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치혼의 암자에서와 스타브로긴: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

 

 

치혼의 암자에서가 문제적인 것은 탈신화화된 주인공, 인간스타브로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고백-참회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심지어 저는 저 스스로 저 자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게 저의 주된 목적, 제 목적의 전부입니다!”(하권, 1093)라고 외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서류-문건’(документ)의 진정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든 이것은 명백히 고백-참회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각색한 <악령>의 희곡 버전

 

 

하지만 바로 여기에 스타브로긴의 원죄, 십자가의 숙명(그의 이름 자체가 십자가를 의미한다)이 들어 있기도 한바, 그는 신-악마의 지위를 누리며 스스로를 위대한[크나큰] 의 주체로 만들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책형 앞에서 속죄하려는(redemption)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저 악령들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용서 및 속죄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내적인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антиисповедь) 사이의 긴장이다. 이 고뇌를 치혼은 그 나름대로 간파한다.

 

이 기록은 죽도록 상처 입은 마음의 요구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치혼]는 집요하게, 비상한 열의를 보이며 계속했다. “그래요, 이것은 참회이고 당신을 압도해버린, 참회의 자연스러운 요구입니다.() 범죄를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뭣 때문에 참회를 부끄러워하십니까?() 당신은 자신의 심리 분석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집착하고, 그저 당신에겐 있지도 않은 그런 무감각함을 뽐내며 독자들을 놀래려는 듯. 죄인이 재판관을 향해 오만한 도전을 던지는 게 아니고 뭡니까?” (하권, 1086-1087)

제가 뭘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의 증오를 겸허하게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증오 하나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죠?”

그들의 웃음입니다.”()

됐어요, 어디 지적이나 해주시죠. 도대체 제 수기에서 정확히 저의 어떤 점이 우스꽝스럽다는 겁니까?()”

심지어 가장 위대한 참회의 형식 속에도 이미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부님께서는 오직 형식에서만, 문장에서만 우스꽝스러운 점을 발견하시는 겁니까?”()

그 본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 죽일 겁니다.”()

뭐라고요?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요? 뭐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겁니까?”

범죄입니다.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범죄가 있는 겁니다.()”(하권, 1090-1092)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뻔뻔함, 그러고서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집 등의 충돌 과정에서 수치’(стыд)의 감각이 생겨난다. 치혼이 암시하듯, 참회와 용서가 진정으로 아름다우려면 이 수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소위 대죄인’(ве- ликий грешник)이 수치심 없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한(бесстыжный) 행위임을 스타브로긴은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감히 신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선민의식과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동시에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죄가 낳은 추의 감각, 그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개입돼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빚어내는, 자기 분열을 야기할 만큼 치열한 내적 투쟁은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자연스레 웃음’(우스꽝스러움)의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치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이고 초조한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서류-문건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루소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하지만(하권, 1066)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자기 해부 내지는 자기 과시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치혼의 암자에서의 스타브로긴은 18세기 계몽의 인간으로서 비교적 행복한 기만에 사로잡혀 있던 루소(실제 <고백> 속의 문학적 자아인 루소의 형상과는 상당히 구분되지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신의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는 한낱 하는 일 없이 빌빌대고 돌아다니는 귀족 도련님”(샤토프의 말: 상권, 396),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유희의 욕망에 탐닉하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이다. 이제 다시 <악령>의 플롯으로 돌아가자.

 

치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오로지 종잇장의 공표를 피하기위해 흡사 출구라도 찾듯 새로운 범죄 속으로 몸을 내던”(하권, 1099)진다. 모든 죄악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점잖게, 즉 몹시 야비하게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종결된 후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살이 무한히 늘어선 기만의 대열 중 마지막 기만”(하권, 1043)이기에 자신은 결코 자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치혼의 암자에서를 곁들인다면, 자살은 수치웃음을 극복하지 못한 대가이며 신의 심판을 끝까지 거부하고 오롯이 그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기만성에 관해서라면 스타브로긴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실상 그의 -악마로서의 아우라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1045)라는 유서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으로 몫으로 남겨진 스타브로긴의 최후, 즉 자기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을 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은 가히 키릴로프의 최후만큼이나 희극적이다. 자살 이후에 남는 것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리 붙여도 무의미한, 그저 목매단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로서 스타브로긴은 우스꽝스러움을 비롯한 온갖 파토스를 체화한 상태로 신화의 영역에 붙박인다. 탈신화화의 공격 끝에 한 마리의 추악하고 유치한 거미로 치환될지라도 어떻든 그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적어도 끝까지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유일한 자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마땅한 리얼리즘의 문법을 생각한다면 스타브로긴은 정녕 베르쟈예프의 말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맹점이자 매혹이자 원죄였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십자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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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쓸 때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책입니다. 바쿠닌은 물론 그와 네차예프의 관계, 네차예프의 성격 등에 관한 얘기도 나옵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시절 숙제 목록 일순위였던 것 같은데요(^^;;) ,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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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타브로긴과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 영웅-주인공, 분신, 가면

