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드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재색을 겸비한, 부유한 명문가의 딸로서 그녀는 자신의 비상함을 또렷이 의식할뿐더러 불쾌감을 유발할 만큼 그것을 강조한다. “나와 같은 여자의 운명에는 모든 것이 특이해야만 해.”(2, 115) 이런 식의 오만한 자존심, 무엇보다도 귀족 살롱 특유의 권태가 그녀의 뜨거운 열정을 부채질한다. 사랑에 관한 한, 그녀의 야망은 그 시대의 도덕률과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특히 그녀는 라 몰 가문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탓에 앙리 4세의 부인이었던 마고(마르그리트) 여왕의 연인으로서 정쟁 과정에서 참수를 당한 보니파스 드 라 몰을 숭배한다. 심지어 그의 기일에는 검은 상복을 입기도 하다. 처형당한 연인의 머리를 품에 안았던 마고를 향한 모방 욕망은 더 대단하다.(<적과 흑>의 마지막 장면, 쥘리엥의 잘린 머리에 키스를 하는 마틸드를 보라.) 그뿐인가. 야심 찬 여장부의 대명사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 아벨라르의 연인 엘로이즈, 루소의 <() 엘로이스>의 주인공들 등 그녀가 동경하거나 적어도 염두에 두는 대상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마틸드가 전범으로 삼은 보니파스 드 라몰, 그가 사랑한 여왕 마고. 이 영화로 더 유명해졌죠.^^ 

 

이렇듯, 마틸드는 타고난 지식욕과 왕성한 독서, 풍요로운 지적 환경 덕분에 실제로 사랑을 체험하기도 전에 사랑이라는 개념에 먼저 눈뜬다. 때문에 실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이 투영한 그 모습대로 사랑을 키우고 사랑의 대상을 자신의 틀에 따라 창조하려 한다. 그녀의 사랑이 시종일관 이기주의 혹은 자기중심주의의 산물인 것은 당연하다.

 

덧붙여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다. 소위 양갓집 규수치고는 너무도 쉽게 쥘리엥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더욱이 그녀가 먼저 유혹, 적어도 제안한다) 그 이후 자존심, 수치심과 싸우면서도 연애를 지속하며 임신을 한 후에도 아버지에게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한데, 그녀의 오만함이야말로 본질적으로 계급적 산물임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쥘리엥의 추측대로, 마틸드는 가문과 재산과 미모 덕분에 앞으로 무난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방욕망에 사로잡혀 인생을 소설책처럼, 역사 속 인물처럼 꾸려가도 현실적 기반이 튼튼한 자는 파멸하지 않는 법이다.

 

쥘리엥은 말하자면, 마틸드와 드 레날 부인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으나, 앞서 보았듯,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모방 욕망에 감염돼 있었다. ‘나폴레옹처럼!’이라는 좌우명은 그 무엇보다도 연애에 적용된다. , 상류 사회의 상징처럼 나타나는 여인을 하나씩 둘씩 정복하는 것. 드 레날 부인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사랑의 행복이라기보다는 정복의 쾌감을 안겨준다. 물론, 결국에는 레날 부인의 사랑에 모방 욕망마저 희석되고, 한계 상황에 처한 그가 의지하는 존재 역시 레날 부인이지만.

 

 

 

 

 

 

 

 

 

 

 

 

(역시나 <적과 흑>에 모종의 전범을 제공한 루소의 이 소설. 물론 이 소설 이전에 철학자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였던 엘로이즈의 연애가 있었지요.)

