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1. 소수적인 문학

 

들뢰즈/가타리가 카프카론에서 사용한 소수적인(mineure) 문학이라는 개념은 물론 카프카가 처한 언어적 정황과 관련된 것이다.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으로서 고도로 탈영토화된 언어, 정치성과 집합성을 특징으로 한다(들뢰즈/가타리, 44-46). 카프카의 경우 체코어, 독일어, 유대어 등 세 개의 언어-문화가 만나고 어긋나면서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는 지점이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K’()의 실존적 고독과 소외, 그리고 카프카 특유의 분석적이고 건조한 문체(‘문서체’)의 진앙도 여기이다. 그럼에도 소수적인 문학의 핵심은 생래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에 있지 않다. “소수적이지 않은 위대한 문학이나 혁명적 문학은 없다. 모든 거장적인 문학을 증오하는 것.”(들뢰즈/가타리, 67)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 그것이 단일하며 다수적이거나 다수적이었다고 해도 를 소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자기 자신의 언어 안에서 이방인처럼 되는 것”(같은 곳)이다.

 

 

 

 

 

 

 

 

 

 

 

 

 

 

단일 민족에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적 지향점을 타진할 때 소수적인 문학은 제법 유용한 개념으로 보인다. ‘세계문학지역문학’(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이 요청될 만큼 여러 언어권 간의 경계가 흐려졌으며 문단의 구조는 기존의 작가/비평/출판(시장) 권력에 덧붙여 대학(문예창작학과) 권력까지 가세해 무척 복잡해졌다. 이와는 별개로 여전히 좋은 문학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장이 기술 논리와 경제 논리에 따라 급속도로 재편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칙이 새삼 강조되면서 소수적인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가 정영문의 문학적인 성취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 (이 역시 문학 권력들의 흐름의 산물이지만!) 반가운 건 이 때문이다. 다수적인-소수적인 문학은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처럼 극히 상대적인, 고로 정치적인 개념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둘의 생산적인 공생 관계의 예를 19세기 러시아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다수-규범의 문학과 소수-전위의 문학: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정녕 톨스토이의 소설이 소설-서사시인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설-비극이다. 전자의 소설에서는 세기의 영웅인 나폴레옹조차 한 명의 등장인물로, 더욱이 꼰질꼰질하고 촌스러운 출세주의자로 전락하는(<전쟁과 평화>) 반면, 후자의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의 누추한 하숙방에 틀어박힌 채 나폴레옹을 꿈꾸다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괴상한 법학도마저 오이디푸스 못지않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죄와 벌>). 요컨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었음에도 그들이 살았던 러시아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다름과 다름의 공존이 두 작가를 공히 불멸케 하고 러시아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루카치의 소설론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혁신성을 지적하는 것으로(루카치, 205-206) 끝나는데, 톨스토이가 전범의 계보를 완성한 만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위의 계보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사의 심판이 사실상 종료된 문학, 더군다나 의 문학 얘기이다. 지금 생성 중인 문학, 더군다나 /우리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다시금 톨스토이를 겨냥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자면, 본질상 혼돈과 무질서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다(<미성년>).

 

 

 

 

 

 

 

 

 

 

 

 

 

 

 

 

3. 정영문의 이론적 서사와 <어떤 작위의 세계>

 

3-1. 말과 사물 사이 - 말의 말

 

이제 우리 문학의 전위의 계보도 두둑해졌는데 정영문은 그 끄트머리에 있을 법하다. 2000년대 이후 그가 써낸 책의 목차만 봐도 중성적인 낱말이 오히려 생경하게 여겨질 만큼 정영문스럽다.

  (...) 

현재로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최고작인 <작위>에서 정영문스러움은 더 공고해진 느낌이다. 일종의 서문에서 그는 이 소설을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이미 전형적인 번역 투(더욱이 윤문을 거치지 않은!)의 문장, 각종 지시 형용사와 대명사에 대한 강박적인 거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인바, 사소한 변주를 동반한 동어반복, 불성실하고 무성의하고 심드렁한 문체 등이 눈에 익다. 다만, 말들의 틈새가 훨씬 더 촘촘, 아니, “쫀쫀”(<달에 홀린 광대>, 33)해졌으며 작가의 감각 기관에 포착된 객관적인 사물과 대상은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작위>, 7)려 있다. 이는 작가의 관심사가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말의 세계에 있기 때문, 말의 말, 소설의 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작위>, 270)임을, 굳이 괄호까지 사용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앞서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부제로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7)를 지적했는데,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뜬구름에 좀 더 재미를 느낀 듯하다. 그 이유인즉,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작위>, 270)이다.