 

4-1. <악령> 속의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을 쓴 -악마

 

 

<악령>의 구성상 모든 논의는 스타브로긴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그에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그와 여타 인물 간의 관계는 주인공-영웅(원상)과 분신 관계의 신화적 도식을 근대적 틀에서 재현해낸다. 본원적 의미에서의 분신은 웃음과 패러디의 기능을 수행하면서(смеховой двойник, пародирующий двойник) 원상의 생존(부활)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공-영웅과 분신은 엄격한 가치론적 위계질서에 종속되며 주종관계 역시 명확히 규정된다.

 

이 도식에 따를 때 스타브로긴의 분신들의 희생은 표트르의 미학적 죽음까지 포함하여 궁극적으론 주인공-영웅의 부활을 예고함과 동시에 오직 이를 통해서만 성스러움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자살로 인해 재구축된 분신 신화의 도식은 상당히 왜곡되고 <악령>성스러운[신의] 희극’(Divine Comedy)이 아니라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비극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성적 층위가 아니라 미학적 층위인바, 스타브로긴의 형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아닌 소설 속에서 을 창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 그 본질상 ’(육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신성을 상실하는 반면 을 갖지 않으면 소설적 인물(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손쉬운 작업은 그 자체로 신성의 육화인 그리스도를 재현해내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랫동안 이 작업에 공을 들였고 그 성과인 므이시킨, 알료샤 등은 실패한 만큼이나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가 스타브로긴을 통해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소설, 더욱이 정치와 혁명의 탈신화화를 다룬 극히 범속한 소설 속에서 의 형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스타브로긴 인생의 몇 장면>(?) 공연 포스터.)

 

더욱이 그 은 목소리 따위가 아닌,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이며 악마성의 현시를 통해 신성을 획득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이다. 작가가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내지는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키릴로프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은 반면, 스타브로긴에겐 젊음과 아름다움, 건강함과 육체적 완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무한히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부여한다. 이렇게 그를 1860년대 러시아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로 만듦으로써 사회학적 동기화를 획득함은 물론 물질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시험에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에게 연역적으로 접근한다면 명실상부한 고백록인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짚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곳곳에서 내 힘을 시험해 봤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면서 내게 그 일을 권했지요. 나 자신을 위한, 또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 시험에서, 그 힘은 예나 지금이나 내 평생 동안 무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나는 당신 오빠의 따귀를 참아 냈습니다. 결혼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 바로 이것만은 결코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스위스에서 그렇게 격려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걸 믿었건만.() / 당신의 오빠는 내게, 대지와의 관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신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목적을 상실한다고 말하더군요. 이 모든 것을 두고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선 오직 한 푼의 관대함도 없이, 한 푼의 힘도 없이, 부정(否定) 하나만이 흘러나왔을 뿐입니다. 아니, 부정조차도 흘러나오지 못했지요. 모든 것이 언제나 미미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하권, 1041-1042)

 

각종 시험의 결과로 나타난 부정은 상태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따라서 비존재와 무가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다. 시험-부정의 일환으로서 다수의 분신을 동시적으로 창조한 것도 천지창조의 메타포를 소설 텍스트에서 실현한 것으로 읽힌다. , 태초에 신이 자신의 모습에 근거하여(образ и подобие) 인간을 만든 것에 반해, 스타브로긴은 대상의 본질에 천착하여 자신의 관념을 그 틀 속에 집어넣고 형상-이름을 고착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름이 없는, 고로 추한 존재(безобразный-безобразный)이다.

