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의 탄생, 그 예감과 기대를 담은 교양소설: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 노발리스, <푸른 꽃>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은 어머니와 함께 아우크스부르크의 외갓집으로 떠난다. 여행 중에 여러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슬람 여인 출리마, 늙은 노다지꾼(광부), 동굴의 은둔자를 만나는 등 값진 체험을 한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하인리히의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시인인 클링스오르를 소개해준다. 그에게는 마틸데라는 손녀딸이 있는데, 그녀와 하인리히는 금방 첫 눈에 반한다. 이들의 사랑 얘기와 나란히 클링스오르가 들려주는 긴 동화(에로스와 파벨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것이 노발리스의 미완성 소설 <푸른 꽃>(원제: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1부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2부는 순례자의 모습을 한 하인리히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대체로 이 소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상징과 알레고리, 고양된 시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가령 하인리히가 마틸데와 교감하는 장면을 보자.

 

하인리히는 마틸데와 함께 남았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에다 살그머니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그의 뜨거운 키스에 자연스럽게 응답해 주었다. “사랑하는 마틸데.” “사랑하는 하인리히.” 이것이 그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녀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 다른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하인리히는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서 있었다.(147-148)

 

 

처음 본 순간부터 꼭 어디선가 본 것 같고 먼 옛날부터 알았던 것 같은 느낌, 사랑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 육체적인 관능과 종교적 성스러움의 결합 등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이라는 말의 시원을 보여준다.

 

 

, 마틸데. 죽음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할 거야.”

맞아, 하인리히. 내가 어딜 가든, 그곳엔 언제나 네가 있을 거야.”

그래, 마틸데. 네가 어디에 있든 그곳엔 영원히 내가 있을 거야.”

난 영원이 뭔지 몰라. 그렇지만 널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느낌, 그게 바로 영원인지도 몰라.”

그래, 마틸데. 우리는 영원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니까.”(169)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푸른 꽃>의 언어에 몰입하다 보면 묘한 최면 효과가 생긴다. 실제로 노발리스는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자신의 낭만주의 미학을 삶에 그대로 반영한 것 같은 느낌이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에 병약한 체질, 29년에 걸친 짧은 삶,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 끊임없는 떠남의 욕구,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낭만화하려는 의지 등. 특히 어린 약혼녀 소피와의 사랑, 그녀의 요절은 노발리스의 정신적, 문학적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듯하다. 요컨대, ‘푸른 꽃은 낭만주의, 그 자체이다 

(진짜 꽃미남, 예쁘게 생겼죠?ㅎㅎ)

 

<푸른 꽃>의 첫 부분에서 하인리히는 어떤 낯선 사나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일종의 신비체험과 같은 꿈을 꾼다. 한 젊은이가 낯선 미지의 고장을 여행한다. 어두운 숲속, 돌산, 연못, 시냇물을 지나자 그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해온 이상향이 나타난다.

 

그를 감싸고 있는 햇살은 평소에 보던 햇살보다 밝고 부드러웠다.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앗아간 것은 우물가에 서서 반짝이는 넓은 잎사귀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푸른빛의 키 큰 꽃이었다. 푸른 꽃 주위에는 온갖 색깔의 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주위에 진동했다. 그의 눈엔 푸른 꽃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푸른 꽃을 응시했다. 마침내 그가 그 꽃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푸른 꽃은 갑자기 움직이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15)

 

푸른 꽃과의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지만 그로 인해 절망이나 환멸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신비감이 더해진다. 푸른 꽃의 모습에 탐닉하던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러나 이 경우엔 현실조차도 이상과 반목하는, 어떤 적대적인 힘이 아니다. 1부와 2부의 제목이 각각 암시하듯, 시인의 탄생이든, 사랑의 완성이든, 이상의 도래든 기대는 절대 배반당하지 않고 실현된다. 하인리히가 동굴에서 만난 은둔자가 갖고 있던 책, 어느 시인의 놀라운 운명을 다룬 소설은 아마 <푸른 꽃>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천재 시인의 탄생이 기대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실현되었다면, 과연 노발리스가 혹평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맞먹는 교양소설이 탄생했을까? 실상 미완성이라는 형식마저도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우리를 유혹하는 저 푸른 꽃의 형상에 부합하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 연이어 독일문학, 독일소설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 한때 낭만주의에 꽂힌(^^;) 적이 있어서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다시 읽은 노발리스는 좀 많이 부담스럽더라고요. 혹자의 말대로 '오글거리는' 낭만성을 참기도 힘들고. 한편으론 괴테의<빌헬름...>이 얼마나 잘 쓴 소설인가, 싶기도 하고요.  

