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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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에 대한 한 과학자의 견해- 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된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1985년 영국 글래스고 대학(애덤 스미스의 모교이자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에서 강연한 내용들을 그의 미망인인 앤 드루얀이 편집한 유고집이다. 부재에서도 충분히 그 내용을 직감할 수 있듯이 종교와 신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그 오류에 대한 칼 세이건의 견해를 담고 있는 책이다. 우리에게 <코스모스>라는 책과 TV다큐멘터리로 너무나 익숙한 칼 세이건은 그동안 세인들에게 과학자라는 본업 보다는 방송인이라는 곡해를 오히려 더 많이 받아 왔다.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의 엄청난 흥행과 그만의 지적인 나레이션은 대중들을 우주라는 바다에 심취하게 만들고 코스모스 신드롬까지 만들어 냈다.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그를 보는 시선이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깊이가 없고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여 과학을 마치 무슨 엔터테이먼트로 전략시켰다는 곱지 않는 평가와 더불어 과학자로서의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폄하적인 판단을 하면서 그를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정도로 격하시켜놓고 있기도 하다. 물론 수긍이 가는 평가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이번 그의 유고작을 접하게 되면 이러한 그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일거에 불식하는 계기로 다가오게 된다. 

그 동안 종교와 과학 그리고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공방은 치열하게 진행 되었고 이제는 창조론이 맞다 진화론이 맞다라는 소모적인 논쟁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느 정도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동안 찰스 다윈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을 분리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대중들을 미혹시키는 종교적 장막을 걷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종교적인 장막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이제 더 이상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의 의미는 많이 희석되어 있다. 칼 세이건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리처드 도킨스이다. 도킨스는 그야말로 진화론의 투사이다. 종교와 신에 대한 정곡을 보이는 족족 그대로 간파하여 한방에 해체해 버리고 쓰러진 신에 대해서 확인 사살까지 하는 종교계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비쳐진다. 한편으로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도킨스만큼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학자도 없기에 그의 말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칼 세이건은 왠지 우유부단하면서 조용하다. 속된 말로 뜨뜨미지근하다고 할까 이것 같기도 하면서도 확실하게 이것이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그래서 주위 진화론자를 비롯한 독자들에겐 그 포스가 약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동안 수세에 몰렸던 과학이 대반전을 통해서 종교에 판정승을 거둔 시기에는 맞는 표현이 될 수 는 있어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칼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세이건이 보여준 그동안의 성향은 그가 우주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로서의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40-150억년이라는 천문학적인 개념과 초속 30만키로라는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바라보는 우주는 종교, 신, 과학, 창조론, 진화론등의 세세한 다툼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우주라는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어 지는 것이고 이에 대한 소소한 편차는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속에 작은 단편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보면 무의할 수 도 있는 것이고 서두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도킨스가 소를 물가로 끌고 가기 위해 물에 대한 효용과 그 기원 그리고 과학적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소를 회유하고 강박하고 질타하면서 이끌어 왔다면 세이건은 소가 저절로 물가로 오기까지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소가 질문하는 말에 끊없고 힘든 대답을 하면서 결국 물가로 인도했다고 볼 수 있다. 도킨스가 종교를 한방에 질식사 시켰다면 세이건은 서서히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다. 물론 도킨스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동안 수십세기 동안 종교가 자행에 왔던 일을 돌이켜 볼때 종교의 성격상 한방에 그 콧대를 꺽지 못하면 그 엄청난 자생력으로 또다시 대중을 미혹시키려는 반동적인 현상을 수도 없이 보아왔기에 도킨스의 방법론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종교의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대두하는 것이 그 만큼 현대에 들어서 종교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고 종교는 또 다른 출구를 찾기 때문에 도킨스의 처방이 어쩌면 유효적절하게 다가올 수 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건의 생각은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 우주탄생과 성장이라는 경이롭고 거대한 현상 앞에서 그저 유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모든것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집스럽고도 회의적인 접근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까지 검증하고 연마되어 오늘날 과학이라 부르는 패러다임이 탄생했듯이 다소 우직스럽고 더디더라도 종교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주고 거기에 대해 요목조목 증거를 제시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의 생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세이건(물론 도킨스를 비롯한 모든 과학자들)은 종교를 과학으로 대체하고자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 위안과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다만 종교가 과학의 영역까지 침범해 대중들을 현혹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도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다. 