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의 비극: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아남을 것인가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마담 보바리>는 시골 의사의 아내인 엠마 보바리의 불륜과 파멸을 그린 소설이지만 소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해내는 책(소설)과 그 욕망-책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의 충돌, 그것을 엠마의 인생이 보여준다. 수도원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소설을 많이 읽은 탓에 항상 소설처럼!’을 꿈꾸는 그녀에게 현실은 따분하기만 하다. 가령, 결혼 전에는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자 전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이런 그녀 앞에 레옹이 나타나, 지금껏 비어 있던 욕망의 빈 칸을 채워준다. 그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고독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는 것이 더 즐겁다.

 

 

 

 

 

 

 

 

 

 

 

 

 

 

 

로돌프의 경우도 비슷하다. 명실상부한 애인이 생기자 그녀는 옛날에 읽었던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을 떠올리며 그녀 자신이 그토록 선망하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전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욕의 만족감”(237)마저 맛본다. 속된 현실과 권태를 참아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낸 셈이다. 이 낭만적 사랑에 탐닉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자세를 취한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기만과 배반으로 점철된 사랑의 비극 때문에 파멸한 여주인공의 역을 맡는다. 종부성사까지 준비하고 신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3년 뒤, ‘파리 물을 먹고 돌아온 레옹이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걸요!”(354)라는 천연덕스러운 말로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하지만 소설과 몽상 속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었던 불륜이 현실 속에서 반복과 지속을 거듭하자 결혼생활 못지않은 진부함을 지니게 된다. 권태와 환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엠마의 파국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연애가 아니다. ‘소설처럼살기 위해 그녀는 몸치장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살림살이와 금전문제에는 무관심하다. 낭만적인 소설에는 돈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책과 몽상 속의 세계는 너무나 시적인데 실제 현실은 너무나 속되고 천박하달까.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다가 엠마는 요즘 식으로 말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만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로돌프를 찾아가 때 아닌 사랑 타령을 늘어놓고 돈을 구걸하는(“실은 저 파산했어요, 로돌프! 제게 삼천 프랑만 꿔주세요!”(448)) 장면은 거의 참담하다. 음독자살과 그 과정(특히 수의를 입힐 때 시체가 된 상태에서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엠마의 욕망과 몽상을 모독하고 조롱한다. 혹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다른 처지에 놓였더라면 사정이 좀 달랐을까? 물론 아니다. 욕망은 그 본질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는 잡지에 연재될 당시부터 물의를 일으켰으며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업자, 편집자가 모두 법정에 섰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보바리 보인의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을 법하다. 그때 플로베르가 내놓은 답이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저 유명한 말이다. 플로베르와 엠마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어떻든 그는 저 속된, 따라서 보편적인 모방 욕망의 근원과 귀결을 속속들이 해부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의 아들로서 메스 대신 펜을 손에 든 외과의-소설가였던 셈이다.

 

 

 

 

 

 

 

 

 

 

 

 

 

 

<마담 보바리>을 쓸 때 그는 스스로를 손등에 납덩어리를 얹어놓고 피아노를 치는 사람”(1852726일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비유했다. 그 살인적인 고통을 5년 동안 감내했다. 대체로 플로베르는 동굴 속에 칩거한 고독한 ’, 크루아세의 은둔자를 자처하며 고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문학함을 실천했다. ‘일물일어설의 창시자답게 비단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쓰느냐, 문체의 문제에 어쩌면 최초로 골몰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블독이에요 ㅎㅎ)

 

으젠느 지로가 그린 초상화 속의 플로베르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눈은 반쯤 풀려 있으며 전반적인 생김새는 불도그를 닮았다. 덧붙여 183센티의 거구였던 그는 간질병 환자였거나 적어도 간질발작으로 추정되는 신경 발작에 시달렸다. 이런 그를 두고서, 말년에 두툼한 플로베르 전기(<집안의 백치>)를 썼던 사르트르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썼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뚱뚱하고 키가 큰 그 둔한 인간과 그의 그 걸작 사이의 대조였다.”(사르트르, 대담)

 

과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오만하고 방탕한(혹은 그런 척한) 독신자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샤를르의 어린 시절로 시작해서 약제사 오메에 관한 문장(“그는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503))으로 끝난다. 이렇듯 바보들’(결국 죽는다)속물들’(결국 살아남는다)만 등장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기는 더 쉽지 않다. 그러나 낭만적 거짓의 허울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진 소설적 진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소설의 교과서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 <책앤>

 

--  말미에 쓴 대로 소설가 지망생(^^;)은 꼭 탐독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랬죠.) 소설이 안 써질 때면  재능의 부재가 아닌 노력의 부족을 탓하라!, 뭐, 이런 생각하며 떠올리는 작가입니다...^^;

 

위에 이미지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보바리>,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바리의 삶이 얼마나 '연극적'(!)인지를 무척 잘 표현했던 것 같아요. 겸사겸사, <레이스 뜨는 여자>, <피아니스트> 등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가 그렇듯 ^^;) 그녀의 매력과 연기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터. <브론테 자매>(?)인가 하는 영화에서는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역을, 이자벨 위페르가 앤 역을 맡았는데요... 흠.

 

 

전설 같은 프랑스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다 볼 있는 이런 영화가 있었죠...^^;  

 

한편, 러시아 소설 판 <보바리 부인>은 (역시나 불륜을 소재로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 체호프의 단편 <베짱이>인 것 같습니다. 아참, 이것도 불륜 얘기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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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2013-03-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 서울대 러시아문학의 이해 수강생입니다.

방금전 보바리 부인을 다 읽고 감상문을 써보려고 검색하다가 선생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자벨 위페르의 '마담 보바리'를 한 번 봐야겠네요^^

2013-03-0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