낭만주의에 대한 학적(^^;) 관심은 물론 도스..키에게서 시작됐지만, 더 직접적인 근원을 들라면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이 작가, 이 작품입니다!

 

 

 

 

 

 

 

 

 

 

 

 

그때의 감흥이 커서 나름 부채의식을 갖고(^^;;) 직접 번역도 했습니다! 만 27세에 사망한 이 작가-시인의 시는 저의 데뷔작에 제사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그게 96년이었음을 생각하니, 너무 오래 살고 있네요. 누구 말마따나 "Too old to die young"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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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하고 경건한 시민 사회와 아름답고 관능적인 예술 세계,

두 세계의 창조적 결합을 꿈꾸다:

- 토마스만,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을 담은 예술가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낭만주의 이래 공식처럼 굳어진, 고독과 소외의 천형을 감내해야 하는 천재 예술가 대() 우매하되 행복한 천중이라는 유구한 이분법이 여기서 다소 변형된다. , 관능적이고 이단적인 예술 세계의 반대편에 엄정하고 경건한 시민 사회가 존재한다. 물론 이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작가의 전기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이원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의 문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모든 사람과 충돌하는 것일까? 왜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다른 소년들 사이에 있으면 왜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13)라고 자문하며 괴로워한다. 시를 쓰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저주받은숙명 탓이다. 다름때문에 그는 한스 한젠에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이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섞인 동경”(14)을 느낀다.

 

그가 한스를 사랑한 것은 우선 한스가 미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스가 모든 면에서 그 자신과는 정반대되는 상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영웅과도 같이 승마를 하고 체조를 하고 수영을 하는 씩씩한 장부였고 모든 사람들한테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중략) /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4)

 

열여섯 살이 됐을 때는 비슷한 이유로 금발의 잉에”, “명랑한 잉에 홀름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는 금발과 푸른 눈의 세계, 저 건강한 시민 사회에 마냥 편입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 살짝 발을 담그되 궁극적으로는 그 언저리를 맴돌며 자기만의 세계, 즉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실제로 서른을 넘긴 토니오는 그 꿈을 이룬다.

 

 

 

 

 

 

 

 

 

 

 

 

 

 

작가가 된 토니오는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으며 생활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단지 창조자로서만 간주되기를 원했다.(38) 그러나 강조하건대 생활인’,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혹은 길 잃은 시민”(59)으로서의 토니오가 없다면 예술인토니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화가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와 나누는 대화를 보자.

 

예술적인 것은 단지 우리들의 타락한, 우리들의 기예적인 신경 조직의 불안초조감과 냉철한 황홀경일 따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연기해 내고 그것과 더불어 놀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멋있게 표현할 수 있으려면, 또는 그렇게 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싶으면, 우리 예술가들 자신은 그 무엇인가 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과 이상하게도 동떨어지고 무관한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44-45)

 

토니오의 말을 곱씹으면, ‘예술적인 것’(=‘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인간적인 것은 대립적 관계를 넘어서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년 만에 고향 도시를 밟았다가 덴마크로 간 토니오가 한스와 잉에를 먼발치에서 다시 보았을 때 느끼는 소회 역시 시민 사회를 향한 척력과 인력의 미묘한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98-99) ‘토니오 크뢰거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반영된바, 시민적인, 즉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향한 질투와 다름’(이상함)에 대한 집착, 이 모순되는 두 기질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진정으로 숭고한 예술이 완성된다.

 

청교도 정신에서 유래하는 명상적이고 철저하며 정확한 성품이셨고 우수에 잠기곤 하셨지요. 불확실한 이국적 혈통을 물려받으신 제 어머니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소박한 동시에 태만하고 정열적이었으며 충동적 방종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중략) 이 혼혈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 훌륭한 가정 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술가입니다. (중략) /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106-107)

 

문학에만 논의를 한정시키자면 토니오, 나아가 작가 토마스 만의 이상은 러시아문학과 같은 신성한 문학의 창조였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한 도정으로서의 문학, 구원해줄 수 있는 언어의 힘, 인간 정신 전체를 두고 볼 때 가장 고귀한 현상인 문학적 정신”(51)에 종사하는 자, 즉 문학가는 완전한 인간이며 성자(聖者)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고독 때문에 괴로워 우는 왕(<돈 카를로스>)이든 시민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보헤미안이든 예술가는 인식의 구토를 참으면서도 그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고서 깜.짝. 놀란 것이 <데미안>이 무척 독일문학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녕 낭만적, 몽환적, 관념적이더군요! 물론 그 원류는 괴테이겠지만(노발리스하고도 비슷하고!), 헤세와 거의 동년배인 토마스 만을 떠올릴 수밖에요.