세이건이 바라보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는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과 동일시 된다.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속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고 그 요소들이 하나하나 서로 연결 되어서 우주라는 메타포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영역은 이런 관점에서 각자의 역활을 수행해 가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영역을 넘어가는 순간 우주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세이건의 과학관과 종교관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정확하게 여기다 저기다 하고 구분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덩샤오핑은 횩묘든 백묘든 쥐만 잘 잡으면 훌륭한 고양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쥐를 잡는 방법과 쥐와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종교적 입지가 좁아들수록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창궐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과학적 해결방안은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세이건의 종교적 견해는 이런 측면에서 지금의 과학계에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냉소적이고 공격적인 종교와 신에 대한 부정보다는 어린이가 특정한 교리나 음악, 예술이나 제의에 일찌감치 노출되면 성장해서는 그런 것들을 마치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듯이 인내심을 갖고 꾸준하게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해 나가는 방법론이 더 효과적일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와 과학의 대치와 공존이라는 개념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에 일부분임을 잊지 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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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대폭발의 비밀 -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소원주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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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 첫 소절에 나오는 말이다. 백두산이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 그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백두산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한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대외적으로 포장되어 있는 현학적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 靈山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는 메타포로서의 위상은 그 높이 만큼이나 한민족의 정신속에 각인되어 있다. 여기서 한민족이라하면 지협적인 한민족개념이 아닌 고대사를 거슬러 올라가 예,맥,숙신,말갈등이라 통칭 되었던 광범위한 개념으로까지 확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백두산을 바라보고 느끼는 일종의 애착이 이들 지협적인 갈래의 민족정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민족의 영산이라 숭배하고 있는 백두산에 대해서 정작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고작 해발 2750m이니 휴화산으로 정상에 화산의 흔적인 칼데라호인 천지가 있고 구한말 국경분쟁에서 그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것외에 일반대중에게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극히 과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더라도 최근래에 화산활동이 있었던 시기는 1702년으로 간헐적인 활동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백두산에 대한 무지는 지금에 와서 휴화산에서 사화산쪽으로 그 이미지가 고착화되고 있고 재해영화에서 보는 화산폭발과 같은 화산활동과는 그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 과연 백두산은 화산으로서 그 맥을 다한 것일까?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은 실로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저자는 백두산이 과거 10세기경에 화산활동을 했다고 한다. 폼베이의 비극으로 알려진 베수비오화산 폭발과 세인트헬렌스의 화산폭발등 인류가 기록 문화라는 형식을 가지면서 기록되기 시작한 화산폭발중에 엄청한 폭발력과 그이후 재앙과도 같은 피해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부분들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한 문명의 후퇴를 목격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그저 남의 나라, 문명의 이야기일 뿐이지 우리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지진이나 화산하면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나 보편화 되어 있지 한반도는 안전지대로 생각했고 그러한 자연재앙이 실제로 없었기(정확히 표현하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기에)에 더욱 더 관심밖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보고 매일같이 부르는 애국가 속의 백두산은 그저 영묘하고 신령이 깃든 우린 한민족의 메타포일 뿐 다른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질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일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 저자는 대폭발(화산폭발의 강도를 일컫는 지표인 VEI 7급)이라고 지칭한다. 