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네 번의 자살미수,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 시도와 성공. 한 작가의 문학세계의 핵심어가 자살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삶 자체가 이렇게 요약되기는 쉽지 않겠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왜 그토록 자살에 집착했을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二十世紀旗手)라는 유명한 말, 그 기괴한 원죄 의식의 근거가 무엇일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3)

 

 

(왼쪽 사진은 처음 보는데, 이미지가 사뭇 다르네요! 웬 훈남의 중년이 ^^;; )

 

오바 요조가 쓴 총 세 편의 수기는 부끄럼으로 점철된 27년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배고픔과 가난을 모르고 보낸 유년기와 익살연기를 시작한 소년기(수기1), 담배여자 등 타락과 이른바 가마쿠라 정사(情死) 미수 사건, 호리키와의 교류, 좌익사상에의 경도로 요약되는 청소년기(수기2), 무명 만화가(‘조시 이키타’)를 자처하며 넙치(시부타), 시즈코 등의 집에 기식하다가 약물 중독, 각혈에 시달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청년기(수기3). 여기에 스스로를 자살로써 벌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죄가 있는가.

 

 

 

 

 

 

 

 

 

 

 

 

문제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자기도취이다. 나르시시즘은 그 표현 양상은 다양할 수 있으나, 애초 희랍신화가 보여주듯,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요조는 마땅히 어떤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죄인(=범인), ‘음지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조장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을 더 키워나간다. 주로 여성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일련의 기괴한 행각(가령 자신의 내연녀가 능욕당하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거의 일부러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건강한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기생충의 삶을 고집하며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는 것 등 그 스스로 익살은 물론 수난을 자처한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51)

 

어떤 경우든 요조의 관심사는 오직 이며 그 는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카인의 표식을 단 이다. 여기에 요조와 호리키의 말장난을 적용해 보자.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아아, 알 것 같다.(115)

 

다른 식의 물음을 던져보자. ‘’, 그리고 은 희극명사인가, 비극명사인가. 요조의 삶은 죄와 벌의 희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죄 많은 광대이고자 한다. 그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자가 바보이자 외톨이인 다케이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니, 그가 어울리는 자들은 대체로 반쯤 날건달인 호리키, 어딘가 타락과 연민의 냄새를 풍기는 여성들 등 소외계층이거나 타락계층이다.

 

 

(다운만 받아놓고 아직 못 본 ㅠ.ㅠ 영화 ^^;) 

 

 

이렇게 낮은 데로 임하여 돈키호테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인-바보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는 지상의 그리스도로 거듭난다. 훗날 어느 술집 마담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 지상의 그리스도를 꿈꾼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범죄자, 백치, 광인이 될 수밖에 없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조는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을 선고한다. 물론 다분히 퇴폐적인 측면이 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중략)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31)

 

몇몇 소설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격>은 거의 사소설(私小說)에 가까운, 말하자면 가면의 고백이다.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그의 우울증은 치유됐을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의 냉소적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엄살에서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말미에 언급한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도 재밌습니다 ^^; 

 

 

 

 

 

 

 

 

 

 

 

 

 

원래 썩 좋아하지 않은 일본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큰데요, 요즘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우울할 때마다 항상 틀어놓았던(일본어 공부도 할겸^^), "필란도노 카모메와 데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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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미 2013-04-0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통을 향한 집요한 엄살...ㅋㅋㅋ 인간실격에 딱맞는 표현이네요
 

낯선 시간, 낯선 소설 속으로: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1913)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1, 15) 잠들기 전 는 언제나처럼 엄마의 저녁 키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침 손님(스완 씨)이 와 있어 엄마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대한 용건이 있으니 꼭 의 방으로 올라와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내지만 냉대에 부딪친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가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으니 함께 자주라는 아빠의 권유도 있고 하여 엄마는 의 방으로 온다. 엄마가 의 곁에서 책을 읽어주는 밤, “나는 이런 밤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1, 83)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나자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며 귀가하는 성인 가 등장한다. 엄마는 에게 간만에 홍차를 권하고 사람을 시켜 일부러 프티트 마들렌을 사오게 한다. 과자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입안으로 가져간 순간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1, 86)라는 것을 잊을 만큼 강렬한 기쁨을 맛본다. 그 진앙을 찾던 끝에 콩브레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준 마들렌의 맛에 도달한다.

