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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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후 : 뉴욕의 지하철역과 통로에 물이 들어차 통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1년 후 : 무전 송수신탑의 경고등이 꺼지고 고압전선에 전류가 차단된다. 이렇게 되면 무멋보다도 고압전선에 부딪혀 매년 10억 마리씩 희생되던 새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3년 후 : 난방이 중단됨에 따라 몇 해의 겨울을 거치며 갖가지 배관들이 얼어터진다. 내부가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면서 건물이 손상된다. 도시의 따뜻한 환경에 살던 바퀴벌레들은 겨울을 한두 번 거치는 동안 멸종된다.
20년 후 : 고가도로를 지탱하던 강철기둥들이 물에 부식되면서 휘기 시작된다. 파나마운하가 막혀버리면서 남북 아메리카가 다시 합쳐진다. 우리가 즐겨 먹던 일반적인 밭작물들의 맛이 지금 같지 않은 야생종으로, 그러니까 인간의 입맛에 개량되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
100년 후 : 지금 지구상에 남아 있는 코끼리들은 상아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지면서 개체수가 스무 배정도 늘어난다. 반면 너구리, 족제비, 여우 같은 포식자들은 인간이 남긴 생존력이 엄청나게 강한 고양이 등에 밀려 개체수가 오히려 줄어든다.
500년 후 : 알루미늄으로 된 식기세척기 부속과 스테인레스스틸로된 조리기구가 풀숲에 반쯤 덮인 채 있지만 그것들의 플라스틱 손잡이는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여전히 멀쩡하다.
1천년 후 : 뉴욕시에 남아 있던 돌담들은 결국 빙하에 무너지고 만다. 인간이 만든 인공구조물 가운데 이때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영불해협의 해저터널뿐일 것이다.
3만 5천년 후 : 납이 마침내 토양에서 전부 씻겨나간다. 하지만 카드뮴이 씻겨나가전까지는 7만 5천년 세월이 걸린다.
1억 20만년 후 : 인류가 남긴 청동 조각품은 아직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30억년 후 :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모습이겠지만 갖자기 생명체가 여전히 지구상에 번성할 것이다.
50억년 후 : 죽어가는 태양이 내행생들을 다 감싸면서 지구는 불타버릴 것이다. 

인류라는 새로운 종이 지구에 출현한 역사는 지구 전 역사와 비교해 보면 1%남짓의 극히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비한 종이다. 하지만 그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지구라는 행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적은 지구역사를 통틀어 단 한번도 있지 않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만큼 인류를 제외한 여타의 생명체에게 인류는 다름아닌 통제 불가능한 존재였고 잔인한 포식자였다. 인류가 등장하면서 고대 거대 포유류들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야생의 동물들은 야생성을 상실하고 인류에게 복종하면서 또 다른 자체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애완동물 내지는 인류의 먹거리를 해결해주는 가축이라는 형태로.  

<인간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 인간이 없는 세상의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추론해 보는 책이다. 이 지구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인류가 흔적없이 살아진다면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서두와 책표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환호성을 지를 것으로 보인다. 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고 야생의 생명체는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특히 그동안 인간에 의해 야생성을 박탈당했던 동물들 역시 초기에는 다소 힘겨운 종의 사투를 해야하나 서서히 자연의 법칙에 동화되어 그 옛날 자신들 선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류가 남긴 지구상의 흔적들 역시 세월의 힘에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 그리고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는 어떨것인가라는 막연한 상상만을 펼쳐가는 내용만은 아니다. 또한 단지 지구상에서 인류가 사라져서 인간없는 세상이 되면 다른 생명체와 지구라는 행성자체가 인간이전의 동의 다양성이나 온전한 자연을 그대로 회복할 것이라는 다소 희망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필자는 우리의 DMZ나 지중해 연안의 키프로스 섬을 통해서 장시간에 걸쳐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생명체의 번성 보다 오히려 인간이 남긴 그 족적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인류의 등장으로 지구라는 행성과 그 부속물은 인류에 의해 인류의 방식으로 리모델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에 필요한 방식으로 인간의 이라는 종의 번식을 위해 지구자체가 변형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물들은 각종 인공구조물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지구상에 단 한번이라도 등장하지 못했던 다양한 화학적 유전학적 변종들을 만들어 내면서 그 짧은 시간에 지구자체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흔적들은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지구상에서 살아지더라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흔적들이 인간이 없어진 세상에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핵관련 폐기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류가 창조해낸 부수물은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남아있는 생명체에게 유산으로 남겨질지도 모른다. 