이 규모는 폼베이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던 배수비오 화산의 50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발로 놀라운 것은 이러한 대규모의 폭발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짧은 주기를 두고 10세기 초반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 무슨소리인가? 그러한 대폭발이 있었다면 분명하게 역사기록에 남아있어야 하지 않는가? 역사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면 이러한 기록은 현존하는 한국사와 중국사,일본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 저자는 그저 시쳇말로 한번쯤 뜨기 위해서 말도 안돼는 논거를 들고 나온 것일까?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한다. <통섭>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인류가 좀더 합리적인 판단과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통합적인 교류가 있어야 하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통합적인 지식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에는 통섭에 대한 학자들의 진지한 자세가 엿보이고 있다. 이러한 통섭의 사고가 그동안 밝혀지지 않거나 그저 매장되어버린 중대한 역사의 한장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가치만으로 의미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10세기에 발생했던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한국고대사중에 가장 그 근거와 기록이 전무한 <발해>의 연관고리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발해를 정복한 거란의 <요사>에는 926년에 상경을 함락하면서 발해라는 대제국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고 명시되어 있고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 요사를 상세히 살펴보면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역사학자들은 대게 이럴 경우 동양적인 시각에서 상세한 표현보다는 대의명분적인 표현을 사서의 기록으로 채택하는 경향으로 인해 그 의미가 포괄적으로 기록되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왠지 이러한 시각은 자가당착적인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한다. 그럼 반대적인 해석으로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인해 국가라는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거란이 발해를 침공해서 죽어가는 맹수의 숨통을 끊어놓았다라는 명제는 참일까? 이 역시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 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무엇을 책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오랜세월동안 땅속에 묻혔있었던 과학적인 자료들과 사실들이 말해주는 백두산 대폭발과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않고 있는 발해의 운명에 대해서 과학과 역사가 손을 잡고 새로운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실증사학이라는 개념이 결국 역사적인 문헌적 자료와 고고학적 유물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역사학과 과학이 서로의 영역을 허물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다양한 기법과 역사학의 추론이 만나게 되면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길이 좀더 빨리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논거를 계기로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이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 이번 책이 출간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추상화의 대상이었던 백두산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좀더 사실적이고 객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더불어 영역을 넘나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대에 아직도 현실적으로 그 벽이 크게 느껴지는 대목들이 앞으로 후학들과 독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뿐인 통섭이 아닌 실천적인 통섭을 통해서 좀더 발전적인 학문적 성취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매번 이러한 논거를 접하게 되면 과연 우리는 뭘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책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면서 과연 우리는 백두산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해왔는지 일본학자들의 노력을 보면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문제에 그토록을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실천방안에 대해선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왔다는 사실이 이번에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지나간 역사는 그저 과거라는 시간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항상 되풀이 되고 그러한 역사를 기반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하기 때문에 역사는 중요한 것이다. 역사의 진위를 논쟁하기전에 먼저 그 진위에 접근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때인것 같다. 

▣ 또한 그동안 화산활동은 먼나라 이야기쯤으로 인식되어왔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접근의 기회를 마련해 주는 저서이다. 특히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백두산의 존재가 향후 우리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 이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고 싶어진다. 메타포적인 백두산이나 관광코스 일환의 백두산이 아닌 실존하고 있는 백두산의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휴화산은 언제가는 또 다시 화산활동을 할 수 있는 화산을 말한다. 