 소명인양 합리화하며 그 루트를 충실히 따라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목표가 하나로 정해졌으니 무섭도록 요령 익히기 공부만을 한다. 그리고 합격하고나선 그 삶의 분위기에 맞춰 살아갈 것이다. 우린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늘상 반복되는 행동만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하는 기계의 일상과 다를 바 없잖은가.

  그렇기 때문에 우린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의 조건부터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길, 프로그램화된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실존의 문제를 대입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내가 지닌 생각조차 프로그램화 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나라고 규정했었던 수많은 자의식들 또한 허구임을 알아야 한다. 타자화된 자화상, 나라는 실체가 국가에 귀속되어 국가적인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화폐에 귀속되어 자본만능주의의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분과화된 학문에 귀속되어 우물 안 개구리의 자화상이 투영되었으며, 종교에 귀속되어 난 특별하다는 선민의식적 자아가 투영되었다. 그런 총체적인 자화상들이 모여 나의 실체를 이루는 고로, 지금의 나의 생각과 나의 사고, 그 모든 것은 나 자신의 본래면목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린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고 절대적인 자화상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불가능하다. 애초부터 우리의 본래면목은 없었음으로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것은 '천국'이란 내세를 규정하고서 희구하는 것과도 같을 뿐인 것이다. 또한 나만의 자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 저 사람과 이런 것들이 달라'라고 규정되는 것이 곧 자신의 자화상이 되는 까닭에, 나 자신을 규정할 수록 타인과 경계를 만들며 사회와 격리될 뿐이다. 그건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자아정체감의 혼란 속에 극복하려 하지 않고 회피를 거듭하였던 것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자아정체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신념임을 안다면 그걸 과감하게 허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이 다른 나를 만드는데 제약으로 다가온다. 이제 나는 나를 바꾸어줄 방대한 정보와 네트를 가진 다른 신체와의 만남을 꿈꾼다. -上同-"

  우린 현실에 기반하여 삶을 사는 인간이다. 그 현실이 우리를 프로그램했고 지금껏 살아오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오류를 알았다고 하여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을까? 그건 죽으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린 어떠한 방법을 통해 이 제약들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는가? 그건 바로 다른 신체와의 접속을 통해 신체의 변이를 유도할 때 가능하다. 들뢰즈식으로 이야기하면 '되기'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과의 차이를 전제한 신체와의 능동적으로 신체의 변이를 조성해 나갈 때 우리에게 짐 쥐어졌던 모든 체제들 또한 허물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공부를 하고 지금 못하는 것들은 나중에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며 위로를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나 그건 한심한 소리이다. 미래로 미뤄둔 행복은 결코 오지 않으며 그 미래가 현재가 되는 순간 또다른 미래로 미뤄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예전 거기'에서나 '미래의 저기'엔 아무 것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속하며 공부 그 자체를 즐기자. 그리고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보고 그 물음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자. 난 지금 공부하고 있다. 물론 공부가 재밌으니깐 한다. 그리고 맘껏 사유할 수 있으니깐 한다. 그리고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물론 안정적이니까. 그리고 학생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교학상장의 광경을 볼 수 있으니까. 정말 생각 같아선 분교에 발령 받아 다기세트를 구입해서 아이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만남을 유도하고 싶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희망을 일구는 길은 단 하나, 교사가 먼저 공부에 미치는 것 뿐이다. 설령 입시를 위한 것일지라도 선생님이 공부에 미치면 자연스럽게 그 배움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따지고보면 원래 교사란 그런 직업이다. 자신이 평생 뭔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자신이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다 -고미숙저 '호모쿵푸스' 177p"

  확장의 기본은 내가 능동적인 신체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 신체가 되기 위해선 더욱 즐기며 공부해야 할지니, 공부와 지식의 본래면목은 즐거움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런 즐거움 속에서 얻은 지식만이 우리의 삶을 살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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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글 좋습니다. 글이 좋은건, 그만큼 많은 고민과 깊이있는 생각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요령있게 공부하면 사실 합격은 더 쉬울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건, 제 마음과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거부합니다. 공부는 일상이 되어야하고, 즐거움으로 머물러야합니다.

leeza 2007-08-30 22:10   좋아요 0 | URL
이 말들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 참 기뻐요. 이게 하나의 정답일 순 없지만, 어느 정도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기에 통하는 것이리라 생각되네요~

