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세상, 한 판 붙어보자

- 발자크, <고리오 영감>

 

 

 

 

세계문학사는 발자크를 소설의 교과서로 정의했다. 근대, 자본주의, 대도시, 속물들, 야망에 찬 청년, 전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의 삶. 이 모든 것이 <고리오 영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장황하게 묘사되는 보케르 부인의 고급 하숙집의 풍경은 마냥 비루한, 하지만 그렇기에 진실한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끝으로, 그곳에는 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가난이 있다. 더 이를 데 없이 궁핍하고 넝마 같은 가난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난은 진흙이 묻지 않았다 해도 얼룩이 지고, 구멍이나 누더기가 없더라도 곧 썩어 넘어질 지경이었다.(14)

 

이 하숙집에 고리오 영감, 보트랭(자크 콜랭), 빅토린 타페이유, ‘할멈노처녀 미쇼노 양, 으젠느 드 라스티냐크 등 일곱 명의 하숙인이 산다. 이들 중 라스티냐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법대생이다.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절 우리의 청년들이 그러했듯, 그가 가진 것이라곤 머리와 야망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그를 끌어당기는 것은 두툼한 법전이 가득 찬 도서관이 아니라 현란한 세속적 불빛이 번득이는 파리의 사교계이다. 그곳을 드나들던 그는 고리오 영감의 작은딸인 델핀 드 뉘싱겐의 연인이 된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도식적 틀에서 부각되는 것은, 그러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연애가 아니다. <고리오 영감>의 관심사는 첫째, 라스티냐크의 눈을 통해 포착한 인간 본연의 속물스러움을, 둘째, 그 속물스러운 세계와 마주하여 그가 겪는 내적인 운동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의 행복을 위해 제분업으로 모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은그릇마저 부수어서 내다 판다. 작가의 비유를 빌자면 개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숭고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부성애가 곧 그의 실존이다. 하지만 두 딸은 아비를 자기 집에 들이지도 않고 돈이 필요할 때만(가령, 무도회에 필요한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아비를 찾는다. 아비가 졸도하여 생사를 헤매고 있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뿐더러 장례비도 대주지 않는다. 이 고리오 부녀의 얘기는 라스티냐크의 눈에 비친 파리 풍속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세상은 시적인 데라곤 하나도 없이 시종일관 속되고 치사하다. 여기서 라스티냐크의 목표는 단 하나,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알쏭달쏭한 세상이라는 책을 정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보트랭은 그 나름의 처세술을 설파하며 청년을 길들인다.

 

자네는 보세앙 사촌 집에 가서 사치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를 이미 맡았네. 자네는 고리오 영감 딸인 레스토 부인 집에 가서 파리 여성의 냄새를 맡았어. 그날 자네는 이마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적어서 돌아왔네. 그 단어란 <출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브라보! () 출세하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노력과 필사적 싸움이 어떤가를 판단해 보게.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거미들처럼 자네들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네. 왜냐하면 좋은 자리가 오만 개밖에 없기 때문이야.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 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147-148)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이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민한다. 그의 분류법에 따라 복종(귀찮다), 투쟁(불확실하다), 반항(불가능하다)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고리오 영감의 무덤에 묻은 뒤 등불이 빛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396)

 

그 대결의 첫 행동은 아비의 죽음을 나 몰라라했던 뉘싱겐 부인 댁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스티냐크는 체포되는 순간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았던 도형수 보트랭의 방식(반항) 대신에 복종이나 투쟁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 어떻든 이로써 순수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은 언제 봐도 불편한 구석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초점을 라스티냐크에 맞춘 탓이다.

 

 

 

 

 

 

 

 

 

 

 

 

실상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은 고리오 영감이나 라스티냐크 같은 어떤 구체적인 개인도, 파리라는 근대적인 공간도 아니다. 훗날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을 모조리 아우르는 제목으로 생각한 인간 희극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이 웃긴 인간 세상이 곧 주인공이다. 발자크 자신도 평생을 그야말로 웃긴 속물로 살았다. 그러나 어떤 속물도 자기 안의 속물스러움과 세상의 속물스러움을 이토록 깊이 꿰뚫어보지 못했고 또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소설적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세상이 더럽고 비루할수록 그 세상과 한 판 붙어볼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 설령 그 역시 라스티냐크의 경우처럼 속물스러운 타협의 형태가 될지라도, 그것 없이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어떤 진정성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 네이버캐스트  

 

-- 오랜만에(그런 것 같은데 아닌가?) 하나 올려 본다.

발자크의 소설은 언제나 지루했고, 지금 읽어도 지루하다. 처음 읽은 건 혜원사판이었지 싶은데 <골짜기의 백합>. 지루한 연애 소설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주기적으로 읽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고리오 영감>, <잃어버린 환상>, <나귀 가죽> 등등) 대체로 다 그렇다. 그럼에도(!)  계속 읽는 것은, 저 글의 맨 처음에 썼듯, 그의 소설이 아무리 봐도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교과서가 재미있는 거 봤나. 교과서는 항상 지루하다! 그 지루함을 견디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대목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본들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한데, 지루한 소설을 잘 쓰는 작가들이 의외로(?) 전기가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가 대표적. 발자크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는 것이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 덧붙여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형상(즉, 진정한 소설쟁이!)처럼 보이는, 로뎅이 조각한 발자크. 한데 마땅한 이미지가 왜 이리 없냐. 언제가 프랑스 가면 꼭 봐야지...  

 

- 저 동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볼쇼이 극장 맞은편에 서 있는 마르크스 동상. (발자크와 마르크스(더 정확히 엥겔스)도 뭐, 붙이자면, 못 붙일 건 없다.) 돌에 새겨진 문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여름에는 좋았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진 날, 저거 또 보러 갔다가 얼어죽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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