 

이렇게 아무런 핵심이 없고 이 핵심 없음이 곧 핵심인 세계가 나타났는데, 정영문은 그것을 완벽한 작위의 세계’, 심지어 이상한 무위의 세계라고 부른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작위>, 190) 이런 허망한 세계에 관한 집요한 말장난이 한 편의 소설이 됐다. 그것에 대한 각종 해석이 초라하고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소설론인 까닭이다. 그것도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거나 기존의 소설론이나 서사학과의 대결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닌 심드렁하고 시건방진(!) 소설인 까닭이다. 그뿐인가. 소위 난해한 소설의 대명사인 정영문에게는 그 나름의 완벽한 알리바이도 있다. , 그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에 허무와 불모의 세계관이 돋보임과 동시에 잘 짜인 서사 구조를 갖춘 중단편 소설이 적지 않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성묘를 떠났다가 성묘를 하고 돌아오는(혹은 제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극적인 대화와 괴상한 작태가 인상적인 부자(父子) 이야기를 그린 달에 홀린 광대(<달에 홀린 광대>)라든가 남의 집에 침입해 기껏 마실 것과 치질약과 네 곡의 연주”(<목신의 어떤 오후>, 39)만 요구한 어린 강도 커플의 난감한얘기를 액자식으로 들려주는 브라운 부인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자기만의 검은 이야기 사슬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정영문은 보이지 않는 균열파괴적인 충동의 극단으로 치닫더니 급기야는 핏기 없는 독백(‘하품을 곁들인!) ‘중얼거림을 택한 형국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무력한 상태의 궁극의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을 뿐인 것 같아. 앞으로 글을 쓴다 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겠지.”(<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156.) 사물과 말 사이의 간극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과 마땅히 그럴 필요도 없다는 체념 뒤에 나왔을 법한 글쓰기는 칸트 식으로 말해 지극히 무목적인, 따라서 지극히 미학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그 표현이 <바셀린 붓다>이다. 장은커녕 문단조차 잘 나누어놓지 않고 아무데나 되는대로 마구 읽으라는(혹은 굳이 그렇게도 읽지 말라는) 식의 이 소설은 베케트의 <몰로이>에 대한 오마주인 것 같으나 그 작태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실은 그것의 캐리커처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생각하다는 술어로 연결된 치명적인 문장 하나가 15쪽에 걸쳐 이어진다.

 

나는 일상의 다양한 모습과 차원들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신이 생선을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지금까지 먹은 생선의 숫자는 얼마나 될지에 대해 생각하며, 그런 생각을 생선을 먹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다는 생각을 하고,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삶이 언젠가 이후로 사실주의와의 길고도 험하며 지루하고도 즐거운, 전면적인 싸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제초제를 위스키로 착각해 커피로 넣으려 했던 화가에 대해 생각하며(이쯤에서 그만할까? - 이것은 화자가 내는 목소리이다. 그만할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더 할 수도 있고, 더 하고 싶은 걸 이것은 좀더 장난스러운 작가의 목소리다) () 역시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하루들로 이루어진, 이런 식으로 그 목록을 끝없이 작성하고, 그 목록들에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일상들의 순간들 혹은 시간들이 있었다.(<바셀린 붓다>, 60-74.)

 

거미의 항문에서 줄줄 나와 엮어지는 거미줄에 싱싱한 먹이가 걸려들듯(혹은 그러지 않듯) 말들이 사물들을 붙잡을 때가 있는데, 대략 그 순간에 정영문식 서사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다. 그것의 재미는 어쩌면 그가 배척하는 일련의 재미없는 서사(“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성장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작위>, 94))을 향한 유쾌한 야유에서 시작된다. 이어, 자신이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작위>, 95)을 써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소설의 숙명이기도 했던 의미와 논리의 과잉에 맞서 점점 더 비워지는 의미, 점점 더 무너지는 논리를 선보이는 소설이 태어난다.

 

(계속)

 

-- <세계의문학>, 2013년, 여름호

 

- 주요 계간지에 지면을 얻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지난 겨울, <창비>에 실은 촌평도 그렇거니와! - 그러니까 영도 다리 밑 점쟁이 말대로 사십부터는 인생이 피려나 보다! ^^;; ) 완죤 감격, 그쪽의 기획 의도에 맞추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좀 길었음에도,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간 쓰고 싶은 얘기를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_-;;) 최대한 요령껏(?) 풀어보려고 했다. 언제든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우리 소설을 좀 체계적으로 읽어보고 싶은 바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공.부.가 체질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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