 

 

 

 

 

 

 

 

 

 

 

 

 

 

여기까지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권 <스완네 집 쪽으로>11절의 내용이다. 남편이 죽은 이후 처음에는 콩브레를, 그 다음은 자기 집과 방과 침대를 떠나지 않고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사는 레오니 아주머니, 주인마님 보필과 살림에 열성인 만큼이나 외부인들(노처녀 욀랄리 할멈)과 아랫사람(부엌데기, 즉 지오토의 자비)에게는 매몰찬 하녀 프랑수아즈의 얘기가 흥미롭다. 독립된 소설처럼 삽입된 스완의 사랑은 물질적인 부와 세련된 몸가짐에 덧붙여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사교계 인사 스완이 천박한 화류계 여자 오데트를 사랑하면서 겪는 감정적 흐름을 다룬다. 환희, 의심과 질투에 이어 찾아온 것은 환멸이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2, 330) 이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스완은 오데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들의 딸 질베르트가 의 첫 사랑이 된다. 이렇듯 콩브레의 는 두 산책로인 메제글리즈(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 부르주아지귀족의 세계를 오가며 작가를 꿈꾼다. 수시로 재능의 부재를 절감하지만 종국에는 총 500명이 넘는 인물들의 대서사시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순간과 영원을 오가는 무한대의 시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세밀화 같은 묘사, 소설적 가공 없이 무심한 척 던져지는 인물들과 야생의 상념들, 학술서 수준의 미학 담론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직 소비만 하는 상류 사회의 수다의 생리학’(벤야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몽롱한 반수(半睡)의 서사를 좇아가기가 만만치 않다. 프루스트의 실제 삶(명망 있고 부유한 집안의 장남, 타고난 감수성과 총명함, 최상의 교육 환경 등)에서도 극적인 사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장 이브 타디에). 유일한 결핍인 병약한 체질(천식)은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만년 마마보이의 호사스러운 삶, 가령 엄선된 식재료로 구성된 식탁, 과민성 피부 관리법, 소음과 외풍과 빛이 차단된 최고급 거처 등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알랭 드 보통).

 

 

 

 

 

 

 

 

 

 

 

 

 

사진 속의 프루스트 역시 스완처럼 마땅한 직업도 없이 사교계를 드나들며 딜레탕트의 삶을 즐기는 전형적인 댄디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권의 번역서에 미발표 평문, 얄팍한 소설책(<즐거움과 나날들>)이 거의 전부인 허랑방탕한 고급 속물이 상당한 규모의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바로, 우여곡절 끝에(당시 갈리마르-NRF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지드는 훗날 프루스트에게 이 소설의 출간을 거부한 일을 통렬히 후회하는 편지를 쓴다) 자비로 출간된 <스완네 집 쪽으로>이다. 이어 총 7권에 육박하는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완간되는 것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쳐 작가가 사망한 다음이다.

 

 

 

 

 

 

 

 

 

 

 

 

 

 

이 소설을 둘러싼 논의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 그리고 글쓰기와 인상에 관한 이야기(폴 리쾨르), ‘시간-진리를 찾아가는, 그 점에서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들뢰즈), 욕망을 포함하여 여러 사물-대상의 변형 과정에 주목하는 소설(지라르) . 실상 소설의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전체의 맨 처음(“오랜 시간(longtemps)”)과 맨 끝에(“시간 속에(dans le Temps)”) ‘시간이 버티고 있다.

 

 

 

 

 

 

 

 

 

 

 

 

 

 

 

('시인' 이성복의 불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

 

프루스트는 환시와 환각의 안개가 드리워진 낯선 시간 속을 헤매며 이미 환()이 돼버린 잃어버린과거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런 식으로 되찾은현재-영원을 선보인다. 40년에 이르는 인생의 전반부를 한심한 허송세월에 바치고 남은 10년을 파리 번화가에 쌓아놓은 자기만의 성에 틀어박힌 채 잃어지고’ ‘살아진시간들과 그 속으로 사라진 이름’, ‘’, ‘사물을 살려내는 데 보낸 작가!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식마저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 크로노스 신으로 의인화되는 시간과 맞장을 떠본들 얻는 것은 패배-죽음뿐이다. “!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2, 407)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시간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이보다 더 고독하고 숭고한 소설쓰기가 또 있을까. 한 시인이 그의 소설을 인식의 허망함과 허망함의 인식”(이성복)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리라.

