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의 탄생, 그 예감과 기대를 담은 교양소설: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 노발리스, <푸른 꽃>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은 어머니와 함께 아우크스부르크의 외갓집으로 떠난다. 여행 중에 여러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슬람 여인 출리마, 늙은 노다지꾼(광부), 동굴의 은둔자를 만나는 등 값진 체험을 한다. 드디어 목적지 도착. 하인리히의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시인인 클링스오르를 소개해준다. 그에게는 마틸데라는 손녀딸이 있는데, 그녀와 하인리히는 금방 첫 눈에 반한다. 이들의 사랑 얘기와 나란히 클링스오르가 들려주는 긴 동화(에로스와 파벨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것이 노발리스의 미완성 소설 <푸른 꽃>(원제: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엔)의 1부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2부는 순례자의 모습을 한 하인리히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대체로 이 소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상징과 알레고리, 고양된 시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가령 하인리히가 마틸데와 교감하는 장면을 보자.
하인리히는 마틸데와 함께 남았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에다 살그머니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그의 뜨거운 키스에 자연스럽게 응답해 주었다. “사랑하는 마틸데.” “사랑하는 하인리히.” 이것이 그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녀는 그와 악수를 나눈 뒤 다른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하인리히는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서 있었다.(147-148)
처음 본 순간부터 꼭 어디선가 본 것 같고 먼 옛날부터 알았던 것 같은 느낌, 사랑을 통해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 육체적인 관능과 종교적 성스러움의 결합 등 이들의 사랑은 ‘낭만적’이라는 말의 시원을 보여준다.
“아, 마틸데. 죽음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할 거야.”
“맞아, 하인리히. 내가 어딜 가든, 그곳엔 언제나 네가 있을 거야.”
“그래, 마틸데. 네가 어디에 있든 그곳엔 영원히 내가 있을 거야.”
“난 영원이 뭔지 몰라. 그렇지만 널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느낌, 그게 바로 영원인지도 몰라.”
“그래, 마틸데. 우리는 영원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니까.”(169)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지만, <푸른 꽃>의 언어에 몰입하다 보면 묘한 최면 효과가 생긴다. 실제로 노발리스는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함과 동시에 자신의 낭만주의 미학을 삶에 그대로 반영한 것 같은 느낌이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에 병약한 체질, 29년에 걸친 짧은 삶,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 끊임없는 떠남의 욕구,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낭만화하려는 의지 등. 특히 어린 약혼녀 소피와의 사랑, 그녀의 요절은 노발리스의 정신적, 문학적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듯하다. 요컨대, ‘푸른 꽃’은 낭만주의, 그 자체이다.
(진짜 꽃미남, 예쁘게 생겼죠?ㅎㅎ)
<푸른 꽃>의 첫 부분에서 하인리히는 어떤 낯선 사나이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일종의 신비체험과 같은 꿈을 꾼다. 한 젊은이가 낯선 미지의 고장을 여행한다. 어두운 숲속, 돌산, 연못, 시냇물을 지나자 그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해온 이상향이 나타난다.
그를 감싸고 있는 햇살은 평소에 보던 햇살보다 밝고 부드러웠다.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앗아간 것은 우물가에 서서 반짝이는 넓은 잎사귀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푸른빛의 키 큰 꽃이었다. 푸른 꽃 주위에는 온갖 색깔의 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피어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주위에 진동했다. 그의 눈엔 푸른 꽃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푸른 꽃을 응시했다. 마침내 그가 그 꽃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푸른 꽃은 갑자기 움직이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15)
푸른 꽃과의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지만 그로 인해 절망이나 환멸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신비감이 더해진다. 푸른 꽃의 모습에 탐닉하던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러나 이 경우엔 현실조차도 이상과 반목하는, 어떤 적대적인 힘이 아니다. 1부와 2부의 제목이 각각 암시하듯, 시인의 탄생이든, 사랑의 완성이든, 이상의 도래든 ‘기대’는 절대 배반당하지 않고 ‘실현’된다. 하인리히가 동굴에서 만난 은둔자가 갖고 있던 책, 즉 “어느 시인의 놀라운 운명을 다룬 소설”은 아마 <푸른 꽃>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천재 시인의 탄생이 ‘기대’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실현’되었다면, 과연 노발리스가 혹평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맞먹는 교양소설이 탄생했을까? 실상 미완성이라는 형식마저도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우리를 유혹하는 저 ‘푸른 꽃’의 형상에 부합하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 연이어 독일문학, 독일소설에 관한 글을 올립니다.
-- 한때 낭만주의에 꽂힌(^^;) 적이 있어서 이런 저런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다시 읽은 노발리스는 좀 많이 부담스럽더라고요. 혹자의 말대로 '오글거리는' 낭만성을 참기도 힘들고. 한편으론 괴테의<빌헬름...>이 얼마나 잘 쓴 소설인가, 싶기도 하고요.
낭만주의에 대한 학적(^^;) 관심은 물론 도스..키에게서 시작됐지만, 더 직접적인 근원을 들라면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이 작가, 이 작품입니다!
그때의 감흥이 커서 나름 부채의식을 갖고(^^;;) 직접 번역도 했습니다! 만 27세에 사망한 이 작가-시인의 시는 저의 데뷔작에 제사를 제공하기도 했는데, 그게 96년이었음을 생각하니, 너무 오래 살고 있네요. 누구 말마따나 "Too old to die young"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