 

반면, 그에게 마틸드는 시종일관 상승과 정복과 모험의 욕망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실상 엇비슷한 또래의 젊은 연인 사이에 관능적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둘 모두가 갖고 있던 모방 욕망이다.(“사실 그들의 환희에는 약간 의도적인 기색이 스며있었다. 정열적인 사랑이 그들에게는 아직 현실이기보다는 모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2, 138) 쥘리엥은 은연중에 스스로를 아벨라르에, 생 프뢰(<() 엘로이즈>의 남자 주인공)에 비유하곤 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 비극의 주인공인데, 쥘리엥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런 비극으로 몰아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살다 보니 죽는 것이지,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그가 열심히 들고 날랐던 사다리는 어쨌거나 위로 올라가기 위한 도구였다. 사랑의 사다리가 결국 추락의 도구로 변질된 것은 역시나 비천한 신세드높은 마음을 키웠기 때문이리라.

 

5. 스탕달의 소설론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적과 흑>에는 ‘1830년 연대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830년은 나폴레옹의 실각한 뒤 다시 왕좌를 거머쥔 부르봉 왕조가 7월 혁명에 의해 무너진 해이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언급되는 프랑스의 왕은 여전히 샤를르 10세이며 연구자들이 추적한 바 쥘리엥 소렐의 모험은 18269월말에서 18307월말 사이에 걸쳐 일어난다. 한데 소설이 발표된 해는 1830년이다. , 이 소설은 7월 혁명의 발발을 전제하지 않은 채 거의 전적으로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적과 흑>이 어쨌거나 정치소설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수시로 정치에 대해 논하며(특히 드 라 몰 후작의 살롱) 그들 스스로 모종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피라르 신부(장세니스트: 자유주의자)와 프릴레르 부주교(예수회파: 자유주의자)의 경우처럼 종교적 분파와 정치적 성향이 맞물려 눈에 뜨이는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많은 이들의 삶이 정치적 정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적과 흑>이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한 충실한 기록으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야말로 연대기인 것인데, 이는 스탕달의 소설적 원칙과 맞닿아 있다. 가령 마틸드와 상류 사회를 묘사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런데 독자여, 소설이란 큰길가를 돌아다니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푸른 창공을 비춰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도로에 파인 수렁의 진흙을 비춰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채롱에 거울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다니! 그의 거울이 진흙을 비추면 여러분은 그 거울을 비난한다! 차라리 수렁이 파인 큰길을, 아니 그보다도 물이 괴어 수렁이 파이도록 방치한 도로 감시인을 비난함이 마땅할 것이다.”(2, 162)

 

소설은 현실을 철저히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은 낭만주의가 팽배하던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거의 혁명적인 측면이 있다. <적과 흑>과 비슷한 시기(1831)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 얼마나 낭만적인가를 생각해보라. 물론, 스탕달의 주인공들 역시 낭만적 지향과 파국을 보여주지만, 그들을 에워싼 현실과 세태 묘사, 계급의식과 환경결정론의 대두, 무엇보다도 훗날 니체를 감동시킨 치밀한 심리 묘사 등은 가히 사실주의의 문을 연 소설답다. 이 경우 정치와 시대에 관한 배려는 필수적인데, 소설 속에 느닷없이 삽입된 한 인물의 말이 그 근거이다. “만약 당신의 인물들이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1830년의 프랑스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은 당신이 주장하듯 거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2, 195)

 

소설가로서 스탕달은 모방 욕망, 낭만적 거짓에 맞서 소설적 진실을 구축하려 했다. 쥘리엥의 비극은 곧 모방 욕망의 비극이기도 하다. 한데 정작 스탕달 자신은 낭만적 가면을 쓴 채 댄디, 예술애호가, 1812년의 군인, 사랑에 빠진 연인, 정치가, 역사가 등 수시로 역할을 바꿔가면서 유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의 유언이자 묘비명이 보여주듯,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와 사랑-연애였으리라. “밀라노인 아리고 베일레, 살았고 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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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쥘리엥 소렐의 환멸과 좌절

 

