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 신의 존재와 권능을 증명하는 악마, 정치권력에 맞서는 문학 권력: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930년대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의 수도 모스크바에 악마 볼란드가 수행원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그의 앞에서 악마의 존재를,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한 베를리오즈는 이른바 참수형을 선고받고 전차에 목이 잘려 죽는다. 이어, 악마들은 바리에테[버라이어티] 극장 관계자들을 혼내줌과 동시에 한 판 마술쇼를 벌여 모스크바 시민들의 허영과 속악을 폭로한다. 대체로 이들의 활약상(폭로와 응징!)을 통해 당시 소비에트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탈린 공포 정치와 무자비한 숙청(아파트 주민들의 증발), 급속한 근대화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한 주택난(악마조차 집 주인을 쫓아내고 새로 서류를 작성하지 않으면 묵을 아파트가 없다), 뇌물 수수와 각종 뒷거래(주택 위원장 니카노르의 수난), 지나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그리보예도프집에 들어가려면 악마라도 출입증이 필요하다) . 보다시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소설이지만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천착했던 여러 형이상학적 문제를 파헤친 철학 소설이기도 하다.

 

 

 

 

 

 

 

 

 

 

 

 

 

 

다시 소설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볼란드는 베를리오즈의 운명을 예언하면서 제발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부탁하고 그것을 증명할 일곱 번째 증거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예언은 물론 실현되었다. 뿐더러 베를리오즈의 잘린 머리가 악마의 무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신봉한 무신론의 원칙에 따라 (불멸 대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는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베를리오즈], 모든 일이 예언대로 실현됐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볼란드가 머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중략) 당신은 머리가 잘리면 사람의 삶은 그것으로 멈추고 그 사람은 재로 화하여 무()로 사라져버린다는 이론을 열띠게 전파해 왔지요. 저의 손님들 앞에서 - 하긴 이 손님들 자체가 반론의 증거가 되기는 합니다만 - 이분들 앞에서 당신의 이론은 확고하고 재치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이론이라는 건 다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사람은 각자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론도 있지요. 그 이론도 실현될 겁니다! 당신은 무로 사라질 것이고, 저는 당신의 머리로 술잔을 만들게 되어 기쁠 겁니다. 존재를 위해 건배합시다!”(462-463)

 

이렇게 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신에게서 출발하여 신에게로 귀결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제사로 쓰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말(“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입지요.”)은 여러 모로 선언적이다. 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에 도달하는 것, 악마의 존재를 눈앞에 직접 보여줌으로써 숨어 있는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절대선)과 악마(절대악)의 관계는 여기서,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을지라도, 영원한 공존과 동행의 운명을 타고난 원상과 그림자처럼 상보적이다. -예수의 사도 마태오(레비 마트베이)에게 볼란드가 하는 말을 보라.

 

넌 마치 그림자도 악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약간의 호의를 발휘해서 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 선으로 무엇을 할 것이며, 땅 위에 그림자가 사라진다면 이 땅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그림자는 사물과 사람들 때문에 지는 것이다. 저기 내 장검 때문에 그림자가 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나무나 살아 있는 동물 때문에도 생기지. 벌거벗은 세상을 즐기려는 네 환상 때문에 나무와 동물들을 모두 없애고 지구의 껍데기를 전부 벗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는 바보다.”(604)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거장은 대체 무엇일까. 그는 이름도 없을뿐더러(그저 거장-M’일 뿐이다!) 전기적인 사항도 최소화되어 있다. 좀 과장하면, 작가의 분신으로서 오직 문학과 작가의 소명을 얘기하기 위해 존재한달까. 특히 그가 우여곡절 끝에 불태워버린 원고(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부활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원고는 불타지 않아요.”(486) 볼란드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문학의 불멸을 위해서는, 실상 극히 소비에트적인 화법인바, 작가 권력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스탈린의 애매한 비호-폭력아래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던 불가코프에게 이것은 무척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랬기에 그는 거장을 통해 자신이 역사와 시대 앞에서 범한 죄(‘비겁함’)를 예슈아(예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처형을 묵과할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에게 투영한다. 나아가 거장이 빌라도를 만월의 고통, 즉 불면과 편두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듯, 불가코프는 거장에게 은 아닐지언정 최후의 안식처를 선사한다. 평안이야말로 병마에 시달리며 당시로서는 출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써나간 불가코프가 스스로에게 내민 위안의 손길이었을 터이다.

 

, 다른 이들보다 세 배는 더 낭만적인 거장이여, 낮에는 반려자와 함께 꽃이 피기 시작한 벚나무 아래를 산책하고 저녁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듣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촛불 앞에서 거위 깃털로 글을 쓰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파우스트처럼 새로운 호문쿨루스를 빚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증류기 앞에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까? 저곳! 저기에 벌써 당신들의 집과 늙은 하인이 기다리고 있고, 촛불도 벌써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촛불은 곧 꺼질 겁니다,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올 테니까요. 이 길로 가십시오, 거장, 이 길로!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떠날 때가 됐습니다.”(642-643)

 

 

-- <네이버캐스트>

 

 

-- 대학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된 작가. <거장과 마르가리타> 처음 읽었을 때(당시는 번역도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진짜 깜.놀.했는데, 그 무렵엔 전체 형식에 일단 끌렸던 터라, 그런 식(즉, 두 텍스트가 시공을 초월하여 뫼비우스 띠처럼 뒤섞이는, 어떤 의미에선 무척 유치하지만 또한 무척 에로틱하다!)의 장편을 써보고 싶었고, 심지어 내 나름으로 뭘 썼던 기억도 있다. (쓰다 보니, '루저'의 한탄이냐, 뭐냐, 죄다 기억, 즉 과거지사의 나열이냐...쩝.) 좀 철들고 나서 그런 형식 자체가 정녕 '영혼의 형식'이었음을 알겠다.  그러니 소설의 어떤 형식도 실은, 모방을 불.허.한.다!

--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빚진 작품들이 많은데, 우선은 이것.

 

 

 

 

 

 

 

 

 

 

 

 

 

 

 

 

 

 

-- 그리고 이 참에 한 번 더 올려본다. 이 작가, 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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