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긍정과 생성과 기쁨의 철학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물론 철학자 니체가 쓴 철학책이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 독특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한 천재 작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아름다운 문학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존의 엄정한 철학서와는 달리 모종의 문학적 설정도 있다.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을 들어간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고독 속에서 정진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아침의 태양을 맞으며 세상에 나온다. 이후 그는 적잖은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도시와 산속을 오가며 자신의 ‘말’을 설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들에게 초인(超人)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이렇게 그는 운을 뗀다. ‘초인’(위버멘쉬: Übermensch)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중략) /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 나는 사랑한다. 몰락하는 자로서 살 뿐 그 밖의 삶은 모르는 자를. 왜냐하면 그는 건너가는 자이기 때문이다.(「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19)
건너감과 몰락의 의미는 또한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를 여는 아포리즘은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다룬다. 낙타는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하는 인내의 정신으로서 그 짐을 지고 사막을 달린다. 저 고독한 사막에서 정신의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제 정신은 사자가 된다. 당위와 의무(‘너는 해야 한다’)에 맞서 사자는 의지와 자유(‘나는 원한다’)를 주장한다. 그 순간 정신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말하라,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아이가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이제는 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38)
이 책에 만연한 여러 비유 중 아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단계를 상징한다. 아이는 끊임없이 ‘건너가고’ ‘몰락하고’ 그로써 끊임없는 긍정과 창조를 실천한다. 아이는 ‘(과거에) 그러했다’라는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을 모른다. 2부의 한 아포리즘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했다. 이것이 분노하며 이를 부드득거리는 의지와 고독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이름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한 의지는 모든 과거의 일에 대해 악의적인 방관자일 뿐이다. /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 (중략) /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원한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이것이 의지가 굴리지 못하는 돌의 이름이다. / 그리하여 원한과 불만에 찬 의지는 돌을 굴리고 자신과 같이 원한과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구제에 대하여」, 248-249)
이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의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은 결코 얄팍한 니힐리즘이 아니다. 동일한 것의 끊임없는 반복과 권태를 말함도 아니며 단 한 번뿐인 삶이나 존재의 비극을 말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수히 쌓아졌다가 무수히 허물어지되 그러면서도 설움과 분함을 모르는 아이의 모래성 같은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에워싼 동물들의 말대로, 춤이며 웃음이며 영원한 시작이며 영원한 움직임이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은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球]이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굽어 있다.(「치유되고 있는 자」, 383)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행복의 섬에서」, 148-149) 그리하여 당당히 신을 죽여 버리고 독수리와 뱀을 거느린 채 악동처럼 웃는 자.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낡아빠진 망상이 있다.”(「낡은 서판(書板)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57) 그 망상을 뒤엎고 ‘선악의 저편’을 꿈꾼, 아침놀과 한낮의 태양을 사랑한 자. 그는 부정과 어둠과 비극에 맞서 끊임없이 긍정과 생성과 기쁨을 역설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신의 존재, 선악의 무게,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 무게를 거부하며 자유를 쟁취한 후 ‘아이’의 정신으로 영원히 회귀하기 위해 포효했던 ‘사자’는 곧 니체가 아니었을까.
(네이버 캐스트)
- 작년말에 정간한 <책앤>에 다시 글을 연재하기로 한 참에 오래 전에 쓴 글을 하나 올려본다.
- 근황. 날은 포근해졌지만 최근 아이의 경련이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져 다소 우울하다.
(각종 과거에 대한) '원한'을 갖지 않기 힘들다. 자책도 도움이 안 된다, 당연히. 오랜만에 루쉰의 소설들, 특히 [아Q정전]을 다시 읽고 감동했는데, 아Q처럼,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 보면 뭐 이런 일도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어쨌거나 말도 하고 걷기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이제는 혼자서 레고도 쌓는다.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면 다시 집을 탈환하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아이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생경해,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도망친다. 그런 다음엔? 잠시 도망 놀이를 하다가 다시 제자리. 그래도 (아Q처럼! 아이들처럼!) 재빨리 망각하고 다시 놀아보자.
니체의 이 책에서 출발하는 소설.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