쥘리엥 소렐은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즉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비의 집에서 거의 기생충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는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닌다. 우선 지방 귀족 사회에 가정교사로 편입된 청년의 지위는 제법 애매하다. 지적인 능력과 야망의 크기에 비해 그 사회적 처지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이며, 쥘리엥처럼 성격이 예민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는 추상적인 의미의 상류 사회는 흠모하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가령, 가난하되 오만한 사람의 특징인 바, 추상적인 돈은 동경하되 구체적인 돈은 경멸하고 대체로 이해타산과 축재(재테크!)에 둔하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순수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의 산물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출세욕이 강할수록 속물적 가치에 대한 혐오는 더 커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가 시장 집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편, 브장송의 신학교는 그야말로 시련의 도가니이다. 성직에 대한 소명감보다는 최대한 손쉽게 빵과 안정을 얻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온 거친 평민의 아들들이 모두 쥘리엥의 적이 된다. 그의 장점(우수한 성적, 순수에의 집착, 성취욕구, 성실성 등)이 질투와 힐난을 불러온다. 일등을 하면 세상살이가 피곤해진다. 이런 현실을 통감할수록 쥘리엥의 소외감은 더 커진다. 피라르 신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 우울했을 터이다.

 

드 라 몰 후작의 저택은 어떠한가. 작가는 쥘리엥이 시골 출신임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파리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실제로 파리 귀족사회는 지방 귀족사회와는 사뭇 다르다. 쥘리엥의 두 연인 드 레날 부인과 마틸드는 그 상징 같다. 전자가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다정한 모성에 가깝다면(, 촌스럽고 그렇기에 숭고하다!) 후자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이기에 더욱더 정복의 욕구를 자극한다. 그럼에도 그 욕구를 성공리에 실현하기에는, 즉 파리의 노회한 귀족 사회를 감당하기에는 그는 너무 순수했거나 너무 어리석었다. 타고난 능력 덕분에 후작의 밀사가 될 만큼 신임을 얻어놓고서도 고작(!) 여자 문제 때문에 파멸하다니!

 

 

 

 

 

 

 

 

 

 

 

 

 

 

 

하지만 쥘리엥의 매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그의 야망이 좌절됐을 때이다. 후작의 손에 떨어진 드 레날 부인의 편지(실은 어느 사제가 쓴 것을 부인이 베껴 적은 것이다)를 마틸드에게서 건네받고 그것을 다 읽자마자 그는 말한다. “나는 드 라 몰 후작님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기 딸을 이런 작자에게 주려 하겠소! 잘 있어요!”(2, 319) 그러곤 그 길로 베르에르 시로 달려가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드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쏜다.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무척 짧을뿐더러 그의 심리에 관한 언급이 없다. 부인을 쏜 것은 과연 복수심 때문이었을까.

 

어떻든 이후 우리가 보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쥘리엥이다. 굳이 발뺌을 하지도 않거니와 자살의 유혹도 나폴레옹을 떠올리며 일찌감치 물리친다. “나는 아직 대여섯 주일을 살 수 있다. 자살! 안 될 말이지. 나폴레옹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갔는데.”(2, 331) 브장송의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을 날을 세는, 더 정확히 남아 있는 날을 조용히 향유하는 쥘리엥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숭고하다. 진정한 높이는 오히려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확보된다는 것, 대단한 역설이 아닌가. 법정 가득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 내 범죄는 잔혹한 것이며 또한 계획적인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러므로 본인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내 젊은 나이가 동정을 살 만하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고 그들을 영원히 의기소침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젊은이들 말입니다. / 여러분, 그 점이 바로 본인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받지 못하는 만큼, 내 범죄는 더욱더 준엄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있을 뿐입니다.”(2, 373-374)

 

살인미수는 큰 죄이지만, 쥘리엥의 주장을 피해의식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정황(드 라 몰 후작과 프릴레르 부주교의 해묵은 반목, 남작에다 시장이 된 발르노의 복수심, 마틸드의 영웅주의가 빚어낸 역효과 등)과 사회 구조이다. <적과 흑>의 초반부에 등장한, 지방 권력의 농간으로 브장송에서 사형을 당한 루이 장렐의 운명이 실로 복선이었던 셈이다.