막연하게 인간없는 세상이 지구의 자정능력에 의해 원상복구 될 것이라는 생각자체가 기대감 뿐이라는것을 말해준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러한 막연한 기대감 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인류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어차피 인류가 어느날 갑자기 살아질 확률은 거의 없다. 외부 행성의 충돌이나 지금처럼 갑자기 등장한 신종풀루등의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결국 살아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인가?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가 출현해서 지금의 지구를 리모델링한 것처럼 앞으로도 인류에겐 지구를 리모델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지구를 재편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인류이외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이제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할때이다. 독불장군이 없듯이 인간만이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인간없는 세상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는다. 그 만큼 인간이 남긴 산물들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통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산물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인간만 살아진다는 것 자체가 책임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없는 세상은 인간도 상상하기 싫지만 여타 다른 생명체들도 그다지 반기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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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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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무색하게 하는 기상 이변도 이제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상당히 익숙해진지 오래 되었다. 앨리뇨니 라니냐하는 용어도 기상학 관련 이외의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인류가 지구상에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하면서 기후(날씨)에 대해선 가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과학혁명이 몰아 닥치기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의 날씨는 신성한 것이였고 절대권력자의 권력과도 일맥상통한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동양 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절대적이 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겪으면서 거의 모든 자연력은 인간의 통제하에 놓였다. 아니 통제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 특유의 오만성은 근래에 들어 각종 기상이변의 원인이 지구 온난화에 있다는 과학적인 연구와 홍보 덕택에 더 이상 인간이 자연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결국 자연과 평화로운 동반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논리를 파급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산화탄소등의 온실가스의 과배출로 인해 지구의 온난화가 발생하게 되고 온난화로 인해 극지방의 빙하의 유실로 인한 해수면의 급증가로 인해 더 이상 태양계내 유일한 생명이 살고 있는 지금 같은 지구는 존재하기 힘들것이라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온 지구를 강타하고 있다. 이상태로 계속 가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물려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일본 교토를 통해서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합의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이 탄생하였고 향후 장래를 향하여 의무적으로 이산화탄소배출량의 감소에 합의하게 이르렀다. 그리고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해서 꾸준히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 나가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 온난화에 관한 계략적인 이야기이다.

IPCC의 탄생으로 우리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산화탄소의 주범인 화석연료의 자제와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을 위한
다양한 연구 그리고 범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한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스캔들처럼 만약에 지구온난화가 이러한 스캔들이라고 하면 과연 이를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바로 이 책 <지구 온난화에 속지마라>은 우리가 알고 있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1500년 기후주기 라는 학설을 지구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각종 신빙성 있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이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속으로 빠뜨린다는 점이다. 중세시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을 비롯한 모든 천체가 돌고 있다는 천동설은 거의 진리였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학설은 이단이었고 외면당했던 것처럼 지금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의견 역시 이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이론을 전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은 그래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이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내용들은 상당수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한 진실 감추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지구온난화에 대한 전면적인 재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그동안 우리가 인식하던 하지 못하던 간에 주기적으로 온난기와 한랭기를 반복해서 기후 변화를 해왔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면 오히려 온난기에 각종 생물의 성장이 좋아졌고 인류에게도 유익한 결과를 나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랭기에 접어들면서 식량문제가 대두됨으로서 더 많은 산림과 농토가 필요하게 되고 이는 결국 자연생태계 교란으로 더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 역시 과학적 증거에 의해 판명되었다.