 

-- <책&>

 

**  이번 호에 실은 건데 편집 과정에서 문장이 너무 심하게 훼손돼서(ㅠ.ㅠ) 부랴부랴 올립니다^^;

작품이 난해하니 참고서(^^;)도 난해하고, 어쩜, 작가의 평전조차 어찌나 지루한지! ㅋㅋ 어쨌거나 머릿속에 애매하게 남아 있는 '스완'과 뭐 여타 인물들이 좀 더 또렷해졌고, 불어 공부할 때 읽었던 앞부분을 훌륭한 번역으로 다시 곱씹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옛날 판본으론 2, 3권 정도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새 번역본이 출간되는 속도에 맞추어 꾸준히 완독(!)해 볼 참입니다. 바로 진입(?)하기 두려우신 분은 만화 버전으로 먼저 보세요! 이것도 계속 나오는 중입니다.  

-- 앗,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의 출처는,  척 봐도 아시겠죠? 바로 이 분! ^^;

 

 

 

 

 

 

 

 

 

 

 

 

 

 

 

 

-- 아래, 지라르의 책에도 소개된(?) 프루스트의 사진입니다.^^;  

 

- 크로노스 관련 부분, 물론 염두에 둔 이미지는 고야의 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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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미학과 숭고미: 숙명’, 그것의 이름은 노트르담

-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루이 11세 치하, 15세기 프랑스 파리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실제로 시테 섬과 이른바 뒷골목, 노트르담 대성당을 비롯한 건축물 묘사도 생생하고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하는 루이 11세의 형상도 또렷한 편이다. 마녀재판이나 공개처형을 매개로 한, 당시의 사법, 형벌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도 맹렬하다. 여러 모로 29세의 위고가 품었던 작가적 야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소설은 산만한 구성, 지루한 장광설, 지나치게 환상적인인물과 사건 등 19세기의 여느 프랑스 고전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소설이 거의 200년 동안 우리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파리의 노트르담>은 낭만주의 미학이 십분 발현된 소설이다. 인물들의 성격은 물론 갈등과 사건의 양상 역시 대단히 극적이다.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라 에스메랄다는 그 자체로 동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충격적일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 탓에 끊임없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금욕과 의지의 화신인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마저 그녀에게 눈이 멀어 상식적으론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보여준다. 대체로 이 인물은 종교와 학문의 빛에 가려진 중세의 암흑을 상징하는 것 같다. 라 에스메랄다를 향한 그의 열정 역시 어딘가 진정성이 결여된, 열정이라기보다는 열정에 관한 수사(修辭)처럼, 억눌린 관능적 욕망의 병리적 분출처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카지모도는 추()의 극치를 이루는 외모 덕분에 오히려 더 생기롭다. 등뼈가 활처럼 휘고 가슴뼈가 앞으로 툭 불거지고 머리는 양어깨 속에 푹 파묻힌 심각한 곱사등에 두 다리는 제멋대로 뒤틀린 절름발이, 왼쪽 눈에는 무사마귀가 나 있는 애꾸눈. 게다가 열네 살 때부터 종지기로 살아 귀마저 멀었다. 이 흉악한 존재가 곧 성모마리아’(노트르담)의 수호를 받는 성역의 닮은꼴, 심지어 그것과 한 몸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 피조물과 이 건물 사이에는 미리부터 존재하던 신비로운 조화 같은 것이 있었다. (중략) 그리하여 늘 대성당의 방향으로 자라나고, 거기서 살고, 거기서 자고, 거의 한 번도 거기서 나가지 않고, 줄곧 그 신비로운 압력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그는 그것과 닮아가고, 말하자면 그 속에 들어박혀, 마침내 그것의 일부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중략) 그의 툭툭 불거진 각은 건물의 움푹움푹 들어간 각에 끼여 박혀, 그는 이 건물의 입주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연적인 내용물이기도 한 것 같았다.(1, 282)

 

그가 처형되기 직전의 라 에스메랄다를 구출함으로써 성역 안에서 절대적인 미와 절대적인 추가 충돌, 결합한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말없이 서로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아리땁기 그지없는 것을, 그녀는 추하기 그지없는 것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미추의 대립은 선악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 라 에스메랄다는 동정심도 많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카지모도는 심술궂고 사납고 거칠다. 그러나 작가가 추구한 미학은 이렇게 경직된 미추의 변증법을 넘어선다.