 

여기서 끊임없는 움직임이 시작되는바, 이러한 내적 방황에는 분명히 레르몬토프적인 유산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레르몬토프-페초린이 극히 유아론적이며 또한 유아적으로 강력한 자아의 팽창으로 인해 괴로워했다면, 스타브로긴의 고뇌는 정반대로, 블랙홀과 같은 자아를 하나의 형상-이름으로 고착시킬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에겐 무수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통째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대상은 스타브로긴의 거대한 심연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그는 또 다시 이름을 상실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거나 형상-이름을 빌려야 한다. 현실에서 그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 상권, 432)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리자베타 투쉬나),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마리야 레뱌드키나), 영원한 안정의 시험(다리야 샤토바) 등은 결과적으로 심연의 넓이와 깊이를 각인시킬 따름이다. 니체의 저 유명한 아포리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속의 괴물 및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공히 스타브로긴의 은유로 읽힌다. 심연이 남은 집어삼킬 수 있어도 자신은 집어삼킬 수 없듯 은 타살은 해도, 또한 살해의 객체가 될 수는 있어도 자살은 하지 못한다.

 

물론, 스타브로긴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문제의 장면에서 작가는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달리 짧은 진술만 던져줌으로써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그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카트코프의 강압적 권유도 없었건만 그토록 공들여 쓴 치혼의 암자에서를 단행본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달리 말해 1922년까지 방치되었던 이 거친 원고에 스타브로긴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의 요한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싱크로율 99프로입니다ㅋㅋ  스타브로긴의 만화 버전이랄까요 ^^; (나오키의 <플루토>에서는 엡실론이 대략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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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키릴로프의 혁명: 신인-그리스도? 인신?

 

키릴로프에 관한 한 작가는 관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필수적인 속성, 즉 생물학적, 사회적 속성을 최소화한다. 가령, 샤토프와 같은 스물예닐곱이라는 나이는 깡그리 잊힐 만큼 무의미하고 건축기사라는 직업은 스체판의 유쾌한 농담대로(상권, 151) 그의 사상에 대한 아이러니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자살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지만 쉬갈료프의 노트만도 못한, 그저 소문일 따름이다. 섭생도 엉망이어서,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동틀 녘에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작가 특유의 유물론에 기대자면 이런 무위 상태, 황폐한 생활 방식이야말로 가히 관념인의 탄생을 위한 질 좋은 토양인 셈인데, 간질병도 유전적 요인과 이런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간단히, 키릴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타 백수들 중 단연코 으뜸일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나아가 관념을 위해 창조된 종이 인간’(샤토프의 말: 상권, 216, 219), ‘자연의 품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온 인간’(<지하로부터의 수기>, 5: 104)으로 창조되었다. 이 때문에 또한 그는 <악령>이라는 극히 속된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대심문관만큼이나 환상적인 층위에서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환상은 흔히 통용되는 장르가 아니라 인물의 내적 운동성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장르로서 삼차원적인 시공간을 초월한 간질발작의 찰나적 황홀경, 혹은 정지됨으로써 영원히 확장되는 시간(237분에 고정된 키릴로프의 시계바늘: 상권, 370)처럼 관념의 영역에 속한다. 키릴로프는 바위자체가 아닌 그것에 대한 공포(=죽음=), 즉 각종 관념의 극복을 꿈꾸지만 그것도 결국엔 또 다른 관념(인신)을 현실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키릴로프의 인신사상은 니힐리즘(특히 богоборчество’)의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서 본질상 표트르의 정치론과 유사할 수 있다. 하지만 표트르가 외부 세계를 향한 공격성을 과시하는 반면(정치), 키릴로프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한다(신화). 샤토프는 이를 광기로 치부하며 동정하지만, 키릴로프라는 인물만 놓고 보면 그는 오히려 관념인간의 변증법이 가장 조화롭게 발현된 예이며 심지어 그것의 육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인신 되기프로젝트는 그리스도 되기프로젝트의 변형이며 이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심지어 과거의 샤토프보다도 더 메시아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자, 이른바 가짜 메시아이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양가적인 이 콤플렉스가 설득력을, 또 미학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제조건이 바로 인물의 도덕적인 완성도, 그리고 믿음의 깊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스타브로긴이 미남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것처럼, 또 샤토프가 추남에 불쌍한 농노여야 하는 것처럼, 또 표트르가 영리하되 치사한 행동분자여야 하는 것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어야 한다. 작가가 키릴로프를 거의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의 모상이자 조용한 돈 키호테, 우스꽝스러운 백치-광인의 모습에 가깝게 창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잎사귀에 대한 사랑, ‘좋음에 대한 믿음은 그가 신인(богочеловек)이든 인신(человекобог)이든 그냥 광인이든 하여간 비루한 인간들이 난무하는 <악령>의 텍스트에서 신의 유비로서의 인간의 원형에 가장 근접해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최근에 푸른빛이 약간 남아 있는 노란 잎을 보았습니다. 잎사귀 끝이 좀 시들었더군요. 바람에 날려 온 것이었지요. 열 살이 되던 해 겨울,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잎사귀를 그려보곤 했지요, 잎맥이 반짝거리는 푸른 잎사귀를. 그리고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요.”