 

한편 통렬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힌 쥘리엥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죄는 상승 욕망, 말하자면 꿈꿀 권리를 가진 것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상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을 경멸하고 또한 그러면서도 상승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이야말로 자기기만의 핵심이다. 그러나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 자기 모순 덕분에 쥘리엥은 19세기 판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끝까지 운명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최후을 맞이하는 영웅! 그 운명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점에서 <적과 흑>은 확실히 연애소설이다.

 

 

 

 

 

 

 

 

 

 

 

 

 

 

 

 

4. 연애의 법칙, 인생의 법칙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을 열정적인 사랑, 취미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 허영적인 사랑 등 네 종류로 구분한다. 이 분류법을 <적과 흑>의 주인공에게 적용시키면, 드 레날 부인과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에, 마틸드와의 사랑은 허영적인 사랑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그 출발점은 허영적인 사랑이다. 스탕달의 비유를 빌자면, 프랑스 남자라면 누구나 훌륭한 말[]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 말이다. <적과 흑>을 놓고 보면 문제는 우리의 연인들이 소설을 읽는지 어떤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드 레날 부인은 사랑이 모방 욕망의 산물인 파리(“파리에서는 사랑이란 소설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 66)가 아닌 시골에 산다. 물론 지방 여성도(가령 엠마 보바리처럼) 소설을 읽을 수 있으나 그녀는 소설은커녕 대체로 책 자체를 별로 읽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의 삶도, 사랑도 ‘-처럼의 유혹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롭다. 현모양처의 삶이든, 10세 연하의 정부를 둔 서른 살짜리 유부녀 연인의 역할이든 모두 심리적, 육체적 욕구에 따라 자연스레 주어진 것이다. 그녀의 사랑도 스스로 발견하고 또 창조해가는 본능적인 형식에 가깝다. 가령, 쥘리엥이 파리로 떠나기 전, 12일에 걸친 마지막 밀회는 너무나 대담하다. 쥘리엥의 부재를 견디는 방식, 즉 그녀의 종교는 거의 광신에 가깝고 그나마도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몸과 마음의 욕망에 따라 발생하여 성장한 사랑의 열병은 오직, 그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녀가 쥘리엥이 처형된 지 사흘 만에 죽는 것은 (병명도 명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 이 사랑의 논리에 따르면 당연하다.

 

레날 부인 역을 캐롤 부케가 맡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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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 혹은 꿈꿀 권리

- 스탕달, <적과 흑>

 

 

   

1. 스탕달, 혁명, <적과 흑>

 

 

1789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18482월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프랑스는 실제로 혼돈과 격변의 공간이었다. 제정(帝政), 왕정, 공화정, 등 정체(政體)의 변화는 곧 세계의 변화였다. 문학은 당연히 그것을 반영한다. 스탕달의 생몰년도(1783-1842)는 이 혁명의 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그의 소설이 두 후배 작가(1799년생인 발자크, 1821년생인 플로베르)와 달리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어떤 특정한 분파나 정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의 삶의 궤적이 혁명 및 정치의 그것과 맞물려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혁명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정작 그의 전기는 놀라울 정도로 따분한 편이다.

 

(흠, 좀 박색이죠?^^; 그렇다고 해서 플로베르나 발자크처럼 극적인(?)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얼굴입니다.. ㅋ)

 