마늘빵 2007-08-30 23:11   좋아요 0 | URL
제가 그랬잖아요. 여기 오는 순간, 딱 아 통했다니깐요. :)
여자분이면 대쉬했을지도 몰라요 =333

찐빵 2007-10-0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사고의 치열함이 묻어나오는 글이군요.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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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벌써 거의 17년이란 시간동안 교육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히 교육과 인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통한 교육을 받게 되고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운다. 그런 배움의 절정은 학교라는 기관에서, 누구나 ‘학생’이란 신분으로 배우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그 시기에 사람들은 육체적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 성장(가치 정립)까지 이뤄지기 때문에 그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한 개인에게 있어, 또는 그 개인이 소속된 사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나 같은 경우 17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교육을 받아오면서 지식을 넓혀간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단히 순종적이었다. 애국가를 외우라고하면 당연히 외웠고, 무언가 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되면 만인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분고분히 행동했으며, 친구들은 늘 한결같이  부모님이 차로 태워다 주는데 나만 힘겹게 걸어다니더라도, 그 친구나 국가를 원망하기보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었다. 그 땐 선생님이란 존재가 한없는 경외감의 대상이었기에, 그 분 말씀에의 순종은 으레 당연한 것이었으며, 학교라는 곳 또한 열심히만 공부하면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이 가능한 곳이라 여겨졌기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교육 주입을 통해 비판적 사고나, 비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선생님이란 존재는 귀족주의적 사회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며, 귀족주의적 요소를 각종 과목을 통해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고 학교 또한 가르침을 통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안목을 키워주기 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어 내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받았던 교육들을 되짚어 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예들만 살펴보더라도 애국가의 암기는 국가에 대한 은근한 충성의 강요이며,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회질서에 대한 순종의 강요이며, 나와 잘 사는 아이에 대한 묵인은 ‘열심히만 공부해 그러면 너도 저 아이 부럽지 않게 더 부유해질 수 있어’라는 말처럼 뜬구름식 교육이 안겨준 허구적 희망이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자각이 예비 교사를 꿈꾸고 있는 나에게 있어 많이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지만, 뭔가 확실하고 옳은 것을 알아가는 것이기에 뿌듯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의 고정관념과도 같던 사상 속에 어떠한 혼란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으며, 능력에 따라 자본의 양이 다르고 사는 모습도 제각각인 귀족주의(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눈으로 보면서 자라왔다. 그런 배움과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 또는 같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10년 넘게 살아왔는데, 촘스키는 그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준다.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학교 교육을 통해 가지게 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그 얘기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도 아니며 병행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제퍼슨은 “귀족주의자는 ‘국민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사람들로, 모든 힘을 국민에게서 빼앗아 더 높은 계급에게 몰아주려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으며 “민주주의자는 ‘국민과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 국민을 신뢰하고, 공존의 이익을 정직하고 안전하게 떠맡아줄 존재로서 국민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얘기했다. 이 인용문만 놓고 보더라도 귀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귀족주의에서의 국민은 기득권자들 위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 시간 외엔 방관자(傍觀者)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국민들의 주체성으로 인한 간섭과 충고는 그들의 안락한 위치 유지와, 쉽사리 얻게 되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을 함께 공존해야할 주체로 여기기에 자기들의 위치 유지보다는 서로 잘 사는 것에, 자기들의 이익보다는 국민들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한다. 이러한 현격한 차이점 때문에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촘스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민주주의자가 될 것인가, 귀족주의자가 될 것인가? 후자의 길은 쉬운 길이며 제도권이 그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 길이기에 어느 정도의 부가 보장되는데 반해 전자의 길은 투쟁과 패배의 길이어서 힘이 들고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지만 결국은 새로운 시대정신이기에 더욱 큰 보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당신 같으면 쉽고 편한 길로 갈 것인가, 어렵고 힘든 길로 갈 것인가?