그건 무슨 알레고리인가요?”

-아니오. 아니, 왜요? 나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그저 잎사귀를, 잎사귀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잎사귀는 좋아요. 모든 것이 좋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오직 그 때문이지요.()”(상권, 369)

모든 사람들이 좋다는 걸 가르치는 사람, 바로 그가 세상을 끝낼 겁니다.”

그렇게 가르쳤던 사람, 바로 그를 못 박았죠.”

그가 올 겁니다, 그의 이름은 인신(人神)입니다.“

신인(神人)이라고요?”

인신지요, 바로 그게 다른 점입니다.”(상권, 371)

 

키릴로프의 실제 삶도 그의 원칙과 이론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는 좋음을 시시각각 느끼기에, 자살(죽음)에 탐닉하는 만큼이나 삶을 사랑하고 즐긴다. 가령, 죽을 날을 세는 낙으로 살면서 동시에 등뼈를 튼튼하게 하려고 매일 공놀이와 맨손체조를 하고 옆집의 갓난아이도 무척 귀여워한다. 정상적인 언어 구사 능력도 결여되어 있을 만큼 고립되어 있지만, 누가 오든 좀처럼 동요하지 않으며 상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해준다.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는 것도 구태여 자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 관념은 절대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가 관념을 먹어치웠든 관념이 그를 먹어치웠든, 어쨌거나 진정한 니힐리스트는 니힐-를 꿈꾸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매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키릴로프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미묘한 역설이야말로 훗날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를 매혹시킨 핵심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은, 비루한 현실과 각종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악령> 원고 중.)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키릴로프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욕망을 잔혹하게 단죄한다. 최후의 순간을 충실한 사도가 아니라 원숭이표트르와 함께 하게 한 것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장치일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표트르와의 장황한 대화, 심지어 고골 풍의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육체적인 드잡이에서 키릴로프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작태이다. 대체로 그의 자살은 그가 평온한 오만함을 자랑하며 꿈꾼 것과는 달리, 또한 독자들이 속편하게 환상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절대로 원칙의 실현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다변을 과시하며 자꾸만 자살의 실행을 연기하는데, 이는 그저 목숨에 대한 집착의 표현일 따름이다. 표트르는 그의 독실함(“신부보다 더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요”: 하권, 955)은 물론이거니와 이 생존 본능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옳았다.

 

물론, 표트르의 짜증스러운 체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키릴로프는 기필코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유예 끝에 행해진 자살은 강조하건대, ‘관념의 거국적이고 비장한 실행이 아니라 마지못해, 차마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거의 면피용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자살만을 외쳐왔고 이미 증인한테 유서까지 넘겨놓은 상태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유서에 그려 넣고 싶어 한 혀를 쑥 빼고 낯짝을 높이 쳐든 그림”(하권, 958)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인신을 꿈꾸었던 자로서 이만한 창피와 낭패도 없을 것이다. 표트르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자살을 전후한 장면을 보자.

 

창문 맞은편 벽 쪽, 즉 문의 오른쪽에 장롱이 있었다. 이 장롱의 오른쪽으로, 벽과 장롱에 의해 형성된 틈새에 키릴로프가 서 있었는데, 그것도 끔찍할 정도로 이상하게, 즉 두 팔을 바지솔기를 따라 늘어뜨리고 온 몸을 쫙 편 채, 머리를 치켜 올려 목덜미를 틈새 바로 안쪽 벽에 바싹 붙이고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는데, 마치 기가 팍 죽어서 몸을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 [표트르]가 키릴로프를 건드리기가 무섭게, 상대편은 재빨리 머리를 숙였고 그 바람에 머리로 그의 손에서 양초를 떨어뜨려 버렸다. 촛대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졌고 촛불은 꺼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마침내 그는 손가락을 빼낸 뒤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으며 쏜살같이 그 집을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는 섬뜩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열 번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렸고, 이미 현관까지 달려 나왔을 때 갑자기 커다란 총성이 들렸다. 그 순간, 그는 현관의 어둠 속에서 정지한 채로 5분 정도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통풍구가 활짝 열린 창문 곁에, 두 발을 방의 오른쪽 구석으로 향한 채 키릴로프의 시체가 뻗어 있었다. 우측 관자놀이를 맞은 것이었고 총알은 두개골을 박살내고 좌측 위쪽으로 빠져나갔다. 피와 뇌수가 거품처럼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권총은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자살자의 손 안에 남겨져 있었다.(하권, 963-966)