저 아리안족들의 오만함, 도저한 지루함과 엄숙함(!), 참아주기 힘들죠? ㅎ ㅎ 혹자는 토마스 만이 톨스토이나 도...키 등 러시아문학과 비슷하다고 느끼지만, 글쎄요, 러시아문학은 워낙에 '속', '속물성'에 대한 배려가 큰 문학이라서요...^^;  

 

그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바로 이 양반 -_-;;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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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의 비극: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아남을 것인가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마담 보바리>는 시골 의사의 아내인 엠마 보바리의 불륜과 파멸을 그린 소설이지만 소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해내는 책(소설)과 그 욕망-책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의 충돌, 그것을 엠마의 인생이 보여준다. 수도원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소설을 많이 읽은 탓에 항상 소설처럼!’을 꿈꾸는 그녀에게 현실은 따분하기만 하다. 가령, 결혼 전에는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자 전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이런 그녀 앞에 레옹이 나타나, 지금껏 비어 있던 욕망의 빈 칸을 채워준다. 그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고독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는 것이 더 즐겁다.

 

 

 

 

 

 

 

 

 

 

 

 

 

 

 

로돌프의 경우도 비슷하다. 명실상부한 애인이 생기자 그녀는 옛날에 읽었던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을 떠올리며 그녀 자신이 그토록 선망하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전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욕의 만족감”(237)마저 맛본다. 속된 현실과 권태를 참아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낸 셈이다. 이 낭만적 사랑에 탐닉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자세를 취한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기만과 배반으로 점철된 사랑의 비극 때문에 파멸한 여주인공의 역을 맡는다. 종부성사까지 준비하고 신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3년 뒤, ‘파리 물을 먹고 돌아온 레옹이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걸요!”(354)라는 천연덕스러운 말로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하지만 소설과 몽상 속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었던 불륜이 현실 속에서 반복과 지속을 거듭하자 결혼생활 못지않은 진부함을 지니게 된다. 권태와 환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엠마의 파국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연애가 아니다. ‘소설처럼살기 위해 그녀는 몸치장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살림살이와 금전문제에는 무관심하다. 낭만적인 소설에는 돈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책과 몽상 속의 세계는 너무나 시적인데 실제 현실은 너무나 속되고 천박하달까.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다가 엠마는 요즘 식으로 말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만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로돌프를 찾아가 때 아닌 사랑 타령을 늘어놓고 돈을 구걸하는(“실은 저 파산했어요, 로돌프! 제게 삼천 프랑만 꿔주세요!”(448)) 장면은 거의 참담하다. 음독자살과 그 과정(특히 수의를 입힐 때 시체가 된 상태에서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엠마의 욕망과 몽상을 모독하고 조롱한다. 혹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다른 처지에 놓였더라면 사정이 좀 달랐을까? 물론 아니다. 욕망은 그 본질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는 잡지에 연재될 당시부터 물의를 일으켰으며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업자, 편집자가 모두 법정에 섰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보바리 보인의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을 법하다. 그때 플로베르가 내놓은 답이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저 유명한 말이다. 플로베르와 엠마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어떻든 그는 저 속된, 따라서 보편적인 모방 욕망의 근원과 귀결을 속속들이 해부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의 아들로서 메스 대신 펜을 손에 든 외과의-소설가였던 셈이다.