젊은 날 스탕달은 나폴레옹 체제 하에서 군인과 관리 생활을 했으며(1812년 전쟁 때는 러시아까지 갔다가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퇴각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는 주로 이탈리아에 머물며 딜레탕트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다시 관직을 얻은 것은 18307월 왕조가 성립됐을 때이다. 대체로 일신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했던 그의 삶은 별다른 얘깃거리를 주지 않는다. 문학적 측면만 봐도 그러하다. 그에게서는 보통 19세기 작가들이 보여주는 순교자적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그는 펜의 도형수를 자처하며 괴물처럼, 짐승처럼 써나갔던 열혈남발자크와도, ‘일물일어설의 원칙에 따라 피를 말리는 고통을 맛보며 소설 쓰기에 임했던 냉혈한플로베르와도 다르다. 등단 시기도 상당히 늦었다. 첫 소설 <아르망스>가 발표된 것은 1826, 그가 불혹의 나이를 넘겼을 때였으니 말이다. 이후 그가 쓴 작품은 회상록이나 에세이를 빼고 소설에만 국한한다면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다. 그런 그가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소설 중 하나인 <적과 흑>을 썼다. 바로 이 대목이 극적이다.

 

군인 혹은 관리로서의 출세를 꿈꾸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못 생긴 외모에 대한 보상 작용인 양 수차례 연애를 거듭했으나 대개의 경우 실연을 당했던(대신 <연애론>을 남겼다) 한량이 1830년에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완성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47세였다. 이 소설은 182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형사 사건(‘베르테사건)을 소재로 취했는데, 그 시의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스탕달은 발자크보다 지명도가 낮은 작가였다). 그러나 스탕달은 자신의 소설이 훗날에는 유명해질 것이라고 믿었고(그러고 싶었고) 결국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실제로 <적과 흑>은 문학성은 물론 읽는 재미마저 갖춘, 고전 치고는 제법 드물게 가독성이 높은 소설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

 

<적과 흑>은 주인공의 야망과 좌절에 주목한다면 비극적인 성장소설이자 모험소설이고, 그의 사랑과 연애에 집중한다면 대단히 감성적인 연애소설이며, 자유간접화법의 사용이 돋보이는 섬세한 심리 묘사에 매료된다면 훌륭한 심리소설이다. 어떤 경우든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매혹적인 청년 쥘리엥 소렐이다. 나폴레옹이 힘으로써 세상을 뒤흔들었다면 스탕달은 문학으로써, 쥘리엥은 연애로써 비슷한 위업을 달성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입장을 주인공에게는 순수한 열광과 숭배의 형태로 반영한다.

 

한편 스탕달은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으로서 귀족과 민중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민중에 관한 한 혐오와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데, 민중이란 내 눈에 항상 더러워 보인다.”라거나 민중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게는 순간순간마다 고통이 될 것이다.”라거나 가게 방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매달 보름씩을 감옥에서 보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지 않은가(<앙리 브륄라르의 삶>). 그럼에도 정작 자기 소설의 주인공은 목수의 아들, 즉 민중에서 택했다.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2. 야망, 혹은 꿈꿀 권리 - 나폴레옹처럼!

 

쥘리엥 소렐은 무식하고 거친 목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아비나 형들과는 달리 도무지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 않을 법한 야리야리한 몸에 뽀얗고 곱상한 얼굴,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행동거지, 뛰어난 지력과 예민한 감수성 등 모든 점에서 너무나 민중답지 않다. 환경결정론과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인공의 성격에 동기화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달리 말해 작가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의 현재 위치와 야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차이가 중요했던 것 같다. , “드높은 마음, 비천한 신세”(110장의 제목)!

 

쥘리엥에게 있어 출세는 군인성직자라는 구체적인 명사로 나타난다. 물론, 그의 진짜 꿈은 늙은 군의관이 불어넣어준 대로 나폴레옹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나폴레옹처럼!