 

 

 

 

 

 

 

 

 

 

젊은 위고가 숭상한 낭만주의, 소위 그로테스크 미학의 핵심은 세계의 이원성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에 있다. , 세계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빛과 어둠 등 서로 모순되는 가치로 구성돼 있다. 그 날카로운 대조는 대단히 불편하고 아주 자주 비현실적이지만 대신 단순한 아름다움이 결코 줄 수 없는 숭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팜므 파탈야수-괴물의 사랑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니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숭고하다.

 

그녀가 채광창으로 가서 보니, 가련한 꼽추는 벽 모퉁이에, 고통스럽고 체념한 듯한 태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게 자아내는 불쾌감을 억제하려고 애를 썼다. “이리 와요.”하고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집트 아가씨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카지모도는 그녀가 자기를 쫓아내는 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물러갔다,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찬 눈을 처녀를 향해 감히 쳐들지도 못하고. “이리 오라니깐.”하고 그녀는 외쳤다. 그러나 그는 계속 떠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독방에서 뛰어나가,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자기 몸에 닿는 것을 느끼고, 카지모도는 사지를 떨었다.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을 들어, 그녀가 자기를 그녀 곁으로 도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은 기쁨과 애정으로 온통 반짝였다. 그녀는 그를 자기의 독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문턱 위에 서 있었다. “안 돼요, 안 돼요.” 그는 말했다. “부엉이는 종달새의 보금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에요.”(2, 250)

 

이 숭고한 열정의 연원은 꽤 깊다. 18년 전, 집시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천사 같은 계집애를 훔쳐가면서 그 자리에 괴물 같은 사내애를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노트르담의 안을 구석구석 누비던 사내애와 노트르담 밖의 거리를 누비던 계집애는 먼 훗날 죽음을 통해 완전히 결합한다. 노트르담의 벽 어디에 그리스어로 새겨진 글자 숙명의 실현이랄까.

 

 

 

 

 

(빅토르 위고의 소설 중 지명도는 낮지만, 개인적으론 무척 감동 깊게 읽은 소설입니다. <악령>에도 언급되는데, 좋은 번역이 나와 기뻤지요...^^;)

 

 

 

 

 

 

이 단어는 실상 <파리의 노트르담>의 모든 인물을 다 아우른다. 양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프롤로, 파리를 배회하는 거리의 시인 그랭구아르, 경박한 바람둥이의 전형 페뷔스,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순간 영원히 잃어야 했던 자루 수녀귀딜, 노트르담을 공격하는 부랑자와 거지 무리들. 이들은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숙명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종속된 자들이다. 숭고한 괴물처럼(카지모도!)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결국 그 숙명의 상징이리라.

 

-- 네이버캐스트

 

--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인기작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아무래도 <레...>가 압권이죠, 여러 모로? 특히, 후반부의 장발장은 소위 할아버지 역할을 맡는 데 재미를 붙인 위고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코제트와 그의 관계도 감동적이고.) 하기야 우리에게 그는 늘 할아버지네요 ㅎㅎ 

 

 

빅토르 위고와 동갑인 유명 작가, 바로, 모험소설의 대가,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남긴 (아버지-페르) 뒤마입니다! 위고는 순문학이고 뒤마는 통속문학이었으나(지금도 대략 그렇게 정리되겠으나), 결국 책은 독자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또 오래 받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니까요.