 

 

 

 

 

 

 

 

 

 

 

 

 

 

<마담 보바리>을 쓸 때 그는 스스로를 손등에 납덩어리를 얹어놓고 피아노를 치는 사람”(1852726일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비유했다. 그 살인적인 고통을 5년 동안 감내했다. 대체로 플로베르는 동굴 속에 칩거한 고독한 ’, 크루아세의 은둔자를 자처하며 고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문학함을 실천했다. ‘일물일어설의 창시자답게 비단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쓰느냐, 문체의 문제에 어쩌면 최초로 골몰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블독이에요 ㅎㅎ)

 

으젠느 지로가 그린 초상화 속의 플로베르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눈은 반쯤 풀려 있으며 전반적인 생김새는 불도그를 닮았다. 덧붙여 183센티의 거구였던 그는 간질병 환자였거나 적어도 간질발작으로 추정되는 신경 발작에 시달렸다. 이런 그를 두고서, 말년에 두툼한 플로베르 전기(<집안의 백치>)를 썼던 사르트르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썼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뚱뚱하고 키가 큰 그 둔한 인간과 그의 그 걸작 사이의 대조였다.”(사르트르, 대담)

 

과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오만하고 방탕한(혹은 그런 척한) 독신자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샤를르의 어린 시절로 시작해서 약제사 오메에 관한 문장(“그는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503))으로 끝난다. 이렇듯 바보들’(결국 죽는다)속물들’(결국 살아남는다)만 등장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기는 더 쉽지 않다. 그러나 낭만적 거짓의 허울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진 소설적 진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소설의 교과서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 <책앤>

 

--  말미에 쓴 대로 소설가 지망생(^^;)은 꼭 탐독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랬죠.) 소설이 안 써질 때면  재능의 부재가 아닌 노력의 부족을 탓하라!, 뭐, 이런 생각하며 떠올리는 작가입니다...^^;

 

위에 이미지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보바리>,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바리의 삶이 얼마나 '연극적'(!)인지를 무척 잘 표현했던 것 같아요. 겸사겸사, <레이스 뜨는 여자>, <피아니스트> 등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가 그렇듯 ^^;) 그녀의 매력과 연기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터. <브론테 자매>(?)인가 하는 영화에서는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역을, 이자벨 위페르가 앤 역을 맡았는데요... 흠.

 

 

전설 같은 프랑스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다 볼 있는 이런 영화가 있었죠...^^;  

 

한편, 러시아 소설 판 <보바리 부인>은 (역시나 불륜을 소재로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 체호프의 단편 <베짱이>인 것 같습니다. 아참, 이것도 불륜 얘기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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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2013-03-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 서울대 러시아문학의 이해 수강생입니다.

방금전 보바리 부인을 다 읽고 감상문을 써보려고 검색하다가 선생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자벨 위페르의 '마담 보바리'를 한 번 봐야겠네요^^

2013-03-0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대한 순간’, 그 이후의 삶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의 고관 부인 안나 카레니나는 가정교사와 불륜 행각을 벌이다 발각된 오빠의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다. 오빠와 올케 사이는 용케 봉합해놓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그날 기차역에서 만난 젊은 장교 브론스키에게 모종의 끌림을 느낀다. 당황한 그녀는 도망치듯 예정보다 빨리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데 도중에 브론스키가 그녀의 뒤를 좇아 같은 기차에 탔음을 알게 된다. 종착역, 마중을 나와 있는 남편 카레닌을 보자 , 어쩜! 저이의 귀는 어째서 저렇게 생긴 걸까?’(1, 229)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거의 10년이 됐건만 왜 이제 와서 남편의 귀가 별안간 못생겨 보인 걸까. 말하자면 운명의 테러와 같은 열정 때문에, 지금껏 아름답고 정숙한 귀부인이자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살아온 안나의 삶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긴다.

 

 

 

 

 

 

 

 

 

 

 

 

 

8부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하지만 이 이 두툼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 그대로 안나 카레니나의 인생 역정, 즉 사회의 통념과 편견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2, 122)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동의어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휘감고 옥죄는 거짓과 기만의 거미줄을 찢어버린다. 결국 그 대가로 그녀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안나의 열정이 소설의 중심축을 형성함에도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연애, 심지어 결혼 자체도 아닌, 그 모든 것 이후에 오는 생활의 속성을 거시적이면서도 세밀하게 안팎에서 묘파해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1, 13) 이렇게 시작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무엇보다도 가정 소설이며 사회 소설이며, 이른바 위대한 순간’(카타르시스의 순간)보다 그 이후의 삶을 문제 삼는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 직후 연출되는 장면을 보자.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남편 앞에서 회개하고 연민에 사로잡힌 카레닌은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러나 거국적인 화해로 점철된 위대한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일 뿐, 그 이후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 묵직한 일상의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진정한 공포는 극적인 파국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오는, 철저히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저 생활의 무게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주인공의 자살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총체로서의 삶은 지속된다. 더욱이 그 삶이란 레빈과 키티의 결혼생활이 보여주듯 지극히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이다. 불륜의 주체였던 안나는 물론이거니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을 인간의 차원이 아닌 더 높은 심급으로 이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레빈의 형의 말대로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간음을 소재로 죄와 벌,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소설로 거듭난다.