  위에서 얘기했던 민주주의, 귀족주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느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보니, 나와는 너무도 요원(遙遠)한 철학정도로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귀족주의자들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 더욱 고착화되고 심화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단순히 나와는 너무도 머나먼 얘기라 하며 흘려보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준 발언은 바로 뭣뭣주의자의 선택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귀족주의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귀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입김을 불어넣어준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스승이라 얘기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선생님’이란 사실이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과목 하나하나에 귀족주의적 사상을 실어놓고서 그걸 아이들에게 조금씩 주입한다. 그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금씩 귀족주의자들로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언뜻 TV를 보니 , 일제 치하 시대에 여학교 선생님이었던 한 할머니께서 그 때 제자들에게 정신대에 가도록 종용했다고 하면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시면서 후회하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자면,  일제치하 시대에 남학생들에게는 강제징용에 찬성하도록, 군사 독재시대에는 군부에 대한 저항이나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도록, 현시대에는 불평등한 부의 편중을 자기의 실력 부족으로 인정하도록 그렇게 교육해왔다. 바로 국가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선생님들이 해온 것이다.(이 말이 올곧게 세상에 저항하며 나름대로의 참 교육관을 펼쳐온 선생님들까지 폄하하는 듯해서 송구스럽기에 여기에서 얘기하고 있는 선생님들은 그저 일반론에 의거한 선생님들임을 밝힙니다.) 그러한 선생님들 밑에 귀족주의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사회에 배출되었기 때문에 이 사회는 여전히 귀족주의적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에 대한 맹신이나 순종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비판적 시각으로 교육이란 것을 보게 되니, 교육을 통해 강제되고 억압되었던 많은 예들을 대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나 또한 교사가 되려고 맘먹지 않았다면, 이러한 교육의 폐해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여전히 귀족주의적 가치관만을 주입시켜주고 있었을 것이다. 교육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지식을 준다는 순기능만 가지고 있지 않고 그 권력층에 대한, 기득권층에 대한 권력 유지, 이익 추구의 묵인(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주입하는 역기능도 있다. 이러한 사실이 크나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내가 단순히 누군가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쳐야 할 입장에 언젠가는 서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 또한 지금까지의 교육이란 미명하의 역기능을 모른 채 누군가를 교육시킨다면, 그들에게 여전히 귀족주의를 전파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이나마 교육의 순기능, 역기능에 대해 알게 되어 정말로 다행이다. 이젠 나의 교육관을 제대로 정립하여 귀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제대로 전파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내가 올바른 민주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그런 민주주의를 전파해줌으로써 제자들이 올바른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이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는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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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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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선택 되어진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것일 거다. 이렇듯 책과의 인연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우연하게(?) 이어진다. 요즘 들어 읽게 된 책들이 '수유+너머'의 책들이고 그 곳에서 나온 신간들인 '나비와 전사, 장자...., 제국 그 사이의 한국 등'의 책을 읽어서 나에게 한계지워진 것들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을 넘어선 자유로운 신체를 꿈꾸게 되었다면 이런 여행서를 읽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내 모토는 '앉아서 유목하기'이다. 정착과 유목의 상대성은 그 자리에 머물로 떠나는 일차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건 아니다. 멀리 떠나 있으되,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 첫사랑의 아련함에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은 '떠난 곳에서 정착하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또한 한 곳에 머물러 있으되 이 곳에서 수많은 인연들과 능동적으로 소통하며 자아와 타자의 사이에 놓여진 거리들을 지워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앉은 채로 유목하기'일 것이다. 바로 나의 앉은 채로 유목하기 위한 그래서 새로운 인연들과 다수로 접속하기 위한 까닭으로 선택한 책이 이 책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선택했으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나를 찾아왔다는 애매한 표현을 쓴 거지만~

  이 책은 가벼운 마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고 컬러 사진도 가득한 탓에 이야기책을 읽듯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카오산에서 만났던 여러 인물들의 얘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 우린 이 책을 통해 인간사와 인생사를 엿볼 수도 있다.  자기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먼 곳을 늘 동경하며 살아가는 우리이다. 그런 우리이면서도 주위 사람이 멀리 여행을 간다고 하면, 으레 "너 현실을 도피하는 거야. 왜 멀리까지 가냐? 여기서도 니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다 할 수 있는데...."라고 하면서 비난이란 비난은 다한다. 물론 그게 도피이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 비난을 타인에서 쏟아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물론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유목과 정착은 장소를 떠났느냐, 떠나지 않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자기 마음에 달려 있는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이 책을 보면서 바로 그 유목과 정착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카오산에서 만났던 인물들 중에 어떤 사람이 멀리 떠났으되 유목의 자유를 느끼며 맘껏 소통하는 사람들일까? 그건 각자가 읽으며 느껴보도록 하자.