그 시점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그동안의 활동 형식을 미루어 봤을때 분명한 것은 다음 폭발 역시 10세기의 폭발만큼 어마어마한 재앙이 올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이에 대한 학문적 실용적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을 통해서 화산학과 지질학에 대한 개략적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접근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저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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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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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家의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던 열녀문을 비롯하여 정형화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개념은 비단 성리학적인 잣대 위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였다. 그 이전의 시대를 상고해 보더라도 현모나 양처에 대한 가치관은 깊숙히 우리의 문화속에 내재되어 있었고 성리학이라는 표준화되고 국가공식화된 이념의 또 다른 표출 방법중 하나였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치마열풍이나 강남열풍이니 하여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고져 밤낮 자식 걱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들에게 이어져 왔다.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사회적으로 상식적인 한계범위를 벗어나더라도)은 모성애(母性愛)라는 감정이입까지 들추어 내어 마치 어머니라는 존재가 필수불가분하게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상의 개념을 요구하고 있고, 당사자인 어머니들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또한 이러한 모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지표로 간주되고 있고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각인되어 인간 진화의 산물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럼 아직도 세계 1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해외입양이나, 중세 유럽의 영아 살해, 극동아시아권의 성 선별적 영아살해(임신중절)를 비롯한 수많은 일련의 사건들은 과연 어떻게 설명 되어야 하는가? 그저 일부 몰지각한 나이 어린 혹은 준비되지 않은 어머니와 민족별로 편향적인 문화적인 강압으로 인해 자식(주로 성별로 딸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탄생>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헌신이라고 일컫는 모성본능에 대한 역사적, 생물학적, 진화론적, 사회문화적 고찰을 통해서 과연 모성본능이 초기 진화론자들이 주장한 것 처럼 영장류에서 호미니드로 갈라져 나오면서 진화된 산물인 것인지, 혹은 수렵/채집시대를 거쳐 농경사회로 진입 하면서 탄생한 가부장제도의 권력이 만들어 낸 메타포인지에 대해서 방대한 동물, 인간들의 실험과 사례를 통해서 그 해답에 접근하고 있는 보기 드문 인간 해부학(정신적인 산물까지 포함한)적 저서이다. 특히 저자가 여성이라고 해서 결코 성 편향적인 관점에서 모성본능을 바라보거나 패미니즘의 사유가 엿보이는 그런류의 감성적인 저술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적확하게 모성본능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 정립부분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현존하고 있는 수렵/채집집단과 영장류의 행동을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 흔히들 문명화된 집단이 가지고 있는 모성본능의 개념과 사뭇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수 도 있고 한편으로 어미니와 모성이 가지고 있던 메타포에 대한 어마어마한 손질이 불가피 할 수 도 있다. 물론 저자는 모성본능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막연하게 형이상학적으로 규정된 모성본능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생물학적, 진화론적 증거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좋은 어머니' 라는 개념에 반대하고 있다. 좋은 어머니 즉 헌신적인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라는 개념은 인류학적으로 진화된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후대에 창의된 허상이라는 개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강요되고 도식화되고 만들어진 '좋은 어머니'가 마치 인간이 진화된 과정속에서 자연선택을 받은 것처럼 비추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모성본능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냉혹하게 표현하면 C < Br (c:행위자가 부담다는 비용, b:수혜자에게 돌아가는 이득, r:연관도)라는 단순한 수학적 부등식 표현된다. 즉 행위자(어머니)가 부담하는 비용이 수혜자(자식)에게 돌아가는 이득과 수혜자와 행위자의 생물학적 연관도를 감안하여 최소한 비용보다 클 경우에 한하여 자식을 키울거라는 논리이다. 이 논거는 정상적인 부부관계, 미혼모, 두번째 아내 그리고 원하지 않는 분만을 비롯한 다양한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어머니와 자식(태아를 포함한)의 관계 역시 자연선택의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대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논거이면서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 논거이다. 그동안 우리에게 각인된 모성본능은 진화적인 시간과 역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발버둥과도 같은 개념으로 받아 들여진다. 마치 전체적으로 효과적인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한쪽에게만 강요되어진 구도이다. 이러한 구도는 '좋은 어머니'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확대되어 전파 되었고 세대에 세대를 거듭 하면서 하나의 정설로 받아 들여지게 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일련의 논거(비단 저자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들이 독자들에게 그다지 반갑게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가 주장하는 모성본능이라는 개념은 거대한 어머니 대자연이라는 틀 속에서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던 생물학적, 사회학적 진화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지 그동안 모성본능에서 파생된 지고지순한 메타포에 감춰져 있는 내면을 보지 못했거나 보지 않을려고 했던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지 자연선택으로 촉발된 어머니 대자연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저자의 취지는 이러한 모성본능을 종교적,사회문화적 잣대로 제단하고 은폐할 경우 그 패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한쪽 성인 여성에게 전가될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생물학적으로 번식의 상대편에 대한 편견은 종전체의 지속적인 건강한 삶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 책으로 인해 어머니와 자식 그리고 모성본능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그 실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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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남자 - 인류 최초의 남성 '아담'을 찾아 떠나는 유전자 오디세이