 

그러나 실제 소설 속에서는 기독교적 신이 형상적으로 부각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이신론(理神論)의 세계관이 지배적이다. 가령 안나는 무섭게 생긴 한 농부가 침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무슨 일을 하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읊조리는 것 같은 꿈을 꾼다. 자살하기 전날 밤에도 거의 비슷한 꿈을 꾸고, 자살하는 순간에도 명멸하는 그녀의 의식의 한가운데로 그 농부가 떠오른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철은 안나가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순간 한 역무원의 목숨을 앗아간 기차-철로의 상징이며, 그것이 계속 그녀의 무의식을 장악하다가 그녀를 달려오는 기차 밑으로 던져넣은 것은 아닐까. 이런 가정이 유물론의 산물이든 미신의 산물이든 어떻든 인간 개개인의 삶과 세계의 흐름을 관장하는 어떤 거대한 힘(때로는 자연이라 불리는)이 있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순간도 그것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이름 앞에는 흔히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세태와 풍습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담아낸 백과사전일뿐더러 러시아문학 특유의 심리적 깊이,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유까지 갖추고 있다. 그 기저에는 그가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후예로서 유년시절부터 평생 동안 쌓아올린 직간접인 경험과 폭넓은 사유, 학습의 성과가 깔려 있다. 거장의 여러 자아가 소설 속 인물의 모습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도시의 번잡한 사교계를 떠나 시골의 영지를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그러면서 사상적 추구에 골몰하기도 하는 지주 귀족 레빈은 작가의 직접적인 분신이다. 그러나 그가 꿈꾼 가장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은 허름한 농민 차림에 봇짐을 진 순례자였던 듯하다. 노작가는 해묵은 가정불화 끝에 오랜 숙원을 실행에 옮겼으나 그의 마지막 여행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시골의 외딴 기차역에서 82년에 걸친 인생을 마감한다.

 

 

 

 

 

 

 

 

 

 

 

 

 

 

 

 

 

 

 

 

-- <책앤>

 

--- 톨스토이 번역 중입니다! 큰 작품을 맡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으나, 여러 정황상, 좀 규모 있는 단편을 하고 있는데, 역시 번역은 '중-노-동-'입니다.  독려 차원에서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글을 올려봅니다.

-- 작가의 밑천은 물론 자신의 삶 전체니까 당연한 소리이지만, 톨스토이는 그 인생 자체가 톨스토이 소설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거의 백프로 자전소설이고요. 당대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엄친아'(부유한 백작에 젊고 예쁜 아내에 명성에 등등)이고 죽어서는 거장이고, 흠, 이런 재수 없는(ㅋㅋㅋ) 인물도 있지만, 솔직히, 단편 하나만 읽어봐도 입이 쩍~ 벌어지긴 합니다...^^;; 그러니까 더 재수 없고..-_-;; 그에 대한 얘기는 언제 또 하도록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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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악마를 어찌할 것인가

-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비행기에 탄 채 어디론가 이송되던 소년들이 불의의 사고로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파리 대왕>은 이 소년들의 모험담을 다루고 있지만 모험소설이나 성장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디스토피아 소설, 혹은 우화의 형식 속에 인간의 본성과 그것의 사회적 발현인 정체(政體)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철학소설에 가깝다 

(베엘제붑(-불)/파리대왕)

 

소년들은 크게 랠프 파와 잭 파로 나뉘는데, 이를 통해 이성과 광기(본능), 문명과 야만,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낙관주의와 냉소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등의 이분법이 형성된다. ‘쿠데타-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한 후 불이 필요해지자 피기의 안경을 훔쳐가 버린 잭 일당 앞에서 랠프와 피기가 하는 말이 나름의 도식이 될 수 있겠다. 두 소년의 과 잭 일당의 야유와 함성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이 말을 해야겠어. 너희들은 마치 한 패의 어린아이들처럼 처신하고 있다는 것을

야유소리가 높아졌다가 돼지가 마술적인 힘을 가진 흰 소라를 쳐들자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 편이 좋겠어? 너희들같이 얼굴에 색칠한 검둥이처럼 구는 것과 랠프같이 지각 있게 구는 것과

오랑캐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돼지는 다시 소리쳤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을 하는 것 - 어느 편이 더 좋겠어?