  지금도 이산하라는 어린 소녀가 했던 얘기가 날 흔들고 있다. 바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어디예요? 대학교를 1~2년 늦게 대학 가는게 뭐가 문제죠? 인생은 길게 봐야 돼요. 중요한 건 햇수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에요."라는 이야기 말이다. 남보다 뒤쳐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린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관점에서보면 그런 1~2년의 뒤처짐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때 나름대로 고민하고 새로운 인연을 쌓고 철학담론을 통해 인생을 재정비한 것이 자유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곤 한다. 바로 그것이다. 타인과 나를 나누는 행위는 결국 나를 위축되게 만들며 나의 가치나, 장점을 단점과 나약함으로 치환할 뿐이다. 나는 나일 뿐, 남이 빨리 오른다하여 빨리 올랐다간 정상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넉다운 될 뿐이다. 나는 나의 속도로 타인을 신경쓰지 말고 오를 일이다. 즉 타인과의 거리를 지워내고 나만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럴 때 나의 삶이 열리며, 나를 비워내고 타인과의 소통 또한 원활할 것이다.

  난 이제 여행이 하고 싶다. 그것이 떠남을 전제로 한 정착이 되게 해서는 안 됨을 잘 안다. 그런 유목적인 여행이 되기 위해선 나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비워낼 수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삶의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 아직 해외여행은 두려운 고로, 국토 종단을 계획해야 겠다. 이미 한비야씨가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를 통해 다짐했던 것인데, 그간 핑계를 대며 하지 못했던 그 일, 이번 임용시험이 끝나면 과감하게 실행해 봐야겠다. 여행은 날 들 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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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8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머리로나마 유목을 꿈꾼다면, 앉아서 유목하기 족이 되려나요?

프레이야 2007-08-2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자님, 굿모닝! 앉아서유목하기족, 여기 하나 추가요^^ 추천합니다.

leeza 2007-08-2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앉아서 유목하기' 참 좋은 말인거 같아요~ 우리 모두 그렇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음 좋겠어요~

비로그인 2007-09-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소장만 하고 있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자님 서평보니 읽어봐야겠다라는...
'앉아서 유목하기' 정말 좋은 말인 것 같아요.

leeza 2007-09-04 06:21   좋아요 0 | URL
한번 꼭 읽어보세요. 기분 비우고 읽기 시작하면 금새 다 읽을 걸요~ 그리고 나선 왠지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스튜디오 지브리 "이웃의 토토로")

  참 아름다운 영화이다.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이며 우리의 지향점이다. ㅋㅋㅋ(너무 띄워주는 듯한 느낌이군. 그치만 맞는 말임)

  메이네 가족이 이사가는 데서 이 영화는 시작된다. 아이들이 집주변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집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우고 있던 그 때, 메이와 그의 언니는 마당에 있는 큰 나무를 보고 신기해라 한다. 여기까지 볼 때만해도 너무나 일상적인 아이들의 모습이라 그저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장면에서 펼쳐졌다.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큰 나무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자, 아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이들을 향해 "녹나무란다"라고 말하며 무관심하다.

  이 장면을 보고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내가 이 장면에 놀란 까닭은, 아이들은 자연에 대해 그런 호기심과 경이로움이 있는데 반해 아빠는 '녹나무'라는 이름을 안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겐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며 놀잇감이 되는 데 반해 어른들에겐 그저 동일한 일상이기에 모든 것에 실증내며 따분하게 생각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메이와 그의 언니는 세상과 자연과 맘껏 소통할 줄 안다. '동그리'도 보고 '토토로'도 보며 직접 대화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녹나무라고 단정하며 더이상 호기심이 없었던들 메이 또한 토토로를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과 열린 마음이 녹나무를 맘껏 탐색할 수 있도록 했으며 토토로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별일이다. 이런 영화를 보며 맘껏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것도... 왠지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 어렸을 때의 나 자신이 아니라, 그런 감응력을 지니고 있던 그 때의 나로 말이다. 이젠 좀더 나 자신을 해체할 때인 것 같다. 오늘은 과연 토토로를 만날 수 있을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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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6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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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7 0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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