 

자살이 완료되는 순간, ‘살아 있는 삶’(живая жизнь)관념을 결정적으로 배반한다. 이 배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관념인을 통틀어 가장 순수하고 선량한 관념인을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심장하다. 키릴로프는 자살을 통해 최초의 인신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됐으며, 이로써 그의 관념이 생명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을 존재케 했던 삶-생명이 뇌수와 피로, 유물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잔해로 환원돼 버렸다. 말하자면 얻은 것은 관념의 육화는커녕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은 삶 자체였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야밤의 홍차와 몽상을 즐기지 못하며 그가 그토록 아꼈던 햇볕 아래 푸른 잎사귀를, 또한 갓난아이가 자라는 풍경을 볼 수 없다. 이런 희생을 대가로, 비록 기만적일지언정, 성스러움을 얻지도 못하고 표트르의 야비한 음모에 일조했을 뿐이다. 하지만 관념이 삼차원적 시공간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이 불협화음과 균열이야말로 낭만적 거짓위에 우뚝 선 소설적 진실의 진면목일 것이다. 또한 바로 여기에, ‘신인-그리스도인신-가짜 메시아도 아닌, 그저 그것을 향한 몽상을 먹고 살았던 한 인간키릴로프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키릴로프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 이 부분을 읽다 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중에서도 [악령]을, 특히 키릴로프를 유달리 좋아했던, 그에게 그야말로 푹 빠졌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 샤토프와 키릴로프에 관해서는 <홀림에 관하여>(현대문학, 2007, 6월호)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 한 편을 쓴 적도 있습니다. 소설 텍스트에서 언급만 되고 묘사는 안 되는, 둘의 아메리카 동거 시절을 소설로 써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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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 2021-07-2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번역본으로 악령을 재밌게 읽고 이 글도 재미있게 본 독자입니다. 혹시 마지막 부분에 올리신 키릴로프와 표트르의 사진은 어디에서 가져오신건지, 그리고 영상을 혹시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갑작스럽게 댓글로 부탁을 드려 결례를 끼친 점 죄송합니다!
 

3. 탈신화화와 새로운 신화의 창조

 

3-1. 샤토프의 혁명: 과연 토끼는 어디에?

 

샤토프의 사상적 편력은 그 나름의 자족성을 가지며 게르첸이 그를 위해 써주었다는 빛나는 인물(Светлая личность)의 신빙성 여부와는 별개로 젊은 혁명가로서의 그의 위상 역시 명백하다. 그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라나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박애, 평등,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민중은 바로 이 대학생을 기다려왔던 것이다(상권, 542-543). 여러 인물의 말도 증언해주듯 과거의샤토프는 민중을 등에 업고 경배할 누구를 찾아 헤맸던, 심지어 그 스스로 그 누구가 되고자 했던 메시아-혁명가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메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광인으로 탈바꿈한다.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정체성은, 그러나,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표트르처럼 샤토프도 스타브로긴을 누구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 다만, 끊임없이 현실 정치의 맥락을 강조하는 표트르와는 달리, 그는 시공간적 초월성에 사로잡힌다. 더불어 이미 그 누구의 지위에 서길 포기하고 스타브로긴을 매개로 끊임없이 그 누구를 갈망하는데, 이 경우 믿음은 정녕 실재가 아니라 의지와 욕망의 대상, 토끼이다.

 

샤토프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표독스럽게 웃었다. “‘토끼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가 필요하다.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말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뒷발을 잡아서 토끼를 손에 넣으려 했던 노즈드료프처럼 말하곤 했다더군요.”

아니죠, 노즈드료프는 벌써 토끼를 잡았다며 우쭐거렸었죠. 내친 김에 괜찮다면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해도 될지.() 당신의 그 토끼는 잡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달아나고 있습니까?”

