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쓰지 쓰는 다시 목 언저리를 박박 긁었다.
"술꾼이 병원에 가면 사람도 아니라고 호통만 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해 줬어요. 선생님이 봐 준다면 나는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더듬더듬 말하는 쓰지 씨를 고쿄와 미도리카와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놔둬 주면 안 될까요, 선생님?"
데쓰로는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쓰지 씨가 요구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합리했다, 그는 처음부터 합리를 담은 그릇을 이미 어딘가로 치워 버렸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소란스러움과도 무관했다. 깊은 체념은 보였지만 어두운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저세상행 열차가 도착하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듯한 한가로운 여행객다운 모습이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쓰지 씨는 갈라진 입술에 조심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쓰지가 데쓰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두 손을 책상에 대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168p)
합리적이라고 하는 설명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데쓰로는 망설인다, 망설인다는 것은 자신의 합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방의 불합리한 말에 귀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쓰지는 그 앞에 고개 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상황을 지켜보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의사가 있는 병원은 그 자체로 귀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