온난화라를 부추기고 있는 대표적인 온실가스인 이산화가스의 증가 역시 온난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인 수치 이고 지구자체 정화력에 의해 우리가 우려할 정도의 수위는 아니다라는 것 역시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필자는 그렇다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발생 가능한 문제에 대한 지금이 대처노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응반응이 문제라고 본다. 정치적인 논리와 경제적 논리가 혼합되어 온난화에 대한 확대 왜곡된 논거들이 재생산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금의 대처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논지이다. 결국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원인 화석연료을 포기하고 비경제적이고 오히려 생태파괴의 주범이 될 수 있는 대체 에너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보다는 화석연료를 좀더 크린하게 바꿀수 있는 방법론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화학비료의 근절은 그 만큼 비례하여 방대한 농토의 확대화를 가져올 것이고 이는 바로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하고 극히 위험한 물결앞에 놓여있다. 물론 필자를 비롯한 반대 의견은 온난화가 너무 과도하게 확대 해석되어 불필요한 공포감만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쪽의 의견이 맞을지는 우리같은 일반인으로서는 파악하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단지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인 여건을 만들어가는 방법의 모색이 가장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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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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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Music)과 사랑(Philia)의 합성어로 음악를 사랑 하면서 인체의 변화에 대한 일종의 뇌신경학 가설중의 하나로 올리버 색스는 이 책에서 음악과 관련된 아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음악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전작인 <색맹의 섬>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수채화 같은 흐름을 다소 기대하였으나 이번 책은 그야말로 일종의 학술 보고서의 양식같아 속도를 높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막상 책 속으로 빠져들어보면 정말 올리브 색스 다운 필체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생물종 중에서 인간이란 종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여러 시각과 관찰을 통해 음악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단의 사고로 인하여 마치 이명현상 같이 귀속이나 머리속에 음악소리가 들린다는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그런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공통적으로 사고로 인한 머리의 충격 내지는 외상으로 인해 그러한 현상이 유발되고 있고 그것은 저자의 전공인 뇌신경학과 상관성이 높다는 결론을 가지면서 그의 본격적인 음악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 

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불식간에 음악과 접촉하고 있다. 내가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거의 매일 음악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 만큼 음악은 인류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초의 문자발명이전 부터 각종 역사의 전달방법중 음악이 차지했던 비중도 높거니와 종교와 관련된 그리고 정치와 관련된 음악 또한 수 많이 있다. 왜 그럼 인간은 음악에 그토록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음악의 구조가 우리 인간의 뇌구조에 반응하는 시스템이 마치 일종의 언어형식으로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지구상의 여러 소리를 접하면서 음악만큼 우리의 정서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소리가 없듯이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언어의 또 다른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인간의 청각기관과 신경체제는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마음속으로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더라도 그에 대한 전달이미지는 모두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동안 음악과 관련한 과학적이고 특히 의학적분야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되어 왔다. 사실 의학기술이 좀더 발달한 지금의 시점에서야 음악을 인식하는 뇌의 부분이 언어를 인식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는 결과를 얻기 까지 우리는 과연 음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에 대한 과학적 반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상담결과를 통해 어릴적 부터 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으면 뇌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고 뇌졸증이나 알츠하이머병, 실어증, 운동실조증, 기억상실증의 치료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특히 발달지체, 자폐증,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좀더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음악이 그러한 질병치료에 치료제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치료와 같이 병행할 경우 생각보다 더 효과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본다. 

