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하고 경건한 시민 사회와 아름답고 관능적인 예술 세계,

두 세계의 창조적 결합을 꿈꾸다:

- 토마스만,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을 담은 예술가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낭만주의 이래 공식처럼 굳어진, 고독과 소외의 천형을 감내해야 하는 천재 예술가 대() 우매하되 행복한 천중이라는 유구한 이분법이 여기서 다소 변형된다. , 관능적이고 이단적인 예술 세계의 반대편에 엄정하고 경건한 시민 사회가 존재한다. 물론 이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일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작가의 전기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이원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그의 문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모든 사람과 충돌하는 것일까? 왜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다른 소년들 사이에 있으면 왜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13)라고 자문하며 괴로워한다. 시를 쓰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저주받은숙명 탓이다. 다름때문에 그는 한스 한젠에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이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섞인 동경”(14)을 느낀다.

 

그가 한스를 사랑한 것은 우선 한스가 미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스가 모든 면에서 그 자신과는 정반대되는 상대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스 한젠은 우등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영웅과도 같이 승마를 하고 체조를 하고 수영을 하는 씩씩한 장부였고 모든 사람들한테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중략) / <너처럼 그렇게 파란 눈을 하고 온 세상 사람들과 정상적이고 행복한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14)

 

열여섯 살이 됐을 때는 비슷한 이유로 금발의 잉에”, “명랑한 잉에 홀름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그는 금발과 푸른 눈의 세계, 저 건강한 시민 사회에 마냥 편입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 살짝 발을 담그되 궁극적으로는 그 언저리를 맴돌며 자기만의 세계, 즉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실제로 서른을 넘긴 토니오는 그 꿈을 이룬다.

 

 

 

 

 

 

 

 

 

 

 

 

 

 

작가가 된 토니오는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으며 생활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단지 창조자로서만 간주되기를 원했다.(38) 그러나 강조하건대 생활인’, 그릇된 길에 접어든 시민혹은 길 잃은 시민”(59)으로서의 토니오가 없다면 예술인토니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화가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와 나누는 대화를 보자.

 

예술적인 것은 단지 우리들의 타락한, 우리들의 기예적인 신경 조직의 불안초조감과 냉철한 황홀경일 따름입니다. 인간적인 것을 연기해 내고 그것과 더불어 놀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효과적으로 멋있게 표현할 수 있으려면, 또는 그렇게 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싶으면, 우리 예술가들 자신은 그 무엇인가 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은 인간적인 것과 이상하게도 동떨어지고 무관한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44-45)

 

토니오의 말을 곱씹으면, ‘예술적인 것’(=‘인간 외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인간적인 것은 대립적 관계를 넘어서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년 만에 고향 도시를 밟았다가 덴마크로 간 토니오가 한스와 잉에를 먼발치에서 다시 보았을 때 느끼는 소회 역시 시민 사회를 향한 척력과 인력의 미묘한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잉에보르크 홀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해야 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98-99) ‘토니오 크뢰거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반영된바, 시민적인, 즉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향한 질투와 다름’(이상함)에 대한 집착, 이 모순되는 두 기질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진정으로 숭고한 예술이 완성된다.

 

청교도 정신에서 유래하는 명상적이고 철저하며 정확한 성품이셨고 우수에 잠기곤 하셨지요. 불확실한 이국적 혈통을 물려받으신 제 어머니는 아름답고 관능적이고 소박한 동시에 태만하고 정열적이었으며 충동적 방종성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중략) 이 혼혈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 훌륭한 가정 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보헤미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술가입니다. (중략) /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106-107)

 

문학에만 논의를 한정시키자면 토니오, 나아가 작가 토마스 만의 이상은 러시아문학과 같은 신성한 문학의 창조였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한 도정으로서의 문학, 구원해줄 수 있는 언어의 힘, 인간 정신 전체를 두고 볼 때 가장 고귀한 현상인 문학적 정신”(51)에 종사하는 자, 즉 문학가는 완전한 인간이며 성자(聖者)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고독 때문에 괴로워 우는 왕(<돈 카를로스>)이든 시민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보헤미안이든 예술가는 인식의 구토를 참으면서도 그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고서 깜.짝. 놀란 것이 <데미안>이 무척 독일문학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정녕 낭만적, 몽환적, 관념적이더군요! 물론 그 원류는 괴테이겠지만(노발리스하고도 비슷하고!), 헤세와 거의 동년배인 토마스 만을 떠올릴 수밖에요.

저 아리안족들의 오만함, 도저한 지루함과 엄숙함(!), 참아주기 힘들죠? ㅎ ㅎ 혹자는 토마스 만이 톨스토이나 도...키 등 러시아문학과 비슷하다고 느끼지만, 글쎄요, 러시아문학은 워낙에 '속', '속물성'에 대한 배려가 큰 문학이라서요...^^;  

 

그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바로 이 양반 -_-;;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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