감히 나한테 그런 말로 묻지 마시오, 다른 말로, 다른 말로 물어보란 말입니다!” 샤토프가 갑자기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하죠!”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그를 준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오직 이걸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닙니까?”

나는 러시아를 믿고 나는 러시아의 정교를 믿고나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믿고나는 새로운 재림이 러시아에서 일어날 것을 믿고나는 또샤토프는 거의 광적인 흥분에 들떠서 더듬거렸다.

그럼 신은? 신은 말입니다?”

나는나는 신을 믿게 될 겁니다.”(상권, 393)

 

샤토프의 슬라브주의 및 메시아주의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현, 더욱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 광증의 징후에 가깝다. 심지어 조차도 믿음의 확고한 대상이 아니라 그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애처로운 신기루’, 즉 관념일 따름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적, 전기적 편력을 상당 부분 샤토프에게 투사했지만 그를 영원히 거대한 회의의 도가니에서 헤매게 할 뿐 호산나를 선사하지는 못한 것이다. 실상 혁명의 관념신의 관념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질의 변화는 전혀 다른 차원, 관념의 대립 쌍으로서의 속에서, 관념인이 아닌 그저 한 인간샤토프에게서 일어난다.

 

메시아-혁명가 샤토프와 메시아주의자 샤토프 사이에는 어떻든 환멸과 그로 인한 전향의 운동성이 들어 있다. 과연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스체판이 암시하듯(상권, 149) 그의 아내 마리(Marie)와 스타브로긴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체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 집안의 농노로서 농노해방과 더불어 자유인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집안에 예속돼 있다. 이러한 물리적 주종 관계는 관념적 층위의 논의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다. 감히 주인나리의 뺨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통렬한 아이러니를 담아 노동을 통해 신을 얻어라”, “부를 버려라”(상권, 398)라고 촉구한들, 신분-계급의 장벽은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다. 마리의 임신 및 출산은 분신(하인)이 원상-영웅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희생제의의 메타포로까지 읽힌다. 그로 인해 샤토프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관념의 여러 가능성이 초래하는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 진정한 구원이란 그리스도가 러시아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의 품으로 돌아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일일 것이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대한 그의 경탄(“두 인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째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완전무결한 새로운 정신이 생겨난 겁니다.” 하권, 916-917)은 곧 작가의 차원의 발언으로 환원해도 무방할 것이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임종 시의 도...키: 은근한 미소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느닷없이 도래한 유토피아는 역시나 느닷없이 닥친 파국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된다. 샤토프의 죽음 자체가 비극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악령>의 구성상 그는 스타브로긴의 분신으로서 불가피하게 마이너스 가치를 지녀야 했다. 가령, 스타브로긴이 절세 미남’(неописаный красавец)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만큼이나 샤토프는 추남에 농노여야 한다. 소설 텍스트에서 유달리 강조되는바, 작은 키에 짜부라진 듯 땅딸막한 몸집, 지나치게 넓은 어깨와 못생긴 얼굴, 어설픈 행동거지 등 작가는 샤토프를 통해 자신의 외모를 희극적으로 과장해놓았다.

 

문제는 그의 용모가 환멸을 느낀 메시아-혁명가(주인공-영웅)의 정체성에 부합하지도 않거니와 동정이라면 모를까 어떤 카리스마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덧붙여 작가는 샤토프를 성스러움이 거세된 무의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애절한 휴먼드라마라면 모를까 숭고한 비극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말하자면 혁명’(‘관념’)도 죽고, ‘인간도 죽은 것이다.

 

 

 

 

어떤 공연에서는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배우가 샤토프 역을 맡은 모양인데요, 샤토프의 핵심은 (이 역시 지라르도 대략 지적했던 듯한데) 그가 추남이라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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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혁명가의 신화 -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중략)

표트르의 바쿠닌식 무정부주의는 그 시작(파괴)과 끝(건설)에 있어서 쉬갈료프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인물 자체도 그 출발점에 있어서는 명실상부한 혁명가, 또 스타브로긴이 붙여준 별명대로 열광자’(эн- тузиаст: 상권, 379)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물리적 운동성과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수완을 부여받았으며 원칙과 이론도 갖추고 있다.