 

그는 혼자 부르짖었다. “아아! 나폴레옹은 프랑스 청년들을 위해 하느님이 보내주신 사람이었다!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나보다는 부자라고 해도 그저 좋은 교육을 받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 자기 대신 입대할 청년을 사거나 출셋길을 개척할 만한 돈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나폴레옹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 숙명적인 그의 기억이 있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1, 154-155.)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는 비단 쥘리엥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전반에 걸쳐 만연해 있다. 소위 나폴레옹 신화의 핵심은 무엇인가. ‘신분은 숙명처럼 주어지는, 고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급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 어쩌면 운을 통해 어떻든 조금이나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혁명, 특히 코르시카 섬 출신의 자그마한 군인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가 된다. 개천에서 용이 태어난 셈인데, 나폴레옹이 증명한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나폴레옹을 향한 쥘리엥의 모방욕망에 늙은 군의가 심심파적으로 베푼 교육의 영향까지 가세한다. 그는 틈나는 대로 <세인트헬레나의 기록>을 읽고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성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아비의 집을 떠난 이래 그는 예비 사제로서 주로 검정색 옷을 입지만(‘’), 그 내면은 나폴레옹적 야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쥐라 산맥의 가련한 농사꾼이나, 평생 동안 이 음울한 검은 곳을 걸치고 있어야 할 내가 아닌가! 아아! 이십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들처럼 군복을 입었을 것이 아닌가! 그때라면 나 같은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아니면 서른여섯 살에 장군이 되었을 텐데.’”(2, 106)

 

그렇다면 은 단순히 군직과 성직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현실적 타협, 혁명의 시대와 왕정복고(반동)의 시대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은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셸랑 신부는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자네 성격의 밑바탕에는 어두운 격정이 엿보이는 것 같아 걱정이네. 그것은 성직자에게는 꼭 필요한 절제라든가 세속적 이득의 완전한 포기 같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단 말이야. 자네의 재주는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 성직자가 될 경우 나는 자네의 구원이 염려되는 바일세.”(1, 78)

 

그러나 목표가 설정됐다면 움직여야 한다. “쥘리엥에게 출세한다는 것은 우선 베리에르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자기 고향이 질색이었다.”(1, 43) 더욱이 그에게는 야망을 뒷받침해줄 충분한 능력(특히 신약 성경을 다 외우고 라틴 고전 문학까지 섭렵할 만큼 뛰어난 라틴어 실력)이 있다. 그리하여 이 19세 청년은 아비의 집을 떠나 베리에르 시() 시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이어, 브장송의 신학교, 파리의 드 라 몰 후작의 저택 등 계속하여 대처(大處)로 나간다. 쥘리엥의 동선, 즉 시골 청년의 상경 스토리는 19세기 근대소설의 일반적인 구성을 반복한다. , 쥘리엥은 검은 옷의 나폴레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신동아>

 

-- 완연한 겨울입니다.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날, 소위 '입신양명'을 위해(과연 그랬던가, 이 역시 조작된 기억이 아닐까, 싶지만요) 등가방 하나만 달랑 메고서 부산역에서 통일호 타고 서울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됐네요.

이런 개인사도 있고 하여, 세계문학의 여러 걸작 소설을 통틀어 '마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적과 흑>입니다. 서른을 넘긴 뒤에도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범우사판으로 읽었는데, 이제는 정말 선택의 폭이 무척 넓어졌죠? 어쨌거나 소설은 뭐라뭐라해도 주인공이 멋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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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패배와 전락을 향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한 남자를 통해 조명한 자유의 문제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어디론가 떠났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자극한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31세에 자그마한 체형의 교사 니키 준페이는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모래사막에 서식하는 곤충을 찾아 떠난다.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기나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곤충 도감에 올리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작은 사구에 파묻힘으로써 원래의 이름을 상실하는 동시에 그 자신이 모래 속의 희귀 생명체, 즉 벌레-곤충으로 변신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모래의 여자>는 니키 준페이가 남자’, 심지어 인간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남자는 모래 구멍 속 여자의 집에 감금된 순간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런 남자의 눈에는 여자가 안쓰러울뿐더러 한심하기까지 하다. 밤마다 모래를 퍼내야 하고 모래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삶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잡혀 온 이방인도 아니면서 왜 자유를 반납하고 사냐고, 혹시 마을 사람들에게 뭔가 수치스러운 짓이라도 한 것이냐고 남자는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의 반응은 차분하다 못해 심드렁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 다니면 되잖아!