스펜서 웰스 지음, 황수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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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라는 창세기 1장의 말처럼 우리 인간들은 그야말로 하나님(만일 존재하기라도 한다면)의 충복처럼 이 지구라는 행성을 뒤덮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멜서스의 예언처럼 인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구를 신이라는 존재에게서 위임받아 대리청정하고 있다는 착각아닌 착각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의 역사를 1년이라는 달력으로 축소해서 보면 고작 12월 31일 오후 늦게 등장한 생명체가 마치 그 앞의 364일을 살아온것 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류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지구라는 행성을 서서히 목죄우고 있고 이러한 행위는 결국 인류라는 종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류지상주의는 결국 인류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종교적인 표현으로 "신의 선택"를 받았다는 자기합리화에 그 기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진화는 이러한 우리들의 얄팍한 자기합리화를 사정없이 깨트리고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던 아니던 간에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최초의 남자>는 바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대략 500-600만년전의 흔적에서 적게는 40-50년전의 호모에렉투스등 시간적인 감각이나 현생 인류와는 사뭇다른 외관등에 익숙한 우리에게 좀더 친근하고 접근가능한 범위로 축약한 인류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인다. 물론 이렇게 시간적 단위를 몇만년 범위로 축속했다고 해서 인류의 기원을 짧게 잡았다는 논거는 아니다. 저자는 철저하게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인류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단지 지금 인류에게 있어 가장 최근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할 뿐이다.  

한가지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동안 발굴된 화석이나 뼈에서 추출한 DNA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을 벗어나 좀더 현실성 있는 방법인 mtDNA(미토콘드리아 DNA)와 남성에게만 존재하는 성염색체인 Y염색체를 이용한 인류의 추적방식으로 현생 인류의 기원을 되집고 있는 점이 눈에 띄인다.
여기서 물론 세부적인 과학적 이론에 대한 가부를 언급할 수 는 없으나 저자의 논거가 과학적 접근방법이나 증명에서 오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이론적 근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저자의 이러한 측정방식에 의거하면 인류의 기원은 대략 5만년전 아프리카 동북부에서 아담이라 지칭하는 M168이라는 최초의 남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인류는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세계 몇 곳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진화해왔다는 이론이 있었지만 이후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현생 인류로 진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저자의 이론은 주목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는 한차례의 빅뱅이라는 대도약을 거치면서 중동지방으로 이동했고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퍼져나가면서 구인류를 몰아냈고 그 자리를 자신의 핏줄로 메어나갔다던 것이다. 

저자는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당시의 기후변화로 추론하고 있다. 열대우림에서 사바나로 그리고 스텝으로 이어지면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에게 식량난이 닥쳐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인류는 자발적으로 좀더 안락하고 식량확보가 용이한 중동지방으로 진출했고 이어서 원예농경이라는 두번째 빅뱅시기를 맞이하여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특히 두번째 도약인 농경이라는 신기술로 무장한 신인류앞에 구인류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결국 현생인류가 지구를 점거하게 된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우수한 유전자가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는 유전자가 제거되는 것임을 말하듯이 이렇게 구인류는 차츰차츰 자연에서 제거되었고 그 빈틈을 신인류는 표나지 않게 메워나갔던 것이다. 저자는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의 mtDNA와 Y염색체의 분석 그리고 세계 각지의 언어을 통해서 이러한 이동경로를 증명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인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과정은 기후 변화라는 외부적 환경도 한 몫을 했지만 결국 인류의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힘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결국 이러한 인류의 도약은 지금의 현생인류로 진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양날의 검처럼 다른 이면은 철저한 정복과 파괴가 뒤따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첫 발을 뒤딘 미지의 땅에 살아가고 있던 다양한 생명체는 어느날 갑자기 출현한 인류라는 종에 의해 철저히 이유도 없이 멸종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인류가 진화해 나가야 할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번째의 도약의 길에 놓여있다. 