다시 함성과 휙 하고 날아오는 소리.

소음에 지지 않고 랠프가 다시 외쳤다.

법을 지키고 구조되는 것과 사냥을 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으냔 말이야?(270)

 

랠프는 해군 중령의 아들로서 아빠 없는 피기를 은근히 무시하고 또 피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별명(피기-돼지)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리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온화한 유형의 지도자-대장으로 나온다. 피기 역시 훌륭한 통치자의 멘토, 즉 지성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성가대 지휘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야심가 잭 대신 랠프가 선거를 거쳐 대장으로 선출되는 데 엄정하고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선거 장난은 소라만큼이나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잭은 항의를 하기 시작했으나 좌중의 고함소리는 대장을 골라내자는 일치된 의견에서 박수갈채로 랠프를 선출하자는 것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知性)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것은 돼지였고,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 - 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30)

 

그 때문인지 랠프와 잭의 연대는 시작부터 위태롭다. 우선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불을 피워 연기를, 즉 봉화를 올리자는 견해와 당장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자는 견해가 대립한다. 작가는 은근히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지만 과연 어느 쪽이 옳다고 정언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 잭 일당을 얼굴에 색칠을 한 채, 즉 가면을 쓴 채 짐승처럼 날뛰는 오랑캐, 공포와 폭력의 축으로 몰아간 것(상당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암퇘지 사냥 장면이나 사이먼-‘짐승살해 장면)은 영국 작가 특유의 결벽증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파리 대왕>의 내포 작가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아이-자식을 바라보는 어른-아빠와 유사하다. 어른-아빠는 소위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랠프와 피기)이나 아직 백지 상태에 가까운 꼬마들이 자신의 권위를 따르며 그 훌륭하고 질서정연한 세계를 모방하길 바란다. 소라의 이용, 선거 흉내, 봉화 지키기 등에 반영된 의회 민주주의의 미니어처를 보라. 한데 하나의 전범이나 희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어른-아빠가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진짜로 등장한다. 이 해군 장교가 아이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성인들 - 어른들도 함께 있니?”(300)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사태를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 그는 어른-아빠특유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아이들을 나무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302)

 

진짜 어른-아빠앞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 흉내를 낼 수 없다. 그토록 호기롭고 용감하게 어른의 세계를 구축했던 잭마저도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른-아빠의 세계는 완벽할까 

 

<파리 대왕>어른-아빠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 바깥에 더 큰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섬 속의 아이들이 봉화냐, 사냥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두 명의 희생양을 내기에 이르렀다면, 섬 밖의 어른들은 숫제 핵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른 세계라고 짐승이라는 이름의 불안과 공포가 없을 리 없다. 잭 일당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무수한 파리 떼로 뒤덮인 암퇘지의 머리, 파리 대왕’(베엘제붑-악마)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결코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이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사이먼)는 재빨리 눈을 떴다. 야릇한 햇볕 속에 그 머리는 재미있다는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꾀는 파리도 도려낸 창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에 꽂혀 있다는 창피함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205)

 

 

-- 네이버캐스트

 

-- 저 글을 쓰며 처음 읽어봤는데요(-_-;;)  그 명성에 비해... 좀 실망했습니다.(영화는 오히려 괜찮았는데요.)  전반적인 주제는 아무래도, 도...키의 <악령>에 가까울 법도 합니다만. 영국 소설은 아무래도 너무 귀족적인(??) 감이 있어요. 최고 소설가는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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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생활하하던 1984년에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부러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사 읽었던 책인데, 이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네요.

구원의 상징이었던 불(안경으로 발생시켰던)을 둘러싼 다툼, 추적자의 신호소리, 히죽이 웃던 '파리대왕'의 등장 등등에서 적잖이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소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소설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또다른 노벨상 수상작 '백년동안의 고독'도 같이 언급해 주시니 더욱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푸른괭이 2013-01-2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백년...>은 아직 다룰 기회가 없었네요-_-;;

DANNYJ 2013-01-2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국에서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더 유익한 포스팅 부탁드려요!

푸른괭이 2013-01-22 15:38   좋아요 0 | URL
예,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