음악이 인간에 전해주는 사랑이라는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이해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수 있는가는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랑에서 출발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해 온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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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우주 - 별의 탄생에서 인류의 진화까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본 우주의 수수께끼
게르하르트 슈타군 지음, 이민용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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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우주>는 우주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와 인류의 기원을 다루고 있지만 기존의 여타 우주 천체학 서적과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대게의 우주 천체학의 저서들의 면모를 보면 자연과학계통의 과학자들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종교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이다. 그래서 책이 풍기는 전반적인 뉘양스가 기존의 과학서적과는 또 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다. 대략 140억년에서 160억년사이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우주의 역사와 우주 탄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빅뱅 그리고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의 탄생 그리고 생명체의 기원등을 다루고 있는 저자의 시각은 참으로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편안하다는 점은 다름아닌 기존의 물리학과 수학등의 공식과 일반 대중의 머리속으로는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든 숫자들의 향연으로 점철된 기존의 과학서적은 그 내용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면서 우주에 대한 접근자체에 심각한 모호함마저 가져다 주는게 사실이다. 만유인류법칙과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 카오스이론등 그 내용만 판단하기에도 일반대중은 우주라는 거대하고 막연한 공간에 반비례하여 지식의 폭이 줄어 들게만 한다. 물론 요즘들어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좀더 일반대중에 가까이 다가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일반대중들의 눈높이는 그들의 언어를 따라잡기에는 그 길이 요원한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면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의 시각에서 기술되는 우주는 왠지 그 자체만으로 친근감을 가지게 한다. 저자의 서술방식은 숫자 중심보다는 일반대중이 느끼는 보통의 개연성에 더 중점을 두고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의 서술내용이 기존의 진화론이나 빅뱅이론을 비롯한 상식적으로 검정된 과학상식에 대해서 부인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저자는 인문학자의 눈높이로 바라본 우주탄생과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접근방식이 기존의 자연과학자들의 시각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점밖에는 없지만 그 작은 차이점이 일반대중에게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준다는 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각종 물리법칙이나 다양한 우주관련이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세세히 알아야 이유도 없고 또한 그런 것 자체를 저자는 다루고 있지 않다. 그저 소설을 읽어 내려 가듯이 큰 줄기만 이해해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왜 유혹하는 우주인가에 대한 해답도 바로 이러한 저자의 시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에 비하면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고 이는 인류의 존재감은 거의 무시해도 좋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게 우주라는 상대는 경외감, 신비로움을 뛰어넘어 유혹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과학과 기술문명의 급작스런 발달로 인해 이제는 왠만한 우주의 비밀을 알아가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는 인류에게 매일 새로운 우주정보는 인류의 지적호기심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에 대한 유혹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는 아니 우리가 우주라고 생각하고 있는 개념 자체가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우주는 어찌보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 정량화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류가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지적설계자에 의해 태초에 설계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만큼 우주는 인류의 지적 호기심에 무한한 자극을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와 같은 존재일 수 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러한 막연한 개념의 우주를 그저 개연성과 우연의 일치라는 쪽으로만 몰고 갈수도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우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은 작을 수 밖에 없다. 그 만큼 우주가 인류에게 보여주는 부분이 작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우주관련 지식을 습득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 판본자체가 1998년도이기 때문에 그동안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과 대치되는 점도 있고, 그 전문지식의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오히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편안한 우주가 이 책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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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쟁 -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신재식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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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수가 이런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 아니라 종교라고 한다" 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이 세상에 절반을 훌쩍 넘은 숫자의 인간들이 어떠한 형태로 간에 이 종교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또한 종교의 최정점에 있는 "신" 이라는 존재의 유무에 대해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신의 형태가 절대적 초월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인격성을 띠고 있던 유일신이던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처럼 종교의 기원은 광대한 넓이 만큼이나 역사적 기원 또한 인류 탄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형태의 고등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절대적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종교형태이던 개인적인 위안의 형태이던 인류발전과 동일한 선상에서 지켜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종교는 우리 인간에게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바로 이 종교에 대한 믿음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다윈의 출현과 진화론의 대두로 인해 신에 대한 그리고 신과 인간과 종교에 대한 불변의 법칙이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다윈주의는 그동안 종교적 담론에 빛을 보지 못한 과학주의를 전면으로 부상시켰다.