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처형사이, 지루한 소송같은 삶: “개 같군!”

카프카(1883-1924), <소송>(1925)

 

 

 

카프카가 서른을 막 넘기고 쓴 미완의 장편 <소송>의 첫 문장이 유명하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피고인의 아침이나 훔쳐 먹는 한심한 감시인들(프란츠와 빌렘)K의 물음에 답을 주기는커녕 말단 직원의 설움만 늘어놓는다.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감독관도 마찬가지이다. 어떻든 체포됐음에도 은행의 자금담당 부장으로서 K의 일상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열흘쯤 뒤 일요일, K는 심리위원회에 참석, 예심판사를 향해 호통을 친 다음 법정을 나온다. 이어, 재차 법원 방문, 법원의 정리(廷吏)와 그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법학도) 목격, 은행 사무실 근처 창고에서 매질을 당하는 두 감시인, “시골에서 온 유령”(112)K의 숙부(카를-알베르트)의 호들갑, 와병 중인 변호사(홀트 박사) 방문, 그의 애인인 레니와의 접촉, 은행의 고객(제조업자)이 소개해준 법원 소속의 초상화가(티토렐리) 방문, 변호사와 그의 고객인 상인 블로크의 관계 등 일련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새 인물의 거듭된 등장도 사건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각각의 만남과 대화는 순서를 바꿔도 될 만큼 우연의 논리에 지배된다. 곳곳에 포진한 여자들과 K의 관계는 외설적이긴 하지만 관능적이지는 않고, 때문에 정서적 감흥보다는 미학적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소송>은 동일한 것의 반복과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 섬세한 변주를 보여주는 티토렐리의 음산한풍경화 세 점(‘황야의 풍경’)을 닮았다. 하숙집 여주인(그루바흐 부인)의 말처럼 무언가 학문적인 것”(32), 일상이 된 체포-소송에 관한 학적 연구 같은 소설, 그리고 모든 점에서 평범의 화신인 K의 삶 깊숙이 침투한 이 권력-법의 테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소송>의 아홉 번째 장(대성당에서)에서 신부는 K에게 기만에 관한 성담’(聖譚)(법 앞에서)을 들려준다. 한 시골 사람이 법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지기에게 저지당한다. 그럼에도 계속 기다리다가 마침내 임종을 앞둔 시점, 지금껏 아무도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이유를 묻는다. 문지기는 이 문은 오직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누가 누구를 기만한 것인가. 문지기야말로 기만당한 것이 아닐까. 그는 법의 내부를 지키는 문지기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법의 문을 지켜야 하는 직무 때문에 자기 자리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쯤 되면 자기기만에 빠진 자발적인 노예가 아닌가. 한편, K는 얼핏 시골 사람에 가까워 보이지만 단 하루도 업무 영역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자애쓰고 한번 밀려나면 다시 돌아오게 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249)에 떤다는 점에서 문지기의 삶을 사는 것도 같다. 혹은, 법의 문 안으로 들어섰고(, 체포됐고) 그 내부의 공허함과 비루함(허름한 주택가의 건물 안에 위치한, 각종 세간이 들어찬 방과 같은 법정!)을 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가정과 물음은, 그러나, 소설의 길고 두툼한 몸통(‘소송’)을 무자비하게 절단하는 마지막 장(‘처형’) 앞에서 무한히 유예된다.

 

 

 

 

 

 

 

 

 

 

 

 

 

 

 

 

카프카가 친구들 앞에서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 즐거워했다고 한다. 익살스러운 농담 같은 첫 장(체포)은 그러나, 1년의 시간차(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8, 서른한 번째 생일날 저녁 9)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종말)과 그 정조에 있어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두 명의 희극배우 대신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의 늙은 조연배우두 명이 등장한다. 저항해본들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K는 순순히 처형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도시 외곽의 황량한 채석장, 조끼는 물론 셔츠까지 벗겨져 땅바닥에 눕혀졌고 양날이 선 길고 얇은 정육점 칼이 달빛을 받아 번득이는 상황임에도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287)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이 부질없는 희망을 조롱하듯, 한 남자가 그의 목을 양손으로 거머쥠과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을 돌린다. “개 같군!” K의 말에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라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가 건물을 빠져나오며 경험한 환각과 구토를 환기시키는 이 당혹스러운, ‘개 같은농담은 대체 무엇인가. 정녕 카프카는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쿤데라, <커튼>) 원했을 법하다.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체포처형’, 그 사이에 위치한 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264)라는 K의 절규가 그래서 더 절절하다.

 

한때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소설을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K의 상황을 좀 더 잘 반영한 것 같은 소송이란 제목으로 다시 읽는 기분이 새롭다. 많은 이들이 카프카와 <소송>에 대해 말했지만, 말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절망에 빠지지만, 신부의 말처럼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273)기 때문이다.

 

-- <책앤>

 

-- 쿤데라에 대한 글을 쓰던 중 한숨 돌리는 참에 그가 대놓고 숭배했던 카프카에 관한 글을 올려본다. 그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90년대. 

겸사겸사 오래된 컴퓨터 속에 잠자코 버티고 있던, 젊은(어린?) 날 썼던 콩트 하나도 꺼내본다.(소설가 이인성의 홈페이지에 실었던 것도 같다.) 맞춤법을 손본 걸 빼면  문장을 전혀 고치지 않았다. 이십대중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무엇을 쓰고자 했던가, 반추해본다. 거칠고 도발적인 문장들(의도된 반복이 무척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희극성을 낳는 것 같다!), 절망적인(혹은 절망을 가장한) 세계관, 환상적이고 알레고리적인 분위기 등이 눈에 들어온다. 요컨대,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다시 쿤데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일별. <농담>에서 <향수>까지. 많은 변주가 있긴 하지만 역시 사람 참 안 변한다. 시간이 변화를 강요하는 탓에 차라리 '안 변함'이 위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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