걸어 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 봐야, 피로하기만 할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 버려!

걸어 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이 단순하고도 묘한 논리에 당황한 남자는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 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무엇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며 무엇이 걸을 수 있는 자유인가.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모래 바깥에서처럼 모래 속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자유를 찾아 헤맨다. 첫 번째 탈출 시도가 실패하자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급기야 여자를 반쯤 혼수상태에 빠뜨려 놓고 손수 만든 밧줄을 이용해 사구 밖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른다. 46일만의 자유!

 

하지만 이 자유가 모래밭을 계속 걸어 다녀야하는 상황, 즉 도망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추격을 피해 열심히 도주한 결과 그가 다다른 곳은 개도 얼씬거리지 않는 소금밭’. 늪과 같은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남자는 판으로 찍어 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적들의 손에 구출된 그는 다시 무덤과 같은 모래 구멍 속에 안치된다.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저들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니, 얼마나 허무한가.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남자의 몸부림은 계속된다.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노인의 외설스러운제안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유를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을 향유하기는커녕 사구 밖으로 한 번 나가 볼 뿐, 자신이 발명한 유수 장치를 살피기 위해 이내 되돌아온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중략)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모래의 여자>는 이렇게 끝난다. 도주를 유예하는 것이 비단 병원에 실려 간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남자는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인가.

 

저 독특한 모래 왕국을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의 은유라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모래의 속성을 이용한 부조리한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망루를 지키는 시선!), 자유의 박탈과 개성의 말살 등은 여러 반()유토피아 소설 속의 국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아베 코보는 <모래의 여자>의 세계를 이데올로기적 은유로 축소하기보다는 실존적인 정황으로,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확장한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 주듯 자유의 개념은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다. 남자 역시 이 점을 슬슬 깨달아간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노동은 삶의 동의어에 가깝다. ‘모래의 여자를 그냥 비참한 수인(囚人)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녀야말로 모래와 더불어 살면서 매순간 모래, 즉 세계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한 것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남자는 사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보유한 채로 사구 속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거듭되는 패배와 전락, 이것이야말로 니키 준페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요소인 셈이다.

 

-- 네이버캐스트

 

갑자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완전 칩거하겠으나,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눈 속에서 절절 매게 됐지요. 덕분에 떠오른 저 책입니다. 눈의 싸늘함과 축축함, 모래의 뜨거움과 건조함... <모래의 여자> 속의 모래 더미는, 개인적으론 러시아 유학 시절 경험한 눈 더미를 상기시키더군요.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주인공 '모래의 여자'입니다. 얼마 전에 사망했다는데, 영화도, 영화 속 그녀의 느낌도 강렬했어요. 별로 야한(?) 영화가 아닌데, 이미지는 대부분 다 에로틱 쪽이네요 ^^; 

아베 코보, 라는 이름은 좀 생소했는데요, 다른 소설도 좀 뒤져보니 카프카와 비교되는 이유는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저 사진은 한 시절 탐독했던 국내 비평가를 닮았어요 ^^; 바로 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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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2014-02-1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어 정보 공유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께는 더욱 흥미로운 연극이 될 것 같아 댓글 남겨요. 공연정보는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www.hanpac.or.kr)에서 "모래의 여자"를 검색하시면 확인가능합니다.

연극 <모래의 여자>
2014.02.18-2014.02.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2만원
예매 바로가기 http://www.hanpac.or.kr/hanpac/program.do?tran=play_info_view&playNo=140129154121243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올바르게 사유하는 존재의 위대함

- 파스칼, <팡세>

 

 

 

 

 

파스칼의 명상록에 관한 한 우리는 오랫동안 팡세라는 제목을 고집해 왔다. 그가 남긴 저 팡세-생각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갈대일 터이다.