 

 

스타브로긴, 당신은 미남입니다!() 당신은 끔찍한 귀족이에요. 귀족이 민주주의에 투신한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당신은 선구자고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당신의 버러지에 불과하단 말입니다.”(하권, 646)

쉬갈료프 같은 작자는 정말 많기도 많죠! 그러나 한 사람, 러시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첫걸음을 얻어냈고, 첫걸음을 어떻게 내디딜지를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요.() 당신이 없으면 난 제로, 당신이 없으면 난 파리이고, 유리병 속에 든 이념이고, 아메리카 없는 콜럼버스입니다.”(하권, 647)

우리는 소리 높여 파괴를 외칠 겁니다.() 우리는 방화를 만연시킬 겁니다. 우리는 전설을 퍼뜨릴 겁니다.() 어쨌거나 혼돈이 시작될 겁니다! 이 세계에서 아직 본 적도 없는 그런 동요가 시작될 겁니다.”(하권, 650.)

당신은 신처럼 오만한 미남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희생양의 후광에 둘러싸인 <숨겨진> 존재입니다. 중요한 건 전설을 퍼뜨리는 것! 당신은 그들을 압도할 겁니다,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할 겁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 석조건물을 건설할 것인가를 생각할 겁니다. 처음으로! 건설하는 건 우리입니다, 우리, 오직 우리뿐이죠!”(하권, 652)

(중략)

표트르는 애당초 대심문관과 같은 환상 텍스트가 아니라 현실 텍스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천년왕국,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 내걸어야 할 역시 관념이 아니라 실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상의 신이 계속 뻗대며 말을 듣지 않는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욕망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공통의 피-죗값(샤토프 살해)으로 민중(5인조)을 올가미처럼 묶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신화적 희생제의의 현실적,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 ‘성스러움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하고 또한 역설적이고 순환적으로 그 폭력을 통해 성스러움의 가치를 획득하는데, 이 경우 희생양은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식의 실현 과정은, ‘속화혹은 이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밖에 없는바, 시종일관 웃음으로 점철돼 있다. 5인조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주저와 불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표트르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부도덕성, 아니 무도덕성 때문에 혁명과 혁명가의 신화는 야비한 정치협잡과 치졸한 복수극으로 변모된다. 특히, 원칙의 실현이 되어야 할 혁명에 개인적인감정, 표트르 자신의 원한을 개입시킴으로써 탈신화화 작업, 웃음은 극에 달한다.

 

 

실상 표트르가 하필이면 샤토프를 지목한 것에는 신화적 제의의 정치적 실현과는 무관한, 보다 치명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키릴로프의 폭로대로(하권, 946) 샤토프가 제네바에서 자기 뺨에 침을 뱉었던 일을, 그 모욕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표트르가 자신의 원형인 네차예프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제 손으로 샤토프에게 총을 쏘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수장하는 일도 직접 한다. 이 장면 속의 표트르는 이반 왕자-을 찾아 헤매던 혁명가도, 열광자도 아닌 치사하고 못된 살인자,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광대일 뿐이다. 광대의 손에 맡겨진 혁명 역시 카니발적 소동, 키릴로프의 말을 빌자면 악마의 보드빌’(дьяволов во- девиль: 하권, 956)일 뿐이다. 이로써 표트르는 그 자신의 고백대로 사회주의가 아닌 협잡꾼”(하권, 649)으로 판명되고, 그가 스타브로긴 앞에서 토로한 관념도 진정성이 결여된 광적인 요설로 전락한다.

 

물론 그는 어딜 가든 배신과 밀고를 일삼고 유령’ 5인조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출혈의 정도가 어느 소설보다도 더 심한 <악령>이기에, 그의 생존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키릴로프에게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를 동여맨 게 전부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텍스트에서는 가장 참혹한 죽음인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이는 각종 미명 하에 혼돈과 파괴를 일삼았던 어설픈 니힐리스트들에게 내린 작가 나름의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체적인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권력, 그리고 등에 업고자 한 민중의 실체는 어떠한가.

 

2-3. 권력의 횡포? 대중의 반역 

 

지방 권력의 대표 격인 신임 현지사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폰 렘브케는 좀처럼 유형화화기 힘든,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독일인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권력자에게는 걸맞지 않은, 다분히 자폐적이고 유아적인, 심지어 환상적인그의 성격(종이 접기, 소설 창작, 꽃 꺾기 등)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가 대체로 맥락을 결여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가령, 스체판을 좌익용공분자로 몰아 그의 집을 수색하고 물품을 차압한 것은 블룸의 개인적인 착오가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쉬피굴린 공장 사태 역시 오해로 점철돼 있다.