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부의 폭발은 바로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인 철학을 요구하게 되었고 근대화라는 패러다임속에서 은근히 슬쩍 과학의 손을 들어주게 된 형국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 빛을 보면서 과학과 종교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맞짱 뜨기에 들어 갔다고 할 수 있다. 과학진영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면서 모든 자연의 법칙을 과학적 논리로 설명했고 근대화라는 뒤배경을 엎고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 왔다. 한편 종교진영은 수천년 동안 이어온 기득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온갖 파렴치한 전략을 동원해서 과학진영에 맞서오고 있다. 결국 양 진영의 논리를 마치 기찻길 처럼 마주보면서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을 걸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이번 <종교전쟁>은 과학과 종교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과학 철학자, 신학자, 종교학자 3인의 과학과 종교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는 책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으로 시작된 과학과 종교의 불꽃티는 공방전을 그저 서구사회의 현상으로만 받아들였던 우리에게 이번 <종교전쟁>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과학과 종교의 양진영의 목소리들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얼마되지 않는 좋은 기회라고 보여 진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견해가 아닌 양쪽의 입장과 견해를 살펴 보면서 과학과 종교라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의 화합을 엿볼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제3자적인 종교학자의 가세로 과학과 종교를 거리를 두고 음미해 볼 수 있는 보너스를 주고 있다.  

그동안 과학진영의 전사인 도킨스의 담론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서적으로 보인다. 창조 vs 진화라는 거대한 담론의 진위성을 뛰어 넘어 좀더 폭넓은 의미에서 과학과 종교의 동거를 알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이번 책은 바로 과학적 정의나 종교적 진리의 진위에 대해서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동안 양측진영의 공방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진위에 대한 논거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찌보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진위여부에 대해서 그 시시비비를 굳이 가려야 할까라는 점에도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것 보다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담론은 과학과 종교의 근원적인 이해와 양진영의 패러다임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건설적인 논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면에서 <종교전쟁>은 독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과학 철학자의 눈에 비치는 종교는 그야말로 도킨스의 집단적 망상에 불과 할 것이고, 신학자의 입장에서 본 과학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일 수 밖에는 없는 탕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측의 절대적인 논거를 재확인하지는 측면보다는 과학이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종교가 과학을 받아들이는 시각에 대한 일대 변혁이 와야 한다는 공통된 견해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양진영을 대표하는 전문가의 입장을 개진하다보니 쏠림현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학자인 김윤성 교수의 제3자적인 견해에서 양측진영을 질타하고 한편으로 아우르는 논거가 이번 책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유물론적 진화론을 견지한 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한국기독교의 실상에 대한 토론 부분에서 장대익 교수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 절로 들었지만 이 책의 출간 의도가 어느 진영의 일방적인 판정승을 끌어내는 제로섬 게임 매치는 아니기 때문에 신재식 교수의 반대논거 또한 많은 부분에서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종교를 위한 종교,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과학과 종교가 상생할 수 있는 계기 마련에 일조를 하는 책임에 분명하다. 양측의 담론이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결국 그 어떠한 담론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양진영은 서로의 담론에 대해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고 서로의 견지를 묵살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서 과학과 종교가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나마도 어느 쪽의 견해가 주가 되는냐에 대한 논거로 유명무실해진 형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시도가 양측 진영의 화해의 밑거름이 될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이다. 이 양측진영의 대결은 모든 인류에게 해악만을 가져다 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종교전쟁>은 양측의 화해 가능성을 내비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담론인 보편타당성을 종교에도 적용해야 하고 종교적 담론인 사랑,평화을 과학에 적용 한다면 분명 일류의 한발짝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그동안 일방적인 담론을 담고 있는 서적에 비해서 양측의 입장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것 같다. 특히 그동안 과학과 종교의 담론이 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창조vs진화 논쟁을 엿볼수 있는 기회가 된 점이 눈에 띄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이번 계기로 인해 좀더 성숙된 토론의 장이 마련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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