그나저나, 작가도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겠어요. 적어도 사진은 잘 나온 것만 몇 장 남겨야...-_-;; 뒤마 1세는, 그의 사진은 처음 보는데(!), 언젠가 아들(<춘희>를 썼죠)의 못된(?) 회상대로 참 호탕(?)하게 생겼네요 ㅋㅋ  성인병을 많이 앓았을 것 같아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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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카라마조프>의 아이들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아이들

 

과연 신 없는 유토피아가 가능할까. 이반의 이성은 그 꿈에 젖어 있지만 드미트리의 감성과 알료샤의 영성은 영원히 신의 품 안에 머물고자 한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든 말든 <카라마조프>에서 영원한 삶을 담보해주는 지상낙원의 은유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하나는 내가 번역한 책, 하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완전 빠져 있던 번역본(옛날 판본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죠 ^^;), 마지막 하나는 대학원 시절 원문 대조 교열을 본 번역본입니다 ^^;)

 

 

일류샤라는 아이가 그야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반의 어법을 빌자면 부조리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무덤 옆에 콜랴 크라소트킨, 스무로프 등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다. 앞서, 이반이 추상적인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반역을 주장한 것을 상기해보라. 알료샤는 정반대로 구체적인 한 아이 일류샤의 죽음을 근거로 사랑과 용서를 촉구한다. 일류샤의 죽음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바로 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순환논리 같지만, 이들이 살아 있기에 또한 일류샤의 죽음이 유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카라마조프들은 아비와 이복형 스메르쟈코프의 죄악과 죽음을 대가로 삶을 선사받는 셈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비와 형제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들-형제들이 앞으로 아름다운 삶을 일궈나가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취한 제사가 의미하는 바도 이것이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서 12: 24)

 

작가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풀어주는 구약의 욥기도 비슷한 전언을 담고 있다. 실상 도스토예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욥의 신실함과 의로움이라기보다는 신의 시험이 종결된 이후 욥이 보이는 반응이다. 성경 속의 욥과 달리 <카라마조프> 속의 욥은 심히 고뇌하며 반문한다. 예전의 아들딸들을 영원토록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새 아들딸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될까, 하고. 이에 대해 작가는 해묵은 슬픔을 대체할 온화한 기쁨에 대해, 삶의 위대한 비밀에 대해 얘기한다.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이다. 이제 작품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도..키의 두 번째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작가보다 스물 네 살이 어렸습니다. 미인은 아니지만, 심지어 러시아 여자치고는 좀 빠지는 얼굴이지만, 야무지고 당차 보이죠? ^^)

 

도스토예프스키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완성한 대작 <카라마조프>를 아내에게 헌정했다. 실제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첫 부인과 사별한 25세 연상의 남자 곁에 머물며 14년 동안 알뜰한 살림꾼이자 뛰어난 조력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른바 가정의 행복을 누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의 다음호를 준비하고 <카라마조프>2부를 구상했다. 건강이 악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아직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그럼에도 죽음은 그 나름의 원칙대로 그를 찾아왔고, 그는 폐동맥 파열로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딸 류보비는 열두 살, 아들 표도르는 열 살이었다.

 

(그녀가 남긴 회고록은 도..키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소설가의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수필가(^^;)가 되었을 법한 평이하고 균형 감각 있는 문체가 돋보입니다.)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여우같은 아내, ‘토끼같은 두 아이와 더불어 인생의 절정을 구가하며 쓴 소설이다. 그 무렵 간질병 발작으로 사망한 막내아들 알료샤에 대한 피 끓는 애도의 감정도 자연스레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 떠올려 보자. 임종의 침상에서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가 가장 애달파 한 것은 물론, 두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이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곧 그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록이자 그의 아이들, 그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 앞에 바치는 유언서이다.

(-- 끝)

 

