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
베튤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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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자 한 자 천천히 나가는 마음입니다, 작가도 그렇게 천천히 생각하며 천천히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 짐작이지만 짐작하는 마음도 흐뭇합니다. 누군가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작가가 설령 아픈 일을 겪더라고 천천히 잘 헤쳐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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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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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지 쓰는 다시 목 언저리를 박박 긁었다. 

 "술꾼이 병원에 가면 사람도 아니라고 호통만 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줬어요. 선생님이 봐 준다면 나는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더듬더듬 말하는 쓰지 씨를 고쿄와 미도리카와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놔둬 주면 안 될까요, 선생님?"

 데쓰로는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쓰지 씨가 요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합리했다, 그는 처음부터 합리를 담은 그릇을 이미 어딘가로 치워 버렸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소란스러움과도 무관했다. 깊은 체념은 보였지만 어두운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저세상행 열차가 도착하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듯한 한가로운 여행객다운 모습이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쓰지 씨는 갈라진 입술에 조심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쓰지가 데쓰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두 손을 책상에 대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168p)


 합리적이라고 하는 설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데쓰로는 망설인다, 망설인다는 것은 자신의 합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방의 불합리한 말에 귀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쓰지는 그 앞에 고개 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상황을 지켜보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의사가 있는 병원은 그 자체로 귀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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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인류 - 인류학의 퓰리처상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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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풍경은 점점 더 장관을 이루는 것 같았지만, 당연히 나는 그런 걸 감상할 여력이 없었다. 지친 와중에 고개를 드니 멀리 고원 끝자락으로 도시가 아침의 옅은 구름에 휩싸여 있는 것만이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파실의 발을 따라 달리며 '계속 움직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주변 시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들판과 나무들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유칼립투스, 유칼립투스, 나무뿌리. 빈 터, 가지, 유칼립투스. 하지만 이제 내 의식은 바깥세상이 아니라 온전히 '내면'으로 향해 있었디. 칼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느꺼지는 감각, 폐가 내지르는 비명과 다리가  타오르는 듯한 통증,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완전히 순수한 집중은 기도'라고 썼다. 내게 달리기는 언제나 종교의 경험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마지막 한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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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에서 먼지로 - 어느 정원사의 이야기
마크 헤이머 지음, 정연희 옮김 / 1984Books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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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덥다. 나는 이따금 일손을 멈추고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날을 간다. 낫질은 보호복을 입을 필요가 없어 반바지에 가벼운 부츠 차림이다. 미스 캐시미어가 집을 비워, 점심 도시락과 물통을 내려놓은 자리 옆 나무에 셔츠를 걸어 놓았다. 풀을 죄다 베려면 세 번의 아침이 필요하다. 모두 끝내자 풀밭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치운 집처럼 헐벗고 슬퍼 보인다. 풀을 베면 느리게 자라는 꽃들이 풀에 잠식되지 않도록 보호하는데 도움이 된다. 베지 않으면 1, 2년도 안 돼서 군데군데 야생화가 자란 풀 천지의 땅이 될 것이다. 비록 나는 낫을 사랑하지만, 여기가 내 풀밭이라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299p)


작가는 정원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고, 일을 하는 도구를 소중하게 돌보는 과정을 쓴다.  일을 하는 순간을 음미하며 글을 쓰는 듯하다. 정원의 주인인 미스 캐시미어의 행동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음미하듯 글로 옮긴다. 일에 몰두한다기보다 글에 몰두하는 정원사의 글. 

그 글을 읽으며 생명을 돌보는 사람의 이야기에서, 씨앗에서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할까? 이렇게 소중하게 음미하며 일을 할까? 음미한다면 소중함이 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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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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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섭리를 따라 생명은 모두 부여받은 자리에서 저마다 자신의 길을 이루어갑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에서 각자 제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삶의 숙제가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숲애서 자기 삶의 숙제를 미루거나 풀지 않는 풀과 나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풀어야 할 삶의 숙제가 생명 앞에 놓이는 것일까요? 이제 그 신비를 만날 때가 되었습니다.

 (118p)

 

저자는 숲에서 만난 생명들을 만나며  삶의 경이에 눈뜨고 그 지혜를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다. 그 지혜를 통해 삶을 스스로 살고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숙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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