 

 

모자를 벗어라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 그는 예기치 못하게, 그 자신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째지는 소리를 질렀는데, 그 예기치 못함 속에 어쩌면 뒤이어 나타난 사건의 결말 자체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 “해적들!” 그는 훨씬 더 째지는 듯한, 훨씬 더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그의 목소리는 탁 끊기고 말았다.() / “맙소사!”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청년은 성호를 긋기 시작했고 서너 명은 정말로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 걸음 정도 앞으로 움직이더니, 갑자기 모두들 한꺼번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각하, 사십을 주기로 했는데관리인이네 놈은 찍소리도 하지 말라고 해서어쩌고저쩌고, 하여간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안드레이 안토노비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꽃다발은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질을 해라!”(하권, 684-685)

 

 

화자의 진술대로 그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장군 나리”(하권, 671)에게 직접 얘기를 해보려고 몰려든 선량한 시민이 경찰 당국 및 이미 정신 이상의 조짐까지 보이는 현지사의 의식 속에서 졸지에 해적혹은 폭도로 등극한다.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로맨스에서나 가능할 법한 역할 혼동’(qui pro quo) 내지는 자가당착이 실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뜻밖에도, 발랄하고 경쾌한 해피엔드가 아니라 처참한 유혈사태일 수 있음은 역사가 증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쉬피굴린 사태는 혁명에 대한 어떤 표상도 없는 질박한 개개인의 집합으로서의 민중과 얼빠진 권력의 우스꽝스러운 충돌에서 끝난다. 실상 희극이든 비극이든 플롯 생성의 원동력은 오해인바, 율리야 렘브케의 파국도 그녀의 허영심과 공명심,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는바, 오랜 세월 동안 미혼의 굴욕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의 산물이다. 어떤 경우든 렘브케 부처는 타도해야 할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동정해야줘야 할 중년부부일 따름이다.

 

 

표트르의 혁명에 동참한 5인조(럄신, 리푸친, 비르긴스키, 쉬갈료프, 톨카첸코), 레뱌드킨, 에르켈 역시도, 쉬갈료프를 예외로, 혁명의 신화를 통째로 뒤집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비르긴스키가 거사를 전후하여 수시로 내뱉은 말대로 이건 아니다!”(Не то!) 어쨌거나 표트르가 단시간에 결성한 어중이떠중이와 애송이 집단, 밀린 품삯을 받는 것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민중이 혁명의 주역이 된다. 여기에, 시대착오적인 자긍심과 옹졸한 불안 사이를 오가는, ‘진보 진영감상적 퇴물스체판 베르호벤스키와 허영에 들뜬, ‘온건파내지는 중도성향의 속물 작가 카르마지노프가 얼떨결에 합세한다. 저속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순간 스캔들을 갈망하는 익명의 군중들의 존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략)

 

 

전반적으로 <악령>이 문제 삼는 것은 니힐리즘이나 당시 러시아의 현실 정치가 아니라 정치-혁명의 논리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오류이다. ‘관념인간의 변증법은 너무도 복잡다단하여, 좀처럼 특정 이데올로기의 특정 실현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정공법을 택하여 정치-혁명의 과정을 그려냈지만, 동시에 그것과 맞닿은 또 다른 차원을 선보인다. ‘지상낙원, 참으로 역설인데,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면, 지상의 존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지상낙원은 결국 몽상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지만 또 진정으로 기만적인, 그렇기에 애처로운 혁명은 이제 <악령>의 두 광인의 정신 속에서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최근에 만든 티브이 시리즈 <악령>의 몇 장면들입니다. 저도 아직 다 못 봤는데요, 중간, 계단 옆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가 스타브로긴입니다. 완죤 마음에 안 들어요...ㅠ.ㅠ

 

 

 

 

 

 

 

좀 멋쩍지만, <악령>에서 나왔다고 할 수도 있는 제 소설도 떠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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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12-0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티브이 시리즈 <악령> 어디서 보신거죠?ㅠㅠ

푸른괭이 2013-12-02 10:29   좋아요 0 | URL
유투브 검색하면 어지간한 건 다 뜹니다. <악령> 옛날 버전과 최신 버전, <죄와 벌> 두 버전, <백치> 두 버전, <카라마조프> 최신 버전,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그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몽땅 다 보실 수 있습니다...^^;; 단, 자막이 없다는...ㅠ.ㅠ

; 2013-12-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검색제목을 뭐라고 쳐야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