안나, 딸 류보비, 아들 표도르입니다. 놀랍게도(^^;), 처음 보는 사진입니다. 류보비는 훗날 (삼류) 작가가 되는데, 편파적이기로 유명한(특히 도..키의 첫 부인에 대한 '모함') 회고록을 남깁니다. 간질병은 유전이 돼도 천재성은 유전이 안 되나 봅니다...-_-;; 톨스토이 집안에서는 계속 나름대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는데(그래서 인물 사전에서 '톨스토이' 항목은 항상 긴데) 도...키 집안은 앞뒤로 다  그 도..키 밖에 없으니...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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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1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만큼 '인간의 본성'을 속속들이 저 밑바닥 끝까지 파고 내려가는 작품도 드물지 싶어요. '음울한 과거를 잊고 이 순간의 삶을 즐기며 밝은 미래를 꿈꿀 것.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생각한 진정한 구원과 부활의 실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작가의 가족을 둘러싼 흥미로운 얘기도 잘 들었습니다. 늙은 작가에겐 '아이들'만이 희망이겠죠.
* * *
지나가는 바람이 일으킨 먼지의 소용돌이처럼 생명체들은 생명의 커다란 숨결에 매달려 회전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부동성을 너무도 잘 가장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과정이라기보다는 사물로 취급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형태의 항구성조차도 한 운동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는 생명체들을 실어 나르는 보이지 않는 숨결은 희미한 출현 속에서 우리 눈에 구체화되기도 한다. 우리는 특정한 형태의 모성애 앞에서 이러한 갑작스런 광명을 접하게 되는데, 모성애는 대부분의 동물들에서 너무나 현저하고 감동적이며 종자를 염려하는 식물에서까지도 관찰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 우리에게 생명의 비밀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각 세대가 자신을 뒤따르는 다음 세대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생명체가 무엇보다도 경과의 장소이며 생명의 본질은 그것을 전달하는 운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될 것이다. -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中에서

푸른괭이 2013-01-1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만이 희망인 건 '젊은'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이반은 양심이 켕기는 것을 느낀다. 나를 낳아준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자유에 맞서, 행동이 아닌 욕망까지도 관장하려는 양심의 자유가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결과 범인이 드미트리라는 억지스러운 확신을 얻는다. 그럼에도 희뿌연 자책은 계속되고 그는 구태여 세 번씩이나 스메르쟈코프를 찾아간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순간, 양심의 자유에 따라 모종의 윤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다.

 

, 늦은 시각이지만 당장 예심판사나 관련자를 찾아가 증거물을 내놓고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을 동시에 고발하는 것. 하지만 왠지 그는 그 일을 내일로 미룬다. 왜 이런 유예가 필요했을까. 중요한 것은 스메르쟈코프가 곧 자살할 것임을 예감, 어쩌면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날 밤, 바깥에서 누가 창틀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분신-악마가 말하지 않는가. “저건 자네 동생 알료샤가 아주 뜻밖의 흥미진진한 소식을 갖고 온 걸세, 내 장담하지!”(3, 298)라고.

 

이튿날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호언장담과 자살에 대들기라도 하듯 기어코 법정에 나간다. 하지만 문제의 3천루블까지 내놓아도 아무도 그의 진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 이반이 감내한 수치를 과연 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반의 내 안의 법정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전날 밤 즉시 자수하지 못한 죄, 즉 유예와 비겁함의 죄까지 떠맡아 완전히 광기의 늪에 빠진다. 이반의 고뇌는 그가 향유한 자유의 용량에 비례한다. 그가 위대한 죄인인 것은 엄밀히 말해 죄의 크기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크기의 따른 것이다. 죄 자체보다는 죄의식이 이반을 윤리와 도덕의 극점으로 이끄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작가 중 도...키, 아니, 어쩌면 도...키 주인공들의 냄새를 가장 많이 풍기는 작가는 카뮈가 아닐까 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에는 이반, 키릴로프 등에 대한 얘기도 꽤 많이 나왔던 것 같은데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은 <전락>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이반이 쓴 것 같은 (얄궂은 ㅎㅎ) 느낌을 주더라고요.) 

 

5.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 화해

 

대체로 <카라마조프>는 서로 모순되는 원칙의 대립 위에 구축되었다. 가령, 알료샤 vs. 이반, ‘’(그리스도) vs. 대심문관(적그리스도), vs. 악마. 물론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길 잃은 양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좀 더 온건한 표현으론 화해이다. 이 임무를 맡은 알료샤는 신성의 육화 같은 존재, 혹은 소설 속에 강림한 그리스도이다. 다시 대심문관으로 돌아가자.

 

이반은 대심문관의 키스로 끝맺는다. ‘가 대심문관에게 건넨 화해의 몸짓이리라. , 대심문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원칙에 있어서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 특히 용서라면 대심문관의 성격상 더욱더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신-그리스도일지라도 상대방이 달가워하지도 않는 용서와 구원을 베풀 권리는 없다.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하는 거지.”(1, 554) 이반의 이 말은 그래서 비극적인 것이다.