 

391-(347) H.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213)

 

인간이 유의미하고 존엄한 존재인 것은 사유라는 행위 때문이다. 위대함의 단초도 여기에 있다. “218-(397)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115-116) 하지만 파스칼은 단순히 사유와 인식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라는 것. ,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 그 궁극의 지점에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팡세>는 인간과 신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으되 신 없는 인간의 비참’(1)신 있는 인간의 행복’(2)으로 이끌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호교론은 가히 확률론의 창시자답게 내기(도박)의 논리를 따른다.

 

325-(230) 신이 있다는 것도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도, 창조되지 않은 것 등등도. 원죄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174)

 

그렇기에 일단 믿고 보는 편이 유리하다. 다소 거칠게 말해, 믿으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믿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당장 현실에서도 세 부류의 사람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178) 중 첫 번째 부류만이 합리성(이성)과 행복을 동시에 획득한다 

 

 

 

 

파스칼은 철학자이기에 앞서 수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발명가이기도 했다. 이성과 논리의 대변자인 그가 본질상 초이성적 존재이거나 반대로 아예 존재도 뭣도 아닐 수 있는 신을 옹호하고 나아가 신앙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것은 제법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해답은 파스칼이 지적하는 인간 본연의 모순에 있는 것 같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 이성이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순간, 때문에 인간의 비참과 그것에의 인식이 극에 달하는 순간, 비로소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 “225-(278)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느껴지는 하느님.”(117-118) 이렇듯, 신과 신앙에 대한 파스칼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인간학의 산물이다. 유한성과 우연성에 종속된, 그래서 항상 아슬아슬한 인간!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137)

 

파스칼은 인간의 실존을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형수들에 비유한다. 그 중 몇몇이 매일 교살당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은 고뇌와 절망에 사로잡힌 채 그 동료들의 운명에서 자기의 운명을 읽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314-(199)). 이 비참한 인간 조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숨은 신’, 무한성과 필연성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과연 비참에서 행복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떻든 비단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라도 온유한 어조로 올바른사유를 촉구한 파스칼의 통찰에는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749-[505] 모든 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유익하게 만들어진 사물까지도. 가령, 자연 속에서 담도 우리를 죽일 수 있고 계단도 정확히 발을 딛지 않으면 우리를 죽일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운동도 전 자연에 영향을 준다. 돌 하나로 온 바다가 변한다. 이렇듯 은총에 있어서도 극히 작은 행동이 그 결과로써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것이 중요하다.

하나하나의 행동에 있어서도 그 행동 외에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상태와, 그 행동의 영향을 받는 다른 행동들의 상태들을 관찰하고 또 이 모든 것의 관련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사람은 매우 신중해질 것이다.(388)

 

 

 --네이버캐스트

 

 

-- 순전히 '팡세'라는 말과 '파스칼'이라는 말에 이끌려 손에 들었던 책. 정말로 '구덩이 오막살이'와 같은  반지하방에 살던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나마 접수됐던 것은, 그 전부터도 알고 있던(-_-;;)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문장 뿐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허걱, 이런 책이더군요! (('팡세'라는 제목을 워낙 좋아해서, 저 글도 제목에서 시작합니다 ㅎ ㅎ) <네이버> 누군가의 댓글 대로, 이렇게 지겨운 책, 요즘도 누가 봅니까?  하지만 은근히 볼 만합니다. 특히, 무던해지고 심드렁해지고 싶을 때...^^; 뭐, 그럴 때는 확률 문제를 풀면 좋겠지만 수학 쪽은 워낙 젬병이라, 수학자가 쓴 명상록을 보는 거죠...^^:  

- 블레즈 파스칼과 함께 떠오르는 인물들은~~~

 

관성의법칙, 작용반작용의법칙, 가속도의법칙, 만유인력의법칙, 중력의법칙 등 바로 뉴턴입니다^^; 덧붙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그, 바로 데카르트입니다 ^^' 뉴턴이 좀 많이 잘 생기긴 했지만 어째 다들 좀 닮았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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