세계가 리얼타임으로 연결되고 국경이나 언어의 장벽등이 흐릿해지면서 그야말로 이동성에 대한 대폭발의 시대를 살고있다. 5만년전만 하더라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인류가 이동하는데에는 1만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겨우 몇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신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인류가 나아가고 진화해가는 길에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인류 자신의 정체성과 그 근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류의 근원을 되돌아보면서 어떻게 인류가 진화를 해왔고 그러한 진화라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변화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로 나아가는 인류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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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화석연료에 중독된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송광섭.송기원 옮김 / 부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미래에서 온 편지>는 저자의 경력 뿐 아니라 번역자의 이력 또한 눈을 끄는 책이다. 토목공학도로서 건설, 토목현장의 일선에서 인간의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분야의 전문가가 지구란 거대한 배에 흠집을 냈다는 참회의 심정으로 딸과 공동으로 번역한 환경 예측 보고서이자 지구와 인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기 반성이다. 옛 선현들의 말에 눈밭위를 걸을때는 항상 심사숙고를 하고 걸어라고 했다. 나의 발자취로 인해 뒤에 걸어 올 후대인들이 방향이 결정되기 쉽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런 행보를 하라는 뜻일 것이다. 바로 선현들이 이말이 가장 뼈저리고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가 다름아닌 지금의 시대일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이 탄생해서 45억년이라는 가히 카운팅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고 그 와중에 지구상에는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 인류처럼 가장 단시간내에 출현해서 지구의 구석구석에 그 발자취를 남긴 종은 없다고 봐도 무관할 것이다. 긴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자연선택의 과정에 의해서 진화한다는 통설을 뒤집기라도 하듯이 인류는 단시간에 진화라는 역사를 새로쓸만큼 급진적으로 진화해왔다. 특히 맬서스가 우려했던 기하급수적 인구성장이 현실화 되고 산업혁명에 의한 일대 대폭발을 거치면서 그동안 진화라는 커다란 톱니바퀴에 그럭저럭 물려가던 방향성이 이제는 그 어떠한 규칙성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인구의 증가는 예전의 수렵,채집의 시대나 농경시대의 생산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식량의 확보는 다시 에너지원에 대한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환경 파괴라는 부메랑으로 다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에 달하였다. 화석연료의 대책 없는 소비는 한정적인 에너지원의 고갈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등 이제는 인간이 가장 맹신하고 자신있어 하는 과학기술로도 예측할 수 없는 극히 위험천만한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특히 저자는 2107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후대인이 보낸 편지를 통해서 통제되지 않는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를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굳이 100년후를 예상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시간에도 전지구적으로 불길한 징후들은 수도 없이 감지되고 있다. 고생대 석탄기이후 매장되었던 검은황금 석유의 발견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상 가장 지불 댓가가 저렴한 에너지원을 물쓰듯이 사용하고 있고 석유정점이라는 각계각층의 경고가 잇따르고 있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 사용량을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에게 안락한 삶을 가져다 주는 모든 하드웨어에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는 이제 인간의 생활과 결부지어서는 상상도 못할 존재가 되어버린 동시에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해 가져오는 폐단 역시 사용의 댓가 치고는 엄청나게 큰 비용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이러한 깨달음이 지금 이전의 시대에서 부터 대두되었지만 각종 정치적인 논리로 발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저자는 지금의 위기를 화석연료가 대표한다는 생각자체에 대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문명의 모든 측면에서 그 한계와 종말적인 징후가 보이면서 더 심층적인 대안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구의 증가, 환경서식처의 파괴, 지구온난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원의 고갈등 제반 요소들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많이 퇴색하게 마련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의 시대가 모든 분야가 마치 씨줄과 날줄로 얽혀여 직조해낸 결과물이듯이 이에 대한 해법 역시 한가닥의 실타래만을 교체한다고 해서 풀어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염두해 두고 각 분야에서 상호유기적인 협력이 있어야만 그나마 사태 진전의 효과가 나올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선각자이자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먼저 생각하는 힘을 맹신했다. 항상 모든것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진일보한 발자국을 먼저 남김으로서 인간은 형이하학적인 면에서 지구상에 명멸했던 그 어떠한 종보다 장족을 발전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준 불의 효용과 가치는 불이 가져단 준 결과에 비해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인 에페메테우스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지혜와 성찰이 지금의 시대엔 더 필요한 것이지 모른다. 이제 더이상 앞만보고 달려가는 기관차의 동력으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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