 

한편, 대심문관의 바깥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대심문관과 의 관계를 반복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혀 반대이다. 알료샤는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형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반은 표절이라고 외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 이반 역시 동생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칙과 논리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대심문과는 달리 화해의 몸짓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어찌 보면 여기에 화해의 전령으로서 알료샤가 갖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물 <카라마조프>. 최근 것인데 아직 못 봤어요.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는데, 이반을 저런 괴상한(??) 얼굴로...ㅠ.ㅠ 스메르쟈코프도 적어도 저 사진만으론 마음에 안 드네요. 좀 더 어두워보여야 하는데...)

 

실상 이반의 무신론에 맞서는 알료샤의 사상은 정확히 사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계와 타자는 또한 그에게 늘 구체적이다. 가령 이반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반면, 알료샤는 하루 24시간을 항상 발로 뛰어다니며 남을 돕는다. 물론 이 청년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조시마 장로가 사망하자 그 시신에서 방향이 아닌 썩는 냄새가 풍긴다. 그렇다면 그는 성자가 아니란 말인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이 기적에의 유혹을 극복해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사람의 몸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과 성스러움은 결코 서로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다. , 장로의 시신을 통해 기적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장로의 위업이나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할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믿기 때문에 기적을 본다는 것.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알료샤가 꾸는 꿈(갈릴래아의 카나)을 보라. 그것은 깊은 믿음이 불러낸 기적의 표현으로서 이반의 악몽과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알료샤의 영성이 신의 존재를 보는 반면(epiphany) 이반의 이성은 그 분열적 성격 때문에 악마를 보는 것이다.

(아들 혹은 아들들이 아비를 죽이는 <카라마조프> 연극 공연(준비)과, 어린 아들을 잃은 아비의 감당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이  극적으로 섞여 있는 영화! 연극이 끝나자 아비는 자살합니다ㅠ.ㅠ )

 

<카라마조프>의 구성적 축이면서 동시에 감성의 영역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역시 알료샤처럼 세계와 인간의 모순 앞에 경외감을 갖고 고개를 숙인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더 끔찍한 것은 영혼 속에 이미 소돔의 이상을 품은 상태에서도 마돈나의 이상을 또한 부정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죄악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자신의 가슴을 진실로, 진실로 불태운다는 거지.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1, 228.)

 

저 고백은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1, 229)라는 말로 끝난다. 실제로 드미트리는 아비 살해의 누명을 씀으로써 온갖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 전말을 간략히 보자.

 

그는 결백을 부르짖지만 즉흥적이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만 되풀이한다. 그렇게 길고 고된 심문이 끝난 후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애기꿈을 꾼다. 아이들의 굶주림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 그는 고통과 죄에 있어서의 연대의식을 넘어서 윤리적 행동을 촉구한다. 심지어, 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이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그 자신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외친다. 간단히,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못된(!) 생각을 품은 죗값을 달게 받아 옥살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가히 작가로부터 열광자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착한 형을 알료샤는 다독인다. “형은 준비가 안 돼 있고, 또 그런 십자가는 형을 위한 것이 아니야.”(3, 528)라고. 실은 드미트리 쪽에서도 짓지도 않은 죄를 감당하는 것이 슬슬 두려워진 터이다. 간수의 하찮은 횡포도 참기 힘든데 유형생활을 어찌 견디랴!

(여러 <카라마조프> 영화 중 드미트리에게 가장 큰 비중이 실렸던 영화는 아무래도 이것! 율브리너가 드미트리 역을 맡았거든요ㅋ) 

 

결국, 드미트리는 알료샤와 이반의 독려를 받아 아메리카로 도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비극적인 고뇌와 비교된다. 두 형제 모두에게 있어 죄는 욕망 차원의 문제이지만 이반과 달리 드미트리는 죄책감의 굴레를 가뿐히 벗어버린다. 그러나 그의 변덕은 웃긴 만큼이나 상식적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가 유달리 빛을 발한다. 온갖 형이상학적 고뇌와 수식어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삶-목숨이기 때문이다카라마조프적인 저열함의 힘!

 

 

(나름 감동 깊게 봤던 러시아 판 <카라마조프>. 드미트리-이반의 여자들, 그루셴카와 카체리나, 둘 다 캐스팅이 완벽했던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취향상 금발 미녀 보다는 짙은 머리색의 그루셴카 쪽이 더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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